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연관계가 없다니, 그게 말이 돼?’ ‘고영훈이 우리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가져다가 나와 비교하는 걸 내 눈으로 직접 봤는데!’‘설마 그 시신이 내가 아니라는 거야?’ ‘하지만 그 반지는 또 어디서 나온 거지?’ ‘게다가 시신에 있던 장미 모양의 태반도 내 것과 똑같았어. 아무리 봐도 그건 나일 수밖에 없는데.’ ‘양쪽 모두 검사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결과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지?’ ‘이 중간에 대체 어디에서 잘못된 걸까?’‘...’고영훈은 시신이 내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나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듯했다. 그러나 곧이어 내가 그를 배신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고영훈의 눈에는 다시 분노가 피어올랐다. “알았어요.” 그는 전화를 끊고 곧바로 다른 전화를 걸었다. “내가 부탁한 일, 어떻게 됐어?” [확인해 보니 강민아 씨가 Y 시행 티켓을 구매한 건 맞습니다만, 사설 운행 버스라 본인이 실제로 탑승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나는 속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그런 걸 산 적 없어!”“다 거짓말이야!” 나는 소리쳤지만, 아무도 내 외침을 들을 수 없었다. 고영훈은 차가운 얼굴로 전화를 끊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 “정말 대단해. 나를 이렇게 농락하다니.” 강주희는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 언니 너무 미워하지 마요. 아마도 나를 원망하고 있을 거예요.” “그동안 내가 언니의 자리를 차지하고, 부모님께 사랑을 받았으니, 언니도 마음이 편할 수는 없겠죠.” 고영훈은 강주희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너 때문이 아니야. 강민아가 욕심이 많아서 그래.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고도 더 많은 것을 바랐으니.” 나는 그 말을 듣고 차갑게 웃었다. ‘내가 욕심이 많다고?’ 내가 강씨 집안으로 돌아온 이후로는 성실하게 지내며 강주희의 자리를 넘보려는 생각은 애초에 한 적도 없었다. ‘애초에 내가 강씨 집안의 핏줄이었으
호텔 객실 안, 고영훈은 며칠 면도도 하지 못하고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고 헝클어진 머리로 소파에 반쯤 누워 있었다. 눈은 근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얼굴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고영훈의 곁에는 Y 시에서 나름대로 세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 하나가 서 있었다. “형님, Y 시 전역에 제 사람들을 풀어서 찾아봤는데요.” “제 능력이면 반나절 안에 형님께서 찾는 사람 소식을 알아낼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도 없으니, 그분 아마도 이미 이 세상에 없는 게 아닐까요?” 그 사람은 말하며 목을 그어 올리는 동작을 했다. “말도 안 돼!” 고영훈이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여기에 없는 것뿐이지, 이 세상에 없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어.”나는 고영훈이 왜 이렇게까지 내가 살아 있다고 확신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이 남자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싶지 않은 걸까?’ ‘설마 아직도 나를 신경 쓰는 걸까?’ 이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자마자 나는 스스로를 비웃고 말았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그가 나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기를 기대하다니, 정말 어리석기 그지없었다. ‘아니겠지. 이 사람이 정말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면, 내가 죽을 위험에 처했을 때 ‘그냥 죽어버려’라는 말을 할 수 있었겠어? 강민아, 이 멍청이!’ ‘...’Y시에서도 나에 대한 소식을 찾지 못한 고영훈은 낙담한 표정으로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경찰관님, 저... 신고하려고요.” 고영훈이 경찰서로 들어섰을 때, 한 중년 여성이 수줍은 듯 작은 목소리로 앞에 있던 경찰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경찰은 잘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고영훈이 다가가서 말했다. “아주머니, 무슨 일인지 제게 말씀해 보세요.”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자기 몸을 감싸며,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어떤 사람이... 사람이 죽었
나는 고영훈이 마치 영혼을 잃어버린 것처럼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을 보며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교차했다. 이 길은 결혼식 호텔에서 우리 신혼집으로 가는 길목으로, 이 길을 거치지 않으면 집으로 갈 수 없었다.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자 생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당시 나는 바로 이 근처에서 고영훈에게 도움을 요청했었다. 살인범의 눈을 피하려 애썼지만, 고영훈의 차가운 말 한마디가 살인범에게 내 위치를 들키게 했고, 결국 나는 목숨을 잃게 되었다. 고영훈은 억지로 자신을 진정시키려는 듯 주먹을 꽉 쥐었다. “결혼식 날, 강민아가 나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하지만 나는...” 그날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리자 그는 더 이상 회상할 수 없었다. ‘만약 강민아가 그 순간 정말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면, 내가 했던 그 말은 강민아를 지옥으로 내몬 것이나 다름없었을 거야!’ 고영훈은 머릿속의 상상을 떨쳐내며 신고자인 중년 여성을 향해 물었다. “혹시 더 기억나는 게 있어요? 그 당시 살인범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아니면 피해자가 무언가 말하지 않았나요?” 김재국은 고영훈의 긴장감을 눈치채고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 그리고 중년 여성을 향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그냥 절차적인 질문일 뿐이니, 천천히 기억을 떠올려 보세요. 놓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중년 여성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팀장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자 김재국이 고개를 돌렸다. 한 경찰이 증거물을 들고 뛰어오고 있었다. “팀장님, 피가 묻은 숄을 발견했습니다. 웨딩드레스의 일부로 보입니다.” 그 숄을 보자 나는 순간 멈춰 섰다. 그것은 바로 내가 결혼식 날 입었던 웨딩드레스의 숄이었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고영훈을 바라보았다. 고영훈은 온몸이 굳어 버린 채, 완전히 멍해 있었고,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김재국은 속이 상한 듯 신고자를 바라보며 약간의 원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일을 왜 그때 바로 신고하지 않았습니까?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아십니까?” 중년 여성은 몸을 웅크리고 떨며 고개를 숙였다. “저는 너무 무서웠어요. 그 사람은 온몸을 검은 옷으로 가리고 있었고, 얼굴까지 가리고 있었어요. 정말 무서웠습니다. 게다가 손놀림이 너무나도 날렵했어요...” 그녀는 꿀꺽 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이틀 동안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눈만 감으면 그 장면이 떠오르거든요. 더는 견딜 수 없어서 이렇게 신고하러 온 거예요.” 김재국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는 신고자를 비난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누구라도 그런 일을 목격했다면 두려움에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으니, 살인범이 언급했던 ‘민아’가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김재국은 신고자를 보호하도록 조처를 취한 뒤, 고영훈과 함께 경찰서로 돌아왔다. 경찰들은 즉시 근처의 모든 CCTV 기록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조사 시간을 고영훈의 결혼식 날로 맞추고 나니, 곧 CCTV 영상에서 내 모습이 발견되었다. 화면 속 나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두려움에 가득 찬 얼굴로 허겁지겁 뛰어가고 있었다. 내 뒤로는 온몸을 검은 옷으로 감싸고 얼굴을 가린 남자가 맹렬히 나를 뒤쫓고 있었다. 나는 공포에 질려 휴대폰을 들고 다급하게 전화하는 모습이었고, 얼굴에는 눈물이 가득했고, 절박한 표정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나는 곧 CCTV 사각지대로 들어가며 화면에서 사라졌다. 그 후로 더 이상 내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때, 고영훈은 책상에 손을 짚으며 간신히 서 있으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강민아는 거짓말하지 않았어. 그때 정말 위험한 상황에 부닥쳐 있었어!!!’ ‘하지만 그때 나는 너무 냉정했고, 차갑게 ‘그냥 죽어버려’라고 말했어!!
만약 내가 아직 살아 있다면, 고영훈이 나 때문에 이렇게 상심하는 모습을 보고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미 죽었고, 그것도 고영훈의 가장 사랑하는 여동생이라던 강주희 때문에 이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내가 살아 있을 때, 고영훈은 항상 강주희와 자신이 소꿉친구로 자랐으며 그녀를 가장 사랑하는 여동생처럼 여긴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이유로 나에게 여러 차례 소홀하게 대했으며, 나는 두 사람의 이상한 ‘남매 사이’ 때문에 고영훈과 숱하게 다투었다. 그런데도 고영훈은 여전히 나와 결혼하길 원했고, ‘연애 바보’였던 나는, 고영훈이 진심으로 나를 사랑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나는 고영훈의 마음속에 내가 정말 있었는지, 아니면 단지 정략결혼의 도구로만 여겼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문 앞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나를 생각에서 깨어나게 했다. 강주희가 다급한 표정으로 집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허둥지둥 고영훈에게 다가가 그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았다. “오빠, 무슨 일이에요?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신 거예요?” 강주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바닥에 널린 술병들을 훑어보고, 고영훈의 얼굴에 묻은 술을 닦아주며 말했다. “혹시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긴 거예요? 무슨 일이든 나에게 말해요.” 고영훈은 소파에 반쯤 누운 채로 셔츠 단추가 풀린 상태였다. 그의 눈은 반쯤 감겨 있었고,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분간하지 못한 채 강주희를 와락 끌어안았다. “민아야... 네가 돌아왔구나.” “내가 알고 있어. 너는 절대 날 떠나지 않을 거라고...” 고영훈의 품에 꼭 껴안긴 강주희는 잠시 얼굴에 증오를 드러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감추고 남자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오빠, 난 주희예요. 언니가 아니라고요.” 고영훈은 그녀의 말을 듣고, 점차 정신을 차리며 힘겹게 눈을 떴다. 자신이 끌어안고 있던 사람이 ‘강민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본능적으로 강주희를 밀쳐냈다.
‘만약 오늘 밤 이 두 사람이 정말 한 침대에 든다면...’ 그 결말을 상상하자, 나는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그래, 만약 그 둘이 그렇게 된다 한들 무슨 상관이야? 나는 이미 차가운 시체 보관소에 누워 있는 조각난 시체일 뿐,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데...’ ‘아니, 나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했잖아? 그런데 왜 아직도 이 사람들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 거야?!’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정리한 후, 한쪽에서 이들의 연극을 보기로 했다. 과연 강주희의 수작이 고영훈에게 통할지 지켜보고 싶었다. 나는 고영훈의 주량이 누구보다도 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 몇 병의 술은 고영훈에게 그저 입가심일 뿐이다. 강주희는 다시 술병을 건네며 말했다. “오빠, 조금만 더 마셔요.” 그러나 고영훈은 술병을 밀어내고, 소파에 엎드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강주희는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 “오빠, 괜찮아요? 영훈 오빠?” 남자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녀는 상의를 벗으며 소파 위의 고영훈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나... 정말 오빠를 좋아해요. 오빠와 평생 함께하고 싶어요. 언니가 오빠를 위해 했던 모든 일들, 나도 다 할 수 있어요.” 강주희는 고영훈을 힘겹게 일으켜 세우고, 그의 품에 몸을 맡겼다. 그러면서 그녀는 남자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오빠, 오늘 밤 모든 것은 내가 원해서 하는 거예요. 오빠가 책임지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래도 오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 그녀는 점점 고영훈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고,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 나는 눈을 감았다. 이런 추악한 장면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으악!” 그러나 내가 예상했던 소리가 아니라, 강주희의 비명이 들려왔다. 눈을 떠 보니, 고영훈은 맑은 눈빛으로 강주희를 바라보고 있었고, 강주희는 바닥에 넘어져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당혹감이 가득했다. “오빠, 지금 뭐 하는
어두운 조명 아래, 고영훈은 술에 취해 흐릿한 눈으로 눈앞의 강주희를 바라보았다. 예전의 강주희는 고영훈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존재였지만, 지금은 처제인 그녀가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졌다. 이 순간, 고영훈은 20년 넘게 함께 해온 강주희를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지금 그 말 무슨 뜻이야?” “별 뜻 없어요.” 강주희는 웃으며 대답했다. “이미 김 팀장님께서 언니가 사고를 당했다고 했으니, 이제 나도 더 이상 자매간의 정을 고려하지 않을래요.” “내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든 쓸 거예요.” 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고영훈의 헝클어진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영훈 오빠, 나 오빠 남자로 좋아해요.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해서라도 오빠를 꼭 가질 거예요.” 고영훈은 본능적으로 침을 삼키며 물었다. “내가 너를 좋아하지 않아도?” 강주희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오빠는 날 좋아해요. 다만 아직 그걸 깨닫지 못한 것뿐이에요.” “아마 언니 때문일 수도 있고,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언젠가 분명히 오빠도 날 좋아하게 될 거라고 믿어요.” 강주희는 웃으며 고영훈을 향해 손을 흔들고 나서 뒤돌아섰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고, 어두운 표정으로 별장을 떠났다. 어두운 조명 아래 강주희의 음산한 얼굴을 본 순간, 나는 귀신임에도 몸이 떨렸다. ‘만약 내가 정말 강주희의 손에 죽었다면, 이 죽음이 그렇게 억울하지는 않겠네.’ ‘강주희 같은 마음이 치밀하고 얼굴이 바뀌는 속도가 번개처럼 빠른 여자를 누가 당해낼 수 있겠어?’ 나는 속으로 계속 생각했다. ‘만약 내가 환생한다면, 그때는 강주희를 상대할 수 있을까?’ ‘내가 죽기 전에 시골에서 10년 넘게 살며 고생했고, 돌아와서는 간신히 금융학을 배워 경영을 익혔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어린 시절부터 호화로
나는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쳤고,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며 강주희를 노려보았다.‘설마...? 이 향초도 내 뼛가루로 만든 거야?’내 시신은 이미 조각조각 나뉘었고, 지금까지 내 머리는 여전히 찾지 못한 상태였다. ‘혹시 이 안에 내 머리의 뼛가루가 들어 있는 건 아닐까?’그 가능성을 떠올리자마자, 내 가슴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 눈앞의 강주희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을 만큼의 증오가 퍼져 나갔다.예전에는 단지 의심만 했을 뿐이지만, 지금 강주희의 눈에 서린 조롱의 빛을 보고 나는 확신했다.내 죽음은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는 강한 심증이 들었다.아니, 강주희가 처음부터 나를 제거하려고 계획했던 것이 분명했다. 나는 향초에서 벗어나 강주희를 향해 달려들려고 했지만, 내 몸은 그녀를 그대로 관통할 뿐이었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원망과 분노로 발을 동동 구르며 뛰어다녔다. ‘강주희, 너는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도대체 내가 너한테 무슨 잘못을 했길래, 나를 이렇게까지 증오하니?’ ‘이제는 내 뼛가루로 만든 향초를 내 가장 사랑했던 남자에게 선물하다니!’ ‘강주희! 네가 정말 나를 죽어서도 편히 쉴 수 없게 만들고, 끝끝내 나를 놓아주지 않는구나.’ 나는 붉어진 눈으로 강렬하게 강주희를 노려보았다. 내 시선이 칼이 될 수 있다면, 그녀는 이미 천 갈래 만갈래로 찢겼을 것이다. 내 분노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고영훈은 향초를 조심스레 받아들며 말했다. “고맙다. 마음 써줘서.” 나는 고영훈 앞에 서서 두 손을 휘저으며 외쳤다. “쓰지 마! 그거 내 뼛가루!” “내 말을 듣고 있어? 절대 쓰면 안 돼!!” 나는 미친 듯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소리치고 몸짓했지만, 결국 나 혼자만의 헛된 외침일 뿐이었다. 강주희는 떠나갔고, 고영훈은 향초를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나는 그저 텅 빈 머리로 아무 생각도 할 수
강주희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 이를 악물었지만, 나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고마워요, 작은어머니. 저 꼭 오래오래 살게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잔을 부딪쳤다. “그야 그렇겠죠. 욕 많이 먹을수록 오래 산다잖아요.” 강주희는 내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눈가가 붉어지더니, 곧 고영훈을 바라봤다. “오빠, 작은어머니가 나한테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 거예요?” “우리 강씨 집안이야 임씨 가문만큼은 못하겠지만, 제가 오빠랑 함께하는 게 이런 식으로 압박을 받아야 한다면, 이 약혼은 하지 않는 게 낫겠어요.” 강주희는 일부러 술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약간 숙이며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아휴, 저 눈물 연기 몇 번이나 본 거야? 이제는 좀 지겹다.’ 나는 하품을 참지 못하며 고개를 돌렸다. “굳이 내 앞에서 이런 연극을 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 앞으로 우리가 서로 엮일 일도 없을 거잖아요.” 나는 여전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고시환을 힐끔 바라보고, 의자를 당겨 일어섰다. “오늘 약혼식에 온 건 우리 남편 때문이야. 우리가 서로 얼굴 보기 싫어하는 건 분명하니까, 미안하지만 이만 갈게.” 뒤돌아 나가려는 순간, 고영훈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그는 내 얼굴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곧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작은어머니, 주희한테 사과하세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 나오며 손가락으로 귀를 파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봐?” “제가 주희한테 사과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작은어머니, 아까 말씀이 너무 지나치셨잖아요.” 고영훈의 말에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으며 주변 사람들을 둘러봤다. “지금 여기 계신 분들, 다 들으셨죠? 제가 누구한테 무례했다는 건데, 당사자 말고 또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 계시면 말씀 좀 해보세요.”나는 손가락으로 강
‘어차피 곧 이혼할 사인데, 앞으로는 서로 얽힐 일도 없겠지. 아마 두 번 다시 마주칠 일도 없을 거야.’ 주요석에 앉아 있던 고정한이 그 순간 고시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주변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다 들리도록 크게 말했다. “시환아, 너 하나 양과 벌써 혼인신고까지 했다며? 결혼식은 언제 올릴 거니? 이왕 여자 쪽에서 허락한 건데, 절대 서운하게 하면 안 된다.” 고정한의 말이 떨어지자, 이미 조용했던 예식장은 더더욱 적막에 휩싸였다.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고시환을 바라보며, 속으로는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뭐? 고시환이랑 임씨 가문의 임하나 양이 혼인신고를 했다고?” “전부터 그런 소문이 살짝 돌긴 했는데, 진짜였네.” “근데 아까 보니까 둘이 말도 안 하고, 웃는 얼굴도 안 보였는데. 둘이 대체 왜 갑자기 혼인신고를 한 거야?” “에휴, 너 그거 모르지? 고시환은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H 시에서는 힘이 없잖아. 그래서 H 시에 발붙이려고 그런 거지.” “임씨 가문이 고씨 가문만큼은 아니어도, H 시에서는 알아주는 집안이잖아. 고시환 저 사람, 야망이 대단하네.” 예식장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런 계산에 밝은 사람들이었다. 단 몇 초 만에 고시환과 나의 관계를 파악한 듯, 각자의 추측을 마친 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나는 주변의 시선에 전혀 개의치 않고, 그저 미소를 띤 고정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단하네. 그때 고시환이랑 고씨 가문의 본가에서 그렇게 싸우고,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으면서도, 지금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들 행세를 하고 있잖아.’ 나는 옆에 있는 고시환을 힐끗 보았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결국 내가 먼저 나서기로 했다. “아버님, 저희 젊은 사람들 문제에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 우리 영훈 조카 약혼식부터 잘 챙기시는 게 우선 아니겠어요?” 고정한은 한때 고씨 가문에서 그야말로 전설로 불
고시환은 손에 들고 있던 혼인관계증명서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 순간에 우리 사이에 묘하게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기, 약혼식 곧 시작할 것 같은데, 당신 빨리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고씨 가문의 일원인 고시환이 아무리 고영훈과 사이가 안 좋더라도, 주요 가족 행사에서 가족석에 앉지 않고 나와 이 구석에 있는 건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내 말을 들은 듯 주위를 한번 훑어보더니,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어? 뭐 하는 거야?” 고시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직 이혼 안 했잖아. 내 아내로서 나랑 같이 가야지. 괜히 뒷말 나오게 만들 순 없으니까.” “곧 이혼할 건데...”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남자의 손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사실 우리 결혼 소식은 이 상류층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고시환이 내 손을 잡고 주인석에 앉자, 모두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뜨고 수군거리며 고시환과 나의 관계를 추측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그때 손을 뿌리쳤어야 했는데... 이제 이혼하면 뒷말이 더 많겠네.’ ‘고시환이랑 엮였다는 걸 이제 알았을 텐데, 오늘 밤에 이혼 소식까지 돌면 얼마나 말이 많아질까?’ 나는 마음속으로 임씨 가문의 내 부모님에게 미리 사과와 기도를 했다. ‘제발 이 험담들을 잘 견뎌내게 해주세요...’ 고시환은 주인석에 앉아도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지만, 눈썹 사이엔 살짝 드러나는 불쾌감이 있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눈길을 주자, 그 순간 사람들이 수군거리던 소리가 뚝 끊기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입을 다물었다. 나는 고시환의 대응에 속으로 엄지를 치켜세우며 웃음을 참았다. ‘정말 대단하긴 하네.’ 그에게 한마디 장난스럽게 말하고 싶었다.‘이제 곧 남이
장연희의 한마디가 내 혼란스러운 마음을 단숨에 정리했다.‘맞아, 난 이미 죽음을 한 번 경험한 사람이잖아. 뭘 그렇게 겁먹고 있는 거지?’ ‘어릴 적 친구 하나쯤이야, 별로 대수로운 일도 아니잖아.’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나는 서둘러 준비를 마친 뒤, 고영훈과 강주희의 약혼식에 가기로 했다. 청첩장을 들고 예식장에 들어서자, 이리저리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모르게 긴장감이 스쳤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고시환을 찾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다.’ 안도감을 느끼는 동시에, 묘하게 내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졌다. ‘애초에 고시환은 고씨 가문을 싫어하고, 자신의 성을 혐오하는데, 여기 올 리가 없잖아.’ ‘그런데도 왜 이렇게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걸까?’ 며칠 동안 나는 일에 몰두하며 고시환에 대한 생각을 잊으려 애썼지만, 잠깐이라도 쉬는 시간이 생기면 그의 얼굴과 목소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문제는 내 마음이겠지.’ ...나는 예식장 한쪽 구석에 앉아 조용히 쉬고 있었다. 그때, 샴페인 잔을 든 남자 몇 명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아가씨, 전에 본 적 없는 얼굴인데요?” “H 시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계시다니, 어디 가면 또 뵐 수 있을까요?” 나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둘 다 잘생긴 편이긴 했지만, 고시환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다.나는 차갑게 말했다. “만나볼 마음 없으니까 돌아가세요.” 이런 상류층 모임에서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섞여 있는 법이다. 특히 조금이라도 돈이 있는 이른바 ‘재벌 2세’들은 자신들이 평범한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두 사람을 단칼에 거절하자, 그들의 표정에 약간의 불쾌함이 스쳤지만, 공공장소라 억지로 화를 참는 듯했다. “아가씨, 참 성격 있네요. 그런데 어느 집안의 아가씨예요? 혹시 내가 누군지는 알아요?” 나는 그를 힐끗 쳐다보고 기억을
청첩장에 적힌 내용을 읽으며 나는 살짝 놀랐다. ‘고영훈이랑 강주희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빠르게 약혼까지 하다니.’ 며칠 사이에 둘이 약혼식 날짜까지 잡았다니, 정말 예상 밖이었다. 강주희는 웃으며 청첩장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작은어머니, 꼭 시간 맞춰 오셔야 해요.” 약혼식은 열흘 뒤로 정해져 있었다. ‘그때쯤이면 나도 고시환과 이미 이혼했을 거야.’ ‘그땐 고씨 가문이랑 완전히 남이겠지.’ 그 생각이 들자, 나는 청첩장을 다시 강주희에게 밀어 돌려주었다. “나 지금 네 작은어머니 아니야. 곧 고시환 씨와 이혼할 거고, 그 이후로는 너희 고씨 가문 사람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을 거야.” 나는 강주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약혼 축하해. 네 약혼식이 순조롭길 바랄게.” 강주희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다시 한번 청첩장을 내 손에 놓으며 말했다. “그래도 언니잖아요. 반쪽짜리 언니라도, 꼭 와줬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초대하려는 모습에, 나는 웃으며 청첩장을 받아들었다. “알았어. 그렇게 간절히 부탁하니까 가줄게.” ...강주희의 약혼 소식은 삽시간에 퍼졌고, 인터넷에서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사람들은 모두 이 잘 어울리는 커플에게 축하를 보내느라 바빴다. 하지만 한때 고영훈과 결혼을 약속했던 ‘강민아’에 대한 기억은 모두 완전히 잊은 듯했다. 약혼식 당일, 나는 가게에 앉아 청첩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장연희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사장님,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되잖아요. 누가 칼 들고 협박하는 것도 아니고요.”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넌 나를 몰라.” 강주희의 약혼식에 가든 안 가든 사실 내겐 상관없었다. 이미 고영훈에 대한 미련은 다 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문제는, 거기서 혹시 고시환을 마주치게 될까 봐였다. 그날 이후 고시환은 이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
“우리, 이제 끝낼 때가 된 것 같아...” 고시환의 말을 들은 나는 순간 멍해졌다. ‘끝내자고? 이혼을 하겠다는 뜻인가?’ 나는 한참을 머릿속에서 되새기다가, 그가 정말 떠나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고시환이랑 이혼할까?’ 실은 나도 처음 고시환과 결혼한 것도 단지 이 사람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였다. 지금의 강주희, 그녀가 끝까지 물고 늘어지지 않는 한, 나는 임씨 가문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그녀를 상대할 수 있었다. 이제의 나는 고시환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다가 일부러 웃는 얼굴로 말했다. “맞아, 끝내야지. 그럼 좋은 날 골라서 이혼하러 가자.” 고시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재산 분할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필요 없어.” 나는 남자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원래부터 비즈니스 관계였잖아. 임씨 가문 정도면 날 먹여 살리기 충분해.” 나는 일부러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내가 널 찾은 이유는 따로 있어. 나 H 시로 돌아가려고 해.” “이혼 절차는... 오늘 바로 끝내는 게 어때?” 고시환은 눈을 깜빡이며 헛기침을 했다. “오늘? 오늘은 안 될 것 같은데...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밤까지 걸릴 거야.” “괜찮아.”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시간 날 때 말만 해. 언제든 내가 맞출게.” 고시환이 답하기도 전에 나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럼 이만 갈게. 우리 엄마가 집에서 밥 차려놓고 기다리고 계셔.” 나는 문을 나섰고, 고시환은 내 뒷모습을 보며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비서가 허둥지둥 들어왔다. “보스, 방금 그분... 그 사진 속 사람이잖아요?” “그분... 이미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고시환은 액자 속 소녀의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 “맞아요, 이미 떠났어요.” 비서는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이미 사무실을 떠난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고시환의 사무실로 들어서는 순간, 왜 비서가 나를 보고 그렇게 놀랐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내 눈길을 끈 건 고시환이 아니라, 그의 책상 위에 놓인 커다란 액자였다. 나는 그 액자 속 사진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저 사진...’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내 머릿속은 열 살 때로 돌아갔다. 열 살...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중요한 나이였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생일축하는커녕 내 생일이 언제인지조차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 고시환만 빼고. 나도 그날이 기억난다. ‘뚱보’는 내게 다가와 말했다. “나 이제 떠나야 해. 아마 다시는 못 돌아올 거야.”나는 ‘뚱보’를 진심 어린 친구로 여기고 있었기에, 그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하고 엉엉 울며 ‘뚱보’의 가슴을 두드렸다. “다들 나를 떠나는데, 너마저 떠난다고? 너만은 친구라 생각했는데, 너도 나 버리고 갈 거야?” “오늘이 내 생일인데, 다들 케이크를 먹을 때 나는 못 먹어. 이제 내 유일한 친구인 너까지 떠나는 거야?” 그때, 내가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우는 모습을 본 ‘뚱보’는 나를 꼭 안아주며 위로했다. ‘뚱보’는 내 눈물을 닦아주고, 동네 구멍가게에서 슈퍼 막대사탕을 사와 내게 내밀며 말했다. “생일 축하해. 하지만 난 정말 떠나야 해. 해야 할 일이 있거든.” “내가 성공하면 꼭 널 찾으러 올게. 여기서 나 기다려 줄래?” 그때의 나는 ‘뚱보’의 눈빛 속 진심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저 친구가 날 속인다고 생각했다. ‘뚱보’가 날 달래려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사진 한 장 찍어줄게. 내가 너 보고 싶을 때마다 이 사진을 볼 거야.” “이 사진 앞에서 맹세할게. 내가 꼭 돌아와서 너 데리러 갈 거라고!” 그 말에 속아 넘어간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예쁜, 하지만 지금 보면 우스꽝스러운 미소를 카메라 앞에
나는 고시환의 눈을 마주치다가 어색해서 고개를 돌렸다. ‘분위기가 왜 이리 묘하지?’ 결국 나는 가볍게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저기, 나 여기까지 오느라 너무 힘들었거든. 우선 올라가서 쉬어야겠어.” 말을 마치자마자 헐레벌떡 위층으로 올라갔지만, 막상 내 방이 어딘지 몰라서 다시 내려와야 했다. “그... 어디서 자면 돼?” 고시환은 나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 자고 싶은 방에서 자. 당신이 이 집의 주인인데.” 그 말에 나도 순간 눈썹이 꿈틀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돌아 적당한 방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나는 넓고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지금 고시환한테 갖고 있는 감정이 어떤 건지 잘 모르겠어. 예전처럼 그저 복수를 위해 이용하려는 건 아닌 것 같아.’ ‘하지만 지금 내 육체는 임하나고, 영혼은 강민아잖아.’ ‘내가 정말 어린 시절의 정 때문에 고시환을 좋아하게 된 건지, 아니면 지금의 또 다른 고시환에게 끌리는 건지 헷갈려.’ 고시환도 똑같이 알 수 없었다. ‘그 사람이 날 보는 이유가 이 얼굴 때문인지, 아니면 지금의 나 때문인지 모르겠어.’ 다시 한번 몸과 영혼 사이의 갈등에 빠진 나는 하늘을 향해 소리를 내지르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복잡한 거 그만 생각하자.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아야지.’ 며칠 동안 꽉 조였던 긴장감이 풀린 탓인지, 나는 모처럼 완전히 편히 쉬었고 눈을 떠보니 이미 정오가 넘어 있었다. 내가 낯선 침실을 잠시 바라보다가 지금 어디 있는지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집 안을 돌아다녀 봤지만 고시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전화를 걸었는데, 또다시 통화 중이라는 신호음이 들려왔다. ‘대체 뭘 하길래 통화 중이야?’ 나는 찡그린 얼굴로 SL 그룹의 주소를 검색했고,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SL그룹 건물 앞에 도착해 KM 그룹보다도 훨씬 크고 높은 건물을
고시환은 두 팔로 나를 끌어안으며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얼마나 억울한지, 너는 알기나 할까...” 나는 코끝을 훌쩍이며 남자의 품에서 몸을 빼내면서 고시환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남자의 얼굴이 창백한 것 말고는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이자 안도의 숨이 나왔다. “그동안 어디 있었어? 왜 내가 그렇게 전화했는데 단 한 통도 안 받았냐고!” “대체 나를 당신의...” 내가 말을 하다 갑자기 멈췄다. “나의 뭐?” 고시환이 장난스레 물었다. 나는 얼굴이 조금 달아오르며 말했다. “당신의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는 거야?” “민아의 시신을 찾아주자마자 나 같은 파트너는 버리고 팽개치려는 건 아니겠지?” “아직 민아를 죽인 범인을 못 찾았잖아. 우리의 비즈니스 관계는 끝난 게 아니야!” 고시환은 나를 바라보며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 같은 파트너를 잊을 리가. 다만 내가 재벌이니까 쉬고만 있을 순 없잖아.” “안 그러면 재벌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기 힘들겠지. 그러면 너, 임씨 가문의 귀한 딸의 얼굴에 먹칠하게 될 텐데.” 나는 고개를 홱 돌려버리고, 고영훈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근데 고영훈이 했던 말은 뭐야? 얼른 솔직히 말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고시환은 나를 Y 시의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본인의 입을 통해서야 나는 고시환이 자리를 비웠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 장례식이 열리고 있던 동안, 고시환의 회사인 SL 그룹에서 개발한 약품이 누군가를 죽게 만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유족들이 SL 그룹에 찾아와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이 사건이 커지면서, 주가도 끝없이 추락했다. 결국 고시환은 회사를 수습하고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급히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고영훈이 했던 말도 이와 관련 있었다. 유족들은 고시환의 제안에 불만을 품고 사람을 시켜 그를 납치하려 했지만, 고시환은 이를 미리 알아채고 역으로 유족 측을 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