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날 그렇게 믿었다면, 서율의 서류를 일부러 바꿔치기했냐고 묻지 않았을 거야. 지금도 그래... 내가 일부러 계단에서 넘어져 서율을 모함했다고 생각하는 거지?” 도혁의 목소리는 이성적이고 차가웠다. “지민아, 묻는다고 해서 의심하는 건 아니야.”지민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조용히 물었다. “도혁아, 설마 이혼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야?”도혁은 부정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혼할 수 없어.”지민은 그의 깊고 어두운 눈빛을 쳐다보며 물었다. “주식 문제 때문이야? 이제 남은 시간은 3개월뿐이야. 3개월이 지나면 서율과 이혼할 거야?”도혁의 눈이 잠시 흔들렸지만,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지민은 그가 망설이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 망설임은 곧 완전히 이혼을 결심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의 태도가 지민을 실망시켰다.지금 이 순간에도 머뭇거리고 있는데, 3개월 후에는 어떨까? 어쩌면 도혁은 정말로 이혼을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녀를 사로잡았다.지민은 차가운 표정으며 물었다. “도혁아, 설마 서율 씨를 사랑하게 된 거야?”도혁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지민은 이를 악물고 결심한 듯 최후의 수단을 꺼냈다. “도혁아, 난 널 구하려고 평생을 바쳐온 춤을 포기했어. 그때 너는 내게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고, 나는 너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지. 너는 그때 나에게 결혼을 약속했지만 결국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지민은 도혁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때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는 건 나도 알아. 그래서 원망하지는 않아. 하지만 이제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들이 사라졌잖아. 난 네가 그때 했던 약속을 다시 지켜줬으면 해... 내 부탁, 들어줄 수 있어?”병실 안은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지민은 언제나 강하고 현명한 여자기에 누구에게도 은혜를 빌미로 뭔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도혁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직감하고 이렇게 나선 것이다. 지민은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서율도 문미정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직 도혁과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당시 자신의 고집으로 결혼을 한 것이기에 지금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 것도 모두 자신의 선택 탓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문미정에게 자신의 힘든 상황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침묵하던 서율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엄마, 저 지금 회사에 있어요. 금방 갈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그래, 그래. 급하지 않으니 걱정 말고 천천히 와.]이미 S시에 도착한 문미정을 돌려보낼 수 없었기에, 서율은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집에 도착하자, 문미정은 이미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문미정을 보자 서율은 갑자기 코끝이 찡해지며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녀는 걸음을 서둘러 달려가 문미정을 꼭 안았다. “엄마, 미안해요.”이 사과는 3년이나 늦은 것이었다. 문미정 역시 오랜만에 딸을 보자 감정이 북받쳐 서율을 꽉 껴안으며 말했다. “율아, 엄마가 미안해. 그때 네가 좋은 집안을 가진 사람과 결혼하길 원하는 마음에 너의 행복을 우선시하지 못해서 미안하구나.”서율과 문미정은 서로를 안은 채 웃고 울며 오랜 시간 감정을 나눴다. 그렇게 한참을 지나, 두 사람은 차츰 마음이 가라앉았다. 문미정은 눈가의 눈물을 닦으며 서율을 살피더니 눈썹을 찌푸렸다. “율아, 너 예전보다 훨씬 말랐구나. 그동안 힘들었던 거니?”문미정의 걱정스러운 시선에 서율은 서둘러 말했다. “아니에요, 엄마. 제가 조금 살이 쪄서 요즘 다이어트 중이에요. 그래서 더 말라 보이는 거예요.”문미정은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리셨다. “요즘 젊은 애들은 몸 관리 신경 많이 써, 하나같이 마른 것들이 무슨 살을 뺀다고 그래... 아무리 봐도 전혀 안 쪘구먼.”문미정의 잔소리가 새삼스럽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미정은 주위를 둘러보며 궁금한 듯 물었다. “율아, 도혁은 어디 있니? 왜 안 보이는 거야?”서율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일이 좀 바빠서요. 그래서 일부러
도혁은 미소를 지으며 별다른 반응 없이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왔다. “서율이가 저에 대해 오해하는 게 있어 아직 화가 난 모양이에요. 제 잘못이니 서율을 탓하지 마세요. 제가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거든요.”문미정은 도혁이 핑계나 장황한 설명 없이 바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자, 그에 대한 호감이 한층 더 깊어졌다. 문미정은 미소를 지으며 도혁에게 말했다. “나는 서율의 엄마야. 오랫동안 해외에서 지냈고, 이번에 S시에 온 건 서율이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왔단다. 그래야 아빠에게도 안심하고 전해줄 수 있으니까.”서율의 아버지는 큰 회사를 관리해야 해서 이번에 함께 오지 못했다.도혁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예의를 갖춰 답했다. “장모님, 안으로 들어가시죠.”문미정은 도혁이 젊은 나이에 흔히 보이는 거만함이나 무례한 태도 없이 자연스럽고 진중한 모습에 점점 더 만족스러워졌다. 특히 결혼식에 그녀의 가족이 참석하지 못했던 이유를 묻지 않는 그의 배려가 마음에 들었다.문미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그렇게 어렵게 부를 필요 없단다. 서율처럼 편하게 나도 엄마라고 불러.”“알겠습니다, 어머니.” 도혁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공손하게 문미정을 집안으로 안내했다.서율은 한 발 늦게 들어서며 도혁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지?”도혁은 차분히 대답했다. “병실을 나가던 중에 마침 네가 나가는 걸 봤어. 불러도 대답이 없기에 따라와 본 거야.”도혁은 사실 서율과 나눌 이야기가 있어 병실을 나왔으나, 서율이 어딘가 급히 가는 듯한 모습을 보고 따라온 것이었다.서율은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 엄마는 건강이 좋지 않으니, 제발 아무 말이나 하지 마. 안 그러면...”원래는 문미정을 집으로 들이는 대신 자신의 아파트로 데려갈 생각이었지만, 도혁이 갑자기 나타나서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도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면 어떻게 할 생각인데?
과거 서율이가 도혁을 좋아하게 되어 도혁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 문미정은 도혁의 집안인 HS그룹이 작은 기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가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다고 판단한 그녀는 서율이 그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다. 문미정과 육경석은 오랫동안 고지성을 좋은 사윗감으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서율은 고지성을 그저 오빠로만 여겼다. 문미정은 다소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결혼은 반드시 집안 실력이 비슷해야 행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 시기에 서율은 도혁과의 결혼을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문미정과 육경석은 서율과 지성을 이어주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서율은 혹시나 뭔가 계획이 있을까 두려워 집에서 나왔다. 지금 이 순간, 도혁을 만난 문미정은 그가 정말로 준수하고 훌륭한 인물임을 깨달았다. 서율이 집에 돌아오지 않은 동안 그녀는 해외에서 HS그룹의 상황을 자주 살폈고, 가끔 육경석의 입을 통해 도혁에 대한 칭찬을 듣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문미정과 육경석은 서율을 막았던 그때의 결정을 후회하게 되었다. 부모로서 딸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점점 더 깨닫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가다 도혁이 말했다. “어머니, 멀리서 오셨으니 여기서 편하게 지내세요.” 문미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민폐를 끼치겠구나.” 도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는 서율의 어머니시니 제 어머니와도 다름없죠. 너무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이 말에 문미정은 마음이 더 따뜻해졌다. 도혁을 바라보는 눈길이 점점 더 애정이 담기게 되었다. 도혁은 눈치 있게 말했다. “어머니와 서율이 오랜만에 만났으니 할 이야기가 많으실 테죠. 저는 먼저 HS그룹에 가보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그래, 고맙다.” 문미정은 도혁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아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문미정은 전화를 확인하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희 아빠한테 전화왔네.” 문미정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핸드폰 너머에서 육경석이 서율을 만났는지, 서율은 어떻게 지내는지, 그리고 도혁은 어떤지 물어보는 것이 들려왔다. 문미정은 하나하나 답하며 도혁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애정 어린 말투를 숨기지 않았다. 서율은 옆에서 그 대화를 듣고 있었고, 몇 번이나 끼어들어 뭔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문미정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결국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말해서, 서율은 문미정이 이렇게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오랜만에 본 것 같았다. 약 10분 정도 대화가 이어진 후, 문미정은 전화를 끊었다. “서율아, 아까 뭘 말하려고 했니?” “별거 아니에요.” 서율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진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그냥... 우리 집 상황은 당분간 도혁이에게 말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제가 직접 얘기할게요.” 문미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도혁이 같은 사람이면 그 사실을 알아도 별로 문제가 될 것 같진 않구나. 하지만 어쨌든 우리가 먼저 숨긴 거니, 나중에 잘 설명해서 부부 관계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해.” 서율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문미정에게서 들은 바에 따르면, 문미정은 최대 한 달 정도만 머무를 예정이었다. 어차피 도혁이 한 달에 몇 번이나 집에 올까 말까 한 상황이니, 서율은 도혁이 출장 간다는 핑계를 대면 대충 넘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서율이 직접 밥상을 차린 순간, 도혁이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온 도혁을 보고 문미정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도혁아, 무슨 일이니? 율이는 네가 오늘 야근한다고 했는데.” 도혁은 순간적으로 서율의 속셈을 알아차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서율을 한 번 쳐다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
서율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네가 신경 쓰실 일이 아니지.” 도혁은 그녀의 의도를 눈치챘는지 담담하게 대답했다. “문서율, 네가 내가 야근하거나 출장 가는 걸 핑계 삼아 상황을 모면하려는 건 알겠어. 그런데 정말 어머니가 그렇게 쉽게 속아 넘어갈 것 같아?” 서율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 엄마지, 네 엄마는 아니잖아.” 도혁은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내가 네 엄마를 아주머니라고 불러야 하는 거야? 물어보면 네 말대로 대답해도 된다는 거야?” 서율은 도혁의 말에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몇 초 후, 서율은 차갑게 물었다. “변도혁, 대체 뭘 원하는 거야?” “난 널 돕고 있는 거야. 모르겠어?” “도와준다고? 네가 그렇게 착한 사람일 리가 없잖아.” 서율은 도혁의 얼굴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도혁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다. “네 눈엔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인 거야?” 서율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알고는 있었네.” 도혁은 서율의 비꼬는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으시잖아. 지금 네가 걱정되어 먼 길을 오셨는데, 정말 우리 문제로 어머니를 걱정하게 만들고 싶어? 문서율, 내 도움이 있으면 네가 혼자 연기하는 것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을 거야.” 서율은 입을 꾹 다물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도혁의 협조가 있으면, 문미정은 그녀가 그럭저럭 잘 살고 있다고 믿을 것이 분명했다. 사실 서율은 육경남이 S시에 LJ그룹의 지사를 세우고 자신에게 그 관리를 맡기려는 계획을 알고 있었다. 덕분에 그녀는 꽤 오랜 시간 동안 Z국에 머물며 일을 할 예정이었다. 서율은 천천히 부모님께 이혼 사실을 밝힐 계획이었지만, 예상치 못하게 문미정이 자신이 아직 이혼도 하기 전에 찾아온 것이다. 지금 서율과 도혁의 관계는 매우 어색하고, 결혼 생활이 위태롭기 그지없지만, 아직 이혼을 하진 않았다. 그런데 이혼도
“서지민이 나를 건드리지 않는 한, 나도 문제를 일으키진 않을게. 하지만 서지민이 날 괴롭힌다면...”서율은 도혁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때는 참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너도 서지민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나를 이용하려는 생각은 하지 마.” “변도혁, 넌 서지민에게 끝없이 관대해질 수 있지만 그건 네 일이잖아. 난 서지민에게 아무런 빚도 지지 않았어. 나에게도 똑같은 관용을 요구하지 마.” 도혁은 낮고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어.” 서율은 두 사람 사이에 일종의 협의가 이루어졌음을 느꼈다. 그녀는 자리에 일어나며 말했다. “난 먼저 올라갈게. 회사 일 있으면 마저 하러 가.” 그리고 도혁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방으로 올라갔다. 방에 들어서자, 서율은 문득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이 상황에서 연극을 하려면 도혁과 방을 따로 쓸 수는 없었다. 결국, 둘은 같은 방에서 자야 한다는 뜻이었다. 더 큰 문제는 방에 침대가 하나뿐이라는 것. 이 사실을 깨닫자 서율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그녀와 도혁은 이미 부부로서 모든 것을 겪었고,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 자체가 새삼스러울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를 잃은 후, 서율은 도혁에게 설명할 수 없는 반감이 생겼다. 그가 자신에게 손을 대는 것조차 견딜 수 없게 됐다. 서율은 잠시 고민하다가 새 이불을 꺼내 소파에 누웠다. 요즘은 일로 바쁘고, 지민의 끊임없는 방해를 처리하느라 몸이 피곤했다. 소파에 잠시 눕기만 했는데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몸이 허공에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서율은 눈을 천천히 떴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림처럼 잘생긴 얼굴과 차가운 듯 선이 뚜렷한 도혁의 얼굴이었다. 서율은 그제야 자신이 도혁에게 안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변도혁,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녀는 온몸이 긴장한 채로 도혁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도혁은 담담하게 말했다. “침대에서 자.” 서율
서율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도혁은 산처럼 단단해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서율은 그가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잠시 잊고 있었다. 지난번 겨우 위기를 모면했지만, 이번엔 그와 단둘이 있는 상황이었다. 마치 양이 호랑이 굴에 들어온 것과 같았다. 도혁의 키스는 강압적이고 거부할 수 없는 힘을 지녔다. 서율은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무서운 힘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부림은 점차 약해졌다. 도혁이 더 나아가려던 순간,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면서 그의 동작이 멈췄다. 천천히 눈을 뜨자, 서율이 눈물이 가득 흘린 채 누워 있었다. 서율은 지금껏 아무리 힘든 상황에 처해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번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치 차가운 물이 도혁의 머리 위로 쏟아진 듯, 도혁의 뜨거운 욕망이 한순간에 식어버렸다. 그는 조용히 서율을 내려다보며 쉰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싫은 거야?” 서율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우린 3개월 후에 이혼할 거야. 그러니 나를 건드릴 수 없어.” 도혁의 검은 눈동자가 어둡게 빛났다. “우리가 이혼하기 전까지는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해.” 서율은 침대 시트를 단단히 움켜쥐고 눈물을 흘린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결혼한 지 3년이 지났지만, 넌 한 번도 남편으로서의 책임을 다한 적이 없어. 그런데 어떻게 나한테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길 요구할 수 있지?” 도혁은 평소에 서율을 무시하고 집에 돌아오지 않으며, 늘 다른 여자에게 불려 나가고, 서율이 괴롭힘을 당할 때도 방관했다. 서율의 마음은 상처 입을 때마다 조금씩 식어갔다. 도혁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에 서율의 모습이 비쳤다. 마치 끝없는 블랙홀 같아서 오래 쳐다보고 있으면 영혼까지 빨려 들어갈 듯했다. 도혁은 천천히 손을 뻗었고, 서율은 깜짝 놀라 몸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도혁은 그녀를 다치게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럽게
어머니로서 자식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서율은 도혁의 ‘가식’이 정말로 불쾌했지만, 그가 사람을 달래는 데는 재주가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다. 심지어 서율도 문미정을 그토록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으니 말이다.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자, 서율의 얼굴에는 차가운 표정이 드리워졌다. “오늘 밤은 다른 곳에서 자. 내일 아침에 엄마한테 네가 일이 있어 먼저 출근했다고 말씀드릴게.” 도혁은 외투를 벗던 중 고개를 들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뭐라고?” 서율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동안 도와준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우리가 지금처럼 지내는 간 합당하지 않은 것 같아.” “왜 합당하지 않지?” “우리는 곧 이혼할 사이니까...” 서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혁이 차분히 말을 끊었다. “문서율,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라는 사실을 잊은 거야?” 서율은 차갑게 말했다. “곧 끝날 관계야.” “문서율.”도혁의 검은 눈동자는 깊고 차가웠다. 그는 서율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이렇게 서둘러 이혼하려는 이유가 뭐지? 다른 사람이라도 생긴 거야?” 서율은 당황한 듯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혁의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 “고지성, 네가 새로 만날 아니야?” 처음에는 황당하게 들렸지만, 서율은 이내 웃음이 나왔다. “정말 어이가 없네!” 서율은 차갑게 도혁을 쳐다보며 말했다. “변도혁, 네가 더러운 짓을 했다고 해서 나도 그런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너처럼 결혼 중에 불륜을 저지를 만큼 뻔뻔하지 않아.” 도혁은 차가운 눈빛으로 서율의 턱을 쥐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지성과는 언제부터 연락을 주고받았던 거야?” 서율은 그의 손을 떨쳐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너랑 상관없어.” 도혁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도혁은 옆에 있는 안전벨트를 꺼내 그녀에게 채워주었다. 서율은 잠시 얼어붙었다. 곧 도혁의 차갑고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안전벨트 매야지.” 이 광경을 지켜본 문미정은 도혁에게 더욱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율아, 조수석에 타더라도 안전벨트를 매야 한단다. 도혁이가 참 세심하구나.” 문미정이 없었다면, 서율은 아마 비웃었을 것이다. ‘하긴 세심하긴 해. 다른 여자의 물건이 당당하게 조수석에 잡을 정도로.’마치 지민이 그의 아내인 것처럼. 서율은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때 문미정은 도혁에게 슬며시 질문을 던졌다. “도혁아, 예전에 너한테 첫사랑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이 최근에 돌아왔다며?” 문미정의 말에 서율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도혁이가 지민과 함께 어울린다는 건 이미 비밀이 아니었다. 모두 도혁이가 지민에게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문미정이 이 일을 알게 된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반면 도혁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매우 차분하게 인정하며 말했다. “네, 지금 HS그룹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 문미정이 살짝 톤을 올리며 물었다. “그 아가씨가 어쩌다 HS그룹에서 일하게 된 거지?” “지민은 원래 무용을 전공했는데, 저를 구하다 다리를 다쳐 예전처럼 무용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귀국한 뒤, 제가 HS그룹 내의 가벼운 일을 맡겼습니다. 지민이가 제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갚아야 마땅합니다.” 도혁의 말은 매우 합리적이었다. 문미정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율 역시 그의 말에 딱히 흠잡을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문미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도혁아, S시에 네가 그 아가씨와 만난다는 소문이 돌던데... 아직 옛 정을 못 잊은 건 아닌지 걱정돼서 물어보는 거란다...” 도혁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저와 지민은 이미 끝난 관계입니다. 제가 서율과 결혼한 이
서율은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며 의아하게 물었다. “나에 대해 묻고 있었다고?” 도혁은 미묘한 눈빛을 보이며 말했다. “우리가 결혼한 지 3년이 되었지만, 고지성 씨만큼 잘 알지는 못하거든. 그래서 고지성 씨께 당신에 대해 좀 더 배우고 싶었어.” 지성과 서율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친구이니, 그들의 오랜 정은 부부 3년의 세월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도혁의 말을 듣자 문미정은 도혁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 들었고 지성에 대한 미안함이 들었다. 자신의 경쟁자에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공유한다는 것은 지성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문미정은 서둘러 말했다. “시간이 늦었구나. 피곤하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지성은 문미정의 앞에서 무언가 더 보여줄 수 없었기에 미소를 지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차에 타려는 순간, 서율은 문미정과 함께 뒷좌석에 앉으려고 했다. 그때 도혁이 갑자기 조수석 문을 열어 그녀에게 타라고 손짓했다. 서율은 그를 흘깃 쳐다보며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정말 연기 잘하네.’ 결혼한 3년 동안, 도혁은 한 번도 서율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조수석에 앉히지도 않았다. 한 번은 도혁과 함께 지옥순의 생신잔치에 참석할 때, 그녀가 조수석 문을 열고 앉으려 하자, 도혁은 차갑게 말했다. “뒷좌석에 타.” 그 이후로, 서율은 도혁과 함께 외출할 때 조수석에 앉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언제나 뒷좌석에 앉았다. 이제 와서, 서율은 조수석에 앉는 것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벌어진 일로 인해 문미정의 마음은 점차 도혁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아까도 문미정은 서율에게 도혁과 다투지 말라고 계속해서 타일렀다. 문미정이 있는 자리에서 도혁이 그녀에게 문을 열어준 이상, 서율은 그의 체면을 깎지 않기 위해 조수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안전벨트를 매려던 서율의 눈에 문 앞에 붙은 ‘전용 좌석’이라는 스티커가 들어왔다. 순간 멍하니
문미정은 서율을 쳐다보며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도혁을 데리고 온 건 사실 네가 아닌 도혁을 시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야. 네가 어릴 때부터 자존심이 강해서 힘든 일이 있어도 우리한테 잘 말하지 않잖니. 그래서 네가 도혁과의 관계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좋은지 의심스러웠거든.” “지성이는 참 괜찮은 아이야. 그동안 여자친구도 사귀지 않고, 부모님께서 아무리 결혼하라고 재촉해도 따르지 않았대. 그건 아마 아직 네가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일 거야.” “도혁이가 너에게 진심이라면, 지성의 마음을 일찍 정리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서율은 잠시 침묵했다. 서율도 지난번 지성과의 만남에서 그가 여전히 자신에게 미련이 남아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성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서율은 그를 오빠처럼만 여겼다. 그렇지 않았으면 도혁과 결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도혁과 이혼한다고 해도, 지성과는 이어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지성의 마음을 빨리 정리해주는 게 맞는 일이기도 했다. ... 지성은 계산을 마치자마자 뒤에 서 있는 도혁을 발견했다. 지성은 도혁을 보자마자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건 서율과 문미정 앞에서 보여준 따뜻한 모습과는 달랐다. “변도혁 씨, 아주머니와 서율이랑 함께 있지 않고 왜 여기 와 있어요?” 도혁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머니께서 지난번에 고지성 씨가 서율을 대접했다는 얘길 듣고, 이번에는 고지성 씨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며 저더러 계산하라고 하셨어요.” 도혁의 말에 담긴 도발을 느낀 지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변도혁 씨, 아무리 연기가 완벽해도 결국엔 연기일 뿐이죠. 아주머니를 속이는 건 몰라도, 나한테 와서 이런 말 하는 건 좀 가식적이지 않나요?” 지성의 비꼼에도 불구하고, 도혁은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연기라도 고지성 씨는 어머님을 어머님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저는 부를 수
서율은 거짓말이 들통날 상황을 생각하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도혁은 변함없는 표정을 유지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서율은 순간 당황하여 무의식적으로 도혁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오히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을 밀어 넣으며 열 손가락을 깍지 끼듯 맞잡았다. 서율은 깜짝 놀라며 멍하니 몇 초간 움직이지 못했다. 도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메뉴를 주문했다. 서율은 도혁의 손짓에 온 신경이 쏠려 그가 무엇을 주문하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도혁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손을 더 세게 쥐었고 서율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다. 도혁은 자신이 이 상황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걸 아는 듯, 더욱 장난스럽게 그녀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서율은 당장이라도 화를 낼 뻔했지만, 간신히 참고 있었고 얼굴은 이미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성은 서율의 변화를 눈치채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서율아,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졌어? 더운 거야? 에어컨 온도를 좀 더 낮춰줄까?” 서율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지금 온도가 딱 좋아.” 지성은 그녀가 거절하자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도혁도 서율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느낀 듯, 메뉴를 다 고른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서율은 정말이지 그 자리에서 물컵을 들어 도혁의 얼굴에 물을 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지성과 문미정은 그들의 상황을 알아채지 못한 듯, 최근의 일상이나 업무에 대해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며 웨이터가 음식을 가져왔다. 서율은 그제야 자신이 아까 도혁의 손에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메뉴 주문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율의 머릿속은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녀는 이제 문미정에게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웨이터가 가져온 음식을 본 순간, 서율은 할 말을
지성은 문미정과 서율을 보자마자 온화하게 인사를 건넸했다. “아주머니, 서율아.” 곧이어 그의 시선이 함께 온 도혁에게로 향했다. 이미 사전에 이야기를 들은 듯, 지성은 전혀 놀라지 않는 표정이었다. “변도혁 씨, 반갑습니다.” 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지성 씨, 오랜 만이네요.” 지난번 만남의 기억이 아직 생생했다. 서율은 지성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 일 이후로, 지성과 도혁 사이에는 은근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서율은 두 사람을 만나게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다시 이렇게 마주치자 머리가 아팠다. 서율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이미 결혼했는데, 엄마가 혹시 아직도 지성 오빠와 나를 이어주려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런 생각이라면, 왜 변도혁까지 데리고 온 걸까?’서율은 무심코 문미정을 흘끗 쳐다보았다. 문미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안심하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문미정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지성이가 예약한 방으로 들어간 네 사람은 각각 자리에 앉았다. 문미정은 먼저 지성의 할아버지와 부모님의 건강에 대해 물었고, 지성은 미소를 지으며 차근차근 대답했다. 이때 웨이터가 메뉴판을 가져와 주문을 부탁했다. 문미정은 메뉴판을 받아 들고 도혁에게 건넸다. “엄마랑 서율이 입맛이 비슷하니까, 서율이가 좋아할 만한 요리를 몇 가지 골라주면 돼.” 서율은 단번에 문미정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문미정은 그들이 연기한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쉽사리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방법으로 그들의 관계를 시험해보려는 것이었다. 도혁이가 서율이 좋아하는 음식을 모른다면, 그들이 친밀한 사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서율은 지난번 식사 때 도혁이가 자신의 취향을 전혀 모르던 상황이 떠올라 마음이 답답해졌다. 아마 이번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모를 것이라 생각
서율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더 이상 도혁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도혁도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기에, 둘은 묵묵히 차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LJ그룹 건물에 도착하자, 서율은 간단히 감사 인사를 건네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로 향했다. ... 사무실에 도착한 서율은 바로 육경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S시에 온 거 알고 있었어?” 핸드폰 너머에서 경남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들려왔다. [나도 어제 알았어. 엄마가 너 혼자 지내는 게 많이 걱정되셨나 봐. 네가 혹시 힘들어하고 있진 않은지 보러 오신 거래.] 서율은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오빠, 나랑 변도혁이 곧 이혼할 거라는 걸 엄마에게 말해야 할까?” 경남은 미소를 머금은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이혼을 결심했다면, 이혼 후에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율은 그의 말에서 뭔가를 느끼고 다시 물었다. “오빠 말은, 지금 이혼한다고 하면 엄마 아빠가 반대할 거라는 뜻이야?” 경남의 목소리에는 가벼운 웃음이 담겨 있었다. [엄마 아빠는 그렇게 완고한 분들이 아니야. 하지만 네가 이혼을 하겠다고 하면 당연히 이유를 물어보시겠지. 단순히 성격 차이라고 말하고 넘기려는 건 거의 불가능할 거야.][네 잘못이라면 엄마 아빠는 결혼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며 널 혼낼 거야. 반대로 도혁의 잘못이라면, 엄마 아빠가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잖아.][게다가 변도혁이 이혼에 동의할지도 의문이야. 내가 보기엔 네 남편, 그렇게 쉽게 물러날 사람은 아니야. 변도혁이 진지하게 나오면 너 혼자 상대하기 어려울지도 몰라.] 경남의 말에 서율은 아침에 도혁이 자신을 유혹하려던 장면이 떠오르며 마음이 더 답답해졌다. 서율은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오빠, 엄마 보러 안 올 거야?” [이미 엄마랑 통화했어. 변도혁은 네가 누구인지 아직 모르는 것 같아서, 그 문제로 싸울까 봐 당분간 나서지 말자고 하시더라.] S시에 오기 전까지 경남은 부모와 함께
서율은 발걸음을 잠시 멈춘 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서율은 그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표정은 완벽하게 차분함을 유지했다. 도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데려다 줄게.” “괜찮아.” 서율은 자기도 모르게 거절했다. “혼자 가도 돼.” “율아, 도혁이가 너를 데려다주겠다고 하니, 그냥 그렇게 해.” 문미정은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부는 서로 미워할 시간이 없단다.” 문미정은 서율이 도혁에게 서운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두 사람이 다투었다고 오해한 듯했다. 서율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문미정의 기대 어린 눈빛을 보고 차마 더 이상 거절하지 못했다. 집을 나서려는 순간, 도혁이 서율의 손을 잡았다. 서율은 깜짝 놀라며 표정이 굳어졌다. “변도혁, 지금 뭐 하는 거야?” 도혁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렇게 해야 어머니가 우리가 잘 지낸다고 믿으실 거야.” 그 말이 맞긴 했지만, 서율은 방금 일어난 일 때문인지 도혁에게 더 거부감이 들었다. 서율은 그의 손을 몇 번이나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손을 놓지 않았다. 문미정이 뒤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서 서율은 더 이상 무리하게 저항할 수 없었기에 결국 도혁의 손을 잡고 집 밖으로 나왔다. 서율은 도혁과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도혁은 여태껏 한 번도 서율의 손을 잡은 적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손을 잡는 것은 서율에게는 처음이었다. 너무나도 가까운 스킨십이었기에,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문미정은 현관까지 나와 그들이 손을 맞잡고 떠나는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차에 타자마자, 서율은 도혁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차갑게 말했다. “변도혁, 약속을 어겼네.” 도혁은 살짝 긴 속눈썹을 움직이며 서율을 보았다. “뭐?” 도혁이 모르는 척하자 서율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어젯밤에 나랑 약속했잖아. 나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똑똑. 그때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율아, 엄마가 아침 준비 다 했으니 얼른 내려와서 아침 먹어.” 서율은 문미정의 목소리를 듣고 당황하며 황급히 옷의 단추를 채웠다. 그녀는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도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잡아주려 했다. 그러나 서율은 그의 손길을 피했다. 이 방에선 단 1초도 더 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서율이 답을 하지 않자, 문 밖에 있던 문미정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듯했다. “율아, 일어났니? 빨리 안 일어나면 회사 늦겠어...”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엄마, 방금 일어났어요. 세수하고 금방 내려갈게요.” 서율의 모습을 본 문미정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서율은 옷매무새가 엉망이었고, 입술은 붉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상황을 알아차린 문미정은 얼굴이 빨개지며 서율보다 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너 출근 늦을까 봐 깨우러 왔지 뭐야... 어, 어서 준비해. 엄마는 먼저 내려갈게!” 그렇게 말하고는 도망치듯 떠났다. 서율이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도혁은 이미 옷을 다 입고 평소처럼 평온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도혁은 서율이가 돌아온 것을 보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씻고 와. 난 먼저 내려가 있을게.” 서율은 그와 대화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녀는 급히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도혁은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보더니 방을 나섰다. 그가 떠난 후, 서율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엉망진창인 모습을 확인했다. 붉게 부어오른 입술, 잘못 잠근 셔츠 단추,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문미정이 자신을 보고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서율은 수치심에 눈을 질끈 감았다. 눈만 감으면 도혁과의 아찔한 순간이 떠올랐고, 그 기억이 그녀를 괴롭혔다. 만약 문미정이 문을 두드리지 않았더라면,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