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일단 양유진의 진면모를 밝히고 나면 자신과 양유진 사이가 어느 정도까지 난리가 날지 상상이 안갔다.“그리고… 누님의 카메라도 제대로 은폐해 둔 것이 아니고 임시로 놓아둔 것이라 금방 발견될수 있어요.”육민관이 경고했다.양우형도 고개를 끄덕였다.“제일 무서운 건 양유진이 눈치채고 나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암암리에 함정을 팔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누님은 제2의 지다빈이나 백소영이 될 수도 있어요. 게다가 저는 양유진의 마음속에 누님에 대한 원한이 가득할 거라고 생각해요. 한동안은 죽이지도 않으면서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도록 괴롭힐지도 같아요. 누님은 죽음도 두렵지 않을지 몰라도 쌍둥이 생각 하셔야죠.”“우형이 말이 맞아요.”육민관이 동의했다.“양유진은 누님을 매우 경계하고 있어요. 어젯밤에도 정전이 되자마자 바로 미친 듯이 달려왔잖아요. 그건 놈이 누님을 엄청나게 경계하고 있다는 뜻이라고요. 놈이 누님을 그렇게 믿지 않는데 누님도 놈을 믿으면 안됩니다. 아마도 놈은 지금 누님을 정복하고 괴롭힐 생각으로 가득할 거예요.”여름은 두통이 와서 이마를 문질렀다. 두 사람이 하는 말에 일리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좋아. 이혼 얘기를 꺼내볼게. 유진 씨 인내심이 아마도 이번 일요일까지밖에 못 버틸 것 같아. 그 안에 뭔가 좀 더 찾아낼 수 있을지 알아볼게.”“조심하세요. 그러면 저희가 며칠 동안 별장 주변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알려주세요.”*******5성급 호델.양유진이 칼같이 각이 잡힌 양복을 입고 전면창 앞에 서서 발 아래 풍경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손에는 커피를 들고 있었지만 한동안 마시지 않고 그저 들고만 있었다.“무슨 생각 해?”목욕 가운을 입은 백지안이 고혹적인 모습으로 욕실에서 나오더니 뒤에서 양유진을 끌어 안았다. 요망한 손이 양유진의 앞쪽으로 오더니 벨트를 잡아당겼다.“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야.”양유진이 백지안의 손을 치웠다. 그의 얼굴색은 어두웠다.백지안이 입꼬리를 씩
호텔에서 나와 차에 탄 양유진은 외국 번호를 하나 찾았다.곧 건너편에서 간드러진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나, 3년 만이잖아? 마침내 나한테 연락을 주시네.”“강여경, 나에게 감사해야 할 거야. 내가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추동현이 진작에 널 살려두지 않았을 테니까. 넌 추동현에게 이미 쓸모 없는 패가 되어 버렸으니까 말이야.”강여경은 잠시 아무 말이 없더니 싸늘하게 웃었다.“사람들이 추동현 더러 음흉하다지만 내가 보기에는 당신이야 말로 제일 음흉한 인간이야. 몇 년 전부터 함정을 그렇게 파놓고 말이야. 난 당신보다 잔인한 인간은 본 적이 없어. 한선우가 죽었다던데 당신이 한 짓이지?”“국내에 있지도 않으면서 아는 게 많군.”양유진의 눈이 어두워졌다.“돌아오고 싶지 않나? 복수하고 싶지 않아? 누가 당신을 산골 농촌에 팔아 넘겼는지 잊지 말라고. 강여름과 최하준이 이혼을 하긴 했지만 둘은 아직도 잘 살고 있어. 부모님은 아직 감옥에서 고생하고 넌 우리나라로 돌아오지도 못하는데 말이지.”“또 내가 필요한 일이 생겼구나?”강여경은 바로 알아들었다.양유진은 씩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기회를 주지. 운명을 바꿀 기회를 말이야. 나에게 완전히 감사하게 될 거야….”******저녁.여름은 석양을 등에 지고 별장으로 걸어들어갔다..집에 들어서자 양유진이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머리를 내밀었다.“잠깐만 기다려요. 곧 저녁이 다 되니까.”“네.”여름은 옷을 갈아입고 소파에 앉았다. 테이블에 양유진의 휴대 전화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저도 모르게 심장이 쿵쾅거렸다.양유진의 휴대 전화에서 강여경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 너무나 궁금했다.어제 강여경이 지다빈으로 성형하고 나타났던 일의 배후에 양유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나서 강여경과 연락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여름은 백지안만큼이나 강여경이 미웠다.둘 다 찢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여름이 2층으로 올라가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내려오니 양유진이 반찬을 다 차려놓았다.
차가운 소름이 온몸에 쫙 퍼졌다.양유진이 그렇게 빨리 눈치 챘을 리 없으니 너무 예민할 필요 없다고 여름은 스스로를 위안했다.그러나 다음 순간 양유진은 여름의 휴대폰을 홱 채가더니 냅다 집어 던졌다. 순식간에 액정이 깨지면서 여름의 휴대폰은 박살이 났다.“유진 씨…”여름이 벌떡 일어서며 분노에 찬 눈으로 노려보았다.“이게 뭐 하는 거예요?”“아직도 쇼를 해? 아니면 이렇게 물어야 하나? 대체 뭘 알아 챈 거냐고?”양유진은 여전히 부드러운 얼굴로 웃고 있었지만 하는 말은 온몸에 소름이 돋도록 싸늘했다.“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난 그냥 그 어플을 보려고 했던 거예요.”여름은 끝까지 잡아뗐다.“왜 이러는 거예요?”지금 여름은 호랑이 굴에 들어와 있는 셈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오늘은 양유진과 틀어져서는 안 된다. 육민관과 양유형도 곁에 없는 판에.“몰라서 이래요?”양유진이 이상하다는 듯 눈썹을 올렸다.“뭘요?”여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내 휴대폰을 저렇게 만들어 놨으니 물어내세요.”양유진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가만히 여름을 들여다 보다가 갑자기 웃었다.“여름 씨는 역시 내 마음에 쏙 드네요. 나처럼 연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군요. 우린 정말 천생연분인가 보네요. 미안하지만, 내 폰은 돌려주세요.”여름은 당연히 휴대 전화를 돌려줄 수 없었다.이미 양유진과 다툼이 벌어진 바에 휴대 전화기는 하나 가지고 있어야 했다. 가지고 나가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무슨 일이 벌어지면 육민관과 연락은 해야 했다.“그 조건에는 응할 수 없네요. 내 것을 부쉈으니까 유진 씨 폰으로 갚으셔야 겠어요.”여름은 돌아서 가려고 했다.양유진은 여름의 어깨를 와락 잡았다. 여름은 곧 피하면서 먼저 양유진에게 손을 썼다.그러나 양유진은 가볍게 여름의 일격을 피했다.여름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난번에 양유진과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몸싸움할때까지만 해도 양유진은 무술을 익혔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그런데 지금은 전혀 여름에게 뒤지지 않
양유진이 악독한 인간이라는 점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제대로 싸워본 적은 없었다. 지금 양유진의 말을 들으니 여름은 마침내 왜 양유진이 자신을 그렇게 사무치게 증오하는지 알 것 같았다.“그러니까, 내가 유진 씨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말로 들리는군요?”여름이 싸늘하게 웃었다.“그럼요. 난 여름 씨를 위해서 신장도 희생했다고요.”“됐어요. 이렇게 무서운 인간인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때 내가 죽는 게 나을 뻔했네요.”여름은 증오에 차서 말을 이었다.“당신, 요 3년 동안 겉으로는 나에게 잘해주는 척하면서 뒤로는 하나하나 함정을 파고 있었던 거예요. 3년 전 강여경을 지다빈으로 성형시켜 하준씨에게 접근한 것도 당신이 벌인 수작이었죠? 백소영을 모함해서 감옥에 넣은 것도 당신과 관계 있는 거고. 그리고 한선우의 죽음은 당신이 한 짓 중 최악이에요. 어떻게 자기 조카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요? 지옥에 갈 거예요.”“한선우가 죽었을 때부터 날 의심한 건가요?”양유진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내가 아주 철저하게 비밀스럽게 처리했는데 대체 어떻게 안 거지?”여름은 헉하고 숨을 들이마셨다.‘그냥 한 번 해본 말이었는데 인정을 해버리다니!한선우는 정말 양유진이 죽인 거였어.’여름의 놀란 얼굴을 보고 양유진은 사악하게 입꼬리를 올렸다.“예상보다 많은 걸 알고 있었군요. 다행히도…내가 미리 손을 써뒀죠.”“…손을 쓰다니?”여름의 안색이 확 변했다. 바로 테이블 위의 음식을 쳐다보았다. “음식에 뭘 넣었어요?”“어떨 것 같나요?”양유진이 웃었다.“난 여름 씨를 정말 사랑해요. 내가 그렇게 마음을 썼는데도 당신을 손에 넣지 못한다면 정말 평생 한이 될 것 같아서 말이죠. 게다가 최하준의 영상을 보니 그걸 아주 즐기는 것 같던데…. 안심해요. 내가 여름 씨를 완벽하게 만족시켜 줄게요.”“더러워!”여름은 참지 못하고 양유진의 따귀를 때리려고 했다.양유진은 피하지 않았다.“쳐 봐요. 세게 치는 만큼 즐겁게 해줄게요.”“당신 생각대로는
양유진은 휴대 전화를 설치하더니 느긋하게 겉옷을 벗고 여름에게로 다가갔다.여름은 양유진의 우아한 얼굴이 불빛 아래서 악마처럼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았다.‘이게 진짜 양유진이구나.’그 모습을 보고 나니 구역질이 올라왔다.“잠깐,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보고 싶어요.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건 알아야겠어요.”여름은 절망적으로 외쳤다.“그래요, 물어보세요.”양유진은 도마에 올려 놓은 생선을 보는 듯한 눈으로 여름을 바라보았다. 다 잡아 놓은 고기에 대해서 서두를 것 없다는 듯 느긋했다.3년 전에 나에게 접근했을 때 정말 나를 좋아했던 거예요,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었나요?”여름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당신 같은 사람이 정말 단순히 날 사랑해서 따라다녔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진작부터 내가 서경주의 딸이라는 것을 알았나요? 아니면 감추어져 있던 화진 그룹을 노렸던 거예요?”“음, 반반이라고 하죠.”양유진은 애매한 답을 했다.“원래는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했어요. 그런데 최하준 때문에 내가 감옥에 들어가게 되자, 당신이 바로 최하준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완전히 당신을 증오하게 되었죠. 내가 여름 씨를 그렇게 사랑했는데, 내가 대체 최하준보다 못한 게 뭔가요? 최하준이 최고의 부자라서? 안타깝게도 이제는 완전히 내 발 밑에 놓인 처지지만. 놈을 벌레 밟듯 짓밟아 죽일 생각입니다.”섬찍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마친 양유진은 여름을 침대 위로 눌렀다.“그거 알아요? 우리 신혼 첫날 밤, 최하준이 나에게 영상을 하나 보냈죠. 내 평생 받은 모든 모욕은 모두 여름 씨와 최하준에게서 받은 거예요. 이따가 우리 모습도 찍어서 최하준에게 보여주죠. 놈이 사랑하는 사람이 내 밑에 깔려서 얼마나 신음하는지 보여주는 거예요.”여름은 너무 무서워서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저도 모르게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최대한 침착을 유지하며 시간을 끌었다.“그러면 전에 내가 물었을 때는 왜 부인했죠?”“인정하면 날 의심했을 거 아닙니까? 그건 어떤 남자라도 참을
양유진은 바로 알아 챘다.“지난 번에 밀크티를 마시자며 찾아왔을 때군.”“뭐…”여름이 피식 웃었다.“함정은 나도 팔 수 있다고. 자기만 할 수 있다는 착각은 버리시지. 매일 전수현과 사무실에서 아주 격정적으로 노시던데? 양유진의 변태적인 성생활이 알려지면 사람들이 아주 깜짝 놀라겠던데?양유진 대표가 만들어왔던 선량한 이미지는 단숨에 무너지겠지. 위선적인 인간이니 밖으로 보이는 자기 이미지에는 신경이 쓰이실 텐데….”“이거 이거, 강여름도 아주 음흉한 인간이었군 그래?”양유진이 음험하게 웃었다.“아무렴 당신만 하겠나.”여름은 애써 몸에서 올라오는 열기를 눌러가며 비꼬았다.“안타깝게도 당신은 날 잘 몰라. 그래서? 영상이 어디 있지? 가져와 보라고.”양유진이 싸늘하게 여름을 내려다 보았다.“영상을 내놓으라고? 꿈 깨시지.”“내가 헛소리나 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곧 알게 될 거야.”양유진이 웃었다.“내가 그런 취향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니, 진정한 SM의 세계를 맛보게 해주지. 당신도 아주 좋아할 거야. 이게 아주 재미있거든.”양유진이 묘하게 눈을 번뜩였다.여름은 머리카락이 곤두섰다.양유진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생각지 못했다.잠시 양유진이 인간이 아닌 짐승이라는 점을 잊었던듯 했다.“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어.”양유진이 손가락을 세 개 들어 보였다.“하나…”“어디 있는지 말하면 날 놓아줄 건가요?”여름이 깊이 심호흡을 하며 물었다.“아니지. 하지만 다른 놈을 더 부르지는 않겠어. 나 혼자서만 당신이랑 노는 것으로 끝내주지.”양유진은 가식적인 웃음을 씩 짓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둘…”“절대 그렇게는 안 될걸. 절대 영상 원본은 내줄 수 없지. 그 동안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이야. 아무리 영상을 찍어서 날 위협한대도 온 세상에 악마 같은 양유진의 모습을 알리고 말겠어. 당신 지금 이거 강간이라고. 범죄 행위야. 지금 하는 짓 하나 하나 다 범죄 행위라고. 할 테면 해 봐. 너 죽고 나 죽자는 거잖아.”여름은 전혀
“하지만…”양유진이 말을 끊더니 위험한 미소를 지으며 눈썹을 치켜 세웠다.“내가 당신을 안 건드릴 수는 있는데, 과연 당신이 스스로 견딜 수 있을까?”여름은 멍하니 양유진을 바라보았다.“여름 씨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얼마나 참을성이 있는지 알아요. 내 눈으로 봤으니까. 그래서 오늘은 내가 양을 좀 넉넉하게 넣었거든. 아직까지는 정신이 좀 있나 본데, 조금 있으면 몽롱해 질 거예요. 내가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하게 될 걸. 발정난 암고양이처럼 완전히 이성을 잃게 될 거예요.”양유진이 웃을듯 말듯한 얼굴로 말했다.“기대 되네요. 당신이 날 어떻게 덮쳐올지.”여름은 뜨거운 파도가 몸을 철썩철썩 덮쳐왔다. 수억 마리의 개미가 깨물어 대는 듯 견디기가 힘들었다.숨조차도 크게 쉬기가 힘들었다.모공 하나 하나가 터져나가는 듯했다.양유진은 가만히 옆에 앉아서 여름이 죽어라 입술을 깨물고 손으로 자신을 꼬집으며 참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여름의 얼굴은 점점 더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심지어 양유진을 바라보는 눈빛도 서서히 달아올랐다.“자기, 잘 버텨 봐요.”양유진이 불 난 데 부채질 하듯 속삭였다.“이…나쁜 자식아!”여름은 눈 앞의 모든 것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찬물을 뒤집어 쓰고 싶었으나 몸이 묶여 있어 그것도 어려웠다.이때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육민관이 뛰어 들어왔다. 여름은 육민관의 모습을 간신히 확인하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여름이 죽어라 시간을 끈 덕분에 마침내 육민관이 찾아올 시간을 벌었다.“누님에게 손찌검을 하다니! 이 개자식아!”육민관은 얼굴이 퉁퉁 부은 여름을 보고는 양유진에게 달려들었다.“민관이 너 혼자서 여름 씨를 데리고 나갈 수 있을 줄 아나? 웃기지 마.”양유진은 육민관이 갑자기 나타날 줄은 몰랐지만 그다지 개의치 않는 듯했다.“물론 나 혼자서는 무리겠지. 하지만 내가 15분 안에 나가지 않으면 우형이가 경찰에 신고할거야.”육민관이 차갑게 웃었다.“경찰이 와서 이
육민관은 서둘러 여름을 들쳐 업었다.별장을 뛰어 나가니 양우형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차로 맞으러 왔다. 육민관이 여름을 차에 태웠다. 여름은 이미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여름의 눈에 육민관은 그저 남자였다.그녀는 참지 못하고 그대로 민관을 덮쳤다.“우엇! 누님 뭐 하시냐? 제 정신이 아닌가 본데?”양우형이 육민관을 쳐다보았다.“야, 누님이 너 건드리지 못하게 해라.”육민관은 환장할 지경이었다.“주둥이 다물어라.”순간 여름이 민관의 옷을 잡아 찢었다.“아니, 누, 누님! 살려주세요!”육민관은 울기 직전이었다.“저 민관이라고요!”“최하준, 최하준, 빨리 해줘….”여름은 아무 것도 안 들리는지 육민관을 잡아 먹을 듯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야야, 빨리!! 빨리 최하준 집으로 가!”육민관이 외쳤다.양우형은 어쩔 줄 몰라 했다.“그런데 최하준 집이 어딘지도 몰라. 전화번호도 모르겠고.”“바보냐고! 여울이한테 전화 걸어.”육민관이 다급히 외쳤다.양우형이 바로 여울에게 전화를 걸었다.“여울아, 지금 너네 아빠 어디 계시냐?”“아빠요? 지금 옆에…”여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준의 목소리가 들렸다.“난 왜 찾나?”“큰일입니다. 양유진이 누님에게 수를 썼어요. 이거 빨리 좀 해결해 주셔야겠는데요. 안 오시면 누님이 민관이를 잡아먹게 생겼어요.”양우형이 마구 소리를 질렀다.“여름이 건드리지 마!”최하준이 외쳤다.양우형이 울먹이다시피 말을 이었다.“민관이가 건드리는 게 아니라니까요. 누님이 지금 민관이 옷을 막 찢고 있다고요.”“이런…!”하준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올 뻔 했다.“어디야? 당장 가지!”“지금 양유진의 집에서 출발했습니다. 댁이 어딥니까?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그런데… 댁으로 가도 됩니까?”양우형이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청하 파라곤으로 오지. 거기 내 개인 숙소가 하나 있어.”하준은 말을 마치고 바로 일어섰다. 여울이 걱정스럽게 하준의 옷자락을 잡았다.“아빠, 왜요? 엄마한테 무슨 일 생겼어요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