하준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한 눈빛으로 여름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에서 꿀이라도 떨어질 판이었다.“속 쓰리긴… 맹 의원 따위가 당신이랑 비교가 되나? 별 볼일없는 노인네뿐인데. 게다가 그 집 딸이야 말라빠져서 아무것도 없는데 더 볼 것도 없지. 그에 비하면 당신은….”하준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아주 딱 좋아. 매우 보기 드물고, 글래머하지.”“뭐래, 저 변태가 진짜….”음흉한 시선이 느껴지자 여름은 이렇게 쏘아붙였다. 얼굴이 빨개져서 이불을 끌어당기며 흘겨 보았다.“다 자기가 했던 말이잖아?”하준이 싱글거리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자기야, 방금 그런 거 너무 좋아. 카리스마 있게 질투하는 거.”“질투는 누가? 맹지연이 날 들먹이면서 협박하니까 짜증나서 그런 거지.”여름이 딱 잘라 말했다.“아무리 남자가 좋아도 그렇지, 예전에 난 그래도 저렇게 품격 없게 굴고 그러지 않았었는데 맹지연은은 진짜 선 넘는다니까.”“그러게, 나도 별로야. 하지만 방금 맹지연 완전히 열받은 것 같던데…. 정말 말할지도 몰라. 난 당신 명예가.....”하준은 여기까지 말하다가 말을 멈췄다.여름이 인상을 쓰며 하준을 쏘아보았다.“왜 이렇게 갈수록 우유부단해지지? 맹지연한테 협박이나 당하고 있고. 예전에 그 패기랑 살기는 어디로 간 거야?”하준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예전엔 약점이란 게 없었지만 지금은, 당신, 여울이, 하늘이, 모두 내 약점이라서.”여름의 맑은 눈동자가 하준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말했다.“난 협박당하는 거 싫어. 당신은 여울이랑 하늘이 아빠잖아. 당신이 협박당하는 것도 싫어. 돈, 명예, 이런 건 다 뜬구름일 뿐이야. 난 서울에 온 이래로 갖은 풍파를 다 겪었어. 날 욕하는 사람도 너무 많았고. 하지만 그러면 뭐 어때? 인터넷에서 욕 좀 먹는다고 내가 뭐 어떻게 되나? 여기가 우리를 받아주지 않으면 아이들 데리고 이 나라를 떠나면 그만이야. 세상은 넓고 갈데는 많아. 내가 그 사람들한테 제약받을 필요 없잖아.”“……”하준의
-그러니까, 강여름이 최하준이랑 정말 맹지연 파티에서 불륜을 저질렀다는 거야?-맹지연이 부정하지 않았다는 건 인정했다는 거죠. 대놓고 말은 못해도.-맹지연 말투에서 다 느껴지잖아. 완전 한을 품음. 최하준 좋아했나 봄. 안 그럼 강여름이랑 왜 싸웠겠음?-또 그 인간 피해자인가? 진짜 이해가 안 가. 이제 재벌도 아니고 그쪽으로 문제도 있다며? 얼굴 좀 생긴 거 말고 뭐 볼 게 있다고 다들 그렇게 좋아 죽나?-그건 아니지. 최하준이 ‘조금’ 잘생긴 건 아니잖아? 완전 미친 비주얼이지, 안 그래?-어쨌든 강여름이랑 최하준은 완전 사회악이야. 사랑을 하든 뭘 하든 둘이 할 것이지 왜 죄 없는 사람들까지 힘들게 하냐고?-강여름 사진만 봐도 우웩!-강여름 눈은 관상학적으로 도화살 가득, 남자 엄청 밝히게 돼 있음. 저런 여자는 백퍼 바람 펴, 오빠들. 내 번호는 010-****-****.-애도 있다며, 어떻게 저런 짓을 하지? -별달유치원 다닌다던데, 저 집 딸 우리 애랑 같은 반 될까 봐 겁나요. -그 엄마에 그 딸이겠지.“……”뒤로 갈수록 여름의 얼굴이 굳어졌다.자신에게 뭐라는 건 상관없었지만, 아이에게까지 불똥이 튀는 건 견딜 수 없었다. 그건 역린이었다.잠시 뒤, 유치원 교사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어머님, 죄송한데 쌍둥이들 유치원 옮기시면 안 될까요? 죄송해요. 최근 여울 어머님 일로 여러 학부모님이 유치원까지 와서 항의 중이에요. 모두… 모두 여울이 하늘이랑 다른 반에 넣어달라고 난리도 아니에요. 원장님은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입학하는 아이가 없을까봐 걱정하시고요. 죄송하지만, 아이들 유치원에서 빼주셨으면 해요. 원비는 환불해 드릴게요.”“네.”여름은 이러쿵저러쿵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고작 이런 일로 퇴학시키는 유치원이라면 어차피 좋은 유치원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그동안 아이들이 유치원을 쉬고 있기에 망정이지,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공격받았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양유진, 이렇게 날… 건드렸단
“알고 있습니다.”하준의 목소리는 괴로움으로 가득했다.“하지만 이렇게 계속 참고 있자니 여름이도, 아이들도 지킬 수가 없는 제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집니다.”“인생 짧게 보지 마라. 이런건 금방 지나간다.”한병후가 말했다.“양유진이 지금 저렇게 날뛰는 건 뒤에 추신그룹을 업고 있어서다. 추신이 망하면 놈은 아무것도 아니지. 그때가 되면 언제든 처리할 수 있어.”“아버지, 여름이 어머니가… 정말 니아만의 안주인입니까?”하준이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양유진이 그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감히 여름이를 이렇게 함부로 때릴수가 있습니까?”“그건… 나도 의외였다.내 추측이… 틀렸을지도 모르겠구나.”한병후 역시 의문이 들었다.“사실 아버지 추측이 틀리길 바랍니다. 여름이 어머니가 정말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라면 재결합에 더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으니까요.”하준이 한숨을 내쉬었다.******입원 1주일 후.여름은 퇴원했다.퇴원 당일 병원 입구는 기자로 가득했다. 이주혁은 두 사람이 지하 주차장을 통해 몰래 떠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오니 기자가 딱 지키고 있었다.각종 배춧잎에 썩은 계란, 썩은 고기가 차로 날아들었다.차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심지어 누군가 운전석 문을 열고 기사를 억지로 끌어냈고 곧이어 기자들이 벌 떼처럼 차 안으로 몰려들어왔다.“뭐하는 짓입니까? 여긴 법도 없습니까?”서경주는 기자들의 개념없는 행동에 화가 치밀었다.그러나 기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준과 여름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와, 진짜 최하준이랑 같이 있네. 강여름 외도 딱 걸렸어.”“병원 데리고 갈 때 벌써 다 찍었잖아.”하준은 굳은 얼굴로 렌즈를 가렸다.“다 내리시죠! 더는 못 봐줍니다.”“해볼 테면 해보시지. 안 봐주면 어쩔 건데? 우릴 때리기라도 할 건가?”“불륜 저지르는 것들이 무슨 큰 소리야? 내가 제대로 찍어서 세상 사람들한테 네놈들 면상을 알릴 테다.” “우릴 찍겠다고?”여름이 의미
옆에 있던 서경주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여름아, 뭐 하는 짓이냐?”어안이 벙벙해 멍하니 있는 기자도 있고 미친 듯이 셔터를 눌러대는 기자도 있었다.이렇게 협조적인 인터뷰이라니 사진을 다 찍고 나서는 기자들도 이해가 안 됐다.“본인이 완전히 불륜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대놓고 말씀하시는 건가요?”“아뇨. 저는 당신들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양유진을 싫어하는지, 얼마나 혐오하는지를 알려주고 싶은 겁니다. 나는 최하준과 사귈지언정 양유진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양유진이 나를 깊이 사랑한다고 믿고들 계시겠죠? 상관없어요. 매일 아침 8시에 양유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드릴게요.”여름은 기다란 눈썹을 깜빡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무슨 뜻이죠?”기자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하준은 운전석으로 가서 기자를 밀어내더니 창문을 열고는 카메라에 대고 말했다.“다들 날 너무 과대평가들 하시는군. 나는 지난 번에 구치소에서 공격을 받아 그곳에 크게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동안 매주 전문가를 찾아가 치료를 받고 있었고, 지금은 강여름 씨와 관계를 가질 수도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알아보시던지. 아주혁 의사가 한 달 전부터 날 위해 해외에서 최고의 비뇨기과 전문의를 찾고 있었습니다.”기자들은 어리둥절해졌다.“거짓말 하지 마세요. 전에도 안 서서 비뇨기과에 다녔다더니 백지안 씨와 재판할 때 그쪽 변호사가 당신이 피임약을 구매한 증거를 내놓지 않았습니까?”“백지안에게 발기가 안 되는 건 사실입니다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문제가 없더군요. 그러나 지금은 정말 문제가 생겼습니다. 가서 알아들 보시면 됩니다. 내내 약을 먹고 치료하고 있으니까.”하준이 담담하게 말했다.“하지만 지난번에 최하준 씨가 강여름 씨를 안고 병원에 들어갔을 때 보니까 강여름 씨 온몸에 키스마크던데요,”기자가 수긍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나도 봤어.”“네, 내가 남긴 겁니다.”최하준이 뻔뻔하게 고개를 들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입을 맞추는 게 전부였소. 다른 일
여름은 슬슬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었다.“아버지, 모르시겠어요? 제가 무슨 소리를 하든 기자들은 믿지 않아요. 그러니 뭐 숨기고 감출 필요도 없어요.”“뭐라고…?”서경주는 말문이 막혔다.“그렇다고 카메라 앞에서 그렇게 대놓고 입을 맞출 필요가 있었니? 세상에 남자가 없어서 너에게 그렇게 상처를 주었던 녀석하고….”하준이 상처받은 얼굴을 하더니 부루퉁했다.“아버님….”“그 입 다물게. 누가 자네 아버지야? 자네 같은 사위 둔 적도 없고 아들도 둔 적 없네.”서경주가 노기충전해서 소리 질렀다.서경주가 너무 길길이 뛰니 하준이 말을 바꿨다.“전에는 무조건 제가 잘못했으니까 어르신께서 절 나무라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여름이의 아버지로서 사위 선별이라는 관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셔서 양유진처럼 여자에게 손 대는 녀석에게 여름이 옆자리를 허락하신 거 아닙니까?”서경주는 다시 할 말을 잃고 입을 꾹 다물었다.하준이 하는 말도 틀린 말이 아니니 서경주도 체면이 서지 않았다.아버지로서 서경주 역시 온통 실수투성이였다.이렇게 쓰레기 같은 놈인 줄도 모르고 전에는 양유진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지 않았던가.“여름아, 이 애비가 잘못이다. 정말 미안하구나.”서경주가 한숨을 쉬었다.“이번 일을 겪으면서 천하에 멀쩡한 녀석이 당최 없다는 걸 알았다. 앞으로는 결혼하라고 하지 않으마. 집으로 들어오너라. 애비가 곁에서 돌봐 줄 테니. 네가 다른 녀석과 결혼한다면 이제는 안심이 되질 않는다. 역시 자기 힘으로 사는 게 제일이지.”“네, 앞으로 다시는 결혼하지 않고 싶어요.”여름이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하준은 그 말을 듣고 심장이 덜컥했다.“그렇게 말씀하시면 곤란합니다. 이제 예순이 다되셨는데 계속 여름이 곁을 지켜주실 수도 없을 텐데요. 언젠가는 여름이보다 먼저 떠나시지 않겠습니까?”“그래도 여름이는 내 딸이네.”서경주가 냉랭하게 뱉었다.“내가 죽으면 여울이랑 하늘이도 다 컸을 테니 아이들이 여름이를 지켜주면 된다.”“아이
여름은 온 몸을 독사가 기어오르는 것 같았다.악마의 모습으로 손을 휘두르던 양유진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그런데 오늘은 연인처럼 다정했다.“구치소에서 나왔나 보네요.”여름이 냉랭하게 물었다.“네. 경찰에서도 제 사정을 딱하게 여겨줘서요. 그런데 이번 주에 내내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어요. 여름 씨 생각 많이 했어요….”마지막 한 마디가 특히나 의미심장했다.“이런 우연이 있나? 나도 생각 많이 했는데.”여름이 낮게 말했다.“그런데 얼굴을 보고 싶지는 않네요. 또 물 밑에서 무슨 수작을 부릴지, 혹시 또 손을 대지나 않을지 어떻게 알겠어요?”“그날은 내가 좀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하지만 그것도 다 내가 여름 씨를 너무 사랑해서 생긴 일이에요. 여름 씨는… 이혼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양유진이 한숨을 쉬었다.“여름 씨가 녹음을 할지도 모르니까 전화로는 다 말을 못하겠네요.”여름은 녹음을 하고 있었던 휴대폰을 잠깐 다시 들여다 보았다. 양유진의 교활함은 정말 너무나 빈틈이 없어서 물 한 방울 새지 않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니 이혼하고 싶은 건 아니겠죠?”양유진이 웃었다.“우리 이렇게 엮여 있는 거 좋잖아요? 영원히 내 아내로 있다가 죽어도 양 씨 집안 사람이 되는 거예요.”여름이 웃었다.“저기요, 그런 식으로 협박하지 마세요. 나한테는 안 먹히니까. 내가 증거를 들이밀면서 이혼 조건을 협상하려고 할까 봐 그러신가 본데. 뭐, 나도 처음에는 그러고 싶었어요. 그런데 양유진 씨의 파렴치함 때문에 마음을 바꿨죠. 연기 좋아하잖아요? 난 당신이 쓰고 있는 그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당신을 보게 될지가 더 궁금해졌어요.”양유진의 호흡이 다소 거칠어졌다.“무슨 증거 말이죠?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나요?”“네. 계속 그런 식으로 하시던지요. 내가 뭐 하나 알려줄게요. 당신은 날 전혀 몰라.”여름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차 안.양유진이 음험한 얼굴로 끊긴 전화를 바라보고
“내가 당신 일을 한두 번 도와줬나?”추동현이 콧방귀를 뀌었다.“지난번에 강여름의 쌍둥이에게 킬러를 보냈던 일을 내가 모를 줄 아나 보군.”“……”양유진은 화를 억누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양유진, 그 어린 것들도 가만 두지 못하다니, 나도 차마 그 정도로 잔인하게는 못 하겠는걸.”추동현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도와달라니, 대체 뭘 어떻게 도와달라는 건가? 서경주나 아니면 쌍둥이들이라도 납치해서 강여름을 협박하게 해달라고? 그 쪽에서는 대비하지 않을 것 같소? 당신은 무슨 이 나라가 내가 말하는대로 다 이루어지는 내 왕국인줄 아시오? 내가 무슨 램프의 지니야?”양유진은 심장이 두근거렸다.“그런 뜻은 아닙니다.”추동현이 한숨을 쉬었다.“지난번에 성호를 부추겨서 최하준을 죽이려고 들더니 맹지연의 목숨까지 뺏을 뻔하지 않았소? 그 일을 무마하느라고 내가 얼마를 쓴 지나 알아?”“죄송합니다. 그때는 일이 그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저는 그저 추 대표가 최하준이 죽기를 바라는 줄 알고….”“잘 들어. 최하준은 바보가 아니오. 지난 번에 쌍둥이들 사고로 경찰에서 의심을 품고 있소. 또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면 경찰에서 분명 단서를 따라 추적해 올 거요. 그러니 알아서 잘 생각하라고. 나까지 끌고 들어갈 생각하지 말고.”추동현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양유진은 화가 나서 휴대 전화를 집어 던졌다.추동현이 이번에는 절대로 손을 내밀어 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눈치챘다.‘내가 그동안 추신을 위해서 얼마나 개 같이 일했는데.이제 좀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날 이렇게 무시해?흥, 다행히도 플랜B가 있길 망정이지. 그쪽도 동시에 진행시켜야겠군.’양유진은 바로 백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30분 뒤 두 사람은 양유진의 비밀 별장에서 만났다.“어서 와요.”백지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양유진을 맞았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아요?”“지금 송영식은 어때? 쿠베라에서 아직도 본체만체인가?”양유진이 갑자기 싸늘하게 물었다.백지안의 얼굴이 확 굳어
백지안은 양유진의 말에 핏기가 가셨다. 얼마나 소문이 좋지 않은지 본인도 잘 알았기 때문에 양유진의 말대로 하면 기회가 될이다.*****양유진은 그곳을 나와 바로 서경주의 별장으로 향했다.그러나 막상 도착해 보니 경비가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다. 양유진이 왔다는 말에 서경주는 바로 보디가드를 데리고 뛰어나갔다.“마침 잘 왔군. 자네를 찾아갈 생각은 없었거든. 감히 내 딸에게 그 따위 짓을 해?”서경주는 화가 나서 빗자루를 들고 펄펄 뛰었다.“내려 치십시오, 아버님. 제가 여름이를 다치게 했습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양유진은 마음 아프다는 듯한 얼굴로 피할 생각도 없이 땅바닥에 엎드렸다.서경주는 흠칫했다. 그러다가 눈에 골목에 몸을 숨진 기자가 눈에 들어오자 무슨 상황인지 바로 파악이 됐다.“이런 음흉한 놈을 보았나? 내려쳤다가는 내일 아침 서경주가 앞뒤 가리지 않고 양유진을 괴롭혔다는 뉴스가 나오겠군. 그러면 이제 나도 온갖 비난을 다 당하겠지.”서경주가 싸늘하게 웃었다.“아버님….”양유진이 갑자기 낮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사람이 미치면 무슨 짓도 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최하준은 이제 옛날의 그 최하준이 아입니다. 이제는 여름 씨 가족을 보호할 수 없어요. 특히나 벨레스의 두 어르신도 계시니 여름 씨에게 잘 생각하라고 전해주십시오.”서경주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이런 짐승 같은 놈! 감히 내 부모님을 들먹이며 날 위협해?”“그러니까 아버님, 여름 씨에게 말씀 좀 잘 해주십시오. 증거가 있으면 같이 이야기를 해보면 되죠. 제가 빨리 이혼을 해줄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양유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한 번 하더니 떠났다.서경주는 양유진을 실컷 두들겨 패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별장으로 돌아가 여름에게 그 일을 말해주었다.“저 정신나간 양유진 놈하고… 일단 이혼부터 하는 게 순서 아니겠니?”“생각 좀 해볼게요.”여름은 일부러 고민이 많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육민관은 여름을 한 번 쳐다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