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선우의 아버지 뜻에 따라 한선우는 화장하게 되었다.여름은 마지막까지 보고 가기로 했다. 화장이라니 참담한 기분이었지만 무섭다기보다는 마음이 아팠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랐던 상언 오빠의 마지막을 그렇게 보냈다.인간의 삶이란 이렇게 허무한 것이었다.한선우를 보내고 여름은 사흘 동안 출근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딜 간 것은 아니고 마치 거북이처럼 자기 껍데기 속에 가만히 들어앉아 있었다.나흘째가 되었을 때 갑자기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왔다.“외숙모님, 저 서도윤이에요.”“도윤 씨….”여름은 어쩔 줄을 몰랐다. 서도윤이 원망스러운 마음에 전화를 했다고 생각했다.“잠깐 뵙고 싶은데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나와주세요.”서도윤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여름은 흠칫 놀랐다. 본능적으로 방어적인 태도가 되었다. 그러나 서도윤이 와 달라는 곳이 시내 중심가여서 의심을 거둘 수 있었다.곧 여름은 차를 몰고 약속한 커피숍의 예약룸으로 향했다.서도윤은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에는 선글라스와 모자가 놓여 있었다. 심지어 머리도 짧게 자르고 짙은 화장을 해서 여름은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저기… 무슨 일로 불렀어요?”여름이 맞은 편에 앉았다. 서도윤은 내내 얌전한 사람이지만 쉬운 상대는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었다. 여름과 한선우가 사귀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질투도 하지 않았고 가끔 양수영이 하는 뒷담화에도 전혀 끼어들지 않았었다.“이거 좀 보실래요?”서도윤이 자기 휴대 전화를 내밀었다.여름이 열어보니 다른 휴대 전화의 캡처 화면이 보였다. 보내려고 치던 톡이었다.-조심해, 외시여름에게 보내던 톡이었다.“이건 선우 오빠 휴대 전화의 마지막 화면이었어요. 사고 후에 경찰이 근처 풀숲에서 주웠대요. 휴대 전화 비번을 몰라서 제게 가져왔더라고요. 열어보니 이 화면이 제일 먼저 보였어요.”서도윤이 심란한 듯 여름을 바라보았다.“제 생각에 오빠는 사고가 났을 때 뭔가를 깨닫고, 아니면 그게 마지막이라는 걸 알고 외숙모님께 최후
‘조심하라니…대체 누굴 조심하라는 거지?’‘외시…’라는 단어는….’여름의 머릿속을 번뜩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외삼촌이라고 쓰려던 걸까?’여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서도윤이 여름의 표정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뭔가 떠오르신 것 같네요.”“아녜요. 그럴 리가 없어요.”여름이 고개를 저었다.한선우가 왜 죽기 직전에 여름에게 양유진을 조심하라고 경고를 보낸단 말인가?서도윤이 말을 이었다.“오빠는 마지막 순간에 외삼촌이라고 쓰고 있었던 건지 몰라요. 제가 왜 그 화면을 오빠 핸드폰에서 지웠는지 이제 이해가 되시죠?”여름은 바로 이해했다. 존경스럽고 심란한 표정으로 서도윤을 바라보았다.처음으로 그 사람이 얼마나 총명하고 진중한 사람인지 알았다. 평소에 워낙 얌전해서 그리 주의해서 보지 않았던지라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날 미워하지 않나요?”여름이 뜬금없이 물었다.“도윤 씨 시어머니는 한선우 씨가 날 만나러 오다가 사고가 나서 도윤씨와 배 속의 아이만 남겨두고 가게 만들었다고 아주 날 잡아먹지 못해서 난리던데.”“당연히 미워도 했죠.”서도윤이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오빠가 솔직하게 털어놓은 적이 있어요. 외숙모님께 죄송할 일을 많이 했다고. 그리고 상처도 주고 마음을 져버렸었다고요. 외숙모님께 마음에 빚이 많다고 했어요. 저랑도 사실 처음에는 얻어낼 것이 있어서 결혼한 거라며 자기는 겨우 그런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 저랑 결혼하고 나서는 늘 저에게 잘해주었고 바람을 피우지도 않았어요. 외숙모님은 오빠 마음속에서 맴도는 달 같은 존재였어요. 저는 질투하지 않았어요. 어떤 사랑은 소유하는 거고 빼앗는 거지만, 전 그냥 지키는 걸로 충분했거든요.”여름은 감동했다 서도윤이 매우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한선우가 강여경 같은 악마를 만나서 고생을 하더니 서도윤 같은 사람도 만나는구나 하고 감탄했다.서도윤이 말을 이었다.“그리고 저는 정말 아주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면 오빠가 마
서도윤은 말을 마치더니 보자, 선글라스를 쓰고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도윤 씨.”여름이 일어섰다. 주먹을 꼭 쥐었다.“내가 끝까지 조사할 거예요. 한선우 씨가 피해자라면 내가 가해자를 반드시 가만히 두지 않을 거예요.”“고맙습니다. 외숙모님도 선우 오빠의 마지막 유언을 져버리지 말아 주세요.”서도윤은 고개를 돌리고 서글픈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떠났다.여름은 오래도록 룸에 앉아 있었다.추운 날씨가 아님에도 너무나 싸늘했다.서도윤의 추측에도 일리가 있었다.‘만약 한선우의 죽음이 사고가 아니라면?한선우는 유진 씨의 회사에서 날 보러 오려고 했었어.마지막에 대체 왜 날 보러 오려고 했을까?왜 사고가 난 뒤 죽어라 탈출을 하거나 구조 요청을 보낸 게 아니라 나에게 경고의 문자를 주려고 했을까? 정말 그렇다면 그 톡은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미처 다 써서 보내기도 전에 화재가 일어나서 그렇지.죽어라 하고 휴대 전화를 집어 던지기 전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보내려고 한 톡이었어.마지막에 다 치지 못한 문자는 정말 ‘외삼촌’이라는 글자였을까?한선우는 유진 씨 밑에서 일하고 있었으니 유진 씨나 그 패밀리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었을 수도 있지. 그런데 최후의 순간에 나에게 뭔가를 말해주려고 했는데…. 사고가 났단 말이지.어쩌면 사고일 수도 있고 어쩌면 입막음이었을 수도 있어.사고라면 굉장한 우연이고, 입막음이었다면… 너무 무섭잖아.어쨌든 한선우의 어머니도 양씨 이니, 반은 양씨 집안의 핏줄이란 말이야.’여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스스로 진정해야 한다고 되뇌었다.한선우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 사건의 진상을 찾아야 한다. 어쨌든 한선우의 죽음이 자신과 관계가 없을 수는 없으니까.다시 양유진의 별장으로 돌아온 여름은 그곳이 너무나 음산해서 묘지처럼 느껴졌다.저도 모르게 하준의 말을 떠올리게 되었다.‘내가 정말 유진 씨를 잘 아는 걸까? 최하준의 ㅇ머니와 추동현은 대학 때부터 알았지만 30년이 지
“경찰 말로는 사고가 나고 나서 끼어서 도저히 탈출할 수 없었을 거라고 해요.”양유진이 한숨을 내쉬었다.“이미 간 사람을 되돌릴 수도 없으니 너무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아요. 산 사람은 살아야죠. 아 참, 선우가 세상을 떠나던 날 누나가 흉기를 들고 여름 씨를 찾아갔었다던데 나중에 최하준이….”“아, 네. 저도 최하준이 어떻게 왔는지는 모르겠네요.”여름이 설명했다.“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그렇게 쪼잔한 녀석은 아닙니다. 그때 최하준 씨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들었어요. 누나도 여름 씨도 내 가족이니 무슨 일이 생겼더라면 난 너무나 마음이 아팠을 거예요.”양유진이 다가와서 여름의 손을 잡았다. 미간에 다정한 빛이 가득했다.예전 같았으면 여름은 죄책감을 느꼈겠지만 지금은 심장이 싸늘하게 식었다.‘이게 진짜 유진 씨의 모습일까? 아니면 저 다정한 가면 뒤에 내가 모르는 모습이 감추어져 있는 건 아닐까?’“다 지나간 일인데요. 유진 씨도 피곤하겠어요. 좀 쉬세요.”그러더니 여름은 위층으로 올라갔다.양유진이 갑자기 여름을 불러 세웠다.“아 참. 내일모레 시간 있나요? 맹 의원의 딸 생일 파티라는데 사모님께서 당신과 함께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맹 의원님 지위도 있고, 부부 동반 모임이라 거절하기 힘들더라고요.”“네. 같이 가요.”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아마도 그런 곳에 가면 양유진의 됨됨이를 더욱 잘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다음 날.여름은 여울이에게서 전화를 받았다.“엄마, 여울이하고 하늘이는 다 잊어버렸어?”“미안해. 엄마가 요즘 일이 좀 많았어.”여름은 너무 미안했다. 한동안 한선우 일로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것이다.물론 지금은 하준이 돌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더 그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여울이가 한숨을 쉬었다.“장난이야. 엄마 어릴 때 친구가 하늘나라에 가서 마음이 아프다고 아빠가 얘기해줬어. 괜찮아.”“우리 아가가 엄마를 이해해 줘서 엄마가 고마워.”여름이 웃었다.“하지만
“엄마….”여울이 먼저 여름을 발견하고 신나게 뛰어와 꼭 안았다.“엄마! 이거 봐요. 할머니가 사준 자동차예요. 나랑 하늘이랑 경주하고 있었어요.”“잘 노는구나”여름이 부드럽게 여울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하늘을 바라보았다.여울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하늘은 요즘 서경주의 집에서 자기도 하고, 하준의 집에서 자기도 했다.“하늘아, 아빠 집에서 지내는 거 어때?”여름은 전혀 피하는 기색 없이 하준의 면전에서 물었다.하준도 긴장된 얼굴로 아들을 살폈다. 요 며칠 하준은 온 힘을 다해 아드님을 모시느라고 노심초사했다.“…뭐 그래요.”하늘이가 고개를 들고 여름을 바라보며 대답했다.여름은 살짝 놀랐다. 하늘은 까다로운 성격이라 하늘이가 그냥 그렇다고 한다는 것은 하준의 식구들이 꽤나 잘해주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잘 됐구나.”여름은 한시름 놓았다. 이제 뒷일은 걱정할 것 없으니 여름은 한선우의 사인 조사에 전력을 다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제 그만 놀고 갈비 먹으러 가자. 얼른 먹어야 수영하지.”하준이 다가와서 말했다.“좋아, 좋아. 수영하러 가는구나.”여울은 너무나 기뻐했다.여름은 당황했다.“애들 어린데 수영은 좀 그렇지 않아? 수영장 물이 깨끗하지 않아서 병 걸리기도 쉽고.”여름이 말을 듣고 아이들이 실망한 얼굴이 되었다. 하늘도 인상을 살짝 쓰는 것이 기분이 안 좋은 듯했다.“개인 수영장이라 다른 사람들은 안 오는 곳이야.”하준이 설명했다.“내가 관리인에게 깨끗한 물로 넣어달라고 했어. 우리 네 식구 말고는 아무도 없을 거야.”“……”여름은 순간적으로 다른 핑계를 찾지 못했다.여름은 짜증스럽게 돌아섰다. 하준은 아이들에게 윙크를 해 보이며 입꼬리를 한껏 올렸다.어쨌거나 ‘우리 네 식구’라는 말에 대해 여름이 걸고넘어지지 않은 것이다.여울은 몰래 큭큭 웃었다. 하늘의 눈동자에도 웃음기가 도는 것이 역시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넷은 갈비를 실컷 먹었다.주방장이 양념을 꽤 잘 재웠
분명 촌스럽기 그지없는 래시가드를 사주었는데 여름은 머리를 높이 틀어 올려 이목구비를 산뜻하게 드러냈다. 그 아래로 굴곡진 몸매는 래시가드로 가리기에는 도저히 무리였다.애를 둘이나 낳았는데도 여전히 아름다웠다.여름은 시간이 갈수록 잘 익어가는 와인처럼 점점 더 매혹적인 여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왜 그렇게 넋을 놓고 엄마를 쳐다보는데요? 우리 수영하러 가요.”여울이 갑자기 입을 비죽거렸다.눈치 없는 어린애의 한마디에 둘은 곤란해졌다.여름은 곧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여름은 저도 모르게 하준을 노려 보고는 여울을 데리고 수영장으로 갔다.하늘도 따라갔다.하준은 헛기침을 하더니 하늘을 불렀다.“하늘이는 오늘 내가 자유형을 가르쳐 줄게.”하늘은 수영을 할 줄 알아서 하준이 데리고 조금 더 깊은 풀로 이동했다. 여울은 수영을 할 줄 모르므로 여름은 감히 모험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얕은 물에서 놀았다.그러나 여울은 조금 놀더니 하늘과 하준이 신나게 수영하는 것을 보고는 징징거리기 시작했다.“안 돼요. 여울이는 수영을 못하니까 그쪽에 가면 안 돼.”여름이 거절했다.“갈래, 나도 저기서 놀 거야. 튜브 끼고 놀면 되잖아.”여울은 계속 떼를 썼다.여름은 골치가 아팠다. 이때 하준이 하늘이를 데리고 왔다.“여름아, 그럼 하늘이랑 물총놀이 할래?”“좋아! 물총놀이 좋아!”하준은 여름 곁으로 왔다. 여름의 몸에 온통 물방울이 튀어서 목에서부터 물방울이 주루륵 흘러내리고 있었다.“어딜 봐?”여름이 하준의 시선을 느끼고 얼굴이 화끈해져서 노려보고는 얼른 가리려고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 수영복은 애초에 뭐가 드러나 보이지 않는 디자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뭐가 보고 싶었으면 내가 애진작에 비키니를 사줬겠지.”하준이 얼굴의 물을 닦으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아들이 있어서 참은 거야. 당신 비키니 입은 걸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었거든.”“……”‘뭐야, 아들까지 경계하는 거야?’여름은 완전히 어이가 없어 더는 하준을 상대
여름은 놀다가 늘어진 여울을 안고 올라갔다. 여울이 몸을 닦아 주고 커다란 수건으로 여울이를 감싸주었다.돌아보다가 하준의 깊은 눈동자와 마주쳤다.“자, 눈 감아봐.”하준은 고개를 숙여 여름의 목과 몸을 닦아주었다. 너무 친밀한 동작에 여름은 부자연스럽게 옆으로 슬쩍 피했다.“닦아줄 필요 없어. 좀 있다가 씻을 거야.”“그래. 수건 덮고 가. 밤이라 추우니까 감기 걸리지 않게.”하준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울을 안고 가는 여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다가 생각에 잠긴 듯한 하늘이와 눈을 마주쳤다.“엄마랑 다시 잘 지내고 싶어요?”하늘이가 비죽거렸다.“포기하세요. 할 줄 아는 게 많다는 건 알겠지만 우리 엄마는 유진이 아저씨랑 결혼했어요. 응원할 수 없어요.”“하늘아, 아빠가 뭐 하나 가르쳐 줄까?”하준이 정색했다.“엄마가 나한테 엄청 짜증 난다는 표정 짓는 거 봤니?”“충분히 티 나지 않나요?”“아니지. 내 눈에는 다시 아빠한테 설레는 모순된 마음을 감추려고 노력하는 엄마란다.”하준이 하늘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어른 문제를 이해하기에는 어렵겠지. 네가 사랑하는 여자애가 생겼을 때는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게다. 아직은 사랑을 모를 나이지.”“……”주먹으로 베개를 치는 느낌이었다. 아직 어린애에게 사랑을 논하다니….“그리고, 이건 잘 들어두렴.”하준이 진지하게 하늘이를 바라보았다.“가끔은 좋은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해. 어른들 세계는 복잡해서 위선적인 사람을 쉽게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거든.”“무슨 뜻이에요?”하늘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유진이 아저씨가 위선적이라고요?”하준은 부인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다.“나는 그냥 나쁜 어른은 얼굴이나 하는 행동만으로는 알아보기 힘들다고 말하는 거야. 네가 잘 판단했으면 좋겠구나. 엄마는 상장회사 대표야. 네 외할아버지도 어마어마한 부자시고. 앞으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음흉하게 너에게 다가와서 너에게서 뭔가를 얻어내려고 할 거야. 네가 아무리 똑똑해
“내일은 약속 있어.”여름은 하준이 하려는 말을 예상하고 미리 말을 끊었다.“양유진이랑?”하준의 얼굴에 크게 실망한 기색이 비쳤다.여름은 이상하다는 눈으로 하준을 흘긋 보았다.“맹지연 생일 파티에 가자고 하던데? 왜? 맹지연이 파티에 당신은 안 불렀어?”“난 그 사람이랑 별로 친하지도 않다고.”하준이 바로 선을 그었다.여름은 상황을 보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다음 날, 하준이 막 회사에 도착했는데 누군가가 불렀다.“드디어 잡았다!”맹지연이 화려하게 차려입고 하준의 눈앞에 나타났다. 한창나이의 맹지연은 꽃처럼 아름다웠다.하준은 여름이 맹지연의 생일 파티에 초대되었다는 말을 떠올렸다. 눈썹이 꿈틀하더니 긴 다리를 멈추었다.“하준 씨, 내가 몇 번을 찾아왔는지 알아요? 일부러 날 피한 거 아녜요? 전화도 안 받고.”그렇게 말하며 맹지연은 아주 익숙하게 하준의 팔에 손을 걸었다.“자중하시죠.”하준이 얼른 피했다.“당신이 마음에 드는데 왜 자중해야 하는데요?”맹자연이 애교스럽게 입을 비죽 내밀었다.“게다가 오늘은 내 생일인데 좀 맞춰주면 덧나나?”하준이 담담하게 맹자연을 바라보았다.“음.”“음~이 뭐예요? 너무 쌀쌀맞아. 아, 몰라. 오늘은 꼭 내 생일 파티에 와야 해요.”맹지연이 가방에서 초대장을 꺼내 하준의 품에 찔러 넣었다.“안 오면 우리 아빠한테 손 봐주라고 할 거예요.”하준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맹지연이 말하는 ‘손 봐주다’가 무슨 말인지 하준이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지금은 FTT가 긴박한 상황인데 어떤 일이라도 처리하다가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알았죠? 기다릴게요.”맹지연이 하준에게 손 키스를 날리더니 돌아서서 가 버렸다.하준의 눈에 혐오감이 스쳤다. 그러나 손에 든 초대장을 보더니 씩 웃었다.오늘 밤 누구누구가 자신을 보고 어떤 표정이 될지 궁금했다.******밤. 여름은 얌전한 검은 드레스를 입고 양유진과 함께 맹 의원 집으로 향했다.오늘 밤은 맹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