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혁은 서율의 날카로운 눈빛을 보며 말했다.“이미 이번 위기를 성공적으로 넘겼는데, 그렇게까지 몰아붙여야만 적성이 풀리는 거야?”서율은 도혁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내가 지민 씨를 일부러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도혁은 어두운 눈빛으로 서율을 바라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서율은 더 이상 물을 필요조차 없었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넌 내가 C국말에 능통한 덕분에 이번 위기를 해결했다고 생각했겠지. 일이 쉽게 풀렸는데 내가 일부러 지민 씨를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도혁의 눈빛이 깊어졌다. “당연한 거 아니야?”서율은 평온하고도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확실히 말해두지. 난 C국말을 전혀 모르거든.” “C국말을 모른다고?” 도혁은 그 말을 믿기 어렵다는 듯 되물었다. “그래.” 서율의 입가에는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난 C국말을 모르지만, SH 그룹에서 미리 보내준 계획서를 여러 번 꼼꼼히 읽어보았어. 그 덕분에 내용을 기억해 두어 겨우 위기를 넘길 수 있었지.” 서율은 도혁의 단정하고 차가운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직도 내가 일을 쉽게 해결했다고 생각해?”짧은 정적이 흘렀다.사실 서율은 도혁의 대답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지민만 얽히면, 어떤 일이든 우선순위가 뒤바뀌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서율은 더 이상 도혁에게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도혁이 지민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문이 닫히자 서율은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더는 일할 기분이 아니었다.지민은 결국 자신의 이마가 터질 때까지 머리를 찧어댔다. 서율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하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도혁의 태도는 여전히 서율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서율은 의자에 기대 잠시 더 앉아 있었지만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다. 결국 사무실을 나서 바깥 공기를 쐬러 가기로 했다.사무실을 나서
선홍빛 피가 지민의 몸에서 흘러나와 깨끗한 대리석 바닥을 물들였다. 그 모습은 섬뜩할 만큼 충격적이었다.서율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어두운 색 정장을 입은 도혁이 마침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도혁은 계단 아래에 쓰러져 있는 지민을 보고 순간적으로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지민아!” 도혁은 서둘러 다가가 지민을 안아 올리며 명령했다. “구급차 불러!”...병원 응급실, 붉은 비상등이 번쩍이는 가운데 도혁의 얼굴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그의 표정은 무겁고 차가웠다.“문서율, 틀림없이 네년 짓이야! 네가 지민을 밀었겠지, 이 악독한 여자야!”지민의 소식을 듣고 병원에 달려온 효연은 서율의 코앞에서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지민을 죽이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질 않나 봐! 세상에 너만큼 역겨운 사람도 없겠지! 진짜 양심이란 게 있긴 하니?”서율은 차갑게 효연을 쳐다보았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원수라도 되는 듯한 얼굴이었다. “양심이 없는 건 효연 씨가 1등일 거예요. 그러니 효연 씨와 비하면 난 아직 멀었네요. 그리고 악독한 걸 따진다면 전 효연 씨의 1/1000도 따라가지 못할 거예요.”서율의 눈빛에는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정작 본인이 가장 악독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그토록 대놓고 비난하시다니, 효연 씨는 정말 부끄러운 줄 모르시나 봐요.”서율의 조롱 어린 말은 욕설 한마디 없이도 날카로운 비수처럼 효연의 심장에 꽂혔다. 효연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이성을 잃은 채 서율을 노려보았다. “오늘 내가 지민을 대신해 널 혼쭐 내줄 거야!” 효연은 손을 치켜들고 서율을 향해 다가갔다.서율은 태연하게 말했다.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면 솔직히 말해요. 자꾸 다른 사람을 핑계 삼는 건 참 격 떨어지거든요.”“문서율!” 효연은 거의 이성을 잃은 듯한 목소리로 서율의 이름을 부르며 고함쳤다. 병원 전체에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그만해.” 효연의 손목이 갑자기 누군가에게
효연은 서율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최근의 서율은 예전처럼 당하고만 있지 않고 모든 말에 똑 부러지게 대응해 왔다.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효연의 기세를 꺾어버렸다.도혁은 서율을 쳐다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서율은 담담하게 그와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난 밀지 않았어. 지민 씨가 발을 헛디딘 거야.”“그럼 왜 하필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나랑 이야기하고 싶어 했지만, 난 그 여자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거든.” 서율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날 다급히 막으려다 발을 헛디뎌 굴러떨어진 거야.”도혁은 말없이 서율을 쳐다보았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감정을 읽기 어려웠고, 주위의 온도마저 서늘해지는 듯했다. 도혁의 표정에서 의심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서 믿지 못하는 듯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계단에서 넘어지는 일은 흔치 않으니까.숨이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효연도 잠시 불안한 표정을 보였지만, 서율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도혁과 눈을 맞추었다. 그녀의 눈빛은 맑고 당당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마침내 도혁은 시선을 돌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은 내가 직접 확인할 거야. 문서율, 네 말이 사실이길 바랄게.”잠시 후, 수술실의 불이 꺼졌다. 지민은 다행히도 경미한 뇌진탕을 입었을 뿐, 며칠 병원에 머문 후 집에서 요양하면 된다는 진단을 받았다....지민이 깨어났을 때, 병실은 조용했다. 호화롭고 아늑한 병실 내부를 둘러보던 그녀는 옆에서 졸고 있는 효연을 발견했다. 지민의 눈길이 병실을 한 번 훑고 지나갔지만 그녀가 보고 싶어 했던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효연은 그녀가 깨어난 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지민아, 드디어 깼구나.” 효연은 서둘러 다가가 물 한 잔을 따라 그녀에게 건넸다. “어때, 아직도 머리가 아파?”지민은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물었다. “괜찮아. 그런데 도혁은 어디에 있어?”효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그녀의 미간
효연의 말은 과장도 모자라 아예 사실을 뒤바꿔버렸다. 도혁이 자리를 비운 이유가 서율에게 붙잡혔기 때문이라는 말도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도혁은 그저 사건의 경위를 확인하러 갔을 뿐이었다. 물론, 효연이 사실을 말할 리는 없었다. 그녀는 서율을 몹시도 증오하고 있었고, 하루빨리 서율이 도혁과 이혼하기를 바라고 있었다.도혁은 과거에 늘 지민 덕분에 효연의 편을 들어줬지만, 지금의 도혁은 서율의 말을 믿었기에 효연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서율에게 여러 차례 당한 경험 때문에 서율에 대한 증오는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효연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지민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랜 세월 친구로 지낸 덕에 효연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지민이었다. 그녀는 효연의 말이 사실과 다름을 이미 알고 있었다.“효연아, 나 좀 혼자 있고 싶어. 잠시 나가줄래?” 지민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효연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지민아!”“나가줘.” 지민은 다시 한번 조용히 말했다. 효연은 못마땅했지만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다음 날, 도혁이 지민의 병실을 찾았다. 그와 함께 서율도 동행했다. 마침 병실에서 사과를 깎고 있던 효연은 도혁을 보자마자 반갑게 웃으려다, 뒤따라 들어온 서율을 보고 표정이 굳어졌다.“문서율, 네가 여길 왜 온 거야?” 효연이 날카롭게 외치자 서율은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효연 씨, 제 귀는 멀쩡해요. 소리 좀 낮춰주시죠. 이렇게 시끄럽게 소리치는 모습은 정말 보기 좋지 않네요.”“문서율, 너...” 효연이 불같이 반응하려던 순간, 지민의 차분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효연아.”지민의 눈치를 본 효연은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서율은 가져온 과일 바구니와 꽃을 병실 한쪽에 내려놓으며 조용히 물었다. “지민 씨, 몸은 좀 어떠세요?”지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별일 없어요. 와줘서 고마워요.”지민의 평온한 표정과 말투에 효연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별일 아니야. 내일이면 퇴원할 수 있어.”“그래,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알겠어.”두 사람은 짧게 대화를 나눴지만, 서율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자 효연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도혁을 쳐다보며 말했다. “도혁 오빠, 문서율이 지민을 밀어서 계단에서 떨어뜨렸다고요...”그러나 도혁은 그녀의 말을 끊고 지민을 깊은 눈빛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서율이 정말 밀었어?”서율은 가져온 꽃을 가만히 손질하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도혁이 이미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굳이 지민에게 다시 묻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지민이 밀었다고 말한다면, 그는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서율에게 책임을 묻기라도 할까?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서율은 알고 있었다. 도혁에게 지민은 절대 가벼운 존재가 아니었다. 지민은 도혁의 생명의 은인이었고, 서율 대신 선택하지 못했던 과거의 상처가 담긴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민을 향한 감정은 단순하지 않았다. 어쩌면 서율의 억울함을 통해 지민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내려는 건 아닐까?지민은 도혁의 차가운 얼굴을 쳐다보며 조용히 물었다. “도혁아, 설마 내가 일부러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거야?”도혁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난 그런 말을 한 적 없어.”“하지만, 그게 네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인 거잖아.” 지민은 슬픔이 뒤섞인 표정으로 속삭였다. “도혁아, 설마 내가 서율 씨를 모함하려 했다고 생각한 거야?”“아니. 당시 너희가 가까이 있었고 몸이 부딪쳤으니 오해한 걸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거지.”“오해라고?” 지민은 믿기지 않는 듯 도혁을 쳐다보았다. “도혁아, 설마 내가 아니라 서율 씨를 믿고 있는 거야?”도혁의 목소리는 낮고 냉정했다. “난 사실만 믿어.”지민은 그 말을 듣고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차가운 감정이 마음을 얼어붙게 하고, 마치 얼굴을 세게 얻어맞은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한동안 도혁을 바라보던 지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서율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번졌다. “지민 씨는 왜 그쪽에 CCTV가 없다고 생각한 거죠?”지민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며 당황한 빛을 띄었다. 이내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닫고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 저도 서율 씨를 오해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깨어나자마자 효연에게 확인해 달라고 했는데... 그쪽에는 CCTV가 없다고 하더라고요.”본능적으로 핑계를 댔지만, 서율의 평온한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지민 씨는 제가 당신을 밀었다고 확신한 건가요?”지민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곳에 정말로 CCTV가 있는 건지 아니면 서율이 속임수를 쓰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확인했을 때 분명 그 위치에는 CCTV가 없었다. 그래서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밀려왔다.지민은 깊은숨을 들이쉬고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서율 씨, 사실 저도 당신이 의도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지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효연이 비웃으며 소리쳤다. “지민이가 누구 때문에 업무에서 몇 번이나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번에 또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우연이라니, 그 말을 누가 믿어?”서율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답했다. “효연 씨, 제가 지민 씨를 일부러 곤란하게 한 게 아니라, 지민 씨가 업무 중에 실수한 일이 있을 뿐입니다.”효연은 차갑게 웃으며 대꾸했다. “일을 조금 실수했다고 무릎을 꿇게 만들다니, 그게 당연한 거야? 자기가 여왕이라도 되는 줄 아나 봐?”서율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니요, 제가 말하기도 전에 스스로 무릎 꿇은 건지도 모르잖아요?”“문서율, 너...” 효연의 얼굴이 새빨개지며 서율을 향해 다가서려 했으나, 도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두 사람을 막아섰다.“그만해.” 도혁은 서율을 향해 경고의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문서율, 제발 일을 크게 만들지 마.”서율은 지친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먼저 문제를 일으킨 건 아니잖아.”지민은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
“정말 날 그렇게 믿었다면, 서율의 서류를 일부러 바꿔치기했냐고 묻지 않았을 거야. 지금도 그래... 내가 일부러 계단에서 넘어져 서율을 모함했다고 생각하는 거지?” 도혁의 목소리는 이성적이고 차가웠다. “지민아, 묻는다고 해서 의심하는 건 아니야.”지민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조용히 물었다. “도혁아, 설마 이혼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야?”도혁은 부정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혼할 수 없어.”지민은 그의 깊고 어두운 눈빛을 쳐다보며 물었다. “주식 문제 때문이야? 이제 남은 시간은 3개월뿐이야. 3개월이 지나면 서율과 이혼할 거야?”도혁의 눈이 잠시 흔들렸지만,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지민은 그가 망설이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 망설임은 곧 완전히 이혼을 결심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의 태도가 지민을 실망시켰다.지금 이 순간에도 머뭇거리고 있는데, 3개월 후에는 어떨까? 어쩌면 도혁은 정말로 이혼을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녀를 사로잡았다.지민은 차가운 표정으며 물었다. “도혁아, 설마 서율 씨를 사랑하게 된 거야?”도혁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지민은 이를 악물고 결심한 듯 최후의 수단을 꺼냈다. “도혁아, 난 널 구하려고 평생을 바쳐온 춤을 포기했어. 그때 너는 내게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고, 나는 너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지. 너는 그때 나에게 결혼을 약속했지만 결국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지민은 도혁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때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는 건 나도 알아. 그래서 원망하지는 않아. 하지만 이제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들이 사라졌잖아. 난 네가 그때 했던 약속을 다시 지켜줬으면 해... 내 부탁, 들어줄 수 있어?”병실 안은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지민은 언제나 강하고 현명한 여자기에 누구에게도 은혜를 빌미로 뭔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도혁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직감하고 이렇게 나선 것이다. 지민은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서율도 문미정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직 도혁과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당시 자신의 고집으로 결혼을 한 것이기에 지금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 것도 모두 자신의 선택 탓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문미정에게 자신의 힘든 상황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침묵하던 서율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엄마, 저 지금 회사에 있어요. 금방 갈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그래, 그래. 급하지 않으니 걱정 말고 천천히 와.]이미 S시에 도착한 문미정을 돌려보낼 수 없었기에, 서율은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집에 도착하자, 문미정은 이미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문미정을 보자 서율은 갑자기 코끝이 찡해지며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녀는 걸음을 서둘러 달려가 문미정을 꼭 안았다. “엄마, 미안해요.”이 사과는 3년이나 늦은 것이었다. 문미정 역시 오랜만에 딸을 보자 감정이 북받쳐 서율을 꽉 껴안으며 말했다. “율아, 엄마가 미안해. 그때 네가 좋은 집안을 가진 사람과 결혼하길 원하는 마음에 너의 행복을 우선시하지 못해서 미안하구나.”서율과 문미정은 서로를 안은 채 웃고 울며 오랜 시간 감정을 나눴다. 그렇게 한참을 지나, 두 사람은 차츰 마음이 가라앉았다. 문미정은 눈가의 눈물을 닦으며 서율을 살피더니 눈썹을 찌푸렸다. “율아, 너 예전보다 훨씬 말랐구나. 그동안 힘들었던 거니?”문미정의 걱정스러운 시선에 서율은 서둘러 말했다. “아니에요, 엄마. 제가 조금 살이 쪄서 요즘 다이어트 중이에요. 그래서 더 말라 보이는 거예요.”문미정은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리셨다. “요즘 젊은 애들은 몸 관리 신경 많이 써, 하나같이 마른 것들이 무슨 살을 뺀다고 그래... 아무리 봐도 전혀 안 쪘구먼.”문미정의 잔소리가 새삼스럽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미정은 주위를 둘러보며 궁금한 듯 물었다. “율아, 도혁은 어디 있니? 왜 안 보이는 거야?”서율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일이 좀 바빠서요. 그래서 일부러
어머니로서 자식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서율은 도혁의 ‘가식’이 정말로 불쾌했지만, 그가 사람을 달래는 데는 재주가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다. 심지어 서율도 문미정을 그토록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으니 말이다.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자, 서율의 얼굴에는 차가운 표정이 드리워졌다. “오늘 밤은 다른 곳에서 자. 내일 아침에 엄마한테 네가 일이 있어 먼저 출근했다고 말씀드릴게.” 도혁은 외투를 벗던 중 고개를 들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뭐라고?” 서율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동안 도와준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우리가 지금처럼 지내는 간 합당하지 않은 것 같아.” “왜 합당하지 않지?” “우리는 곧 이혼할 사이니까...” 서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혁이 차분히 말을 끊었다. “문서율,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라는 사실을 잊은 거야?” 서율은 차갑게 말했다. “곧 끝날 관계야.” “문서율.”도혁의 검은 눈동자는 깊고 차가웠다. 그는 서율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이렇게 서둘러 이혼하려는 이유가 뭐지? 다른 사람이라도 생긴 거야?” 서율은 당황한 듯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혁의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 “고지성, 네가 새로 만날 아니야?” 처음에는 황당하게 들렸지만, 서율은 이내 웃음이 나왔다. “정말 어이가 없네!” 서율은 차갑게 도혁을 쳐다보며 말했다. “변도혁, 네가 더러운 짓을 했다고 해서 나도 그런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너처럼 결혼 중에 불륜을 저지를 만큼 뻔뻔하지 않아.” 도혁은 차가운 눈빛으로 서율의 턱을 쥐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지성과는 언제부터 연락을 주고받았던 거야?” 서율은 그의 손을 떨쳐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너랑 상관없어.” 도혁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도혁은 옆에 있는 안전벨트를 꺼내 그녀에게 채워주었다. 서율은 잠시 얼어붙었다. 곧 도혁의 차갑고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안전벨트 매야지.” 이 광경을 지켜본 문미정은 도혁에게 더욱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율아, 조수석에 타더라도 안전벨트를 매야 한단다. 도혁이가 참 세심하구나.” 문미정이 없었다면, 서율은 아마 비웃었을 것이다. ‘하긴 세심하긴 해. 다른 여자의 물건이 당당하게 조수석에 잡을 정도로.’마치 지민이 그의 아내인 것처럼. 서율은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때 문미정은 도혁에게 슬며시 질문을 던졌다. “도혁아, 예전에 너한테 첫사랑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이 최근에 돌아왔다며?” 문미정의 말에 서율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도혁이가 지민과 함께 어울린다는 건 이미 비밀이 아니었다. 모두 도혁이가 지민에게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문미정이 이 일을 알게 된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반면 도혁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매우 차분하게 인정하며 말했다. “네, 지금 HS그룹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 문미정이 살짝 톤을 올리며 물었다. “그 아가씨가 어쩌다 HS그룹에서 일하게 된 거지?” “지민은 원래 무용을 전공했는데, 저를 구하다 다리를 다쳐 예전처럼 무용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귀국한 뒤, 제가 HS그룹 내의 가벼운 일을 맡겼습니다. 지민이가 제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갚아야 마땅합니다.” 도혁의 말은 매우 합리적이었다. 문미정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율 역시 그의 말에 딱히 흠잡을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문미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도혁아, S시에 네가 그 아가씨와 만난다는 소문이 돌던데... 아직 옛 정을 못 잊은 건 아닌지 걱정돼서 물어보는 거란다...” 도혁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저와 지민은 이미 끝난 관계입니다. 제가 서율과 결혼한 이
서율은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며 의아하게 물었다. “나에 대해 묻고 있었다고?” 도혁은 미묘한 눈빛을 보이며 말했다. “우리가 결혼한 지 3년이 되었지만, 고지성 씨만큼 잘 알지는 못하거든. 그래서 고지성 씨께 당신에 대해 좀 더 배우고 싶었어.” 지성과 서율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친구이니, 그들의 오랜 정은 부부 3년의 세월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도혁의 말을 듣자 문미정은 도혁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 들었고 지성에 대한 미안함이 들었다. 자신의 경쟁자에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공유한다는 것은 지성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문미정은 서둘러 말했다. “시간이 늦었구나. 피곤하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지성은 문미정의 앞에서 무언가 더 보여줄 수 없었기에 미소를 지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차에 타려는 순간, 서율은 문미정과 함께 뒷좌석에 앉으려고 했다. 그때 도혁이 갑자기 조수석 문을 열어 그녀에게 타라고 손짓했다. 서율은 그를 흘깃 쳐다보며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정말 연기 잘하네.’ 결혼한 3년 동안, 도혁은 한 번도 서율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조수석에 앉히지도 않았다. 한 번은 도혁과 함께 지옥순의 생신잔치에 참석할 때, 그녀가 조수석 문을 열고 앉으려 하자, 도혁은 차갑게 말했다. “뒷좌석에 타.” 그 이후로, 서율은 도혁과 함께 외출할 때 조수석에 앉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언제나 뒷좌석에 앉았다. 이제 와서, 서율은 조수석에 앉는 것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벌어진 일로 인해 문미정의 마음은 점차 도혁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아까도 문미정은 서율에게 도혁과 다투지 말라고 계속해서 타일렀다. 문미정이 있는 자리에서 도혁이 그녀에게 문을 열어준 이상, 서율은 그의 체면을 깎지 않기 위해 조수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안전벨트를 매려던 서율의 눈에 문 앞에 붙은 ‘전용 좌석’이라는 스티커가 들어왔다. 순간 멍하니
문미정은 서율을 쳐다보며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도혁을 데리고 온 건 사실 네가 아닌 도혁을 시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야. 네가 어릴 때부터 자존심이 강해서 힘든 일이 있어도 우리한테 잘 말하지 않잖니. 그래서 네가 도혁과의 관계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좋은지 의심스러웠거든.” “지성이는 참 괜찮은 아이야. 그동안 여자친구도 사귀지 않고, 부모님께서 아무리 결혼하라고 재촉해도 따르지 않았대. 그건 아마 아직 네가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일 거야.” “도혁이가 너에게 진심이라면, 지성의 마음을 일찍 정리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서율은 잠시 침묵했다. 서율도 지난번 지성과의 만남에서 그가 여전히 자신에게 미련이 남아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성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서율은 그를 오빠처럼만 여겼다. 그렇지 않았으면 도혁과 결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도혁과 이혼한다고 해도, 지성과는 이어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지성의 마음을 빨리 정리해주는 게 맞는 일이기도 했다. ... 지성은 계산을 마치자마자 뒤에 서 있는 도혁을 발견했다. 지성은 도혁을 보자마자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건 서율과 문미정 앞에서 보여준 따뜻한 모습과는 달랐다. “변도혁 씨, 아주머니와 서율이랑 함께 있지 않고 왜 여기 와 있어요?” 도혁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머니께서 지난번에 고지성 씨가 서율을 대접했다는 얘길 듣고, 이번에는 고지성 씨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며 저더러 계산하라고 하셨어요.” 도혁의 말에 담긴 도발을 느낀 지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변도혁 씨, 아무리 연기가 완벽해도 결국엔 연기일 뿐이죠. 아주머니를 속이는 건 몰라도, 나한테 와서 이런 말 하는 건 좀 가식적이지 않나요?” 지성의 비꼼에도 불구하고, 도혁은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연기라도 고지성 씨는 어머님을 어머님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저는 부를 수
서율은 거짓말이 들통날 상황을 생각하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도혁은 변함없는 표정을 유지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서율은 순간 당황하여 무의식적으로 도혁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오히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을 밀어 넣으며 열 손가락을 깍지 끼듯 맞잡았다. 서율은 깜짝 놀라며 멍하니 몇 초간 움직이지 못했다. 도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메뉴를 주문했다. 서율은 도혁의 손짓에 온 신경이 쏠려 그가 무엇을 주문하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도혁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손을 더 세게 쥐었고 서율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다. 도혁은 자신이 이 상황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걸 아는 듯, 더욱 장난스럽게 그녀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서율은 당장이라도 화를 낼 뻔했지만, 간신히 참고 있었고 얼굴은 이미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성은 서율의 변화를 눈치채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서율아,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졌어? 더운 거야? 에어컨 온도를 좀 더 낮춰줄까?” 서율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지금 온도가 딱 좋아.” 지성은 그녀가 거절하자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도혁도 서율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느낀 듯, 메뉴를 다 고른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서율은 정말이지 그 자리에서 물컵을 들어 도혁의 얼굴에 물을 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지성과 문미정은 그들의 상황을 알아채지 못한 듯, 최근의 일상이나 업무에 대해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며 웨이터가 음식을 가져왔다. 서율은 그제야 자신이 아까 도혁의 손에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메뉴 주문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율의 머릿속은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녀는 이제 문미정에게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웨이터가 가져온 음식을 본 순간, 서율은 할 말을
지성은 문미정과 서율을 보자마자 온화하게 인사를 건넸했다. “아주머니, 서율아.” 곧이어 그의 시선이 함께 온 도혁에게로 향했다. 이미 사전에 이야기를 들은 듯, 지성은 전혀 놀라지 않는 표정이었다. “변도혁 씨, 반갑습니다.” 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지성 씨, 오랜 만이네요.” 지난번 만남의 기억이 아직 생생했다. 서율은 지성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 일 이후로, 지성과 도혁 사이에는 은근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서율은 두 사람을 만나게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다시 이렇게 마주치자 머리가 아팠다. 서율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이미 결혼했는데, 엄마가 혹시 아직도 지성 오빠와 나를 이어주려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런 생각이라면, 왜 변도혁까지 데리고 온 걸까?’서율은 무심코 문미정을 흘끗 쳐다보았다. 문미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안심하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문미정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지성이가 예약한 방으로 들어간 네 사람은 각각 자리에 앉았다. 문미정은 먼저 지성의 할아버지와 부모님의 건강에 대해 물었고, 지성은 미소를 지으며 차근차근 대답했다. 이때 웨이터가 메뉴판을 가져와 주문을 부탁했다. 문미정은 메뉴판을 받아 들고 도혁에게 건넸다. “엄마랑 서율이 입맛이 비슷하니까, 서율이가 좋아할 만한 요리를 몇 가지 골라주면 돼.” 서율은 단번에 문미정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문미정은 그들이 연기한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쉽사리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방법으로 그들의 관계를 시험해보려는 것이었다. 도혁이가 서율이 좋아하는 음식을 모른다면, 그들이 친밀한 사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서율은 지난번 식사 때 도혁이가 자신의 취향을 전혀 모르던 상황이 떠올라 마음이 답답해졌다. 아마 이번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모를 것이라 생각
서율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더 이상 도혁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도혁도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기에, 둘은 묵묵히 차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LJ그룹 건물에 도착하자, 서율은 간단히 감사 인사를 건네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로 향했다. ... 사무실에 도착한 서율은 바로 육경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S시에 온 거 알고 있었어?” 핸드폰 너머에서 경남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들려왔다. [나도 어제 알았어. 엄마가 너 혼자 지내는 게 많이 걱정되셨나 봐. 네가 혹시 힘들어하고 있진 않은지 보러 오신 거래.] 서율은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오빠, 나랑 변도혁이 곧 이혼할 거라는 걸 엄마에게 말해야 할까?” 경남은 미소를 머금은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이혼을 결심했다면, 이혼 후에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율은 그의 말에서 뭔가를 느끼고 다시 물었다. “오빠 말은, 지금 이혼한다고 하면 엄마 아빠가 반대할 거라는 뜻이야?” 경남의 목소리에는 가벼운 웃음이 담겨 있었다. [엄마 아빠는 그렇게 완고한 분들이 아니야. 하지만 네가 이혼을 하겠다고 하면 당연히 이유를 물어보시겠지. 단순히 성격 차이라고 말하고 넘기려는 건 거의 불가능할 거야.][네 잘못이라면 엄마 아빠는 결혼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며 널 혼낼 거야. 반대로 도혁의 잘못이라면, 엄마 아빠가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잖아.][게다가 변도혁이 이혼에 동의할지도 의문이야. 내가 보기엔 네 남편, 그렇게 쉽게 물러날 사람은 아니야. 변도혁이 진지하게 나오면 너 혼자 상대하기 어려울지도 몰라.] 경남의 말에 서율은 아침에 도혁이 자신을 유혹하려던 장면이 떠오르며 마음이 더 답답해졌다. 서율은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오빠, 엄마 보러 안 올 거야?” [이미 엄마랑 통화했어. 변도혁은 네가 누구인지 아직 모르는 것 같아서, 그 문제로 싸울까 봐 당분간 나서지 말자고 하시더라.] S시에 오기 전까지 경남은 부모와 함께
서율은 발걸음을 잠시 멈춘 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서율은 그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표정은 완벽하게 차분함을 유지했다. 도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데려다 줄게.” “괜찮아.” 서율은 자기도 모르게 거절했다. “혼자 가도 돼.” “율아, 도혁이가 너를 데려다주겠다고 하니, 그냥 그렇게 해.” 문미정은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부는 서로 미워할 시간이 없단다.” 문미정은 서율이 도혁에게 서운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두 사람이 다투었다고 오해한 듯했다. 서율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문미정의 기대 어린 눈빛을 보고 차마 더 이상 거절하지 못했다. 집을 나서려는 순간, 도혁이 서율의 손을 잡았다. 서율은 깜짝 놀라며 표정이 굳어졌다. “변도혁, 지금 뭐 하는 거야?” 도혁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렇게 해야 어머니가 우리가 잘 지낸다고 믿으실 거야.” 그 말이 맞긴 했지만, 서율은 방금 일어난 일 때문인지 도혁에게 더 거부감이 들었다. 서율은 그의 손을 몇 번이나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손을 놓지 않았다. 문미정이 뒤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서 서율은 더 이상 무리하게 저항할 수 없었기에 결국 도혁의 손을 잡고 집 밖으로 나왔다. 서율은 도혁과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도혁은 여태껏 한 번도 서율의 손을 잡은 적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손을 잡는 것은 서율에게는 처음이었다. 너무나도 가까운 스킨십이었기에,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문미정은 현관까지 나와 그들이 손을 맞잡고 떠나는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차에 타자마자, 서율은 도혁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차갑게 말했다. “변도혁, 약속을 어겼네.” 도혁은 살짝 긴 속눈썹을 움직이며 서율을 보았다. “뭐?” 도혁이 모르는 척하자 서율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어젯밤에 나랑 약속했잖아. 나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똑똑. 그때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율아, 엄마가 아침 준비 다 했으니 얼른 내려와서 아침 먹어.” 서율은 문미정의 목소리를 듣고 당황하며 황급히 옷의 단추를 채웠다. 그녀는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도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잡아주려 했다. 그러나 서율은 그의 손길을 피했다. 이 방에선 단 1초도 더 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서율이 답을 하지 않자, 문 밖에 있던 문미정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듯했다. “율아, 일어났니? 빨리 안 일어나면 회사 늦겠어...”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엄마, 방금 일어났어요. 세수하고 금방 내려갈게요.” 서율의 모습을 본 문미정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서율은 옷매무새가 엉망이었고, 입술은 붉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상황을 알아차린 문미정은 얼굴이 빨개지며 서율보다 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너 출근 늦을까 봐 깨우러 왔지 뭐야... 어, 어서 준비해. 엄마는 먼저 내려갈게!” 그렇게 말하고는 도망치듯 떠났다. 서율이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도혁은 이미 옷을 다 입고 평소처럼 평온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도혁은 서율이가 돌아온 것을 보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씻고 와. 난 먼저 내려가 있을게.” 서율은 그와 대화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녀는 급히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도혁은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보더니 방을 나섰다. 그가 떠난 후, 서율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엉망진창인 모습을 확인했다. 붉게 부어오른 입술, 잘못 잠근 셔츠 단추,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문미정이 자신을 보고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서율은 수치심에 눈을 질끈 감았다. 눈만 감으면 도혁과의 아찔한 순간이 떠올랐고, 그 기억이 그녀를 괴롭혔다. 만약 문미정이 문을 두드리지 않았더라면,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