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민관이 고개를 저었다.“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누님께 여쭤봐야 할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에 누님께서 이 증거물로 양유진을 협박해 이혼할 거라고 하신 적이 있어서 아직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누님이 깨어나신 후에 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하준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여름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도 똑똑한 사람이었다.‘하지만 양유진의 비열함을 너무 얕잡아 봤어.’******낮 12시.여름의 의식이 희미하게 돌아오고 있었다. 순전히 배가 고팠기 때문이었다. 배가 내내 꼬르륵거려서 힘들었다.“배 안 고파? 죽 좀 시켰는데.”하준이 재빨리 여름을 부축해 앉히고는 자기 가슴에 기대게 했다. 그리고는 한 손엔 그릇을 받쳐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죽을 떠먹이기 시작했다.입을 벌리려는 순간, 여름은 얼굴 전체가 화끈거리며 아파옴을 느꼈다.“얼굴에 멍이 들어서 회복하는 데 최소 일주일은 걸릴 거라고 그랬어.”하준이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응.”여름은 통증을 참으며 간신히 반 그릇가량을 먹었다. 그러다 이상하다는 듯 하준을 바라보았다.“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어젯밤에….”여름의 얼굴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온몸에 펄펄 열이 끓던 기억만 날 뿐, 나중에는 의식이 흐릿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어젯밤 육민관이 나에게 데려왔어….”하준이 헛기침을 한 차례 하고는 부자연스럽게 여름을 바라보았다.“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여름은 잠시 말이 없더니 입을 열었다.“아니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고 당신한테는 왜? 서지도 않는 당신한테 데려와서는 뭘 어쩌겠다고?”“……”완전히 무시당한 하준은 얼굴이 굳어졌다.“지난번에 당신이 날 도와주던 그 방법대로 밤새 잠 한숨 못 자가며 죽도록 해줬더니만.”“… 쿨럭쿨럭.”여름은 하마터면 죽이 목에 걸릴 뻔했다.기침을 한 탓인지 빨개진 얼굴이 화끈거렸다.무의식적으로 두 다리를 움직여 보던 여름은 하준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그러다 자신의 얼굴 상태가 보기 흉할 거라는 데
“……”완전히 무시당한 하준은 심기가 불편했다. 한참을 부루퉁하게 있던 하준이 입을 열었다.“어젯밤 나한테 착착 감겨들 때랑은 말이 다르잖아. 어제는…”“됐어, 그만!”여름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말을 끊었다. 어제는 완전히 이성을 잃었던 상태였다. 오글거리는 멘트를 잔뜩 내뱉었음이 분명했다.“그래, 그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자. 이거 좀 봐봐.”하준은 양유진의 영상을 여름에게 보여주었다.처음에 분노로 가득하던 여름의 얼굴이 뒤로 갈수록 무덤덤해졌다.양유진의 뻔뻔함은 이미 수도 없이 겪은지라 이 상황이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그저 자신이 이런 인간과 결혼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한스럽고 짜증 날 뿐이었다.심지어 최하준 앞에서 양유진이야말로 자신이 평생 믿고 사랑할 사람이라고 말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그야말로 도끼로 제 발 찍은 격이었다.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내가 그렇게 말을 했는데, 양유진은 좋은 남자가 아니라고. 그렇게 안 믿더니….”하준이 원망했다.“당신은 완전히 그 녀석 술수에 넘어가 있었으니 그 녀석 말이라면 껌뻑 죽었겠지.”“……”여름은 진땀이 났다.익숙한 대화였다. 전에 자신이 하준에게 빈정댈 때 했던 말이다. ‘내가 저 소리를 되돌려받게 될 줄이야….’“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그런 말을 해?”여름은 지지 않고 되받아쳤다.“나야 최면에 걸린 거였고 양유진은….”괴로워하는 여름의 짜증섞인 모습에 하준은 더 얘기하지 않고 입을 닫았다. 여름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준의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내가 뭐, 속고 싶어서 속았나? 양유진이 전에 나 대신 칼을 맞는 바람에 그랬지.”그때 여름 때문에 양유진이 신장까지 잃었으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렇게까지 여름을 위해 희생했던 사람은 없었다. 최하준도 그 정도는 아니었으니까.“양유진같이 비열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 정말 당신을 위해 신장을 잃었을 거라고 생각해?”하준이 반문했다.여름은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 뒤의 일들을 생각
또 한 번 상처입은 하준은 쓸쓸하게 시선을 떨구었다. 검고 짙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잘생긴 얼굴에 참담하고 쓸쓸하고 서러운 표정이 가득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너무나 처량해 보였다.하준은 여름을 침대 위에 눕혔다.여름은 당황스러웠다. 영혼을 잃은 듯한 하준의 모습을 보자 순간 후회가 밀려왔다.‘장난 좀 친다고 한 소리가 너무 했나?’“저기… 최하준 씨....”“자기가 그렇게 말할 줄 몰랐는데.”하준의 두 손이 여름의 두 귀를 감싸더니 입꼬리가 의미심장하게 올라갔다. “그렇다면 행동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내가 얼마나 당신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지.” “……”하준이 갑작스레 얼굴을 바꾸고 달려들자 여름은 너무 놀랐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입을 막았다.“뭐 하자는 거야? 나 입원 중인 거 안 보여?”“그러니까 누가 번번이 날 그렇게 도발하래? 잠깐 기능에 고장이 생기긴 하지만 방법이 그것뿐인 건 아니라고.”알 수 없는 웃음을 짓는 하준의 말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이 변태!”여름은 얼굴이 빨개져서 하준을 노려보았다.또 맘이 약해졌던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 때문에 내가 불륜녀란 오명을 얻은 거 아냐!”“흥, 그 사람들이 뭘 알아? 당신은 처음부터 시종일관 변한적 없는데.”하준이 눈웃음을 치며 여름을 바라보았다.“자기 정말… 양유진하고 아무 일 없었던 거야?”“그건 왜 물어? 당신하고 무슨 상관인데?”여름은 쌀쌀맞게 답을 피했다. 예전에 여름은 하준이 양유진보다 못 한다고 빈정댔던 생각이 나서 귀가 타오르듯 빨개졌다.“당연히 상관있지. 그럼, 당신한테 남자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 하나뿐이었단 말이잖아.”하준은 여름이 난처해하는 모습을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활짝 웃는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같이 천진했다.“자기야, 나 정말 기분 좋아.”하준은 부드럽게 여름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또 맞췄다. “이 거짓말쟁이, 그동안 자기한테 속아서 마음고생 참 많이 했어. 난 정말 당신이 양유진하고….”“김
“뭐하는거야?”여름은 어리둥절했다.“내가 씻겨줘야지. 지금 이 상태로 씻을 힘도 없잖아?”하준인 당연하다는 듯 소매를 걷어 올렸다.“…아, 나가.”여름은 부끄럽기도 하고 짜증도 나서 하준을 밀치려 했다. 그러나 걸음을 떼는 순간 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하준의 품에 쓰러지고 말았다.“안 그래도 어디 안 갈 거니까 이렇게까지 꼭 안을 필요는 없는데.”하준이 장난기 가득하게 웃었다.화가 치밀자 얼굴이 욱신거렸다.결국, 하준은 여름을 씻겨주었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힌 뒤 여름을 안고 나갔다. 여름은 자기 얼굴이 퉁퉁 부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얼굴이 새빨개진 것을 다 들켰을 것이다.욕실에서 나오자 하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울과 하늘이었다. 두 아이 모두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한 터였다.여울이 물었다“아빠, 엄마는 어때요? 어디 있어요? 엄마 괜찮아요?.”하늘도 보탰다.“엄마 보러 갈래요. 어디예요?”“엄마는 옆에 있어.”하준이 핸드폰을 여름에게 건내자 여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우리 둥이들, 엄마는 괜찮아. 걱정하지 마.”“엄마.”엄마 목소리에 여울이 울먹였다.“깜짝 놀랐어요. 유진이 아저씨가 엄마 괴롭혀서 아빠한테 약 구하러 간다고 민관이 삼촌이 그랬거든요. 엄마 이제 괜찮아요?”하늘이 물었다.“아빠가 해독약 줬어요? 엄마, 많이 아파요?”여울도 질세라 말을 이었다.“아빠도 의사쌤이에요? 주혁이 아저씨가 의사 아니예요?”“어….”꼬맹이들 이야기에 하준이 키득거렸다. 여름은 난처했다.“민관이 삼촌이 아빠한테 말해서 아빠가 엄마 병원 데려다줬어. 주혁이 아저씨가 간판 명의여서 따로 예약이 필요없이 병원에 바로 입원할 수 있거든.”“그렇구나. 난 아빠가 낫게 해준다 그래서 신기하다고 생각했어.”여울은 말을 마치고는 울음을 터뜨렸다.“유진이 아저씨가 왜 엄마한테 나쁜 짓을 해요? 유진이 아저씨 나빠. 엄마 보러 병원에 갈래요.”“안 돼. 지난번에 차 사고 날 뻔한 거
“최하준, 적당히 하라고!”여름은 약이 올라 죽을 지경이었다. 힘이 어디서 났는지 옆에 있던 꽃다발을 집어 하준의 머리 위에 뭉갰다.하준은 머리를 막고는 얼른 뒤로 피했다.마침 병실로 들어오던 이주혁이 이 장면을 보고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놀렸다.“회복이 아주 빠르시군요.”여름이 답답하다는 듯 연신 깊은숨을 내쉬더니 아예 이불로 얼굴을 덮어버렸다.“넌 또 뭔 짓을 했냐?”여름의 행동을 보고 주혁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하준을 쳐다보았다.이상하지 않은가? 폭행당한 사람이 저렇게 달콤하고 환하게 웃다니.“너 뇌에 무슨 문제 생겼냐?”이주혁이 어이없어했다.“너처럼 외모와 여자를 밝히는 녀석은 이해 못하지.”하준은 업신여기듯 이주혁을 힐긋 보았다.“……”‘내가 몰라? 내가 사귄 여자만도 열 손가락으로 다 못 셀 정도인데, 내가 대체 뭘 몰라?에휴, 모르겠다.’이주혁은 더 따지고 싶지도 않아서 손에 든 약을 건넸다.“잘 먹여. 하루 세 번이다. 간다.”예전에 잘못한 게 있는 데다, 시아와 사이가 안 좋은 여름이 자신을 곱게 보지 않을 것 같았다. 주혁은 상황 판단이 빠른 편이었다.막 나가려는데 하준의 목소리가 들렸다.“육민관 얘기로는 백소영도 양유진에게 모함을 당한 거라던데 그게 무슨 소리야?” ‘백소영’이란 세 글자에 주혁의 다리가 저절로 멈췄다.여름은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지만, 주혁이 멈춰선 걸 보고는 살짝 마음이 움직여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내가 말하면 듣기는 하고? 전에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아무도 안 믿어줬잖아.”“그때는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잖아. 앞으로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다 믿을게. 주혁이가 바보라고 해도 믿어.”대단한 생존본능이었다.“……”주혁은 어두운 얼굴로 무표정하게 하준을 노려보았다.“아주 종잇장 같은 우정이네.”하준은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내가 예전에 와이프 말을 안 들어서 이 꼴이 됐잖아. 그동안 얻은 교훈이 많지.”여름이 단호하게 말했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 당신
여름도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 잠시 후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말을 이었다.“3년 전, 내가 지다빈이 강여경이라고 말했을 때도….”이주혁이 말을 끊었다.“하지만, DNA 검사를 해보니 죽은 사람은 진짜 지다빈이었어요. 여름 씨, 소영이랑 친했던 건 잘 알지만, 그 집 식구들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요. 소영이 무죄를 밝히겠다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요.”주혁의 태도에 여름은 화가 치밀었다.“백지안이 순수하고 착하다고 했었죠? 소영이가 괴롭히는 거라고. 이제 백지안의 실체를 알고서도 소영이가 백지안을 괴롭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백지안 때문에 자살까지 하려고 했던 거 몰라요? 이제 날 오해했던 걸 알았다면 소영이도 예전의 나와 같은 상황일 수 있다는 걸 왜 생각 못해요?” 주혁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하준이 잽싸게 거들었다.“당신 말이 맞아. 우리가 정말 바보 같았어. 백소영에게 편견이 있었던 거야.”“그래, 편견 있었지.”여름이 하준의 말에 동의했다.“이주혁 씨, 소영이랑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걔한테 편견이 있는 것 같아요. 처음부터 걜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 지었잖아요. 그리고 자기 생각이 틀렸을까봐 수많은 이유를 만들어 자신이 맞다는 걸 증명하려고 했죠. 그런데 사실은 당신이 너무 고집만 부린거예요. 왜 소영이가 세상을 떠난 지금까지 공평하게 평가받을 기회를 주려고 하지 않죠?”“세상을 떠났다고?”주혁이 중얼거렸다. 며칠 전 묘지에서 유골이 파헤쳐진 그쪽 집안 사람의 묘지를 본 터였다.“그럼 살았겠어요? 바다에 뛰어들었는데. 경찰이 샅샅이 뒤졌는데도 못 찾았다고요, 살아 있을 리가 있어요?”여름은 목이 메었다. 하준은 뭐라 위로해야 좋을지 몰라 그저 여름의 등만 어루만져줄 뿐이였다.여름이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그때 지다빈과 강태환의 머리카락으로 검사해서 부녀관계라는 걸 밝혀냈는데, 동성에서 검사를 하다 보니 강여경의 친구가 알게된 거예요.”“죽은 사람은 진짜 지다빈이었어요. 화재가 발생
여름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하준은 점점 가슴이 아파왔다.새삼 추동현의 악랄함에 치가 떨렸다.‘아마 내가 동성으로 갔을 때부터 날 목표로 삼아 하나하나 계획을 실행했겠지.’추동현은 양유진의 야심까지 간파해 그 야심마저 이용했다. 두 사람 다 속을 철저히 감춘 음흉한 인간이었기에 여름도 하준도 속을 수밖에 없었다.“미안해. 내가 그때 당신을 조금이라도 믿었더라면 오늘 같은 일은 없었을 텐데.”“아니, 그래도 벌어질 일은 벌어졌을 거야. 백지안이 나타났을 테니까. 그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 사촌 동생에게도 저렇게 신경을 쓰는데 진짜 백지안이 나타나면 어떨까 하고. 결국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고 난 경쟁에서 완전히 참패했지.”여름이 무기력하게 말했다.“백지안이 최면을 쓰기 전, 날 파티에 데려갔을 때, 친구들이 그렇게 날 왕따시키고 모욕주었는데도 당신은 내 편이 되어주지 않았어. 다들 무조건 백지안만 떠받들면서 날 받아들여 주지 않았지. 우리 사이에 애정이 식고 믿음을 잃어갈 무렵 아이가 생겼고, 내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하준의 얼굴에 괴로움이 역력했다. 백지안의 기억 조작으로 여름이 하는 내용의 대부분은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다.이주혁은 진심으로 사과했다.“미안해요, 그 말이 맞네요. 그때 소영이한테도 여름 씨한테도 편견이 있었어요. 전부 사과할게요.” 여름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난 그래도 살아있으니 사과를 받을 수도 있지만, 죽은 사람은요? 불쌍한 소영인 억울함을 풀지도 못했고 부모님까지 돌아가셨어요. 어머님 유골마저 개와 바꿔치기 되었고요.”“……”이주혁은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소영의 맑고 예쁜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그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났다.여름의 눈시울은 붉어졌다.“알아요? 소영이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전에 사이가 좋았을 때도 백지안이 소영이를 괴롭힌 건데도 백지안이 울기만 하면 당신들은 소영이가 백지안을 괴롭혔다고 생각했대요. 아마 당신들 눈에 백지안은 영원히
오해해서 미안했다고 말할가?이제와서 다 부질없는 일이다. 이미 저세상으로 간 사람이 다시 돌아올 리는 없으니까.******병실.여름은 내내 아무 말이 없었다. 얼굴엔 온통 상처로 가득했다.하준은 조심스레 곁에서 오렌지 껍질을 까고 있었다. 이제 백소영이 여름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았다.인제 와서 아무리 사과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상처는 이미 생겼고 그저 그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자기야, 우리 함께 그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보자. 진짜 범인이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게.”오렌지 하나를 까서 건네며 말했다.“별로 먹고 싶지 않아.”여름이 무덤덤하게 말했다.“당신들 탓하자고 한 얘기 아니야. 내가 후회되서 그래. 좀 더 일찍 알아챘더라면 양유진이 그런 짓은 못 했을 텐데, 내 친구를 해친 인간과 결혼했다니.”“당신 잘못은 아니지. 양유진 연기가 대단했지. 나도 놈이 정말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을 정도니까.”하준은 자조섞인 말을 토로하면서 한편으로 여름을 위로했다.그 뒤로 이틀, 여름은 내내 병실에만 있었다.휴대 전화로 뉴스도 보지 않았기에 인터넷을 뒤덮은 자신에 대한 악플도 볼 수 없었다.여름은 견딜 수 있었지만, 윤서는 그렇지 못했다.윤서는 그런 악플에 뚜껑이 열릴 지경이었고 여름의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욕을 퍼부어댔다.“뭘 안다고 아무 소리나 막 하는 거야? 아, 열받아. 양유진이 그런 인간일 줄이야. 경찰이 겨우 5일 구류로 끝낸 거 알아? 아오, 열 받아. 널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5일? 아오오!”“어쩔 수 없어, 자수했잖아. 태도도 좋고 여론도 다 그 쪽으로 기울었으니 경찰서에서도 더 큰 처벌은 어려웠겠지.”여름이 냉랭하게 말했다.“인터넷상에서 저 난리인데 너도 뭐라고 좀 해라. 양유진도 대단해 진짜. 그 얘기 올라간 지 며칠인데 아직도 실검 차트 에서 내려올 기미가 안 보이더라.” 윤서가 어지간히 속상한 모양이었다.“지금 네 상태가 딱 나 그때랑 비슷하다. 나가자마자 계란 맞게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