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순간 양유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아직 테이블에 차려진 도시락을 숨기지도 못했다. 그나마 꽃다발은 하준이 들고 간 상황이었다.“식사 중이었군요.”도시락을 보더니 양유진의 눈에 어두운 빛이 스쳤다.“최하준이 들고 왔던가요?”여름은 그렇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렇다면 왜 하준이 보낸 도시락을 받아먹었는지 해명할 말도 마땅치 않았다.“아뇨. 식당에서 올려보낸 거예요.”숨 막히는 2초가 흐르고 여름은 바로 화제를 바꾸었다.“최하준이 왔던 건 어떻게 알았어요?”“최하준이 회사에 와서 또 질척거릴까 봐 1층에서 직원들에게 혹시 최하준이 오면 내게 말해달라고 부탁해 놓았었거든요.”웃으며 말하던 양유진이 물었다.“갔나 보죠?”“네. 못 올라오게 했거든요.”그렇게 말하고 여름은 완전히 찔려서 어쩔 줄 몰랐다.“잘됐네요.”양유진의 눈이 반짝하더니 갑자기 웃었다.“사무실 향기가 좋네요.”“방금 향수를 뿌려서 그런가 봐요.”여름은 하준이 들고 왔던 꽃에서 나는 향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일단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으니 계속 꼬리를 물고 해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저기, 식사했어요? 식당으로 내려갈까요?”안에 숨어 있는 시한폭탄 최하준을 생각하니 더는 사무실에 있을 수 없었다.“…그러죠.”양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도시락 가지고 내려갈까요?”“됐어요. 유진 씨가 올 줄 알았으면 올려보내라고 하지 말 걸 그랬어요.”여름은 어색하게 웃고는 얼른 일어서 같이 내려가려고 했다.“잠깐만요. 화장실 좀 갔다올게요.”양유진이 갑자기 휴게실로 걸어갔다.여름은 너무 놀라서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양유진이 어찌나 빨리 움직이는지 적당한 말을 둘러 대 막기도 전에 문이 열려버렸다.그런데 휴게실에는 아무도 없었다.하준과 꽃도 보이지 않았다.안에 사람이 숨을 만한 공간은 옷장밖에 없었다.‘최하준이 옷장 안으로 숨었나?’여름은 튀어나올 듯 뛰던 심장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 오버한 것인지 모르지만 최하준이 여
“그건… 좀 생각해 볼게요.”여름은 혼란스러웠다. 사실 양유진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하늘이를 대외적으로 자기 아들이라고 공개하면 양유진도 명실상부한 아버지의 역할을 줄 수 있다. 그냥 두었다가 최하준이 하늘이가 자기 아들인 것을 알게 되면 그 질척거리는 인간을 평생 떼어낼 수 없을 것이다.“생각하고 말고 할 게 뭐 있어요?”양유진은 실망스러운 듯했다.“하늘이도 생각이 빤한 아이에요. 말로 안 해도 다른 아이들처럼 엄마랑 자유롭게 돌아다니지 못하는 게 괴로울 거예요. 하지만 여름 씨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으니 차마 말을 못 하는 거예요.”여름은 숟가락을 꽉 쥐었다.하늘이가 어떤 아이인지는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늘이는 너무 철이 들어서 마음이 아플 정도다.“혹시…나랑 계속 함께할 생각이 없는 거라면 모를까….”양유진이 돌연 그런 소리를 했다.“……”여름은 심장이 철렁했다.‘아직 결심을 굳히지 못한 건가? 이미 유진 씨 집에 들어가서 살고 있는데도?’양유진과 관계를 가질 준비까지 되어 있는데도 유진은 각방을 고집하고 있고, 그동안 하준은 툭하면 나타나서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저도 하늘이가 얼마나 성숙한 아이인지 알아요. 그건 일단 하늘이 의견을 물어볼게요.”여름이 적당히 핑계를 댔다.“그래요.”유진은 더 할 말이 없었다.“오후에는 같이 쇼핑이나 할까요? 뭐 사고 싶은 거 없어요? 결혼한 지 한참 됐는데도 여름 씨에게 뭘 사준 적이 없네요.”“아녜요. 오후에는 중요한 미팅이 있어요.”마침내 거짓말이 아닌 사실을 말할 수 있었다.“그래요. 나도 회사에 가서 밀린 일이나 해야겠군요. 아내가 이렇게 워커홀릭이라니 어쩔 수 없군요.”양유진이 던진 농담에 여름은 더욱 죄책감이 느껴졌다.사무실로 돌아와 자기 휴게실에서 잠든 하준을 보다 죄책감은 극에 달했다.“최하준, 누가 여기서 자래? 나가.”여름은 화가 나서 하준을 잡아당겼지만 그 큰 몸은 무슨 말뚝이라도 박아 놓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하준이 멍하니 눈을 뜨더
第1130章하준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더니 바지도 벗기 시작했다.“샤워하려고.”여름은 턱을 떨어트리고 서 있었다. 하준의 바지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속옷을 입고 있기는 했지만 그 모습을 보고 나가 여름의 얼굴은 더 새빨갛게 달아올랐다.“뭘 그렇게 부끄러워해.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하준은 장난스럽게 눈썹을 찡긋했다.“아니, 안 서는 남자는 처음 봐서 그렇지.”여름이 억지로 한 마디 뱉었다.가장 건드려서는 안 되는 약점이었지만 이미 있는 대로 충격을 받아서 하준은 오히려 무덤덤했다.“안 서면 뭐 어때? 그것 말고도 난 당신을 기쁘게 해줄 방법을 수만 가지는 알고 있어.”“…변태!”여름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하준을 노려보고 소리 질렀다.“옷 입고 꺼져! 누가 여기서 샤워해도 된대!”“어제 못 씻었더니 너무 찌뿌둥하다.”마지막 옷을 벗으려고 하준이 허리를 숙이자 여름은 더는 볼 수 없어서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의자에 앉아서 여름은 한참 동안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다.오 사장과 홍보 팀의 류 팀장이 와서 서울의 개발 프로젝트에 대한 일을 논의했다.휴게실에 있는 인간에게 신경을 쓰느라 여름은 미팅 내용에 집중할 수 없었다. 대충 얼버무리고 둘을 쫓아 보내려고 했다.그런데 어쩐 일인지 오 사장과 류 팀장은 일을 확실히 마무리 짓지 않으면 나가지 않을 기세였다.10분 뒤 갑자기 휴게실 문이 벌컥 열렸다.“자기야, 나 옷 좀 입혀줘.”하준이 허리에 분홍색 목욕 수건을 걸치고 맨발로 걸어나왔다. 머리는 아직도 축축하게 젖어서 물방울이 대흉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진하게 풍기는 하준의 시원한 민트향에 자리에 있던 남자 둘까지도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여름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욕이 천만 개 뒤섞였다. 얼굴은 홍당무처럼 빨갛게 되었다. 땅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었다.“오해하지 마세요. 지금….”“이해합니다. 이해해요.”오 사장이 얼른 말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늘 일은 절대로 한 마디도
여름은 이마를 짚었다.“손이 있는데 왜 혼자 못 입어? 일부러 이러지?”“아니야. 여기 팔 부은 거 안 보여?”하준이 퉁퉁 부은 오른쪽 팔을 흔들어 보였다.“팔을 굽힐 수가 없다니까.”여름은 그 팔을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아주 고생하시네. 그렇게 다쳤는데도 여기까지 와서 여우짓 하느라고.”“도와주기 싫다면 그냥 이렇게 하고 나가는 수밖에 없지.”하준이 한숨을 폭 쉬었다.여름은 완전히 노출된 하준의 몸을 보고는 머리가 아팠다. 이러고 나갔다가는 내일이면 여름과 하준에 대한 스캔들이 온 나라를 달굴 판이었다.결국 포기한 듯 휴게실로 들어갔다.“일단 들어와.”하준은 여름을 따라 들어가더니 찰칵하고 문을 잠갔다.여름은 잠긴 문을 한 번 보더니 수건만 한 장 걸친 하준을 노려보며 꽥 소리를 질렀다.“최! 하! 준!”“안 잠갔다가 누가 보고 우릴 오해하면 어떡해?”하준이 느긋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나 입가에는 미소가 걸린 것이 사뭇 눈꼴 시었다.“아 참, 바지도 좀 입혀 줄래? 고마워.”“…못 입혀줘.”여름은 눈 둘 곳이 없어서 짜증이 올라왔다.“자신 있으면 그러고 나가보시던지.”“그래. 그럼 갈게.”그렇게 말하면서 하준은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는 광경을 보고 여름은 후다닥 달려가서 문을 확 닫고 잠갔다.하준은 여름을 보며 은근히 웃었다.“미안해. 손 좀 빌려줘.”“아주 뻔뻔하기가 짝이 없어.”여름은 하준의 뇌 구조가 어떻게 된 것인 것 궁금했다.“아니, 나도 염치는 있거든. 하지만 정말 팔이 너무 아프단 말이야.”하준은 순진한 척하며 눈을 깜빡였다.여름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옷을 안 입혀줄 수도 없어서 고개를 숙이고 억지로 입혀주었다. 다정한 손길은 아니었지만 하준의 입가에는 내내 흐뭇한 미소가 걸려있었다.특히나 부끄러움에 발그레해진 여름의 얼굴은 한껏 섹시해 보이기까지 했다.‘한때는 내 아내였는데 어쩌다가 이런 사람을 아껴주지 못하고 놓친 걸까.’여름이 셔츠를 입혀주려고 일어나자 하준
그렇게 말하는 여름의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여름이 울자 하준은 당황했다. 마음도 너무 아팠다.“울지 마. 난 당신을 괴롭힌 게 아니야. 그냥 입을 맞추고 싶었을 뿐이야. 키스가 싫으면 안 하면 되지.”뒤로 가면서 하준은 억울하다는 듯 세상 불쌍한 얼굴을 해 보였다.여름은 그 틈을 타서 하준을 확 밀쳐 멀리 떨어졌다. 다시는 가까이 다가갈 생각이 들지 않았다.하준은 앉아서 왼손으로 힘겹게 단추를 잠갔다.여름은 다시는 하준에게 희롱을 당하고 싶지 않아 아예 나가 버렸다.사무실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보고서를 읽었다. 그러나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입가에 아직도 남아있는 하준의 온기가 여름을 더욱 무겁게 누르는 족쇄가 되었다. 그러나 하준의 입맞춤에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었다.양유진이 신체적으로 가까워지려고 할 때면 그렇게나 어색할 수가 없는데….생각할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오래지 않아서 하준이 나왔다.여름은 일에 집중하는 척, 하준은 눈에도 안 들어온다는 듯한 모양을 해 보였다.지금 하준이 입만 뻥긋했다가는 그대로 하준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버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어젯밤에 보았던 피임약을 하준이 다시 내밀자 여름은 완전히 심장이 터질 듯 화가 났다.“매일 와서 이딴 걸 먹일 셈이야? 어제도 먹었잖아? 이런 건 자꾸 먹으면 몸에 해롭다고!”하준의 팔이 굳어지더니 한참 만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오늘도 양유진이랑 잘지 모르니까….”여름은 노트북을 탁 닫았다. 한참을 아무 말이 없이 가만히 있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지금 내가 유진 씨 아이를 가질까 봐 이러는 거지? 그러면 이런 거 자꾸 먹으라고 할 필요 없어. 애진작에 유진 씨 애는 낳았거든.”하준이 부르르 떨더니 웃었다.“거짓말하지 마.”“거짓말 아니거든.”여름이 벌떡 일어서더니 결연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나랑 유진 씨 사이에는 이미 아이가 있어. 내가 나가 살 때 종종 보러 왔었거든. 둘이 한잔하다가 관
여름은 일부러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어떻게 알았어?”하준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심장이 찢어지는 듯했다.여름이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는 사실보다도 양유진과의 사이에 그렇게 큰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훨씬 충격이었다.“아니야. 거짓말이라고 해. 당신은 지금 내게 거짓말하고 있어.”하준은 미친 듯 달려들어 여름의 어깨를 꽉 잡고 힘껏 흔들었다. 고통에 두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당신이 낳았다면 내 아이겠지, 아니야? 당신은 3년 전에 죽음까지고 꾸며냈던 사람이야.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도 원래 유산되지 않았던 거지? 그 아이는 내 아이잖아?”하준의 고함소리에 여름은 심장이 덜덜 떨렸다.눈물을 철철 흘리는 하준의 모습을 보니 누군가가 심장을 꽉 움켜쥔 듯 아팠다.한참 만에야 여름은 어렵사리 입을 열어 비웃음을 흘렸다.“잊어버렸나 본데. 우리 아이는 당신 손에 사라졌잖아. 그날 얼마나 출혈이 있었는지 기억 안 나?”하준은 멍해졌다.팔 전체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몸은 기둥처럼 꼼짝 않았다.‘그래. 내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내 아이는 내 손에 사라져갔지.놓쳐 버렸어. 아껴주지 않아서 여름이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거야.’두 줄기 눈물이 다시 하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마침내 하준은 ‘심장이 산산조각 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절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어렵사리 찾아낸 눈곱만한 희망이 무참하게 짓밟혀 버렸다.하준의 눈에서 서서히 빛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여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이거야, 최하준. 이제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다시는 달라붙지 마.’여름은 두려웠다. 이렇게 하준과 계속 얽히다가는 완전히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는 신세가 될 것만 같았다.이제 여름은 더 이상 양유진을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하준을 상처 줄 수밖에 없다.******마침내 하준은 돌아갔다.비틀비틀 여름의 사무실에서 걸어 나가는 하준은 인사도 할 정신이 없었다.여름은 창가에 서
전화기 건너편의 상혁은 하준의 말을 듣고 폭탄이라도 터진 듯 깜짝 놀랐다.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상혁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그게…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비탄에 잠겨 있던 하준은 흠칫했다.“……”‘내가 뭘 들은 거지? 이젠 환청이 들리나?지금 김 실장 말은, 내가 이해하고 있는 그 뜻이 맞는 거야?’무수한 풍랑을 겪어낸 하준이지만 지금은 너무 얼떨떨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하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건너편의 상혁은 더욱 당황했다.“죄송합니다. 저도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닙니다.”“그러니까… 하늘이가 내 아들이라는 거지?”갑자기 재빨리 머리가 돌아간 하준이 얼른 미끼를 던졌다.상혁은 대체 하준이 어쩌다가 하늘이의 정체까지 밝혀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더욱 심장이 쪼그라 붙었다. 연신 사과만 했다.“정말 죄송합니다. 그건 강 대표님께 물어보시죠. 저는 그 일에 대해서 절대로 입도 뻥긋하지 않겠다고 강 대표님께 약속을 드렸거든요.”상혁이 하는 말을 듣고 하준은 이미 80%는 확신하게 되었다. 하준은 상혁을 잘 알았다. 만약 하늘이 하준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상혁은 듣자마자 바로 부인했을 것이다.유치원에 있는 여름을 닮은 그 아이는 자기 아들이 확실해 보였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하준은 그 아이가 양유진과 강여름의 아이인 줄 알았다.그래서 완전히 멘탈이 붕괴된 나머지 죽어버릴까 싶기까지 했던 것이다.그런데 그게 다 여름의 거짓말이었다니….‘잠깐, 그때 여름이는 쌍둥이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러면 하나가 더 있어야 맞잖아?’머리가 번쩍했다. 갑자기 여울이가 떠올랐다.‘엄마가 없어 가엽다며 여름이가 특별히 잘 돌보아 주어서 여울이가 그렇게 따르는 줄 알았는데….여름이는 어땠지?여울이에게 너무 지나치게 잘해주지 않았나?’전에는 자기 아이가 있다는 생각을 못 해서 전혀 예상치 못했다.‘그렇지만 두 아이가 같은 유치원을 다니는 데다 사이가 지나치게 좋았단 말이야. 게다가 강여름의 가짜 죽음에도 깊이 관여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양하는
여울이가 양하의 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질투가 났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여울이가 자기 딸이라니…..어쩐지 아이를 딱히 좋아하지 않았는데 여울이가 그렇게나 귀엽더라니.“말해 보게. 당시의 진상을 알아야겠어.”하준이 흥분해서 입을 열었다.상혁은 조금 놀랐다.“진상을 모르신다면서 어떻게 아이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그건 자네가 알 필요 없고.”하준의 떨리는 목소리에서 이미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제발 말해줘.”늘 오만하던 하준이 처음으로 이렇게 간절히 부탁하자 상혁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사실 가짜 유산은 강 대표님께서 먼저 제안하셨습니다. 당시 회장님께서 아이들이 태어나면 백지안 님에게 키우게 하겠다고 한사코 고집을 부리셨으니까요. 그때 저도 백지안 님이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다는 생각이 안 들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이 제2, 제3의 유년시절 회장님이 됐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강 대표님의 바람을 들어드리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혼자서는 아무래도 버거워서 부회장님 도움을 받았습니다.상혁은 한숨을 쉬었다.“사실 부회장님께 감사하셔야 합니다. 부회장님께서강 대표님을 해외로 내보내고 최고의 의사를 붙여서 아이들을 지켜주셨던 겁니다. 모르셨겠지만 당시 강 대표님은 정신과 약을 많이 드셔서 아이들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출국 후 몇 달이나 입원 치료를 받으셨어요. 아이들도 조산이 되어서 인큐베이터에 2달이나 있다가 겨우 나왔을 정도입니다.그 말을 들으니 너무 고통스러워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이제 보니 여름과 아이들이 받은 고통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여름이 자신에게 그렇게 큰 원한을 품은 것도 당연하다 싶었다.여지껏 그렇게 양하가 마음에 안 들어 못된 소리도 많이 했는데 이제 보니 자신은 양하보다도 못한 인간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상혁이 말을 이었다.“이제야 말씀드리지만, 그때 회장님 태도에 정말 분노했었습니다. 회장님이 백지안 님과 사귀는 거야 이해한다고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