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민은 채림을 따라 창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때 창고 앞에 서 있던 주민이 고개를 숙이며 사람들에게 말했다.“아니요. 모두 자세히 확인했는데, 유통기한이 지난 약품은 없었어요.”“없었다고? 하나도?”“네, 하나도.”창고에서 나온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여전히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창고로 뛰어들어가 확인했다. 물론 현지 주민들 중 문화 수준이 높지 않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지만, 유통기한을 확인하는 건 그들에게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이 약품들은 모두 최근에 생산된 거라 유통기한이 지나려면 아직 멀었다.“이제 다들 안심하셨죠?”채림과 경민은 사람들을 지나 커다란 바위 위에 우뚝 섰다.“제가 약속드리죠. BM 그룹 의료팀은 설립 초기부터 어질고 착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치료하고 살리자는 취지를 고수해 왔습니다. BM 그룹은 영원히 이 취지를 어기지 않을 겁니다.”채림의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소란스러움은 점차 가라앉았다.“다들 진정하고 생각해 보세요. 만약 여러분 말씀대로 BM 그룹이 정말 자선쇼를 벌이려던 거라면 결과를 누구보다 중요시하지 않았을까요? 의료사고가 나면 공들여 준비한 자선쇼를 망치는 건데, 그건 쇼를 하는 의도를 망치는 행위 아닌가요?”채림의 말에 사람들은 점차 진정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확실이 맞는 말이었다.“다들 제 말 들어보세요.”그때, 맨 뒤편에 서 있던 주민들은 명망 있는 옆 마을 이장도 이곳에 와있다는 걸 발견했다.이춘덕은 채림의 옆에 서서 소개했다.“이분이 백 회장님 따님이세요. 우리 마을이 이 정도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게 모두 백 회장님이 후원해준 덕분이라는 건, 다들 아시죠?”“백 회장님이 어떤 분이셨는지는 제가 잘 압니다. 그분은 임종 직전까지 부하직원들에게 우리 마을데 대한 후원을 끊으면 안 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심지어는 BM 그룹이 망하는 한이 있어도 후원은 아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그런 분이 일궈 세운 기업이 어떻게 양심도 없이 유통기한이 지난 약품을 사용하겠습니까? 모두 오해입니다.
채림이 차에 올라타는 동시에 강현은 차에서 내렸다. 결국 차에는 채림과 강현만 남겨 되었다.“문 대표님...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채림은 이토록 황량하고 외진 산지에서 지후를 만난 게 너무 이상했다.채림이 약간 멍해 있을 때 지후가 입을 열었다.“집에 온다더니 왜 안 왔어요?”“네?”채림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 때문에 왔다고? 고작 그런 이유로?’“저는 무슨 일로 찾으셨어요?”채림은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특별한 일은 없고요, 마침 후원하던 지역에 시찰을 나왔다가 채림 씨도 여기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들렀어요.”지후는 눈을 내리깔며 채림의 눈을 피했다.“아.”채림은 나른하게 겹쳐진 지후의 두 다리를 멍하니 보더니 입을 오므리고 한참을 망설였다.“할 말 있으면 해요.”지후가 귀찮은 듯 말을 툭 내뱉었다.“다리가...”“가문에 유필규 선생 같은 명의가 있는데, 내 다리 하나 못 고쳤을까 봐요?”지후는 차갑게 되물었다.“그리고 다 알면서 뭘 물어요?”‘알면서 묻는다고? 뭔 말이지?’하지만 유필규 선생님의 의술이 뛰어나다는 건 백 번 동의했다.“그럼 전에는 왜 계속 휠체어에 앉아 다녔어요?”채림이 다시 물었다.“전에 확실히 다쳤었는데 나중에 완치되었요. 최근 몇 년 동안 외부에 비밀로 한 건, MS 그룹의 전략이었고요.”지후는 간단하게 설명했지만 그의 말투는 매우 진지했다.채림은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MS 그룹이 세계로 몸집이 뻗으면서 적수도 점차 많아졌을 거다. 그런데 만약 지후가 장애인이라면 약한 척하면서 다른 세력을 잡아먹기 쉬워진다. 이 도리는 채림도 알고 있다.“그런데 이제는 왜 숨기지 않으세요?”채림은 여전히 궁금했다.지후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깊은 눈동자로 채림을 바라봤다.채림은 왠지 모르게 그 눈빛을 피하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게, 지후의 눈을 보고 있으면 뭐라도 잘못한 것처럼 가슴이 쿡쿡 찔렸으니까.‘아까 그 눈빛은 뭐지? 설마... 나 때문이라는 건가?’채림은
“피곤하면 먼저 자요.”지후는 채림의 눈빛을 읽은 듯 모처럼 스윗하게 배려했다.“산지라 저녁에 위험할 거예요. 저기 저 경호원들이 둘둘씩 교대하며 지킬 거예요.”그 말인 즉, 사나와 지후가 각각 텐트 하나씩 차지하고 나머지 넷은 둘둘씩 번갈아 가며 휴식할 거란 말이었다.지후의 말을 이해한 채림은 그제야 바짝 긴장했던 정신을 살짝 풀었다.“전 아직 피곤하지 않아요. 우선 모닥불 좀 쬘게요.”모닥불은 활활 타올랐다. MS 그룹 경호원은 역시 괜히 뽑힌 게 아니었다. 그 짧은 사이에 어디서 이렇게 불이 잘 붙는 재료를 찾았는지. 산에 올라오기 전부터 미리 준비했을지도 몰랐다.지후는 모닥불 옆에 앉아 있었다. 채림은 원래 그의 맞은편에 앉으려고 했으나 바람 방향 때문에 아예 앉아 있을 수 없어, 마지 못해 지후의 옆에 있는 돌멩이 위에 앉았다.“씁.”다리를 구부리고 앉던 채림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지후는 곁눈질로 채림의 다리를 보더니 덤덤하게 물었다.“아까 다친 거예요?”“괜찮은 것 같아요.”채림이 대답했다.지후는 입을 오므리더니 귀찮은 듯 채림에게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채림의 바지를 걷어 올렸더니 흰 종아리는 이미 빨간 피로 물들어 있었다.지후의 손은 미세하게 떨렸고, 어두운 눈에는 안쓰러움이 잠깐 머물렀다 이내 스쳐지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소의 차가운 모습으로 돌아왔다.“바보예요? 문제 해결한답시고 바로 앞뒤 가리지 않고 마구 뛰어들어요? 그러다 무슨 일이라도 나서 돌아가지 못하면 어쩌려고요?”“...”채림이 대답하기도 전에 지후는 경호원더러 의료 상자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이윽고 그 안에서 요오드와 면봉을 꺼내 채림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순간 분위가는 약간 어색해졌다.그렇게 훤칠하던 남자가 평소의 위엄과 카리스마를 내려 놓은 채 제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갑작스러운 다정함에 채림은 서둘러 어색한 분위기를 풀려고 애를 썼다.“별거 아니에요.”그러다가 방금 전 저를 질책
무심코 두 손으로 제 가슴을 감싼 채림은 놀란 눈으로 텐트 안으로 들어오는 지후를 바라봤다.“얼른 나와요. 근처 산지가 불안정해서 위험해요.”지후의 말에 채림은 잠시 숨을 돌렸다. 그러고 나서 황급히 지후를 따라 텐트 밖으로 나왔다. 알고 보니 방금 전 산이 흔들린 건 산사태의 징조였다.“대표님, 길이 막혀 여전히 차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걸어가야 합니다.”강현이 다급히 달려와 난처한 표정으로 보고를 올렸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채림의 안색을 살폈다. 지후 역시 아무 말 없이 채림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상처는 괜찮아요?”“네.”채림은 단호하게 대답했다.강현은 약간 망설이는 지후를 흘긋거리더니 앞으로 나섰다.“사모님, 저희가 사모님을 들고 갈게요.”채림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절대 그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다.“어제 상처 치료 안 했을 때도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소독하고 붕대를 감은 상태예요.”채림은 말하면서 재빨리 제 가방을 정리했다.“뭘 꾸물거려요? 얼른 가요”말을 마친 채림은 백팩을 등에 멨다. 하지만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갑자기 등이 가벼워져서 확인했더니 커다란 손 하나가 가방을 빼앗어 들었다.“이리 줘요.”지후는 채림의 가방을 제 등에 메고 빠른 걸음으로 앞장섰다. 그 순간 채림의 마음에 일순 따뜻한 물결이 일렁였다.지후가 서 있는 걸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렇게 보니, 지후의 몸매는 윤재 못지 않았다. 윤재는 인기 남자 연예인들 중에서도 몸매가 가장 뛰어난 축에 속하는데, 지후의 몸매는 오히려 그보다도 더 매력 있었다.“내가 밟았던 곳을 밟아요.”앞에서 걷던 지후는 고개를 살짝 돌리며 당부했다.“똑바로 밟아요.”“어... 네.”채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지후의 뒤를 바싹 따라 가다 보니 처음으로 그에게서 침착함과 성숙함이 느껴졌다. 어떤 일에 직면하든 여유롭게 대처하는 모습은 그녀가 느꼈던 것처럼 MS 그룹 수많은 직원들에게도 안전감을 가져다줬을
남자들은 매우 평범하고 소박하며 사람냄새가 났다. 그 때문에 나른하게 누워 있는 여자와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채림은 속으로 상대의 신분을 짐작하더니 아무 내색도 없이 넌지시 물었다.“혹시 산계 마을 주민이세요?”남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는 댁들은 누구죠?”채림은 저와 일행의 신분을 대충 얘기하고, 자기 아버지가 산계 마을을 후원해 주던 백 회장이라고 덧붙였다.그제야 남자들은 채림에 대한 경계를 풀었고 말투도 누그러들었다.“은인의 따님이셨군요. 어쩐지 친절하시다 했네요. 저희는 도시에 일 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폭우를 만나고 차 바퀴도 터져 하루를 꼬박 걸어왔어요. 먹지도 마시지도 못해 힘들던 찰나에 마침 여러분을 만난 거예요. 안 그랬으면 집에 도착할 때까지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채림은 맞장구쳤다.“저희도 어젯밤 폭우 때문에 산에 갇혔어요. 옆마을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길도 막히고 걷기도 힘들어 저희도 고민중이었어요.”“아니면 먼저 우리 마을에 가는 건 어때요? 며칠 지나면 날도 개일 거고 길도 뚫릴 거예요. 그때 가도 늦지 않을 거예요.”세 남자가 열정적으로 초대했다.채림은 잠깐 고민하다가 뒤돌아 지후를 찾았다.“둘째 삼촌, 저분들 말도 일리가 있다고 봐요. 여기 산계 마을과 더 가꾸우니 우선 거기서 지내다가 날이 개이면 다시 출발하는 게 어때요?”지후는 차라운 눈빛을 보냈다.“또 영웅놀이 할 생각이에요? 여긴 H시가 아니에요.”채림은 지후의 숨은 뜻을 알아챘다. 이 낯선 곳에서 아무 준비도 없이 마음만 앞세워 행동하면 안 된다.“걱정하지 마세요. 저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에요.”채림은 지후를 향해 눈을 깜빡였다.“둘째 삼촌도 있는데, 두려울 거 뭐 있어요?”“...”지후는 입안에서 할 말이 맴돌았지만, 채림이 눈을 깜빡이는 모습을 본 순간 다시 목구멍으로 내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채림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더니 뒤돌아 세 남자에게 말했다.“그러면 길 안내 부탁드릴게요.”세 남자는 채림을 거의 경
“저 납치당한 거예요. 여기 사람 아니에요. 저를 데리고 도망쳐줘요. 저 집에 가고 싶어요.”여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흐느꼈는데 목소리는 낮지만 매우 절실했다.여자는 채림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달려들더니 채림의 손을 덥석 잡았다.“제발 구해줘요. 당신은 저 구해줄 수 있잖아요.”채림은 여자를 옆에 앉히더니 경계하는 눈빛으로 밖을 흘긋거리며 말했다.“어떻게 도망쳤어요?”“저 사람들이 이틀 동안 계속 저한테 약을 먹여 온몸에 힘이 안 들어갔었거든요. 아까 물 바꿔치기 해줘서 고마워요. 그 덕에 도망쳐 나왔어요. 저 집식구들 지금 술 마시고 있어요. 저 이러다가 오늘 바보와 결혼해야 해요...”여자는 말하면서 울음을 터뜨렸지만 감히 목놓아 울지는 못했다.“저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이따 신부 화장을 도와줄 사람이 올 거예요. 어떡해요?”여긴 산계 마을 주민들의 구역이라 채림도 강경하게 맞설 수 없었다. 시간이 촉박한 데다 일도 까다로워 채림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러자 여자는 채림이 저를 도와주기 싫어하는 줄 알고 울며 푸릎 꿇었다.“제발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저희 집 돈 많아요. 여기서 안전하게 빠져나가면 제 아빠는 분명 원하는 걸 다 들어드릴 거예요. 얼마를 원하든 말만 해요.”채림은 입을 오므리고 지후를 봤다. 안타깝지만 이 사람은 하필 돈이 넘쳐나도록 많았다.지후는 채림의 눈빛을 느끼고 그녀를 바라봤다.“어떻게 할 생각이에요?”“구해야죠.”채림은 짤막한 한마디를 내뱉었다.이렇게 젊은 여자가 이렇게 외진 산골 마을로 납치되어 바보에게 시집가야 한다니. 이대로 두면 여자는 남은 평생 출산 기계로 전락할 거고, 앞으로 어떤 시련과 가혹한 생활이 펼쳐질지도 모르는 일이다.여기서 그들을 만난 건 정말 어려운 기회다. 그런데 만약 그들마저 이 여자를 도와주지 않으면, 여자의 인생은 이대로 망칠 거다.강현은 지후가 반대하지 않자 옆에서 대답했다.“경호원들더러 이 여자를 데리고 도망가라고 할까요?”채림은 촛불이 켜진 방을 바라보며 잠
“음, 힘이 없다면 내가 도와주지.”부인은 인내심 있게 말하면서 채림이 입고 있던 옷을 하나둘 벗기기 시작했다. 채림은 순간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도망치는 사람들을 위해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했기에 상대가 저를 마음대로 다루도록 가만히 있었다.지금은 그저 옷장 안에 있는 사람의 인성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 알아서 눈을 감았으리라고...옷을 갈아입은 채림은, 화장을 하지 않았는데도 얼굴이 이미 발그르슴해졌다.부인은 채림을 거울 앞에 앉히더니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지금껏 살면서 이렇게 예쁜 아가씨는 또 처음 보네. 명훈이 물론 바보라지만, 바보에게도 복은 있나 보네!”여자는 혼자 구시렁거리며 낡은 싸구려 화장품을 채림의 얼굴에 펴 발랐다. 파우더를 바른 뒤 블러셔를 바르고, 풀어진 채림의 머리를 얹더니 싸구려 스프레이를 잔뜩 뿌려 모양을 고정했다. 결국 부인의 손길을 거친 채림은 빛 바랜 벽화 속 도자기 인형처럼 변했다.약 30분 뒤, 부인은 만족스러운 듯 화장품 상자를 닫더니 문 쪽으로 걸어가 밖에 대고 소리쳤다.“신부 준비 끝났어. 명훈아, 첫날밤 보내야지.”바깥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는, 헤실헤실 웃고 있던 명훈을 끌고 와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이 열리는 순간, 바보 같은 웃음을 짓던 명훈의 눈이 크게 휘둥그레졌다.“저 여자가 네 새색시야. 얼른 봐. 예쁘지?”부인이 조롱하듯 물었다.“예뻐요! 예뻐요!”명훈은 침을 꼴깍 삼키더니 채림을 덮쳤다.“어머머, 우리는 이만 가자고.”부인은 주위 구경꾼들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 순간, 명훈은 방 안에 있던 남자의 발에 걷어차여 멀리 내동댕이쳐졌다.“내 색시! 새색시!”명훈은 끊임없이 반복하며 채림을 덮치려고 했다.지후는 명훈을 또다시 발로 찼다. 명훈은 지후의 상대가 아니었다. 지후는 얼른 채림을 제 뒤에 보호했다.그때 문밖에 있던 사람들이 인기척을 듣고 다시 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역시 얌전하게 있지 않을 줄 알았어! 약 더 먹여
마침 도착한 이춘덕은 명훈네 집 마당에 들어와 소리쳤다.“이게 다 뭐 하는 겁니까? 백채림 씨는 우리 마을 은인의 따님입니다. 자선 활동하러 이곳에 온 분한테 무슨 무례입니까!”“그런데 저 여자가 명훈의 새색시를 풀어줬어요.”성훈은 여전히 달갑지 않았다.“백 대표님이 없었더라면 새색시를 살 돈이나 있었겠어요?”이춘덕의 말은 힘이 있었다.현장 사람들은 모두 냉정을 되찾았다. 생각해보니 이장의 말이 맞았다. 결국 낫과 호미를 들고 달려들던 사람들은 손에 든 도구를 모두 내려놨다.“사람이 도망쳤으면 쫓아가서 찾아와야지, 여기서 왜 시간만 낭비하고 있어요? 가만히 손 놓고 있다고 사람이 돌아오겠어요?”이춘덕이 말했다.“이장님 말이 맞아요.”성훈도 어느새 진정했는지 얼른 이웃을 불러 손전등을 들고 길을 나섰다.“이장님, 고마워요.”채림은 앞으로 다가가 진심이 담긴 인사를 건넸다.“나한테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다들 좋은 일 하는 건데요.”이춘덕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얼른 가요. 저 사람들이 이따가 사람을 찾지 못하고 돌아오면 또 시비를 걸 거예요.”채림은 연신 감사 인사를 하고 지후와 함께 집을 나섰다. 밖에 있던 강현과 경호원들은 얼른 두 사람을 엄호하며 산계 마을을 떠났다.이제 막 마을을 빠져나왔을 때, 채림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지후에게 말했다.“둘째 삼촌, 한 가지 일이 떠올랐는데, 혹시 삼촌 부하더러 사람을 끝까지 도와주라고 할 수 있어요?”“또 뭘 하려는 겁니까?”지후는 미간을 찌푸렸다.채림은 얼른 애교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새색시를 다시 찾아오는 건 불가능할 거고, 그 집안 사람들도 우리를 찾지 못하면 결국 또 인신매매를 할 거예요. 이런 악랄한 집단은 뿌리 채 뽑아서 감옥에 처넣어야 해요.”“우리 문씨 가문에서 아주 부처님을 들였군요.”지후는 불호령을 내리더니 손을 저으며 이 일을 강현에게 맡겼다.강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받들었다. 이어서 그 명령을 다른 경호원들에게 전달한 뒤, 조용히 채림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양아치들입니다.”사립탐정은 간단하게 요약했다.“하지만 백채림 씨 외모나 재산을 보고 노리는 건 아닌 듯합니다. 경매장에서 손쓰는 게 좋은 선택도 아니고요.”“그건 나도 같은 생각이에요.”채림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저 사람들의 배후가 누군지 아직 모르니, 당분간은 경솔하게 행동하지 마요. 상대가 오히려 경계할 지도 모르니까요. 몰래 저 둘을 감시하면 돼요.”“그런데 저놈들 위치가 하필 백채림 씨와 인접해 있어, 만일의 경우는 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사립탐정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안 그럴 거예요.”채림은 확신했다.“저들을 지시한 사람은 내가 망신당하기를 원하니, 경매장에서 악랄한 수법은 쓰지 않을 거예요. 우리 암호부터 정해요. 이따 내가 모자를 벗으면 그때 기회를 봐서 움직여요.”“네.”사립탐정은 짤막하게 답하고 뒤돌아서더니 자리에 들어서는 사람들 속에 재빨리 숨었다.채림도 얼른 자기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얼마 뒤, 두 남자도 잇따라 그녀 곁에 앉았다.경매가 시작되자마자 공개된 처음 몇 경매품을 채림은 그냥 지나쳤다. 경매에 참여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수중에 있는 가이드북만 살폈다. 그때, 경매사가 무대에 올라 말했다.“다음 경매품입니다.”불빛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대형 스크린에 아름다운 디자인의 왕관이 펼쳐졌다.이윽고 현장 스태프가 경매품을 무대 위로 가져왔다. 오래된 왕관에는 크기가 제각각인 유백색 진주들이 박혀 있어, 독특하면서도 우아한 아름다움을 뽐냈다.“여러분이 기대하셨던 왕관입니다. 왕자와 왕비의 50년 넘는 사랑을 증명한 물건이죠. 게스트분들 모두 이 왕관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 거라는 걸 잘 압니다. 그러니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열정적으로 경매에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지금으로부터 진주 왕관의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경매사가 무대 위에서 나무망치를 두드렸다.“경매가 4억부터 호가 시작하겠습니다. 번호판을 들 때마다 2,000만 원씩 올라갑니다.”경매사의 목소리는
“사나야, 그동안은 아무 생각 하지 말고 편히 몸조리해. 오경수의 화가 가라앉으면 이 일도 지나갈 거야.”진옥경도 딸을 위로했다.“우선 마음을 가라앉혀. 너도 다시 백씨 가문 아가씨 신분을 되찾아야지. 나와 네 아버지도 퇴로를 찾고, 새로운 백을 찾으면, 더 이상 백채림 모녀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어!”“정말이에요?”그 말을 들은 사나의 눈은 다시 생기가 돌았다.“당연하지, 엄마 아빠가 나서는데, 뭔들 못 하겠어?”진옥경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한가족은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그때, 병실 티비에서 갑자기 BM 그룹 의료팀에 관한 뉴스를 보도했다.그런데 맨 처음에 BM 그룹을 손가락질해대던 국면은 채림이 나타난 뒤 180도로 뒤바뀌었다. 백승호 부부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서둘러 밖으로 나와 대책을 논의했다.두 사람은 이제 더 이상 BM 그룹에 발붙일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이 DL 그룹에 아부하려고 생각했던 계략도 채림한테 완전히 간파 당할 줄은 몰랐다. 물론 CS 바이오 일은 아직 진옥경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DL 그룹과 계속 손을 잡는 건 이미 물 건너 갔다. 때문에 백승호는 DL 그룹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새로운 계략을 생각해야 했다.병상에 누워 있던 사나는 뉴스를 보면서 리모컨을 들고 있던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채림이 대중 앞에서 우쭐대는 꼴을 눈으로 직접 보니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더욱이 인터넷에는 백채림과 BM 그룹 칭찬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다.대중들은 백채림이 BM 그룹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게다가 얼굴마저 예쁜 데다 마음씨까지 착하고, 지혜롭기까지 하다며, H시가 이런 훌륭한 여성 후계자를 배출했다는 사실에 모두가 입을 모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사나는 더 이상 들어줄 수 없어 얼른 채널을 돌렸다. 그러다 마침 지금 방송되고 있는 현지 뉴스를 보게 되었다. 오늘 H시 전시회장에서 마침 그 진주 왕관을 경매품으로 내놓았다.채림이 그 왕관에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알고 있던 사나는 머리를 굴
추종현은 격분한 듯 말하고는 뒤돌아 민해란에게 말했다.“민 회장님, 가시죠.”“교수님, 먼저 가시면 제가 뒤따르겠습니다.”민해란은 경호원들에게 눈치를 주어 추종현을 모셔가게 하고는 대뜸 돌아서서 채림에게 물었다.“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한다던 건 또 뭔 소리고? 너 어디 다쳤어? 또 엄마한테 뭐 속이는 거 없어?”“엄마.”채림은 을른 웃으며 어머니를 달랬다.“봐요,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저 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확실히 말해.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 하지 말고.”민해란은 채림을 차에 태웠다. 차가 출발한 뒤 채림은 의료팀이 산지에서 겪었던 일을 대충 말해주었다.물론 산사태가 벌어진 상황을 조금 약화시켰지만, 민해란은 여전히 걱정되어 몇 번이고 캐묻고 나서야 긴장을 조금 늦추었다.“임 실장 얘기를 들어보니 네가 직접 산지에 약을 날랐다던데. 산길이 위험한 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위험할 줄은...”민해란은 한숨을 푹 쉬었다.“네가 총명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러면 오늘 추 교수님을 그냥 빼앗겼을 거야. 우리 채림이 많이 컸네.”채림은 활짝 웃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그러니까 엄마를 도와 부담을 덜어주는 건 당연하잖아요.”“이미 충분해.”민해란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네가 미스 글로벌 파티에서 우승을 따낸 뒤로, BM 그룹이 해외에서 얼마나 유명해졌는지 몰라. 최근에 엄마가 사업을 두 건 추진했는데, 상대가 글쎄 네 덕분에 BM 그룹을 알았대.”“그래요?”채림은 눈웃음을 쳤다.“그런데 명성이 높을수록 시기와 공격을 받을 거야.”민해란은 소중한 듯 제 딸의 손을 꼭 잡았다.“네가 BM 그룹에 가져다주는 이익이 많을수록 질투하는 사람도 많아질 테니까 조심해.”“걱정하지 마요. 엄마 딸 총명해요.”채림은 턱을 살짝 쳐들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약혼식에서 그런 해프닝이 벌어지고 난 뒤, 채림은 이원후를 떠나고 백사나의 얼굴을 진짜 얼굴을 알아봤으며 다친 발도 고쳤다. 그것도 모자라 혼자서 향수
한편, 스크린 속.기자는 유통기한이 지난 약을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으면,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인터뷰에 열기를 더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민은 오히려 놀라우리만치 냉정했고, 심지어 뜬금없이 피식 웃었다.결국 기자는 마지 못해 산지 주민이 손에 든 약을 카메라에 담았다.약병이 점점 확대되자 티비와 컴퓨터 앞에서 생방송을 보던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하지만...약병에 적힌 생산 날짜와 마감 날짜는 아무 문제 없었다.공상에서 민해란과 추종현을 둘러싼 기자들은 본인이 잘못 봤을까 봐 안경을 밀어 올리는가 하면, 눈을 비비댔다.현장에서 취재하던 기자도 당황한 듯 물었다.“어르신, 이 약이 혹시 BM 그룹 의료팀이 나눠준 건가요?”어르신들은 너도나도 고개를 끄덕였다.“아니면 우리가 어디서 이런 약을 얻겠어요?”“여기에 외부인이 전혀 없는데, 누가 우리를 위해 병을 고쳐주겠어요?”기자는 살짝 당황했다. 사실 그들은 DL 그룹 제보를 받고 BM 그룹이 유통 기한이 지난 약물을 사용한다는 소식을 취재하러 나왔다. 그런데 취재 도중 이런 반전이 숨어 있어 어떻게 상황을 마무리해야 할지 막막했다.그때, 다른 매체 기자가 나서서 말했다.“저희 측에서 방금 현지에 남아 있는 BM 그룹 의료팀 담당자와 연락이 닿아 그동안 의료팀이 현지 주민을 위해 진찰하고 처방한 영상과 사진을 입수했습니다. 저와 동료들이 비교해본 결과, BM 그룹이 이번에 주민들에게 나눠준 약품은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유통기한 마감일은 2년 뒤였습니다.”“권 박사님, 한마디만 해주시겠습니까?”기자는 마이크를 권경민에게 건넸다.그러자 경민은 카메라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산지 주민들이 방금 두 가지 고혈압약을 드시고 기침을 하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하셨는데, 이건 정상 반응입니다. 캡토프릴을 복용 시 나타나는 부작용이거든요. 현재 의학적으로 이런 부작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가끔 하는 기침은 인체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H시 국제공항.민해란이 추종현을 모시고 공항을 나올 때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지 모를 기자들이 갑자기 몰려와 그들을 겹겹이 에워쌌다.“추 교수님, 4년 만에 귀국하시는데 BM 그룹 회장님과 함께 귀국하신 건, 앞으로 BM 그룹을 위해 일한다는 뜻입니까?”“네.”민해란이 추종현 대신 대답했다.“추 교수님은 BM 그룹 약물 연구팀 고문을 맡아 BM 그룹의 발전을 도울 겁니다.”“일전에 DL 그룹도 교수님께 도움을 청했다고 들었는데, 왜 결국 BM 그룹을 선택했나요?”기자의 끈질긴 질문에 추종현은 안경을 밀어 올리며 말했다.“BM 그룹의 발전 계획에 마음이 동했습니다. 저와 BM 그룹의 이념 역시 일치하고요.”“혹시 DL 그룹과는 이념이 일치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기자들은 말끝마다 곤란한 질문을 던졌다.이에 민해란이 나서서 추종현을 도왔다.“죄송하지만, 추 교수님은 말주변이 뛰어나지 않습니다.”경호원더러 길을 트라는 눈짓을 보낸 민해란은 추종현을 데리고 떠나려 했지만, 그때 변형빈이 사람들을 데리고 그들 앞에 막아섰다. 이윽고 그는 추종현의 옆에 다가가 말했다.“추 교수님, BM 그룹의 위선적인 모습에 속으면 안 됩니다. 저희 DL 그룹은 비록 노이즈 마케팅에 능하지 않지만 절대 양심을 저버리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변 대표, 그게 무슨 말이죠?”민해란은 불쾌한 듯 따져 물었다.“BM 그룹 의료팀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설마 몰라서 그래요? 언제까지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변형빈은 자신만만한 듯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그때 기자가 갑자기 떠들썩해졌다.핸드폰으로 기사를 확인한 기자들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민해란을 바라보더니 결국 추종현에게 따져 물었다.“추 교수님, BM 그룹 의료팀이 가난한 산지 주민들에게 유효기간이 지난 약품을 사용한 소식이 터졌습니다. 본인 이익을 위해 남의 목숨을 마음대로 짓밟은 BM 그룹이 추구하는 이념이 정녕 추 교수님 이념과 일치한가요?”“뭐요?”추종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채림은 희고도 깨끗한 병실에 누워 있었다. 그제야 채림은 제가 죽지 않았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이곳 의료 시설은 그 시골 마을 조건으로 갖출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살짝 움직여보니 사지가 쑤시고 머리가 어지러웠다.옆 병실에 앉아 있던 경민은 그 인기척을 듣고 달려오더니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이제 정신이 들어요? 어때요? 몸은 좀 괜찮아요?”채림은 제 느낌을 대충 말했다. 그러자 경민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그럼 문제없네요. 머리가 어지러운 건 너무 오래 자고 오래 굶어서 그런 거예요.”“우리 안 죽었어요?”채림이 다급히 물었다.“당연하죠. 설마 지금 우리가 천당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경민은 농담조로 말하며 피식 웃었다.“여기 천당이 아니라 병원이에요.”“그럼 문... 제 둘째 삼촌은요?”채림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섞였다.“그분은 어제 가셨어요.”“안 다쳤어요?”“채림 씨와 비슷하게 가벼운 부상이에요. 그분은 더 빨리 회복했어요.”경민이 말했다.채림은 그제야 한시름 놓더니 한참 생각고는 다시 물었다.“그때 도대체 어떤 상황이었어요? 기억아 하나도 없어서 이미 죽은 줄 알았어요.”“말하자면 참 운이 따라줬어요.”경민은 감개했다.“사실 저도 정확히는 잘 모르지만, 우리를 구해준 마을 주민이 말해줬어요. 저희가 도망칠 때 마침 큰 구덩이를 지났었잖아요, 먼저 굴러 떨어진 바위가 그 구덩이에 들어가면서 나중에 멈춰서 뒤에서 굴러 내린 돌멩이를 막아줬대요. 만약 그런 우연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 바위에 깔려 죽었을 거예요.”“그럼 다친 사람이 있다는 말이에요?”걱정 섞인 채림의 물음에 경민은 고개를 끄덕였다.“채림 씨 둘째 삼촌의 부하 두 명이 좀 심하게 다쳤어요. 다리가 골절됐거든요. 그것도 그나마 다행이에요. 채림 씨 둘째 삼촌이 이미 그 두 분을 큰 병원으로 옮겼어요.”“아.”채림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또 시름이 놓이지 않아 물었다.“우리가 입원해 있으면 의료팀은 일을 어떻게 해요?”
날이 어슴푸레 밝아올 무렵, 채림은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 이미 지후와 강현은 먼저 깨어나 채림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채림은 그들을 보자마자 서둘러 짐을 챙기고 다시 길을 떠날 준비를 마쳤다.얼마 걷지 않았을 때, 맞은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왔다. 맨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권경민이었고, 그의 뒤에는 몇 명의 젊은이들이 따라오고 있었다.“백 대표님!”“여긴 어떻게 왔어요?”채림은 사람들과 가까워진 뒤 물었다.“이틀 동안 돌아오지 않아 현지 주민들이 찾아왔었어요. 하루 전에 폭우가 쏟아졌는데 이 일대는 산사태가 쉽게 일어나는 곳이라 지난 2년간 수차례 사고가 났다고 하면서요. 그 말에 다들 걱정돼서 찾아온 거예요.”경민의 설명에 채림은 싱긋 웃으며 그와 그 뒤에 있는 마을 주민들을 향해 말했다.“고마워요.”“이분은 누구세요?”경민은 채림 옆에 서 있는 지후를 보며 물었다. 그저께 소동이 일어났을 때에도 이 카리스마 있는 남자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때는 미처 누구인지 물어볼 겨를이 없었다.“이 분은...”채림은 고개를 들어 지후를 바라봤다. 지후 역시 고개를 숙인 채 채림의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다.경민은 아무래도 연예인 덕질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니, 당연히 윤재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게다가 채림 역시 지후의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아 한참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제 둘째 삼촌이에요.”“아, 둘째 삼촌. 안녕하세요.”지후는 얇은 입술을 오므리고 팔로 허리를 짚은 채 한참 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등 뒤에 서 있던 강현과 경호원들은 실수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와 연말 보너스라도 깎일까 봐 참느라 애를 먹었다.“우선 나가서 얘기해요.”채림은 어색한 분위기를 먼저 깼다.경민도 뒤에 있던 현지 주민들에게 말했다.“그럼 저희를 데리고 여기서 나가주세요. 부탁 좀 드릴게요.”그들은 현지 주민들을 따라 푹 꺼진 땅과 흔들리지는 출렁다리를 지나 옆 마을로 향했다.하지만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때,
마침 도착한 이춘덕은 명훈네 집 마당에 들어와 소리쳤다.“이게 다 뭐 하는 겁니까? 백채림 씨는 우리 마을 은인의 따님입니다. 자선 활동하러 이곳에 온 분한테 무슨 무례입니까!”“그런데 저 여자가 명훈의 새색시를 풀어줬어요.”성훈은 여전히 달갑지 않았다.“백 대표님이 없었더라면 새색시를 살 돈이나 있었겠어요?”이춘덕의 말은 힘이 있었다.현장 사람들은 모두 냉정을 되찾았다. 생각해보니 이장의 말이 맞았다. 결국 낫과 호미를 들고 달려들던 사람들은 손에 든 도구를 모두 내려놨다.“사람이 도망쳤으면 쫓아가서 찾아와야지, 여기서 왜 시간만 낭비하고 있어요? 가만히 손 놓고 있다고 사람이 돌아오겠어요?”이춘덕이 말했다.“이장님 말이 맞아요.”성훈도 어느새 진정했는지 얼른 이웃을 불러 손전등을 들고 길을 나섰다.“이장님, 고마워요.”채림은 앞으로 다가가 진심이 담긴 인사를 건넸다.“나한테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다들 좋은 일 하는 건데요.”이춘덕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얼른 가요. 저 사람들이 이따가 사람을 찾지 못하고 돌아오면 또 시비를 걸 거예요.”채림은 연신 감사 인사를 하고 지후와 함께 집을 나섰다. 밖에 있던 강현과 경호원들은 얼른 두 사람을 엄호하며 산계 마을을 떠났다.이제 막 마을을 빠져나왔을 때, 채림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지후에게 말했다.“둘째 삼촌, 한 가지 일이 떠올랐는데, 혹시 삼촌 부하더러 사람을 끝까지 도와주라고 할 수 있어요?”“또 뭘 하려는 겁니까?”지후는 미간을 찌푸렸다.채림은 얼른 애교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새색시를 다시 찾아오는 건 불가능할 거고, 그 집안 사람들도 우리를 찾지 못하면 결국 또 인신매매를 할 거예요. 이런 악랄한 집단은 뿌리 채 뽑아서 감옥에 처넣어야 해요.”“우리 문씨 가문에서 아주 부처님을 들였군요.”지후는 불호령을 내리더니 손을 저으며 이 일을 강현에게 맡겼다.강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받들었다. 이어서 그 명령을 다른 경호원들에게 전달한 뒤, 조용히 채림
“음, 힘이 없다면 내가 도와주지.”부인은 인내심 있게 말하면서 채림이 입고 있던 옷을 하나둘 벗기기 시작했다. 채림은 순간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도망치는 사람들을 위해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했기에 상대가 저를 마음대로 다루도록 가만히 있었다.지금은 그저 옷장 안에 있는 사람의 인성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 알아서 눈을 감았으리라고...옷을 갈아입은 채림은, 화장을 하지 않았는데도 얼굴이 이미 발그르슴해졌다.부인은 채림을 거울 앞에 앉히더니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지금껏 살면서 이렇게 예쁜 아가씨는 또 처음 보네. 명훈이 물론 바보라지만, 바보에게도 복은 있나 보네!”여자는 혼자 구시렁거리며 낡은 싸구려 화장품을 채림의 얼굴에 펴 발랐다. 파우더를 바른 뒤 블러셔를 바르고, 풀어진 채림의 머리를 얹더니 싸구려 스프레이를 잔뜩 뿌려 모양을 고정했다. 결국 부인의 손길을 거친 채림은 빛 바랜 벽화 속 도자기 인형처럼 변했다.약 30분 뒤, 부인은 만족스러운 듯 화장품 상자를 닫더니 문 쪽으로 걸어가 밖에 대고 소리쳤다.“신부 준비 끝났어. 명훈아, 첫날밤 보내야지.”바깥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는, 헤실헤실 웃고 있던 명훈을 끌고 와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이 열리는 순간, 바보 같은 웃음을 짓던 명훈의 눈이 크게 휘둥그레졌다.“저 여자가 네 새색시야. 얼른 봐. 예쁘지?”부인이 조롱하듯 물었다.“예뻐요! 예뻐요!”명훈은 침을 꼴깍 삼키더니 채림을 덮쳤다.“어머머, 우리는 이만 가자고.”부인은 주위 구경꾼들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 순간, 명훈은 방 안에 있던 남자의 발에 걷어차여 멀리 내동댕이쳐졌다.“내 색시! 새색시!”명훈은 끊임없이 반복하며 채림을 덮치려고 했다.지후는 명훈을 또다시 발로 찼다. 명훈은 지후의 상대가 아니었다. 지후는 얼른 채림을 제 뒤에 보호했다.그때 문밖에 있던 사람들이 인기척을 듣고 다시 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역시 얌전하게 있지 않을 줄 알았어! 약 더 먹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