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민이 나를 건드리지 않는 한, 나도 문제를 일으키진 않을게. 하지만 서지민이 날 괴롭힌다면...”서율은 도혁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때는 참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너도 서지민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나를 이용하려는 생각은 하지 마.” “변도혁, 넌 서지민에게 끝없이 관대해질 수 있지만 그건 네 일이잖아. 난 서지민에게 아무런 빚도 지지 않았어. 나에게도 똑같은 관용을 요구하지 마.” 도혁은 낮고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어.” 서율은 두 사람 사이에 일종의 협의가 이루어졌음을 느꼈다. 그녀는 자리에 일어나며 말했다. “난 먼저 올라갈게. 회사 일 있으면 마저 하러 가.” 그리고 도혁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방으로 올라갔다. 방에 들어서자, 서율은 문득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이 상황에서 연극을 하려면 도혁과 방을 따로 쓸 수는 없었다. 결국, 둘은 같은 방에서 자야 한다는 뜻이었다. 더 큰 문제는 방에 침대가 하나뿐이라는 것. 이 사실을 깨닫자 서율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그녀와 도혁은 이미 부부로서 모든 것을 겪었고,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 자체가 새삼스러울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를 잃은 후, 서율은 도혁에게 설명할 수 없는 반감이 생겼다. 그가 자신에게 손을 대는 것조차 견딜 수 없게 됐다. 서율은 잠시 고민하다가 새 이불을 꺼내 소파에 누웠다. 요즘은 일로 바쁘고, 지민의 끊임없는 방해를 처리하느라 몸이 피곤했다. 소파에 잠시 눕기만 했는데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몸이 허공에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서율은 눈을 천천히 떴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림처럼 잘생긴 얼굴과 차가운 듯 선이 뚜렷한 도혁의 얼굴이었다. 서율은 그제야 자신이 도혁에게 안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변도혁,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녀는 온몸이 긴장한 채로 도혁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도혁은 담담하게 말했다. “침대에서 자.” 서율
서율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도혁은 산처럼 단단해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서율은 그가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잠시 잊고 있었다. 지난번 겨우 위기를 모면했지만, 이번엔 그와 단둘이 있는 상황이었다. 마치 양이 호랑이 굴에 들어온 것과 같았다. 도혁의 키스는 강압적이고 거부할 수 없는 힘을 지녔다. 서율은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무서운 힘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부림은 점차 약해졌다. 도혁이 더 나아가려던 순간,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면서 그의 동작이 멈췄다. 천천히 눈을 뜨자, 서율이 눈물이 가득 흘린 채 누워 있었다. 서율은 지금껏 아무리 힘든 상황에 처해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번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치 차가운 물이 도혁의 머리 위로 쏟아진 듯, 도혁의 뜨거운 욕망이 한순간에 식어버렸다. 그는 조용히 서율을 내려다보며 쉰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싫은 거야?” 서율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우린 3개월 후에 이혼할 거야. 그러니 나를 건드릴 수 없어.” 도혁의 검은 눈동자가 어둡게 빛났다. “우리가 이혼하기 전까지는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해.” 서율은 침대 시트를 단단히 움켜쥐고 눈물을 흘린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결혼한 지 3년이 지났지만, 넌 한 번도 남편으로서의 책임을 다한 적이 없어. 그런데 어떻게 나한테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길 요구할 수 있지?” 도혁은 평소에 서율을 무시하고 집에 돌아오지 않으며, 늘 다른 여자에게 불려 나가고, 서율이 괴롭힘을 당할 때도 방관했다. 서율의 마음은 상처 입을 때마다 조금씩 식어갔다. 도혁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에 서율의 모습이 비쳤다. 마치 끝없는 블랙홀 같아서 오래 쳐다보고 있으면 영혼까지 빨려 들어갈 듯했다. 도혁은 천천히 손을 뻗었고, 서율은 깜짝 놀라 몸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도혁은 그녀를 다치게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럽게
예전의 서율은 쉽게 위로받고, 도혁의 작은 호의에도 자신을 다 내주려 했었다. 도혁이 잠깐만 다정한 태도를 보여주면, 그녀는 마치 몸과 마음을 도혁에게 바치려고 했다.도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나와 지민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야.” 서율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나와 이혼하고 나면 서지민과 결혼할 생각 당연히 했을 거 아니야?” 도혁의 얇은 입술이 약간 움직였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서율은 모든 것을 이해한 듯했다. 서율은 도혁을 가볍게 밀어내며 말했다. “변도혁, 불편하니 일단 내 몸에서 내려가 줄래?” 도혁은 잠시 그녀를 쳐다보다가 마침내 그녀를 풀어줬다. 서율은 재빨리 일어나 흐트러진 옷을 정리한 후 방을 나가려 했다. 그러나 도혁은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물었다. “어디 가려고?” “지금 이런 상태로 같이 자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서율의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난 객실에서 잘게.” 도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리가 따로 자면 어머니가 눈치챌 거야.” 서율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눈치채면 눈치채는 거지. 어차피 엄마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다만, 요즘 엄마가 몸이 안 좋아서 괜히 걱정 끼치고 싶지 않을 뿐이야.” 도혁은 그녀의 손목을 더욱 세게 잡으며 말했다.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건드리지 않을게.” 서율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변도혁, 난 네 말은 절대 믿지 않아.” 서율은 도혁을 믿지 않았다. 도혁의 입술은 얇게 일직선으로 굳어졌고, 표정에는 약간의 불쾌함이 스쳤다.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게 약속한 것은 절대 어기지 않아.” 서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도혁은 자신에게 약속한 것은 지키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에게 약속한 것이 거의 없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잠시의 침묵 끝에, 서율은 마침내 타협했다. “좋아.
도혁이가 술에 취했을 때면 서율은 그를 부축해 방으로 데려가고, 해장국을 끓여주곤 했다. 도혁이 집에서 밤을 보낼 때면, 서율은 항상 일찍 일어나 그를 위해 정성스럽게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그러나 도혁이 집에서 밤을 보낸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지민이 돌아온 이후로, 그는 거의 집에 머물지 않았다. 도혁은 서율이 정성스럽게 준비한 아침 식사를 고작 한두 번 먹었을 뿐, 그 외에는 바쁘다는 이유로 서둘러 집을 떠나며 아침을 준비한 그녀를 본체만체했다. 도혁은 서율의 기분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기억들이 이제 와서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오르며, 답답하고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도혁을 휘감았다. 도혁은 무의식적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지만, 숨이 트이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답답함이 더해졌다. ... 도혁은 샤워를 마치고 쉬려 했다. 서율은 침대에 누워 도혁이 침구를 깔고 있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의 동작은 아주 깔끔하고 세심했다. 도혁은 꼼꼼하게 이불을 깔았고, 작은 주름 하나 없이 완벽하게 정돈했다. 그가 얼마나 결벽증이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소파가 매우 컸지만 도혁의 체격이 그만큼 컸기에 소파는 왠지 좁아 보였다. 서율은 자신이 누워 있는 넓은 침대와 도혁이 다소 비좁아 보이는 소파를 번갈아 쳐다보았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남편을 배려하는 마음이 불행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잠이나 자자.’침대 옆 스탠드의 불을 끄자 방 안은 어둠에 휩싸였다. 서율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좀처럼 잠에 들지 못했다. 결혼한 지 3년, 그들이 따로 살기 시작한 지는 불과 두 달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도혁과 한 방에 있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예전엔 도혁이 집에 돌아왔을 때, 서율은 그가 전화받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지민에게서 전화가 오기를 바라고 있었다.최근에 너무 많은 일을 벌인 탓인지, 그날 밤 지민에게서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
서율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이 도혁을 그렇게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었다니! 그와 이미 많은 것을 함께 겪었고, 그의 알몸을 본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밤에 있었던 일이었다. 지금은 대낮이고, 이런 상황에서 도혁의 알몸을 보게 되니 충격이 작지 않았다. 묘하게도 설명할 수 없는 당혹감마저 느껴졌다. 서율은 최대한 차분한 척하며 말했다. “미안해, 네가 이미 출근한 줄 알았어. 문을 안 두드리고 들어온 건 실수였어. 바로 나갈게...” 도혁은 이미 평정심을 되찾고, 조용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깊고 검은 눈동자에 당황한 서율의 모습이 비쳤다. 최근 서율의 반항적인 태도와 거침없는 말투가 떠오르자, 지금 이렇게 쩔쩔매는 모습을 보니 도혁은 이상하게도 그녀가 귀엽게 느껴졌다. 어젯밤의 불쾌감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도혁은 머리카락을 닦고 있던 수건을 옆으로 던지고, 서율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서율은 긴장한 듯 숨이 가빠졌다. 눈빛에는 살짝 당혹감이 스쳤다. 서율은 무의식적으로 몇 발자국 물러섰고,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고서야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혁은 그녀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방금 샤워를 마친 탓인지, 도혁의 본래 하얀 피부는 더욱 맑아 보였다. 도혁의 표정은 여전히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차가운 모습이었지만, 검은 눈동자는 엄청 어두웠다. 서율은 어색한 침묵을 깨려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 뭐 필요한 거라도 있어?” 도혁은 그녀를 쳐다본 채로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그 말은 내가 물어야 하는 게 아닌가?” 도혁이 너무 가까이 다가왔기에 두 사람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였다. 서율은 그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긴 속눈썹까지 셀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율의 얼굴은 점점 더 뜨거워졌다. 방 안에는 샤워 후의 은은한 향기가 가득했고, 서율의 머릿속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녀는 생각할 수조
서율은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변도혁!” 도혁의 짙은 눈동자가 서율을 향해 움직였고 곧 담담하게 대답했다. “왜?” 도혁의 완벽한 이목구비는 여전히 흔들림 없이 평온했지만, 미묘하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 순간, 서율은 자신이 그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걸까?’서율은 조금 평정심을 되찾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불쾌함이 피어올랐다. 도혁은 분명히 서율을 놀리며, 그녀가 당황하는 모습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이 남자가 언제부터 이렇게 변한 거지?’서율은 자신이 그에게 휘둘리는 것에 화가 났다. 그녀는 도혁의 손을 뿌리치며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나 먼저 갈게.” 그러나 도혁은 다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서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변도혁,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도혁은 차분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장난치는 거라고 생각한 거야?” 서율은 눈을 살짝 감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니, 내가 문을 안 두드리고 욕실에 들어간 게 잘못이지.” 서율의 이목구비는 분노로 인해 더더욱 생동감이 넘쳤다. 도혁은 그녀를 깊고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장난치는 게 아니라면?” 서율은 시선을 돌려 도혁의 눈을 피했다.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기에 마음이 복잡했다. ‘도대체 뭘 원하는 거지?’도혁의 검은 눈동자는 마치 수많은 별을 담고 있는 듯 깊었다. 도혁은 갑자기 손을 뻗어 서율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서율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물었다. “그럼 무슨 뜻이야?” “정말 알고 싶어?” 도혁의 목소리는 낮고 감미로웠으며, 마치 유혹이라도 하듯 그녀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서율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혁은 그녀의 눈을 쳐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점점 더 가까워졌고, 그의 숨결이 서율을 감싸며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운이 퍼져 나갔다
똑똑. 그때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율아, 엄마가 아침 준비 다 했으니 얼른 내려와서 아침 먹어.” 서율은 문미정의 목소리를 듣고 당황하며 황급히 옷의 단추를 채웠다. 그녀는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도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잡아주려 했다. 그러나 서율은 그의 손길을 피했다. 이 방에선 단 1초도 더 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서율이 답을 하지 않자, 문 밖에 있던 문미정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듯했다. “율아, 일어났니? 빨리 안 일어나면 회사 늦겠어...”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엄마, 방금 일어났어요. 세수하고 금방 내려갈게요.” 서율의 모습을 본 문미정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서율은 옷매무새가 엉망이었고, 입술은 붉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상황을 알아차린 문미정은 얼굴이 빨개지며 서율보다 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너 출근 늦을까 봐 깨우러 왔지 뭐야... 어, 어서 준비해. 엄마는 먼저 내려갈게!” 그렇게 말하고는 도망치듯 떠났다. 서율이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도혁은 이미 옷을 다 입고 평소처럼 평온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도혁은 서율이가 돌아온 것을 보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씻고 와. 난 먼저 내려가 있을게.” 서율은 그와 대화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녀는 급히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도혁은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보더니 방을 나섰다. 그가 떠난 후, 서율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엉망진창인 모습을 확인했다. 붉게 부어오른 입술, 잘못 잠근 셔츠 단추,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문미정이 자신을 보고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서율은 수치심에 눈을 질끈 감았다. 눈만 감으면 도혁과의 아찔한 순간이 떠올랐고, 그 기억이 그녀를 괴롭혔다. 만약 문미정이 문을 두드리지 않았더라면,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
서율은 발걸음을 잠시 멈춘 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서율은 그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표정은 완벽하게 차분함을 유지했다. 도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데려다 줄게.” “괜찮아.” 서율은 자기도 모르게 거절했다. “혼자 가도 돼.” “율아, 도혁이가 너를 데려다주겠다고 하니, 그냥 그렇게 해.” 문미정은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부는 서로 미워할 시간이 없단다.” 문미정은 서율이 도혁에게 서운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두 사람이 다투었다고 오해한 듯했다. 서율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문미정의 기대 어린 눈빛을 보고 차마 더 이상 거절하지 못했다. 집을 나서려는 순간, 도혁이 서율의 손을 잡았다. 서율은 깜짝 놀라며 표정이 굳어졌다. “변도혁, 지금 뭐 하는 거야?” 도혁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렇게 해야 어머니가 우리가 잘 지낸다고 믿으실 거야.” 그 말이 맞긴 했지만, 서율은 방금 일어난 일 때문인지 도혁에게 더 거부감이 들었다. 서율은 그의 손을 몇 번이나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손을 놓지 않았다. 문미정이 뒤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서 서율은 더 이상 무리하게 저항할 수 없었기에 결국 도혁의 손을 잡고 집 밖으로 나왔다. 서율은 도혁과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도혁은 여태껏 한 번도 서율의 손을 잡은 적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손을 잡는 것은 서율에게는 처음이었다. 너무나도 가까운 스킨십이었기에,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문미정은 현관까지 나와 그들이 손을 맞잡고 떠나는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차에 타자마자, 서율은 도혁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차갑게 말했다. “변도혁, 약속을 어겼네.” 도혁은 살짝 긴 속눈썹을 움직이며 서율을 보았다. “뭐?” 도혁이 모르는 척하자 서율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어젯밤에 나랑 약속했잖아. 나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어머니로서 자식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서율은 도혁의 ‘가식’이 정말로 불쾌했지만, 그가 사람을 달래는 데는 재주가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다. 심지어 서율도 문미정을 그토록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으니 말이다.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자, 서율의 얼굴에는 차가운 표정이 드리워졌다. “오늘 밤은 다른 곳에서 자. 내일 아침에 엄마한테 네가 일이 있어 먼저 출근했다고 말씀드릴게.” 도혁은 외투를 벗던 중 고개를 들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뭐라고?” 서율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동안 도와준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우리가 지금처럼 지내는 간 합당하지 않은 것 같아.” “왜 합당하지 않지?” “우리는 곧 이혼할 사이니까...” 서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혁이 차분히 말을 끊었다. “문서율,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라는 사실을 잊은 거야?” 서율은 차갑게 말했다. “곧 끝날 관계야.” “문서율.”도혁의 검은 눈동자는 깊고 차가웠다. 그는 서율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이렇게 서둘러 이혼하려는 이유가 뭐지? 다른 사람이라도 생긴 거야?” 서율은 당황한 듯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혁의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 “고지성, 네가 새로 만날 아니야?” 처음에는 황당하게 들렸지만, 서율은 이내 웃음이 나왔다. “정말 어이가 없네!” 서율은 차갑게 도혁을 쳐다보며 말했다. “변도혁, 네가 더러운 짓을 했다고 해서 나도 그런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너처럼 결혼 중에 불륜을 저지를 만큼 뻔뻔하지 않아.” 도혁은 차가운 눈빛으로 서율의 턱을 쥐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지성과는 언제부터 연락을 주고받았던 거야?” 서율은 그의 손을 떨쳐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너랑 상관없어.” 도혁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도혁은 옆에 있는 안전벨트를 꺼내 그녀에게 채워주었다. 서율은 잠시 얼어붙었다. 곧 도혁의 차갑고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안전벨트 매야지.” 이 광경을 지켜본 문미정은 도혁에게 더욱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율아, 조수석에 타더라도 안전벨트를 매야 한단다. 도혁이가 참 세심하구나.” 문미정이 없었다면, 서율은 아마 비웃었을 것이다. ‘하긴 세심하긴 해. 다른 여자의 물건이 당당하게 조수석에 잡을 정도로.’마치 지민이 그의 아내인 것처럼. 서율은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때 문미정은 도혁에게 슬며시 질문을 던졌다. “도혁아, 예전에 너한테 첫사랑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이 최근에 돌아왔다며?” 문미정의 말에 서율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도혁이가 지민과 함께 어울린다는 건 이미 비밀이 아니었다. 모두 도혁이가 지민에게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문미정이 이 일을 알게 된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반면 도혁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매우 차분하게 인정하며 말했다. “네, 지금 HS그룹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 문미정이 살짝 톤을 올리며 물었다. “그 아가씨가 어쩌다 HS그룹에서 일하게 된 거지?” “지민은 원래 무용을 전공했는데, 저를 구하다 다리를 다쳐 예전처럼 무용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귀국한 뒤, 제가 HS그룹 내의 가벼운 일을 맡겼습니다. 지민이가 제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갚아야 마땅합니다.” 도혁의 말은 매우 합리적이었다. 문미정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율 역시 그의 말에 딱히 흠잡을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문미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도혁아, S시에 네가 그 아가씨와 만난다는 소문이 돌던데... 아직 옛 정을 못 잊은 건 아닌지 걱정돼서 물어보는 거란다...” 도혁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저와 지민은 이미 끝난 관계입니다. 제가 서율과 결혼한 이
서율은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며 의아하게 물었다. “나에 대해 묻고 있었다고?” 도혁은 미묘한 눈빛을 보이며 말했다. “우리가 결혼한 지 3년이 되었지만, 고지성 씨만큼 잘 알지는 못하거든. 그래서 고지성 씨께 당신에 대해 좀 더 배우고 싶었어.” 지성과 서율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친구이니, 그들의 오랜 정은 부부 3년의 세월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도혁의 말을 듣자 문미정은 도혁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 들었고 지성에 대한 미안함이 들었다. 자신의 경쟁자에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공유한다는 것은 지성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문미정은 서둘러 말했다. “시간이 늦었구나. 피곤하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지성은 문미정의 앞에서 무언가 더 보여줄 수 없었기에 미소를 지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차에 타려는 순간, 서율은 문미정과 함께 뒷좌석에 앉으려고 했다. 그때 도혁이 갑자기 조수석 문을 열어 그녀에게 타라고 손짓했다. 서율은 그를 흘깃 쳐다보며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정말 연기 잘하네.’ 결혼한 3년 동안, 도혁은 한 번도 서율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조수석에 앉히지도 않았다. 한 번은 도혁과 함께 지옥순의 생신잔치에 참석할 때, 그녀가 조수석 문을 열고 앉으려 하자, 도혁은 차갑게 말했다. “뒷좌석에 타.” 그 이후로, 서율은 도혁과 함께 외출할 때 조수석에 앉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언제나 뒷좌석에 앉았다. 이제 와서, 서율은 조수석에 앉는 것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벌어진 일로 인해 문미정의 마음은 점차 도혁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아까도 문미정은 서율에게 도혁과 다투지 말라고 계속해서 타일렀다. 문미정이 있는 자리에서 도혁이 그녀에게 문을 열어준 이상, 서율은 그의 체면을 깎지 않기 위해 조수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안전벨트를 매려던 서율의 눈에 문 앞에 붙은 ‘전용 좌석’이라는 스티커가 들어왔다. 순간 멍하니
문미정은 서율을 쳐다보며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도혁을 데리고 온 건 사실 네가 아닌 도혁을 시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야. 네가 어릴 때부터 자존심이 강해서 힘든 일이 있어도 우리한테 잘 말하지 않잖니. 그래서 네가 도혁과의 관계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좋은지 의심스러웠거든.” “지성이는 참 괜찮은 아이야. 그동안 여자친구도 사귀지 않고, 부모님께서 아무리 결혼하라고 재촉해도 따르지 않았대. 그건 아마 아직 네가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일 거야.” “도혁이가 너에게 진심이라면, 지성의 마음을 일찍 정리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서율은 잠시 침묵했다. 서율도 지난번 지성과의 만남에서 그가 여전히 자신에게 미련이 남아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성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서율은 그를 오빠처럼만 여겼다. 그렇지 않았으면 도혁과 결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도혁과 이혼한다고 해도, 지성과는 이어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지성의 마음을 빨리 정리해주는 게 맞는 일이기도 했다. ... 지성은 계산을 마치자마자 뒤에 서 있는 도혁을 발견했다. 지성은 도혁을 보자마자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건 서율과 문미정 앞에서 보여준 따뜻한 모습과는 달랐다. “변도혁 씨, 아주머니와 서율이랑 함께 있지 않고 왜 여기 와 있어요?” 도혁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머니께서 지난번에 고지성 씨가 서율을 대접했다는 얘길 듣고, 이번에는 고지성 씨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며 저더러 계산하라고 하셨어요.” 도혁의 말에 담긴 도발을 느낀 지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변도혁 씨, 아무리 연기가 완벽해도 결국엔 연기일 뿐이죠. 아주머니를 속이는 건 몰라도, 나한테 와서 이런 말 하는 건 좀 가식적이지 않나요?” 지성의 비꼼에도 불구하고, 도혁은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연기라도 고지성 씨는 어머님을 어머님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저는 부를 수
서율은 거짓말이 들통날 상황을 생각하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도혁은 변함없는 표정을 유지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서율은 순간 당황하여 무의식적으로 도혁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오히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을 밀어 넣으며 열 손가락을 깍지 끼듯 맞잡았다. 서율은 깜짝 놀라며 멍하니 몇 초간 움직이지 못했다. 도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메뉴를 주문했다. 서율은 도혁의 손짓에 온 신경이 쏠려 그가 무엇을 주문하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도혁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손을 더 세게 쥐었고 서율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다. 도혁은 자신이 이 상황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걸 아는 듯, 더욱 장난스럽게 그녀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서율은 당장이라도 화를 낼 뻔했지만, 간신히 참고 있었고 얼굴은 이미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성은 서율의 변화를 눈치채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서율아,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졌어? 더운 거야? 에어컨 온도를 좀 더 낮춰줄까?” 서율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지금 온도가 딱 좋아.” 지성은 그녀가 거절하자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도혁도 서율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느낀 듯, 메뉴를 다 고른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서율은 정말이지 그 자리에서 물컵을 들어 도혁의 얼굴에 물을 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지성과 문미정은 그들의 상황을 알아채지 못한 듯, 최근의 일상이나 업무에 대해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며 웨이터가 음식을 가져왔다. 서율은 그제야 자신이 아까 도혁의 손에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메뉴 주문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율의 머릿속은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녀는 이제 문미정에게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웨이터가 가져온 음식을 본 순간, 서율은 할 말을
지성은 문미정과 서율을 보자마자 온화하게 인사를 건넸했다. “아주머니, 서율아.” 곧이어 그의 시선이 함께 온 도혁에게로 향했다. 이미 사전에 이야기를 들은 듯, 지성은 전혀 놀라지 않는 표정이었다. “변도혁 씨, 반갑습니다.” 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지성 씨, 오랜 만이네요.” 지난번 만남의 기억이 아직 생생했다. 서율은 지성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 일 이후로, 지성과 도혁 사이에는 은근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서율은 두 사람을 만나게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다시 이렇게 마주치자 머리가 아팠다. 서율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이미 결혼했는데, 엄마가 혹시 아직도 지성 오빠와 나를 이어주려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런 생각이라면, 왜 변도혁까지 데리고 온 걸까?’서율은 무심코 문미정을 흘끗 쳐다보았다. 문미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안심하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문미정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지성이가 예약한 방으로 들어간 네 사람은 각각 자리에 앉았다. 문미정은 먼저 지성의 할아버지와 부모님의 건강에 대해 물었고, 지성은 미소를 지으며 차근차근 대답했다. 이때 웨이터가 메뉴판을 가져와 주문을 부탁했다. 문미정은 메뉴판을 받아 들고 도혁에게 건넸다. “엄마랑 서율이 입맛이 비슷하니까, 서율이가 좋아할 만한 요리를 몇 가지 골라주면 돼.” 서율은 단번에 문미정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문미정은 그들이 연기한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쉽사리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방법으로 그들의 관계를 시험해보려는 것이었다. 도혁이가 서율이 좋아하는 음식을 모른다면, 그들이 친밀한 사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서율은 지난번 식사 때 도혁이가 자신의 취향을 전혀 모르던 상황이 떠올라 마음이 답답해졌다. 아마 이번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모를 것이라 생각
서율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더 이상 도혁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도혁도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기에, 둘은 묵묵히 차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LJ그룹 건물에 도착하자, 서율은 간단히 감사 인사를 건네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로 향했다. ... 사무실에 도착한 서율은 바로 육경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S시에 온 거 알고 있었어?” 핸드폰 너머에서 경남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들려왔다. [나도 어제 알았어. 엄마가 너 혼자 지내는 게 많이 걱정되셨나 봐. 네가 혹시 힘들어하고 있진 않은지 보러 오신 거래.] 서율은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오빠, 나랑 변도혁이 곧 이혼할 거라는 걸 엄마에게 말해야 할까?” 경남은 미소를 머금은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이혼을 결심했다면, 이혼 후에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율은 그의 말에서 뭔가를 느끼고 다시 물었다. “오빠 말은, 지금 이혼한다고 하면 엄마 아빠가 반대할 거라는 뜻이야?” 경남의 목소리에는 가벼운 웃음이 담겨 있었다. [엄마 아빠는 그렇게 완고한 분들이 아니야. 하지만 네가 이혼을 하겠다고 하면 당연히 이유를 물어보시겠지. 단순히 성격 차이라고 말하고 넘기려는 건 거의 불가능할 거야.][네 잘못이라면 엄마 아빠는 결혼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며 널 혼낼 거야. 반대로 도혁의 잘못이라면, 엄마 아빠가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잖아.][게다가 변도혁이 이혼에 동의할지도 의문이야. 내가 보기엔 네 남편, 그렇게 쉽게 물러날 사람은 아니야. 변도혁이 진지하게 나오면 너 혼자 상대하기 어려울지도 몰라.] 경남의 말에 서율은 아침에 도혁이 자신을 유혹하려던 장면이 떠오르며 마음이 더 답답해졌다. 서율은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오빠, 엄마 보러 안 올 거야?” [이미 엄마랑 통화했어. 변도혁은 네가 누구인지 아직 모르는 것 같아서, 그 문제로 싸울까 봐 당분간 나서지 말자고 하시더라.] S시에 오기 전까지 경남은 부모와 함께
서율은 발걸음을 잠시 멈춘 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서율은 그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표정은 완벽하게 차분함을 유지했다. 도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데려다 줄게.” “괜찮아.” 서율은 자기도 모르게 거절했다. “혼자 가도 돼.” “율아, 도혁이가 너를 데려다주겠다고 하니, 그냥 그렇게 해.” 문미정은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부는 서로 미워할 시간이 없단다.” 문미정은 서율이 도혁에게 서운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두 사람이 다투었다고 오해한 듯했다. 서율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문미정의 기대 어린 눈빛을 보고 차마 더 이상 거절하지 못했다. 집을 나서려는 순간, 도혁이 서율의 손을 잡았다. 서율은 깜짝 놀라며 표정이 굳어졌다. “변도혁, 지금 뭐 하는 거야?” 도혁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렇게 해야 어머니가 우리가 잘 지낸다고 믿으실 거야.” 그 말이 맞긴 했지만, 서율은 방금 일어난 일 때문인지 도혁에게 더 거부감이 들었다. 서율은 그의 손을 몇 번이나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손을 놓지 않았다. 문미정이 뒤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서 서율은 더 이상 무리하게 저항할 수 없었기에 결국 도혁의 손을 잡고 집 밖으로 나왔다. 서율은 도혁과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도혁은 여태껏 한 번도 서율의 손을 잡은 적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손을 잡는 것은 서율에게는 처음이었다. 너무나도 가까운 스킨십이었기에,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문미정은 현관까지 나와 그들이 손을 맞잡고 떠나는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차에 타자마자, 서율은 도혁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차갑게 말했다. “변도혁, 약속을 어겼네.” 도혁은 살짝 긴 속눈썹을 움직이며 서율을 보았다. “뭐?” 도혁이 모르는 척하자 서율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어젯밤에 나랑 약속했잖아. 나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똑똑. 그때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율아, 엄마가 아침 준비 다 했으니 얼른 내려와서 아침 먹어.” 서율은 문미정의 목소리를 듣고 당황하며 황급히 옷의 단추를 채웠다. 그녀는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도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잡아주려 했다. 그러나 서율은 그의 손길을 피했다. 이 방에선 단 1초도 더 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서율이 답을 하지 않자, 문 밖에 있던 문미정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듯했다. “율아, 일어났니? 빨리 안 일어나면 회사 늦겠어...”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엄마, 방금 일어났어요. 세수하고 금방 내려갈게요.” 서율의 모습을 본 문미정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서율은 옷매무새가 엉망이었고, 입술은 붉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상황을 알아차린 문미정은 얼굴이 빨개지며 서율보다 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너 출근 늦을까 봐 깨우러 왔지 뭐야... 어, 어서 준비해. 엄마는 먼저 내려갈게!” 그렇게 말하고는 도망치듯 떠났다. 서율이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도혁은 이미 옷을 다 입고 평소처럼 평온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도혁은 서율이가 돌아온 것을 보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씻고 와. 난 먼저 내려가 있을게.” 서율은 그와 대화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녀는 급히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도혁은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보더니 방을 나섰다. 그가 떠난 후, 서율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엉망진창인 모습을 확인했다. 붉게 부어오른 입술, 잘못 잠근 셔츠 단추,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문미정이 자신을 보고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서율은 수치심에 눈을 질끈 감았다. 눈만 감으면 도혁과의 아찔한 순간이 떠올랐고, 그 기억이 그녀를 괴롭혔다. 만약 문미정이 문을 두드리지 않았더라면,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