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환은 내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내가 휴대폰 화면에 집중하는 걸 보고는 한마디 없이 내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았다. “이런 댓글들 볼 필요 없어. 전부 거짓말이야.”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고시환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머릿속에는 여전히 방금 봤던 댓글의 내용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고시환은 내가 이런 악성 댓글들 때문에 상처받았다고 오해한 것 같았다. 그는 나의 팔을 잡아 끌며 말했다. “가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오자.” 나는 남자의 손을 보며 멈춰 섰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다. “내가 예전에 언니를 버린 적이 정말 있어?” 고시환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무슨 말이야? 너는 외동딸 아니었어?” “그래?” 나는 자신이 없었다. 결국 나는 강민아이고, ‘임하나’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임하나’가 과거에 어떤 일을 했는지는 나조차도 인터넷에서 본 정보 수준으로만 알고 있을 뿐,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 나는 고시환의 손을 천천히 뿌리치며 말했다. “미안해. 지금 우리 부모님 댁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 나는 고시환에게 더 이상 말을 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임하나의 친정 부모님 집으로 향했다. 내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임씨 저택의 대문이 눈앞에 들어왔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몇 가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원래 임하나가 임씨 저택에서 살던 시절의 조각난 기억이었다. 임하나의 몸으로 환혼하면서 나는 항상 ‘임하나’에 대한 뭔가를 종종 희미하게 떠올렸던 것 같다. ‘왜 임하나의 기억이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거지?’ ‘나와 임하나는 정말 아무런 관계도 없는 걸까?’ ‘왜 임하나는 나와 이렇게 똑같이 생겼지? 단순히 우연일까?’ ‘그리고, 왜 나는 강씨 집안에 있는 내 부모님과 혈연관계가 없다는 거지?’ 임씨 저택 대문 앞에 서 있는 동안, 내 머릿
나는 온몸에 힘이 빠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였군요.” 장해선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으며 코끝을 훌쩍이며 말했다. “미안해. 엄마가 일부러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야.” “그때 네가 악몽을 자주 꿔서 엄마가 절에 데리고 갔었어. 그 뒤로 너는 이 일을 잊어버렸고, 우리도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어.” 나는 얼굴에 흐르는 이유 모를 눈물을 닦아냈다. “그럼 언니는요? 지금 어디에 있어요?” 장해선은 고개를 저었다. “몰라. 그때 너희 아빠랑 나랑 사람들을 보내서 찾으려 했는데, 끝내 못 찾았어.” 나는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이 모든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었다. ‘이건 임하나의 일이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내 일처럼 가슴이 아플까?’ “엄마, 한 가지만 더 물을게요. 나 정말 엄마 친딸 맞아요?” 장해선의 눈물샘이 터져버린 듯하며 나를 가슴 아프게 바라보며 말했다. “맞아! 엄마가 약속할게. 너는 엄마의 친딸이야! 너랑 언니는 쌍둥이야. 둘 다 엄마 뱃속에서 나왔어. 엄마가 거짓말할 리가 없잖아!” “쌍둥이요?” “그래.” 장해선은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처음에 엄마가 낳은 건 쌍둥이였어. 너희 둘은 정말 똑같이 생겼었어. 어릴 때는 아빠랑 나도 너희를 자주 헷갈렸지.”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장해선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올랐다. 그 시절의 장해선, 그 시절의 임씨 가문의 모든 사람은 아마도 행복했겠지. ‘만약 그 뒤의 일들이 없었다면, 계속 행복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왜 언니를 잃어버린 거야?” 장해선의 눈빛이 내 마음까지 잠시 흔들렸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듯 보였다. “그건 우리도 몰라. 그때 너한테 물어봤는데 네가 말해주지 않더라고.” 나는 장해선을 위로할 틈도 없이 문득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엄마, 머리카락 한 가닥만 줘요.” 나는 장해선의 머리카락을 한 가닥 뽑아 밀봉된 봉투에 넣고는 그대로 뛰어
긴장으로 굳어 있던 내 몸이 이 순간 더욱 굳어졌다. 나는 재빨리 앞으로 나가 김재국의 흥분된 모습을 보았다. “연관성을 찾았어요! 두 사람은 관계가 있어요!” 김재국은 흥분한 표정으로 우리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우리가 두 달 동안 조사했지만, 끝내 대조할 정보를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임하나 씨, 정말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고영훈도 흥분한 채로 다가와 김재국의 손에서 결과지를 가져갔다. 99.99%의 혈연관계라는 결과를 확인한 고영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다시금 격하게 기뻐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실마리를 찾았어요! 너무 잘됐네요!” 현장에 있는 세 사람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 쏠렸는데, 특히 김재국은 눈에 띄게 흥분한 모습이었다. “임하나 씨, 정말 큰 도움을 주셨어요. 그런데 이 머리카락이 누구의 것인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이미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고, 어찌할 바를 몰라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그냥 막연한 생각으로 감정을 맡겼을 뿐인데, 이 결과라니...’ 나는 예상치 못한 결과에 충격을 받았다. ‘내가 강씨 집안의 딸이 아니라고? 내가 사실 임씨 집안 사람이라고?’ ‘그렇다면 강씨 집안이 그때 왜 나를 데려가려고 했던 걸까?’‘만약 정말 친자확인을 했다면, 그 결과는 대체 뭐였던 거지?’ ‘혹시 누군가가 친자확인 결과에 손을 썼을까?’ 머릿속이 수많은 의문으로 뒤엉켰지만, 누구도 내 질문에 답해줄 수 없었다. 세 사람은 내가 답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김재국은 내 망설임을 알아챘는지 내 손을 꽉 붙잡으며 말했다. “임하나 씨, 이건 이번 사건 해결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단서입니다. 경찰청에서도 이 사건의 원인을 신속히 규명하라고 계속해서 압박하고 있습니다.”“임하나 씨가 이렇게 놀라고 충격받은 걸 보니, 이 사람이랑 어떤 관련이 있는 게 틀림없어요. 조금만 더 알려주실 수 있
수많은 의문이 마음속에 쌓여 나를 짓눌렀지만, 마음 놓고 털어놓을 곳이 없었다. 고시환은 아무 말 없이 내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내 옆에 조용히 있어 주었다. 내가 울다 지쳐 잠들 때까지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눈을 다시 떴을 때, 나는 사방이 온통 새하얀 공간 속에 있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온통 하얀색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저 앞쪽에 누군가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보였다. ‘저게 뭐지...?’ 의아한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자, 안개 같은 것이 걷히면서 그 사람의 모습이 점점 뚜렷해졌다. 그리고 눈앞에 선 사람을 확인한 순간, 나는 놀라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너... 너 임하나야?” “맞아.” 임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은 복잡한 감정으로 뒤섞여 있었다. “언니가 내 몸을 차지했지. 나는 내가 사라진 이 시간 동안 언니가 나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여기에서 다 보고 있었어.” 그녀의 말에 나는 더 당황했다. “그럼... 너 아직 죽은 게 아니야? 환생이라도 안 한 거야?” “아니.” 임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난 여기에 갇혀 있어. 떠날 수도 없고 돌아갈 수도 없어.” 나는 고개를 숙여 내 몸을 바라봤다. “그럼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왜 너랑 마주하게 된 거야?” “그건 나도 몰라.” 임하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마도 우리가 한 번은 만나야 하는 운명이었거나, 아니면 하늘이 내게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준 걸지도 몰라.” 그녀가 자기 잘못을 언급하자, 내가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 떠올랐다. “그럼 너도 내가 네 언니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그래.” 임하나는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쌍둥이였어. 어렸을 때는 분명 겉모습은 똑같이 생겼는데, 사람들은 늘 너만 칭찬했어.” 임하나는 고개를 저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사람들은 내가 거칠고 이기적이라고 했지. 반면 언니는 양보할 줄 알고,
임하나는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언니, 나 그런 못된 짓은 한 적 없어.” “다들 나를 괴롭혔어. 내가 단지 성격이 좀 못된 것뿐이야.” 그 이야기를 꺼내자 임하나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언니를 잃어버리고 나서부터 난 매일 악몽을 꿨어.” “엄마랑 아빠가 나 때문에 얼마나 애를 쓰셨는지 몰라. 부모님은 나 때문에 자책하시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이 일을 잊은 척했어. 하지만 사실은 두 분 다 기억하고 있었어.”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충격을 금치 못했다. ‘다섯 살이었던 임하나가 그 모든 악몽을 견디며 어떻게 버텼을까...’ “내가 잘못했다는 거 알아. 정말로 잘못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날 괴롭혀도 되는 이유가 될 순 없잖아.” 임하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은 과거의 괴롭힘을 떠올리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내가 언니를 버린 걸 알고 나서부터 어떻게든 날 괴롭히려고 했어. 뒷말을 하고, 나를 모욕하는 말로 날 짓눌렀어.” “처음엔 그냥 참았어. 그런데 나중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폭발해 버렸지.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그 애들이 나를 두려워하기 시작했어. 혹시 내가 자신들을 언니처럼 버릴까 봐 겁먹고 날 피했어.” 나는 임하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머릿속에 그녀가 괴롭힘을 당했던 어린 시절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 생각에 내 눈에 눈물이 차오르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흘러내렸다. 나는 임하나에게 다가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이제 괜찮아. 다 지나간 일이야. 그 고통스러운 시간들은 이제 다 끝났어.” 임하나는 내 품에 안긴 채 울음을 쏟아냈다. 한참 동안 울고 나서야 그녀는 빨갛게 부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나 돌아갈 수도 없다는 거 알아. 그리고 돌아가고 싶지도 않아. 하지만 제발 부탁이야, 나를 괴롭힌 그 사람들, 언니가 복수해줘. 그 사람들이 편
임하나는 냉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고정한 회장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지. 네가 정말로 고시환이랑 결혼했으니까.” “그때 고정한 회장은 날 단지 이용하려 했어. 고시환을 화나게 하고, 결국 임씨 가문을 무너뜨리려는 게 목적이었지.” 임하나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사업 세계의 치열한 이면을 깨닫게 되었다. ‘고정한 회장... 정말 목적을 위해 가족이고 뭐고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어.’ 실은 고정한의 계획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당시 고시환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결국 실수로 임하나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임하나는 내 손을 꽉 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언니, 고정한을 꼭 조심해. 그 늙은이는 겉으로는 사람 좋아 보여도, 속으로는 정말 악랄해.” “그 늙은이는 우리 집안의 서쪽 땅을 노리고 있었어. 하지만 아빠가 절대 넘겨주지 않으셨지. 그래서 뒤에서 온갖 짓을 꾸몄던 거야.” “이번에 고시환의 손을 빌려 우리 집안을 무너뜨리려던 계획이 실패했으니, 분명 또 다른 수를 쓸 거야. 언니, 꼭 조심해야 해. 아빠한테도 이 사실을 꼭 알려드려야 해.” 임하나는 다시 눈가가 붉어지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난 이제 없지만, 언니, 꼭 내가 못 산 삶을 대신 살아줘. 엄마, 아빠도 잘 보살펴야 해!” “복수는 안 해도 좋아. 하지만 언니는 꼭 자신을 지켜. 약속해줘.” 나는 점점 희미해져 가는 임하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이 저려왔다.내 눈에서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고, 임하나를 붙잡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그 순간, 나는 목이 메어 울음을 터뜨렸다. “하나야! 가지 마! 돌아와 줘!” 나는 온몸이 눈물로 젖은 채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눈앞에는 낯익은 내 침실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꿈... 이었나?’ 하지만 내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는 깊은 슬픔은 그 모든 게 단순한 꿈만은 아니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막 자신의
고시환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는 완전히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었고, 머릿속이 순식간에 하얘졌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뭐... 뭐라고?" 고시환은 무언가 떠오른 듯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또 농담하는 거지, 그렇지?” “아니야.”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번에 벌어진 일들을 생각해 보면 내가 하는 말이 진실이라는 걸 믿어야 할 거야.” “그 토막 난 시체는 민아야. 내 언니라고.” “민아는 강씨 집안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 왜 그런지는 아직 조사가 더 필요해.” 처음엔 충격으로 인해 무너졌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왜 강씨 집안이 나처럼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람을 딸로 받아들인 거지?’ ‘그리고 강주희는 정말 강씨 집안의 진짜 딸일까?’ ‘만약 그렇다면 왜 입양된 딸이라고 외부에 알려졌을까? 강주희가 괜히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되는 걸 알면서도 말이야.’ 수많은 의문들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이제 나의 행보는 단순히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내 출생의 비밀을 밝히는 것이었다. “우리 집안의 위치는 고씨 가문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야. 그러니 이 일을 제대로 조사하려면 당신 도움이 필요해.” 고시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자리에 앉아 그가 모든 퍼즐을 맞춰보고 마침내 모두 받아들이기를 기다렸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고시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말이 진실임을 장담할 수 있어? 그렇지 않으면 나...” 그가 끝내 말을 삼키자 나는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나왔다. “아니, 그렇지 않으면 뭐? 어쩔 건데?” “난 이미 당신과 결혼했어. 이제 와서 나한테 뭘 어쩌겠다는 거야?” 고시환은 아무 말도 없이 돌아서려 했지만,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설마... 전에 생각도 못 했네. 그 집에 고 회장 쪽의 사람도 있다니. 그럼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것도 다 들은 거 아니야?’ “무슨 눈과 귀 같은 소리야? 그저 너희 신혼부부를 챙기려 보낸 사람일 뿐이다. 다 너희를 걱정해서 그런 거야.” 고정한의 말에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 쏠리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죄송해요. 정말 미안한데, 제가 아직까지 신혼부부 걱정해 준다는 핑계로 사람 보내는 시아버지는 본 적이 없어서요. 혹시 마음속에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니에요?” “너!” 고정한의 얼굴이 굳어지고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사람은 너무 건방지게 굴지 않는 게 좋아. 나중에 어떻게 발목 잡힐지 모른다고!” “네!” 나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고정한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근데 저는 이미 한 번 크게 발목 잡혀 본 적이 있거든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나는 눈에 약간의 분노를 담고 말했다. “그때 아버님은 저를 시켜 시환 씨에게 약을 먹이게 한 속셈, 제가 모를 줄 아세요?” “그때는 제가 약점이 잡혀서 어쩔 수 없었지만, 지금은 모든 걸 알아냈고, 더 이상 아버님이 두렵지 않아요.”고정한은 나를 노려보다가 곧 시선을 거두고 말했다. “너 같은 꼬맹이가 이제는 배짱이 두둑하군.” 그는 고시환을 흘긋 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누가 뒤에서 널 밀어주니 아주 기세가 등등하구나. 옛날처럼 소심하고 겁먹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나는 웃으며 고시환 앞으로 다가가 그의 팔을 껴안으며 얼굴엔 달콤한 미소를 띤 채로 말했다. “그야 물론이죠. 시환 씨가 지금 저를 보물처럼 여겨 주거든요.” “이 사람이 제 곁에 있는 한, 저는 절대 억울한 일 안 당할 거예요. 그리고 제가 무슨 일이 있든 다 제 사랑스러운 남편한테 얘기하거든요.” 내가 껴안고 있던 고시환의 팔이 갑자기 뻣뻣해진 게 느껴졌
강주희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 이를 악물었지만, 나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고마워요, 작은어머니. 저 꼭 오래오래 살게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잔을 부딪쳤다. “그야 그렇겠죠. 욕 많이 먹을수록 오래 산다잖아요.” 강주희는 내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눈가가 붉어지더니, 곧 고영훈을 바라봤다. “오빠, 작은어머니가 나한테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 거예요?” “우리 강씨 집안이야 임씨 가문만큼은 못하겠지만, 제가 오빠랑 함께하는 게 이런 식으로 압박을 받아야 한다면, 이 약혼은 하지 않는 게 낫겠어요.” 강주희는 일부러 술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약간 숙이며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아휴, 저 눈물 연기 몇 번이나 본 거야? 이제는 좀 지겹다.’ 나는 하품을 참지 못하며 고개를 돌렸다. “굳이 내 앞에서 이런 연극을 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 앞으로 우리가 서로 엮일 일도 없을 거잖아요.” 나는 여전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고시환을 힐끔 바라보고, 의자를 당겨 일어섰다. “오늘 약혼식에 온 건 우리 남편 때문이야. 우리가 서로 얼굴 보기 싫어하는 건 분명하니까, 미안하지만 이만 갈게.” 뒤돌아 나가려는 순간, 고영훈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그는 내 얼굴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곧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작은어머니, 주희한테 사과하세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 나오며 손가락으로 귀를 파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봐?” “제가 주희한테 사과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작은어머니, 아까 말씀이 너무 지나치셨잖아요.” 고영훈의 말에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으며 주변 사람들을 둘러봤다. “지금 여기 계신 분들, 다 들으셨죠? 제가 누구한테 무례했다는 건데, 당사자 말고 또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 계시면 말씀 좀 해보세요.”나는 손가락으로 강
‘어차피 곧 이혼할 사인데, 앞으로는 서로 얽힐 일도 없겠지. 아마 두 번 다시 마주칠 일도 없을 거야.’ 주요석에 앉아 있던 고정한이 그 순간 고시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주변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다 들리도록 크게 말했다. “시환아, 너 하나 양과 벌써 혼인신고까지 했다며? 결혼식은 언제 올릴 거니? 이왕 여자 쪽에서 허락한 건데, 절대 서운하게 하면 안 된다.” 고정한의 말이 떨어지자, 이미 조용했던 예식장은 더더욱 적막에 휩싸였다.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고시환을 바라보며, 속으로는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뭐? 고시환이랑 임씨 가문의 임하나 양이 혼인신고를 했다고?” “전부터 그런 소문이 살짝 돌긴 했는데, 진짜였네.” “근데 아까 보니까 둘이 말도 안 하고, 웃는 얼굴도 안 보였는데. 둘이 대체 왜 갑자기 혼인신고를 한 거야?” “에휴, 너 그거 모르지? 고시환은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H 시에서는 힘이 없잖아. 그래서 H 시에 발붙이려고 그런 거지.” “임씨 가문이 고씨 가문만큼은 아니어도, H 시에서는 알아주는 집안이잖아. 고시환 저 사람, 야망이 대단하네.” 예식장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런 계산에 밝은 사람들이었다. 단 몇 초 만에 고시환과 나의 관계를 파악한 듯, 각자의 추측을 마친 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나는 주변의 시선에 전혀 개의치 않고, 그저 미소를 띤 고정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단하네. 그때 고시환이랑 고씨 가문의 본가에서 그렇게 싸우고,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으면서도, 지금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들 행세를 하고 있잖아.’ 나는 옆에 있는 고시환을 힐끗 보았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결국 내가 먼저 나서기로 했다. “아버님, 저희 젊은 사람들 문제에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 우리 영훈 조카 약혼식부터 잘 챙기시는 게 우선 아니겠어요?” 고정한은 한때 고씨 가문에서 그야말로 전설로 불
고시환은 손에 들고 있던 혼인관계증명서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 순간에 우리 사이에 묘하게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기, 약혼식 곧 시작할 것 같은데, 당신 빨리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고씨 가문의 일원인 고시환이 아무리 고영훈과 사이가 안 좋더라도, 주요 가족 행사에서 가족석에 앉지 않고 나와 이 구석에 있는 건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내 말을 들은 듯 주위를 한번 훑어보더니,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어? 뭐 하는 거야?” 고시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직 이혼 안 했잖아. 내 아내로서 나랑 같이 가야지. 괜히 뒷말 나오게 만들 순 없으니까.” “곧 이혼할 건데...”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남자의 손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사실 우리 결혼 소식은 이 상류층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고시환이 내 손을 잡고 주인석에 앉자, 모두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뜨고 수군거리며 고시환과 나의 관계를 추측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그때 손을 뿌리쳤어야 했는데... 이제 이혼하면 뒷말이 더 많겠네.’ ‘고시환이랑 엮였다는 걸 이제 알았을 텐데, 오늘 밤에 이혼 소식까지 돌면 얼마나 말이 많아질까?’ 나는 마음속으로 임씨 가문의 내 부모님에게 미리 사과와 기도를 했다. ‘제발 이 험담들을 잘 견뎌내게 해주세요...’ 고시환은 주인석에 앉아도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지만, 눈썹 사이엔 살짝 드러나는 불쾌감이 있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눈길을 주자, 그 순간 사람들이 수군거리던 소리가 뚝 끊기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입을 다물었다. 나는 고시환의 대응에 속으로 엄지를 치켜세우며 웃음을 참았다. ‘정말 대단하긴 하네.’ 그에게 한마디 장난스럽게 말하고 싶었다.‘이제 곧 남이
장연희의 한마디가 내 혼란스러운 마음을 단숨에 정리했다.‘맞아, 난 이미 죽음을 한 번 경험한 사람이잖아. 뭘 그렇게 겁먹고 있는 거지?’ ‘어릴 적 친구 하나쯤이야, 별로 대수로운 일도 아니잖아.’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나는 서둘러 준비를 마친 뒤, 고영훈과 강주희의 약혼식에 가기로 했다. 청첩장을 들고 예식장에 들어서자, 이리저리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모르게 긴장감이 스쳤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고시환을 찾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다.’ 안도감을 느끼는 동시에, 묘하게 내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졌다. ‘애초에 고시환은 고씨 가문을 싫어하고, 자신의 성을 혐오하는데, 여기 올 리가 없잖아.’ ‘그런데도 왜 이렇게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걸까?’ 며칠 동안 나는 일에 몰두하며 고시환에 대한 생각을 잊으려 애썼지만, 잠깐이라도 쉬는 시간이 생기면 그의 얼굴과 목소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문제는 내 마음이겠지.’ ...나는 예식장 한쪽 구석에 앉아 조용히 쉬고 있었다. 그때, 샴페인 잔을 든 남자 몇 명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아가씨, 전에 본 적 없는 얼굴인데요?” “H 시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계시다니, 어디 가면 또 뵐 수 있을까요?” 나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둘 다 잘생긴 편이긴 했지만, 고시환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다.나는 차갑게 말했다. “만나볼 마음 없으니까 돌아가세요.” 이런 상류층 모임에서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섞여 있는 법이다. 특히 조금이라도 돈이 있는 이른바 ‘재벌 2세’들은 자신들이 평범한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두 사람을 단칼에 거절하자, 그들의 표정에 약간의 불쾌함이 스쳤지만, 공공장소라 억지로 화를 참는 듯했다. “아가씨, 참 성격 있네요. 그런데 어느 집안의 아가씨예요? 혹시 내가 누군지는 알아요?” 나는 그를 힐끗 쳐다보고 기억을
청첩장에 적힌 내용을 읽으며 나는 살짝 놀랐다. ‘고영훈이랑 강주희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빠르게 약혼까지 하다니.’ 며칠 사이에 둘이 약혼식 날짜까지 잡았다니, 정말 예상 밖이었다. 강주희는 웃으며 청첩장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작은어머니, 꼭 시간 맞춰 오셔야 해요.” 약혼식은 열흘 뒤로 정해져 있었다. ‘그때쯤이면 나도 고시환과 이미 이혼했을 거야.’ ‘그땐 고씨 가문이랑 완전히 남이겠지.’ 그 생각이 들자, 나는 청첩장을 다시 강주희에게 밀어 돌려주었다. “나 지금 네 작은어머니 아니야. 곧 고시환 씨와 이혼할 거고, 그 이후로는 너희 고씨 가문 사람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을 거야.” 나는 강주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약혼 축하해. 네 약혼식이 순조롭길 바랄게.” 강주희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다시 한번 청첩장을 내 손에 놓으며 말했다. “그래도 언니잖아요. 반쪽짜리 언니라도, 꼭 와줬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초대하려는 모습에, 나는 웃으며 청첩장을 받아들었다. “알았어. 그렇게 간절히 부탁하니까 가줄게.” ...강주희의 약혼 소식은 삽시간에 퍼졌고, 인터넷에서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사람들은 모두 이 잘 어울리는 커플에게 축하를 보내느라 바빴다. 하지만 한때 고영훈과 결혼을 약속했던 ‘강민아’에 대한 기억은 모두 완전히 잊은 듯했다. 약혼식 당일, 나는 가게에 앉아 청첩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장연희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사장님,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되잖아요. 누가 칼 들고 협박하는 것도 아니고요.”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넌 나를 몰라.” 강주희의 약혼식에 가든 안 가든 사실 내겐 상관없었다. 이미 고영훈에 대한 미련은 다 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문제는, 거기서 혹시 고시환을 마주치게 될까 봐였다. 그날 이후 고시환은 이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
“우리, 이제 끝낼 때가 된 것 같아...” 고시환의 말을 들은 나는 순간 멍해졌다. ‘끝내자고? 이혼을 하겠다는 뜻인가?’ 나는 한참을 머릿속에서 되새기다가, 그가 정말 떠나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고시환이랑 이혼할까?’ 실은 나도 처음 고시환과 결혼한 것도 단지 이 사람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였다. 지금의 강주희, 그녀가 끝까지 물고 늘어지지 않는 한, 나는 임씨 가문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그녀를 상대할 수 있었다. 이제의 나는 고시환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다가 일부러 웃는 얼굴로 말했다. “맞아, 끝내야지. 그럼 좋은 날 골라서 이혼하러 가자.” 고시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재산 분할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필요 없어.” 나는 남자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원래부터 비즈니스 관계였잖아. 임씨 가문 정도면 날 먹여 살리기 충분해.” 나는 일부러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내가 널 찾은 이유는 따로 있어. 나 H 시로 돌아가려고 해.” “이혼 절차는... 오늘 바로 끝내는 게 어때?” 고시환은 눈을 깜빡이며 헛기침을 했다. “오늘? 오늘은 안 될 것 같은데...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밤까지 걸릴 거야.” “괜찮아.”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시간 날 때 말만 해. 언제든 내가 맞출게.” 고시환이 답하기도 전에 나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럼 이만 갈게. 우리 엄마가 집에서 밥 차려놓고 기다리고 계셔.” 나는 문을 나섰고, 고시환은 내 뒷모습을 보며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비서가 허둥지둥 들어왔다. “보스, 방금 그분... 그 사진 속 사람이잖아요?” “그분... 이미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고시환은 액자 속 소녀의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 “맞아요, 이미 떠났어요.” 비서는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이미 사무실을 떠난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고시환의 사무실로 들어서는 순간, 왜 비서가 나를 보고 그렇게 놀랐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내 눈길을 끈 건 고시환이 아니라, 그의 책상 위에 놓인 커다란 액자였다. 나는 그 액자 속 사진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저 사진...’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내 머릿속은 열 살 때로 돌아갔다. 열 살...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중요한 나이였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생일축하는커녕 내 생일이 언제인지조차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 고시환만 빼고. 나도 그날이 기억난다. ‘뚱보’는 내게 다가와 말했다. “나 이제 떠나야 해. 아마 다시는 못 돌아올 거야.”나는 ‘뚱보’를 진심 어린 친구로 여기고 있었기에, 그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하고 엉엉 울며 ‘뚱보’의 가슴을 두드렸다. “다들 나를 떠나는데, 너마저 떠난다고? 너만은 친구라 생각했는데, 너도 나 버리고 갈 거야?” “오늘이 내 생일인데, 다들 케이크를 먹을 때 나는 못 먹어. 이제 내 유일한 친구인 너까지 떠나는 거야?” 그때, 내가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우는 모습을 본 ‘뚱보’는 나를 꼭 안아주며 위로했다. ‘뚱보’는 내 눈물을 닦아주고, 동네 구멍가게에서 슈퍼 막대사탕을 사와 내게 내밀며 말했다. “생일 축하해. 하지만 난 정말 떠나야 해. 해야 할 일이 있거든.” “내가 성공하면 꼭 널 찾으러 올게. 여기서 나 기다려 줄래?” 그때의 나는 ‘뚱보’의 눈빛 속 진심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저 친구가 날 속인다고 생각했다. ‘뚱보’가 날 달래려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사진 한 장 찍어줄게. 내가 너 보고 싶을 때마다 이 사진을 볼 거야.” “이 사진 앞에서 맹세할게. 내가 꼭 돌아와서 너 데리러 갈 거라고!” 그 말에 속아 넘어간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예쁜, 하지만 지금 보면 우스꽝스러운 미소를 카메라 앞에
나는 고시환의 눈을 마주치다가 어색해서 고개를 돌렸다. ‘분위기가 왜 이리 묘하지?’ 결국 나는 가볍게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저기, 나 여기까지 오느라 너무 힘들었거든. 우선 올라가서 쉬어야겠어.” 말을 마치자마자 헐레벌떡 위층으로 올라갔지만, 막상 내 방이 어딘지 몰라서 다시 내려와야 했다. “그... 어디서 자면 돼?” 고시환은 나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 자고 싶은 방에서 자. 당신이 이 집의 주인인데.” 그 말에 나도 순간 눈썹이 꿈틀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돌아 적당한 방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나는 넓고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지금 고시환한테 갖고 있는 감정이 어떤 건지 잘 모르겠어. 예전처럼 그저 복수를 위해 이용하려는 건 아닌 것 같아.’ ‘하지만 지금 내 육체는 임하나고, 영혼은 강민아잖아.’ ‘내가 정말 어린 시절의 정 때문에 고시환을 좋아하게 된 건지, 아니면 지금의 또 다른 고시환에게 끌리는 건지 헷갈려.’ 고시환도 똑같이 알 수 없었다. ‘그 사람이 날 보는 이유가 이 얼굴 때문인지, 아니면 지금의 나 때문인지 모르겠어.’ 다시 한번 몸과 영혼 사이의 갈등에 빠진 나는 하늘을 향해 소리를 내지르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복잡한 거 그만 생각하자.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아야지.’ 며칠 동안 꽉 조였던 긴장감이 풀린 탓인지, 나는 모처럼 완전히 편히 쉬었고 눈을 떠보니 이미 정오가 넘어 있었다. 내가 낯선 침실을 잠시 바라보다가 지금 어디 있는지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집 안을 돌아다녀 봤지만 고시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전화를 걸었는데, 또다시 통화 중이라는 신호음이 들려왔다. ‘대체 뭘 하길래 통화 중이야?’ 나는 찡그린 얼굴로 SL 그룹의 주소를 검색했고,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SL그룹 건물 앞에 도착해 KM 그룹보다도 훨씬 크고 높은 건물을
고시환은 두 팔로 나를 끌어안으며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얼마나 억울한지, 너는 알기나 할까...” 나는 코끝을 훌쩍이며 남자의 품에서 몸을 빼내면서 고시환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남자의 얼굴이 창백한 것 말고는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이자 안도의 숨이 나왔다. “그동안 어디 있었어? 왜 내가 그렇게 전화했는데 단 한 통도 안 받았냐고!” “대체 나를 당신의...” 내가 말을 하다 갑자기 멈췄다. “나의 뭐?” 고시환이 장난스레 물었다. 나는 얼굴이 조금 달아오르며 말했다. “당신의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는 거야?” “민아의 시신을 찾아주자마자 나 같은 파트너는 버리고 팽개치려는 건 아니겠지?” “아직 민아를 죽인 범인을 못 찾았잖아. 우리의 비즈니스 관계는 끝난 게 아니야!” 고시환은 나를 바라보며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 같은 파트너를 잊을 리가. 다만 내가 재벌이니까 쉬고만 있을 순 없잖아.” “안 그러면 재벌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기 힘들겠지. 그러면 너, 임씨 가문의 귀한 딸의 얼굴에 먹칠하게 될 텐데.” 나는 고개를 홱 돌려버리고, 고영훈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근데 고영훈이 했던 말은 뭐야? 얼른 솔직히 말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고시환은 나를 Y 시의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본인의 입을 통해서야 나는 고시환이 자리를 비웠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 장례식이 열리고 있던 동안, 고시환의 회사인 SL 그룹에서 개발한 약품이 누군가를 죽게 만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유족들이 SL 그룹에 찾아와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이 사건이 커지면서, 주가도 끝없이 추락했다. 결국 고시환은 회사를 수습하고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급히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고영훈이 했던 말도 이와 관련 있었다. 유족들은 고시환의 제안에 불만을 품고 사람을 시켜 그를 납치하려 했지만, 고시환은 이를 미리 알아채고 역으로 유족 측을 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