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그 톡을 보고 나서 머리가 터지는 것 같았다.‘우리 둥이는 아직 어린애들인데 누군가가 노리다니.오늘은 운이 좋아 목숨을 구했다지만 내일 또 이런 이리 벌어지면?’여름이 원망과 증오의 시선으로 하준을 노려보았다.“내가 잘못했지. 당신하고 아이들을 같이 두는 게 아니었어. 최하준, 당신은 저승사자야. 아주 나하고는 상극이라고. 전에는 나를 해치더니 이제는 우리 쌍둥이를 노린다고? 왜 내가 이렇게 재수가 없는지 알아? 당신을 만났기 때문이야!”여름의 말이 송곳처럼 하준의 심장을 찔렀다.하준은 너무 마음이 아파 신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간신히 말을 이었다.“추신에서 여울이와 하늘이를 노린 게 아니야.”여름이 비웃었다.“방금 전성을 추신에 스파이로 심어 놨다며? 추신이 아닌데전성이 어떻게 사건의 진상을 알아?”“전서의 말로는 추동현의 배후에 비밀스러운 추종자가 있는데 내내 추동현을 위해서 비인간적인 일을 처리하고 있대. 그 인맥풀에는 니아만의 킬러도 있는데….”여름은 ‘니아만’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전에 육민관이 예전에 백지안과 관계를 가지던 곽철규가 니아만의 킬러에게 죽었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했다. 당시 여름은 백지안이 배후에 알 수 없는 세력이 있다고 느꼈다. 육민관이 나중에 직접 니아만으로 가서 조사를 진행해 보았으나 배후 인물을 밝혀내지 못했었다.“추동현에게 내가 눈에 가시라고는 해도 끽해야 날 죽이려고 들 거야.”하준이 진지하게 설명했다.“사실 추신과 FTT 사이에서 우리 FTT는 내내 밀리고 있어. 데이터를 도둑맞고 나서 윤형이는 추신 때문에 지적 장애가 되었고, 어머니는 추동현에게 이혼을 당했어. 그리고 양하는 살해당했지….”“뭐라는 거야? 양하 씨가 추신에 살해당하다니?”여름이 다시금 놀라운 소식에 경악했다.“추동성의 아들이잖아?”“아니야.”하준이 아픔을 꾹 참으며 답했다. “최근에야 알게 된 사실이긴 한데, 양하는 사실 나와 친형제였어. 어머니가 그날 너무 취해서 상대가 추동현이라고 착각하셨던
얼마나 잔인한 인간이기에 어린애도 가만두질 못한단 말인가!게다가 여울이와 하늘이는 자기 눈으로 직접 자라는 모습을 보았던 아이들인데.“증거 있어?”여름이 한참 만에야 경 입을 열었다.“없어.”하준이 고개를 저었다.“전성도 잠입한 지 얼마 안 돼서 그 정도 정보를 얻은 것만 해도 괜찮은 거라고 봐야지. 아직은 의심을 살 수도 있는 상황이라 더 깊이 파기는 힘들 거야. 내가 양유진을 의심하는 이유는 요 몇 년 동안 추성호의 결혼식을 비롯한 추신의 주요 행사에 매번 양유진이 오는 걸 봤기 때문이야. 추성호와 다른 손님들은 비슷하지만 양유진은 외부인이라고. 달리 무슨 뒷배도 없으면서 지금의 수준으로 회사를 급작스럽게 키울 수 있었던 데는 암암리에 추신의 도움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여름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오후에 양유진이 전수현과 뒹구는 영상을 본 데다 지금은 양유진이 추신과 결탁했다는 의심이라니.“그리고 양유진에게는 동기도 있지.”하준이 이어서 말했다.“맹지연의 생일날 내가 당신이랑 욕실에 있었던 일로 놈은 이성을 잃고 당신에게 손찌검을 할 정도였어. 얼마나 속에 잔인함을 숨기고 있는 놈인지 알 수 있잖아? 충분히 여울이와 하늘이를 해칠 생각도 할 수 있을 정도야. 일이 성사되면 나에게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을 안겨줄 수 있을 뿐 아니라 내가 돌보던 중 벌어진 사건이니 당신은 나를 죽도록 미워하게 되었을 거야. 그러면 우리 둘 사이는 돌이킬 수 없게 되겠지.”여름의 입술이 결국 달달 떨렸다.여름은 영상 속에서 양유진이 채찍을 휘두르던 변태스러운 모습이 반복해서 떠올랐다.‘그래. 그런 변태라면 나와 최하준이 자기에게 미안할 짓을 했다고 생각하고 쉽게 그런 마음을 먹을 수도 있을 거야.그렇게 가식적인 인간이니 그 다정한 얼굴 뒤에 뭘 더 숨기고 있는지 알 수 없지.게다가 오늘 오후에 아이들을 데리고 식사하러 가자고 했을 때 내가 아이들은 오늘 최하준이 데리고 간다고 말해주었잖아?그때부터 손을 댈 결심을 했던 건 아닐까?멍
“이혼하려면 나도 방법은 있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여름은 말을 마치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하준은 좀 열 받았다. 양유진을 믿는다면 모를까, 양유진을 의심하면서도 이혼은 하지 않겠다니 너무나 자기 목숨을 너무 마구 대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강여름, 왜 이렇게 내 말을 안 듣는 거야?”“내가 왜 당신 말을 들어야 하는데?”여름이 담담히 반문했다.“당신은 우리 둥이나 잘 봐줘. 내 일에는 신경 쓰지 말고.”“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내가 당신을 신경 안 쓰면 누굴 신경 쓴단 말이야.”하준이 길가에 차를 세우더니 여름의 몸을 자기 쪽으로 당겼다. 두 손으로 여름의 두 볼을 잡았다. 자신의 넘치는 걱정을 숨길 생각 없이 그대로 드러냈다. “당신은 양유진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얼마나 무서운 인간인지 몰라. 양유진이 당신을 사랑하니까 해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틀렸어. 어린애에게까지 손을 대는 놈이야. 이 세상에 놈이 하지 못할 짓은 없어.”“어쨌든… 지금은 떠날 수 없어.”여름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 하준의 얼굴을 피하면서 답했다.하준은 그 고집스러운 모습을 보며 화가 나서 심장이 아플 지경이었다. “강여름, 당신이 자기 목숨을 이렇게 아끼지 않아서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는 세상에서 제일 못된 사람이랑 결혼할 거야. 그러면 그 새엄마가 둥이를 괴롭힐지도 몰라.”“최하준….”화가 나서 결국 여름은 하준을 노려보았다. 하준이 일부러 자신을 자극하기 위해서 그러는 줄 뻔히 알면서도 그런 소리를 들으니 너무나 무서웠다.“자기야, 꼭 나와 살아달라는 게 아니야. 그냥 당신이 평안하게 지냈으면 좋겠어.”하준이 자기 이마를 여름에게 댔다. 거의 애걸하다시피 한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당신을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는 건 미안해. 하지만 아이들에게 엄마가 없는 건 싫어. 나도 당신이 없으면 안 되고.”남자의 숨결이 여름의 코끝을 간질였다.차 안에 창문이 모두 닫혀있어서인지 여름은 갑자기 공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느낌
애초에 곽철규의 죽음은 백지안과 관계있었다. 문제는 곽철규가 니아만의 킬러의 손에 죽었다는 것이었다. 추신과 곽철규는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었다. 그렇다면 백지안 배후의 세력은 추신이 아니라는 뜻이다. 어쩌면 비밀스러운 추신의 추종자라는 쪽인지도 모른다.그런데 지금 최하준은 그 비밀스러운 추종자를 양유진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양유진은 백지안과 접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여름은 번뜩하고 지난번에 백지안이 납치당했던 일이 떠올랐다. 누군가가 육민관과 백지안을 엮어서 동굴에 넣어두었었다.당시 여름은 육민관이 자신의 가장 믿을만한 조력자라 늘 잘 숨기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어떻게 육민관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예전에는 그때 바에서 기자에게 육민관의 뒷모습을 찍히는 바람에 들킨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그게 아니라 양유진이 일부러 육민관의 행적을 일부러 드러낸 거라면….그 뒤에 여름과 하준이 법정에서 싸울 때 사실 그렇게 크게 승산이 없었다. 그런데 양유진이 자신에게 유리한 증거를 제시해 주어서 여름은 육민관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때 여름은 양유진에게 너무나 고마운 마음이 들어서 결혼을 승낙하게 되었던 것이다.그런데 이제 와서 되돌이켜 보니 그 모든 것이 백지안과 양유진이 짜고 치는 판에 자신이 끌려들어 갔을 가능성이 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꼼짝도 안 하고? 경찰서 다 왔어.”하준이 다가와서 여름의 안전벨트를 풀어주다가 여름이 정신 파는 것을 보고는 이마에 쪽 입을 맞추어 버렸다.여름은 그저 멍하니 하준을 바라보며 아직까지도 그 소름 끼치는 생각에 빠져있었다.“왜 그래?”하준은 여름이 너무 빤히 쳐다보자 너무나 유혹적이라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장소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결국 고개를 숙여 여름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최하준!”여름은 얼른 하준의 입술을 막아내고는 말했다.“내려.”한바탕 욕을 먹을 각오를 하고 있던 하준은 살짝 당황했다.“……”여름이 차 문을 열고 내려 걸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다시 잘 조사해 보겠습니다.”오 경사가 진지하게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까지 살해할 마음을 품을 정도라면 가차 없이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경찰서에서 나올 때 여름의 얼굴은 사뭇 어두웠다. 하준은 여름이 화가 난 줄 알고 비위 맞추듯 말했다.“미안해. 전성이 보낸 톡은 경찰에게 보여줄 수 없었어. 괜히 적이 우리를 경계하게 만들 수도 있잖아? 추신은 지금 세가 어마어마해서 충분한 증거가 없이는 무너뜨릴 수 없어. 그때까지 전성의 신분은 노출되면 안 돼. 안 그랬다가는 양하의 죽음도 헛된 것이 될 거야.”“알아.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도 바보는 아니거든.”여름이 저도 모르게 짜증스럽게 답했다.“경찰이 계속 조사를 한대도 뭐 그럴싸한 결과가 나오지는 않을 것 같은데.”하준이 눈썹을 치켜세웠다.“그건 모르지. 배후의 지시자를 찾아내지 못한대도 놈들에게 타격은 될 거야. 양유진이 움직인 건 추신의 킬러야. 경찰이 계속 파다 보면 분명 추동현도 누군가가 자기 등 뒤에서 문제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그래도 추동현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여름은 흠칫해서 하준을 쳐다보았다.“당신도 아주 바보는 아니네?”“……”하준이 황당한 얼굴을 했다. 여름이 지금 예전에 자신이 백지안에게 속아 넘어갔던 일을 비꼬는 것이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여름이니 그냥 이 정도로 대충 넘어가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가만두지 못했을 것이다.“자기야, 난 이제 예전과는 달라….”“백지안이 스티븐을 자기 변호사로 선임했다던데, 내일 재판 열리는 날이지?”여름이 갑자기 확 주제를 바꾸었다.“자기가 내 일에 그렇게 관심이 있었어?”하준이 은근하게 웃어 보였다.여름은 가식적인 웃음을 지었다.“그럼, 우리가 이혼할 때는 한 푼도 안 주고 내쫓더니 백지안하고 헤어질 때는 그 어마어마한 위자료를 물어주었다는데 관심이 없을 수가 있나?”“……”하준은 마침내 ‘도끼로 제 발등 찍는다’는 게 무슨 소린지 알았다.
하준은 대체 여름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가요.”여름은 괴로운 듯한 하준의 눈빛을 무시하고 양유진을 끌고 차로 가버렸다.양유진의 얇은 입꼬리가 올라갔다. 보란 듯 자상하게 여름에게 차 문을 열어주고 안전벨트까지 메 주었다.흡사 달콤한 신혼부부 같은 느낌이었다.하준은 화가 나서 주먹으로 차를 내리쳤다.양유진의 차가 곧 출발했다.차에서 양유진은 여름의 손을 꼭 쥐었다.“기쁘네요. 난 오늘 여름 씨가 여울이랑 하늘이랑 같이 있겠다고 할 줄 알았거든요.”“가보고 싶기야 하죠. 하지만 애들도 아빠가 있으니까 책임지고 돌봐야죠.”“그도 그렇네요.”양유진의 눈이 번뜩 빛났다.“아 참, 오늘 사고는 대체 어떻게 된 거랍니까?”“사고 차량 기사가 액셀러레이터를 브레이크로 착각하고 힘껏 밟았다네요.”그 일을 언급하니 여름의 얼굴에 분노의 기색이 스쳤다.“그런데 최하준은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라고 해요. 그 차량 운전자의 아들이 아무런 연고도 없이 m국에 가서 갑자기 집과 차를 샀다잖아요? 듣고 보니 누군가의 지시로 그런 짓을 벌인 게 아닌가 싶더라고요.”핸들을 톡톡 두드리던 양유진의 손가락이 살짝 오그라들었다. ‘최하준 자식. 꽤 빨리 찾아냈군.’“예전에 원한 관계를 많이 만들었으니 아이가 있다는 게 알려지지 않았어야 해요. 아예 아이들을 우리 집으로 데려오면 어때요? 최하준 곁에 두는 건 너무 위험한 것 같은데요.”“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최하준이 동의하지 않을 거예요. 아시다시피 최하준은 변호사라서 소송을 걸면 반드시 이길 거예요.”여름이 일부러 골치 아프다는 듯 말했다.“괜찮아요. 여름 씨만 원한다면 도와드릴게요.”양유진이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네. 생각 좀 해볼게요.”여름은 안심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준은 우울한 기분을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여울과 하늘이가 바로 뛰어나왔다. 하준이 혼자서 돌아온 것을 보고 실망해 마지않았다.“엄마는요? 오늘 우리랑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요?”“엄마
하준이 답장을 보냈다-오늘 왜 양유진하고 이혼해야 하는지 그렇게 말을 했는데 내 말을 뭘로 듣는 거야?-자기야, 당신이 애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말도 안 돼. 뭔가 목적이 있어서 양유진 옆에 남가 있는 거지? 쌍둥이를 해치려고 했다는 증거를 잡기 위해서?-자기야, 그러지 말고 돌아와. 양유진이 눈치라도 채면 위험하다고.“……”여름은 가끔 하준이 정말 예리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양유진이 아이들을 해치려고 했다는 증거만 잡으려는 게 아니라 한선우의 죽음에 양유진이 관련되어 있다면 반드시 직접 양유진을 감옥으로 보내고 싶었다.서도윤에게 약속한 일이기도 했다.여름은 아예 휴대 전화를 꺼 놓고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다음 날 회사에 도착해 여름은 육민관을 불러올렸다.“양유진의 별장 사방에 감시 카메라인데 잠깐 카메라에 문제를 일으켜서 상대가 아무것도 못 보게 할 수 있을까? 양유진의 침실과 서재, 컴퓨터를 뒤져보고 싶거든.”“전기를 끊으면 되죠.”육민관이 말했다.“하지만 별장만 전기가 끊기면 의심을 받을 수 있으니 일대의 전기를 다 끊어야겠죠.”“좋아.”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양유진이 어딜 다니는지 알아봐 줘. 그다음에 우리도 다시 행동 계획을 짜자. 시간은 이틀 줄게. 더는 못 끌어.”쌍둥이의 차 사고로 여름은 더 이상 양유진의 곁에 계속 머물면서 연기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양유진이 자신을 보는 눈빛이 점점 더 므흣해 지고 있었다.******법정.하준과 백지안 사이의 사건이 처음 법정 공방을 시작하는 날이다.10여 년을 함께 했던 연인이 이제는 위자료를 두고 법정에 서게 되었다.이번 재판에 언론의 관심이 크게 쏠렸다. 아침부터 법정 입구는 이미 기자로 바글바글했다.오전 10시. 송영식이 백지안과 함께 올라갔다. 두 사람 뒤로 국제 변호사로 이름을 날리는 스티븐이 따라 올라갔다.하준은 검은 맞춤 양복을 입고 어두운 그린 넥타이를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착용하고 있었다. 엄숙한 눈은 보검에서
송영식도 심란한 얼굴이었다. 한때 하준의 베스트 프렌드였지만 지금은 백지안의 곁에 서 있었다.“하준아….”“아쉽네. 넌 내 마음속에 최악의 존대로 남아 있거든.”하준은 송영식은 신경도 쓰지 않고 백지안에게만 냉담하게 답했다.“거 살벌하게 그런 소리를 하냐?”송영식이 화를 냈다.“연인이 아니게 되었다고 그렇게 원한을 품을 건 없잖아?”“영식이 너는 잘 지내나 보구나? 이런 애를 위해서 자식도 몰라라 하고 식구도 몰라라 하고?하준이 냉랭하게 받았다.송영식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동안 송영식은 가족이 자신과 함께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번뇌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지경까지 왔으니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백지안을 따르기로 했다면 끝까지 책임지는 수밖에 없었다.“나는 후회하지 않아.”“고마워.”백지안이 감동한 듯 눈물을 또륵 흘렸다.도저히 눈 뜨고 못 봐줄 꼴이었다. 한때 저런 인간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한스러웠다.“최 변호사,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국내에서는 꽤 이름을 날리시는 모양인데 이제 나와 만났으니 승소는 어렵겠군요.”스티븐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저라면 어떻게 화해할지 궁리하겠습니다.”하준은 담담히 스티븐을 쳐다보았다.“날 이기다니 언감생심이지. 다음 재판까지만 버텨도 대단한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겠소.”말을 마치고 하준은 주머니에 손을 꽂고 법정으로 들어가 버렸다.그 오만한 모습에 스티븐은 화가 올라왔다.“반드시 당신을 꺾어 보이겠어.”곧 재판이 시작되었다.하준은 원고이면서 자신을 대표해 사건을 맡은 담당 변호사였다. 이런 일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판사가 사건 경위를 간단하게 읽고 나자 스티븐이 일어섰다.“저는 의뢰인이 원고에게 위자료를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의뢰인은 8살부터 최하준 씨를 알았습니다. 18세에는 연인 관계로 발전했고 다들 아시다시피 최하준 씨는 정신 병력이 있지만 의뢰인은 그래도 싫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최하준 씨를 위해 의술을 배워왔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