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아무런 문제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죽고 난 후, 영혼이 되어 내가 직접 꾸민 그 신혼집을 떠돌면서 깨달았다. 이미 내가 애정을 담아 꾸몄던 신혼집은 따뜻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싸늘한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어쩌면 그때 내가 미리 이상한 낌새를 채고 떠났더라면 목숨을 잃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임하나, 정신 차려!”내가 생각에 잠긴 걸 눈치챈 고시환이 내 눈앞에서 손을 흔들며 말을 걸었다. “지금 넌 내 아내야. 마음속에 다른 남자 생각하면 안 되지. 그러면 내가 질투하거든.” 나는 남자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며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고 대표님, 걱정 마. 나, 그런 건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히 자신 있어. 난 한 번 정하면 끝까지 가는 사람이거든.” “당신과 결혼했으니 이제 당신을 내 편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지.” “고마운 말이네.” 고시환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 편인 너에게 하나 물어보지. 너, 강민아랑 무슨 사이였어?” “그리고 왜 나한테 ‘뚱보’라고 불렀던 거지? 너 대체 얼마나 알고 있는 거야?” 고시환이 한 걸음씩 다가오며 압박해 오자 나는 점점 뒤로 물러났고, 결국 소파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고개를 들고 고시환의 눈을 마주치니 그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 순간, 내 눈엔 나도 모르게 두려움이 비쳤다. ‘이제 와서 하나하나 따져보겠다는 거잖아.’ 고시환의 태도는 명확했다. 그는 뭔가 알아냈고, 이제 본격적으로 확인하려는 것이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속으로 씁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독립형 전원주택은, 소리친다고 해도 아무도 들을 수 없는 고립된 공간이다. 설령 여기서 고시환이 나를 죽인다 해도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던 그 끔찍한 순간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몸이 떨려서, 나는 본능적으로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 고시환이 다가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전에 네가 그랬지. 결혼하면
“네가 나한테 다가온 이유가 뭐든지 간에, 나를 선택한 이상 내가 듣기 싫어할 말은 하지 마.” 방금 전까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나는,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모를 힘으로 고시환의 뺨을 내리쳤다. 짝! 거실 전체에 울려 퍼진 맑은 뺨 소리. 나는 고시환의 싸늘한 표정을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듣기 싫다고?” “당신이야말로 현실을 외면하는 거 아니야?” “강민아는 이미 죽었어!” “만약 민아가 죽지 않았다면, 당신의 실력으로나, 고영훈의 실력으로 왜 민아를 못 찾았겠어?” 여기까지 말하고 나는 미친 듯이 웃어댔다. “모르겠지?” “민아는 단순히 죽은 게 아니야. 다른 사람에게 몸을 절단당하고 살해당했어. 그리고 민아의 유골로 누군가 향초를 만들었다고!” 다시 살아난 이후부터 억눌려 있던 내 분노가 한순간에 모두 터져 나왔다. 나는 붉게 물든 눈시울로 고시환을 똑바로 노려봤다. 그저 마음속 불만과 분노를 쏟아내려는 것만이 아니었다. 눈앞의 고시환은 어린 시절부터 나와 함께 자라며 나에게 온기를 전해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나를 쓰레기라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모두에게 외면받는 더러운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그 시선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무너지고 말았다. 반쯤 무릎을 꿇은 채 두 팔로 다리를 감싸고 웅크려 앉아 오열하기 시작했다. “믿고 싶지 않으면, 내가 거짓말쟁이라고 해도 좋아. 하지만 나라고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쉬웠을 것 같아?” “내가... 민아가 죽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는지 알아?” “누가 나를 챙겨줬는데? 누가 나를 신경 써줬냐고?” “당신이 듣기 싫다는 이유로 왜 나를 짓눌러야 하지? 내가 당신 장난감이야?” 고시환은 내가 갑작스럽게 무너지는 모습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는 내 상황을 바라보며 잠시 멈칫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참을 울고
주변을 둘러보자, 한눈에 여기가 내 부모님 집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분명 나는 이미 환혼한 몸인데, 왜 이번엔 영혼의 형태로 나타난 거지?’ ‘더군다나 여기는 강주희의 방이잖아?’ 내 머릿속이 복잡해 이유를 생각해보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강주희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들어오더니, 침대 위의 드레스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말도 안 돼! 이건 내가 잘못 본 거야!” “그 사람 이미 죽었어! 절대로 다시 나타날 리가 없어!” 나는 강주희가 옆에 있는 비밀번호가 설정되어 있는 상자를 열어 안을 들여다보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 상자 안에는 온통 향초가 들어 있었다. 이를 악물며 분노로 치를 떨었지만, 지금의 나는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설마... 내 유골이 전부 향초로 만들어진 건가?’ 강주희는 얼굴에 음산한 웃음을 띤 채 그 향초를 손에 들고 비웃으며 말했다. “강민아, 너는 이미 죽었어. 네가 귀신이 돼서 내 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난 두렵지 않아.” “오히려 귀신으로 나타나는 게 좋겠어. 내가 너희 집안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똑똑히 보여줄 테니까!” “너희 부모가 개처럼 내 앞에서 무릎 꿇고 애원하는 꼴도 말이야!” “나는 너희 집안 사람들 모두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나는 강주희의 얼굴에 가득한 증오를 보며, 마음속 깊이 충격을 받았다. ‘강주희는 나를 미워하는 것만이 아니라, 강씨 집안 전체를 증오하고 있어.’ ‘대체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렇게까지 강씨 집안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거야?’ 나는 강주희 앞으로 달려가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 하지만 그 순간, 향초에 내 뼛가루가 섞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향초가 내 영혼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겁에 질린 나는 온 힘을 다해 뒤로 물러났다. ‘안 돼! 난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 “안 돼!” 나는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비명을 질렀다. 눈앞의 익숙한 풍경과 내 앞에 앉아 있는 잘생긴 얼굴.
“우리 사이에 사랑이라는 게 있었나?” 고시환이 나를 흘깃 쳐다보고는, 대답도 없이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뭐야, 이건 또 무슨 태도야?’ 화가 난 나는 씩씩거리며 그의 뒤를 쫓았다. “사랑이 없다고 쳐도, 비즈니스 파트너한테 이런 태도는 아니지 않아?” “그래서 앞으로 뭘 할 생각인데?” 고시환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나는 그와 부딪힐 뻔했다. 순간 당황한 나는 두 발짝 뒤로 물러서며 급히 계단 난간을 붙잡았다. 간신히 중심을 잡은 덕에 굴러떨어지는 건 면했지만, 심장이 쿵쾅거리며 한참 동안 진정되지 않았다.“야! 갑자기 멈추면서 뭐라고 말이라도 하던가!” “내가 여기서 굴러떨어져서 목숨이라도 잃으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생에 다시 살아난 것도 기적 같은데, 하나밖에 없는 목숨 잘 지켜야지.’ ‘다시 죽으면 이번엔 정말로 환혼해서 복수고 나발이고 다 끝나버릴지도 모르잖아.’ 고시환은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아까 했던 질문을 다시 던졌다. “내 질문에 대답해봐.” ‘진짜 예의 없네.’ 나는 불만스럽게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원래 이렇게 매너가 없냐?” 그러곤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내가 뭘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지?’ “솔직히 말해서, 나도 잘 모르겠어.”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덧붙였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당신 같은 Y 시의 최고 갑부랑 결혼했으니, 집에서 먹고 놀면서 내 마음대로 사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고시환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너, 민아를 위해 복수하려고 한 거 아니었어?”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내 복수 계획에는 아무런 지장 없거든.” 고시환은 두 팔을 교차하여 팔짱을 끼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럼 네 복수 계획이라는 게 뭔지 한번 말해봐.” 사실대로 말하자면, 지
고영훈의 방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재빨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서둘러 서랍을 열어 그 안에 놓인 향초를 확인했다. ‘이 안에 든 건 내 뼛가루로 만든 향초야. 혹시 이걸로 DNA 검사가 가능할까?’ ‘만약 가능하다면, 내 죽음의 진실이 곧 밝혀질 거야.’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향초를 주머니에 집어넣었고, 조용히 방을 빠져나가려던 순간,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큰일 났다! 고영훈이 돌아왔어!’ 지금 나가면 고영훈과 마주칠 게 뻔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핑계를 대도 상황이 난처해질 게 뻔했다. ‘안 돼, 지금 나갔다가 잡히면 끝장이야.’ 나는 방 안을 재빨리 둘러보며 숨을 곳을 찾았다. 그리고 옷장을 발견하자 망설임 없이 안으로 몸을 숨기며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제발... 옷장만은 열지 마라. 제발!’ 밖에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곧 고영훈이 피곤한 얼굴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옷장의 틈새로 그가 침대 옆에 앉는 모습을 지켜봤다. 고영훈의 눈은 허공을 향해 멍하니 떠 있었고,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진 듯했다. ‘아 진짜... 울고 싶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왜 저렇게 안 씻고 앉아 있는 거야? 평소 같으면 벌써 욕실로 들어가서 비극의 남주 연기를 시작했을 텐데.’ ‘오늘은 대체 무슨 ‘특별 편성’이라도 있는 거야? 이러다 ‘시청자’한테 욕먹겠네!’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숨소리를 죽이며 상황을 지켜봤다. 내 간절한 기도가 통했던 걸까? 고영훈은 마치 내 마음을 읽은 듯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휴... 살았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리자, 조심스럽게 옷장 문을 열었는데, 내가 한 발을 겨우 옷장 밖으로 내딛으려던 순간, 욕실 문이 다시 열렸다. 나는 깜짝 놀라 재빨리 옷장 안으로 몸을 숨겼다. ‘뭐야? 오늘 ‘에피소드’
나는 뛰면서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돌아가서 고시환에게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고시환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내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다리를 꼬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정말 여유롭네?” “내가 여유롭지 않을 이유가 있나?” 나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왜?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밤에 산책도 다녀오고 말이야.” 고시환은 미소를 띠고 내 앞에 섰다. 남자의 온화한 웃음이 점점 더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손을 들며 항복을 선언했다. “알겠어, 알겠어! 말할게!” 나는 주머니에서 그 향초를 꺼내 그의 앞에 내밀었다. “확실한 정보에 따르면, 이 향초는 민아의 유골로 만들어진 거야. 그런데 이걸로 DNA 검사가 가능할지 모르겠어.” 나는 고시환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만약 가능하다면, 당신이 좀 도와줬으면 해...” “뭐라고 했어?” 고시환은 충격을 받은 듯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향초를 들어 올려 자세히 살펴봤다. “그냥 평범한 향초 아니야? 네가 지금 말한 게...” 그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한때 세상에서 가장 환하게 웃던 그 소녀가 지금은 이 하찮은 향초로 남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듯했다. ‘그럴 만도 하지.’ 나는 고시환의 표정을 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네가 믿기 힘든 거 알아. 하지만 일단 검사해 보면 되잖아?” “설령 가짜라 하더라도, 적어도 하나의 가능성을 지우면 진실에 더 가까이 가게 된 셈이잖아.” 고시환은 내 말에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고, 결국 향초를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넣었다. “내가 전문가를 찾아서 확인해볼게. 하지만 네가 만약...” “만약이고 뭐고 그만해.” 나는 그의 말을 끊으며 단호히 말했다. “가짜라 해도 내가 너를 속였다는 증거는 되지 않아. 단지 내가 얻은 정보가 틀렸다는 것뿐이야. 난 다시
나는 혼자 계속 떠들면서 임하나인 척 연기하며, 고시환의 표정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마치 나를 통째로 투과해,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건 내가 중얼거리던 말을 멈춘 뒤였다. 고시환의 멍한 모습을 보며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래? 나를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건데? 내 유창한 언변에 감동이라도 했어?” “그래.” 고시환은 뜻밖에도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네 태도랑 변명하는 모습이, 강민아랑 너무 닮아서.” 순간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큰일 났다! 내 본모습을 들켜버린 건가?’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그리고 이내 나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야 당연하지!”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솔직히 말할게, 나랑 민아는 쌍둥이처럼 닮은 사이야. 걔가 평소에 무슨 색 속옷 입는지도 내가 다 알 정도라고.” “그러니까 내가 민아랑 조금 닮아 보이고, 행동도 비슷한 건 이상할 게 없어. 근데 너무 나한테 빠지진 마. 큰일 날 테니까!” 나는 고시환이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계단으로 뛰어올라갔다. ‘더 말하면 말할수록 실수할 가능성이 커지니까, 여기서 끝내야 해.’ ‘고시환 저 사람의 머리 회전 속도를 생각하면, 언젠가 내 정체가 들킬 날이 올지도 몰라.’ 그 생각에 나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급히 방으로 뛰어들어간 뒤에야 문득 생각이 스쳤다. ‘잠깐만... 아까 그 사람한테 내가 고영훈 집에 간 걸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보는 걸 깜빡했잖아!’ ‘설마... 내 몸에 위치 추적 장치를 단 거 아니야?’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황급히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옷을 이리저리 만지며 꼼꼼히 살폈지만,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어디에도 이상한 건 없는데... 설마 내가 괜히 의심한 건가?’ 한밤중까지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를 굴리며 한참
‘내 뼛가루로 향초를 만들더니, 이제는 내 뼈까지 가져가고, 심지어 내 피부까지...!’ ‘강주희,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저 사람들은 대체 뭘 하려고 나한테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왜 나를 이렇게까지 만든 거야?’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내 마음은 폭발 직전이었다. ‘대체 왜! 왜냐고!!!’ 나는 비명을 지르듯 마음속으로 울부짖었다. 그리고 그 순간, 온몸이 벌떡 일어나며 깨어났다. 내 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숨은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희미한 어둠 속에서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나는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긴... 고시환의 집이야.’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쪽을 바라봤다. 고시환이 방으로 들어오며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악몽이라도 꾼 거야?” 나는 마음속 깊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목이 잠긴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 “응.” 그리고는 무릎 위에 얼굴을 묻으며 힘없이 덧붙였다. “미안해. 내가 당신 깨웠지.” 고시환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내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나는 남자의 품에 기대어 잠시나마 그 온기를 느끼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한참 후, 조금씩 평온을 되찾은 나는 고시환을 바라보며 문득 한마디를 던졌다. “혹시 나를 민아로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고시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내 어깨에서 손을 거두고는 익숙한 그 방탕한 태도로 돌아갔다. “너무 자의식 과잉하지 마, 임하나 씨.” 그는 가볍게 비웃으며 말했다. “그냥 인간적으로 너를 위로해 준 것뿐이야. 자신감 넘치는 건 좋은데, 과하면 좀 피곤하거든.” 남자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나는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묵직했던 내 마음도 점차 가벼워졌고, 꿈속의 공포도 서서히 사라져 갔다. 잠시 후, 나는 고개를 들어
강주희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 이를 악물었지만, 나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고마워요, 작은어머니. 저 꼭 오래오래 살게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잔을 부딪쳤다. “그야 그렇겠죠. 욕 많이 먹을수록 오래 산다잖아요.” 강주희는 내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눈가가 붉어지더니, 곧 고영훈을 바라봤다. “오빠, 작은어머니가 나한테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 거예요?” “우리 강씨 집안이야 임씨 가문만큼은 못하겠지만, 제가 오빠랑 함께하는 게 이런 식으로 압박을 받아야 한다면, 이 약혼은 하지 않는 게 낫겠어요.” 강주희는 일부러 술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약간 숙이며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아휴, 저 눈물 연기 몇 번이나 본 거야? 이제는 좀 지겹다.’ 나는 하품을 참지 못하며 고개를 돌렸다. “굳이 내 앞에서 이런 연극을 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 앞으로 우리가 서로 엮일 일도 없을 거잖아요.” 나는 여전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고시환을 힐끔 바라보고, 의자를 당겨 일어섰다. “오늘 약혼식에 온 건 우리 남편 때문이야. 우리가 서로 얼굴 보기 싫어하는 건 분명하니까, 미안하지만 이만 갈게.” 뒤돌아 나가려는 순간, 고영훈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그는 내 얼굴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곧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작은어머니, 주희한테 사과하세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 나오며 손가락으로 귀를 파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봐?” “제가 주희한테 사과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작은어머니, 아까 말씀이 너무 지나치셨잖아요.” 고영훈의 말에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으며 주변 사람들을 둘러봤다. “지금 여기 계신 분들, 다 들으셨죠? 제가 누구한테 무례했다는 건데, 당사자 말고 또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 계시면 말씀 좀 해보세요.”나는 손가락으로 강
‘어차피 곧 이혼할 사인데, 앞으로는 서로 얽힐 일도 없겠지. 아마 두 번 다시 마주칠 일도 없을 거야.’ 주요석에 앉아 있던 고정한이 그 순간 고시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주변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다 들리도록 크게 말했다. “시환아, 너 하나 양과 벌써 혼인신고까지 했다며? 결혼식은 언제 올릴 거니? 이왕 여자 쪽에서 허락한 건데, 절대 서운하게 하면 안 된다.” 고정한의 말이 떨어지자, 이미 조용했던 예식장은 더더욱 적막에 휩싸였다.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고시환을 바라보며, 속으로는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뭐? 고시환이랑 임씨 가문의 임하나 양이 혼인신고를 했다고?” “전부터 그런 소문이 살짝 돌긴 했는데, 진짜였네.” “근데 아까 보니까 둘이 말도 안 하고, 웃는 얼굴도 안 보였는데. 둘이 대체 왜 갑자기 혼인신고를 한 거야?” “에휴, 너 그거 모르지? 고시환은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H 시에서는 힘이 없잖아. 그래서 H 시에 발붙이려고 그런 거지.” “임씨 가문이 고씨 가문만큼은 아니어도, H 시에서는 알아주는 집안이잖아. 고시환 저 사람, 야망이 대단하네.” 예식장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런 계산에 밝은 사람들이었다. 단 몇 초 만에 고시환과 나의 관계를 파악한 듯, 각자의 추측을 마친 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나는 주변의 시선에 전혀 개의치 않고, 그저 미소를 띤 고정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단하네. 그때 고시환이랑 고씨 가문의 본가에서 그렇게 싸우고,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으면서도, 지금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들 행세를 하고 있잖아.’ 나는 옆에 있는 고시환을 힐끗 보았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결국 내가 먼저 나서기로 했다. “아버님, 저희 젊은 사람들 문제에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 우리 영훈 조카 약혼식부터 잘 챙기시는 게 우선 아니겠어요?” 고정한은 한때 고씨 가문에서 그야말로 전설로 불
고시환은 손에 들고 있던 혼인관계증명서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 순간에 우리 사이에 묘하게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기, 약혼식 곧 시작할 것 같은데, 당신 빨리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고씨 가문의 일원인 고시환이 아무리 고영훈과 사이가 안 좋더라도, 주요 가족 행사에서 가족석에 앉지 않고 나와 이 구석에 있는 건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내 말을 들은 듯 주위를 한번 훑어보더니,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어? 뭐 하는 거야?” 고시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직 이혼 안 했잖아. 내 아내로서 나랑 같이 가야지. 괜히 뒷말 나오게 만들 순 없으니까.” “곧 이혼할 건데...”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남자의 손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사실 우리 결혼 소식은 이 상류층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고시환이 내 손을 잡고 주인석에 앉자, 모두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뜨고 수군거리며 고시환과 나의 관계를 추측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그때 손을 뿌리쳤어야 했는데... 이제 이혼하면 뒷말이 더 많겠네.’ ‘고시환이랑 엮였다는 걸 이제 알았을 텐데, 오늘 밤에 이혼 소식까지 돌면 얼마나 말이 많아질까?’ 나는 마음속으로 임씨 가문의 내 부모님에게 미리 사과와 기도를 했다. ‘제발 이 험담들을 잘 견뎌내게 해주세요...’ 고시환은 주인석에 앉아도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지만, 눈썹 사이엔 살짝 드러나는 불쾌감이 있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눈길을 주자, 그 순간 사람들이 수군거리던 소리가 뚝 끊기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입을 다물었다. 나는 고시환의 대응에 속으로 엄지를 치켜세우며 웃음을 참았다. ‘정말 대단하긴 하네.’ 그에게 한마디 장난스럽게 말하고 싶었다.‘이제 곧 남이
장연희의 한마디가 내 혼란스러운 마음을 단숨에 정리했다.‘맞아, 난 이미 죽음을 한 번 경험한 사람이잖아. 뭘 그렇게 겁먹고 있는 거지?’ ‘어릴 적 친구 하나쯤이야, 별로 대수로운 일도 아니잖아.’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나는 서둘러 준비를 마친 뒤, 고영훈과 강주희의 약혼식에 가기로 했다. 청첩장을 들고 예식장에 들어서자, 이리저리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모르게 긴장감이 스쳤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고시환을 찾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다.’ 안도감을 느끼는 동시에, 묘하게 내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졌다. ‘애초에 고시환은 고씨 가문을 싫어하고, 자신의 성을 혐오하는데, 여기 올 리가 없잖아.’ ‘그런데도 왜 이렇게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걸까?’ 며칠 동안 나는 일에 몰두하며 고시환에 대한 생각을 잊으려 애썼지만, 잠깐이라도 쉬는 시간이 생기면 그의 얼굴과 목소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문제는 내 마음이겠지.’ ...나는 예식장 한쪽 구석에 앉아 조용히 쉬고 있었다. 그때, 샴페인 잔을 든 남자 몇 명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아가씨, 전에 본 적 없는 얼굴인데요?” “H 시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계시다니, 어디 가면 또 뵐 수 있을까요?” 나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둘 다 잘생긴 편이긴 했지만, 고시환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다.나는 차갑게 말했다. “만나볼 마음 없으니까 돌아가세요.” 이런 상류층 모임에서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섞여 있는 법이다. 특히 조금이라도 돈이 있는 이른바 ‘재벌 2세’들은 자신들이 평범한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두 사람을 단칼에 거절하자, 그들의 표정에 약간의 불쾌함이 스쳤지만, 공공장소라 억지로 화를 참는 듯했다. “아가씨, 참 성격 있네요. 그런데 어느 집안의 아가씨예요? 혹시 내가 누군지는 알아요?” 나는 그를 힐끗 쳐다보고 기억을
청첩장에 적힌 내용을 읽으며 나는 살짝 놀랐다. ‘고영훈이랑 강주희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빠르게 약혼까지 하다니.’ 며칠 사이에 둘이 약혼식 날짜까지 잡았다니, 정말 예상 밖이었다. 강주희는 웃으며 청첩장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작은어머니, 꼭 시간 맞춰 오셔야 해요.” 약혼식은 열흘 뒤로 정해져 있었다. ‘그때쯤이면 나도 고시환과 이미 이혼했을 거야.’ ‘그땐 고씨 가문이랑 완전히 남이겠지.’ 그 생각이 들자, 나는 청첩장을 다시 강주희에게 밀어 돌려주었다. “나 지금 네 작은어머니 아니야. 곧 고시환 씨와 이혼할 거고, 그 이후로는 너희 고씨 가문 사람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을 거야.” 나는 강주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약혼 축하해. 네 약혼식이 순조롭길 바랄게.” 강주희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다시 한번 청첩장을 내 손에 놓으며 말했다. “그래도 언니잖아요. 반쪽짜리 언니라도, 꼭 와줬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초대하려는 모습에, 나는 웃으며 청첩장을 받아들었다. “알았어. 그렇게 간절히 부탁하니까 가줄게.” ...강주희의 약혼 소식은 삽시간에 퍼졌고, 인터넷에서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사람들은 모두 이 잘 어울리는 커플에게 축하를 보내느라 바빴다. 하지만 한때 고영훈과 결혼을 약속했던 ‘강민아’에 대한 기억은 모두 완전히 잊은 듯했다. 약혼식 당일, 나는 가게에 앉아 청첩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장연희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사장님,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되잖아요. 누가 칼 들고 협박하는 것도 아니고요.”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넌 나를 몰라.” 강주희의 약혼식에 가든 안 가든 사실 내겐 상관없었다. 이미 고영훈에 대한 미련은 다 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문제는, 거기서 혹시 고시환을 마주치게 될까 봐였다. 그날 이후 고시환은 이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
“우리, 이제 끝낼 때가 된 것 같아...” 고시환의 말을 들은 나는 순간 멍해졌다. ‘끝내자고? 이혼을 하겠다는 뜻인가?’ 나는 한참을 머릿속에서 되새기다가, 그가 정말 떠나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고시환이랑 이혼할까?’ 실은 나도 처음 고시환과 결혼한 것도 단지 이 사람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였다. 지금의 강주희, 그녀가 끝까지 물고 늘어지지 않는 한, 나는 임씨 가문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그녀를 상대할 수 있었다. 이제의 나는 고시환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다가 일부러 웃는 얼굴로 말했다. “맞아, 끝내야지. 그럼 좋은 날 골라서 이혼하러 가자.” 고시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재산 분할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필요 없어.” 나는 남자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원래부터 비즈니스 관계였잖아. 임씨 가문 정도면 날 먹여 살리기 충분해.” 나는 일부러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내가 널 찾은 이유는 따로 있어. 나 H 시로 돌아가려고 해.” “이혼 절차는... 오늘 바로 끝내는 게 어때?” 고시환은 눈을 깜빡이며 헛기침을 했다. “오늘? 오늘은 안 될 것 같은데...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밤까지 걸릴 거야.” “괜찮아.”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시간 날 때 말만 해. 언제든 내가 맞출게.” 고시환이 답하기도 전에 나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럼 이만 갈게. 우리 엄마가 집에서 밥 차려놓고 기다리고 계셔.” 나는 문을 나섰고, 고시환은 내 뒷모습을 보며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비서가 허둥지둥 들어왔다. “보스, 방금 그분... 그 사진 속 사람이잖아요?” “그분... 이미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고시환은 액자 속 소녀의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 “맞아요, 이미 떠났어요.” 비서는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이미 사무실을 떠난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고시환의 사무실로 들어서는 순간, 왜 비서가 나를 보고 그렇게 놀랐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내 눈길을 끈 건 고시환이 아니라, 그의 책상 위에 놓인 커다란 액자였다. 나는 그 액자 속 사진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저 사진...’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내 머릿속은 열 살 때로 돌아갔다. 열 살...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중요한 나이였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생일축하는커녕 내 생일이 언제인지조차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 고시환만 빼고. 나도 그날이 기억난다. ‘뚱보’는 내게 다가와 말했다. “나 이제 떠나야 해. 아마 다시는 못 돌아올 거야.”나는 ‘뚱보’를 진심 어린 친구로 여기고 있었기에, 그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하고 엉엉 울며 ‘뚱보’의 가슴을 두드렸다. “다들 나를 떠나는데, 너마저 떠난다고? 너만은 친구라 생각했는데, 너도 나 버리고 갈 거야?” “오늘이 내 생일인데, 다들 케이크를 먹을 때 나는 못 먹어. 이제 내 유일한 친구인 너까지 떠나는 거야?” 그때, 내가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우는 모습을 본 ‘뚱보’는 나를 꼭 안아주며 위로했다. ‘뚱보’는 내 눈물을 닦아주고, 동네 구멍가게에서 슈퍼 막대사탕을 사와 내게 내밀며 말했다. “생일 축하해. 하지만 난 정말 떠나야 해. 해야 할 일이 있거든.” “내가 성공하면 꼭 널 찾으러 올게. 여기서 나 기다려 줄래?” 그때의 나는 ‘뚱보’의 눈빛 속 진심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저 친구가 날 속인다고 생각했다. ‘뚱보’가 날 달래려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사진 한 장 찍어줄게. 내가 너 보고 싶을 때마다 이 사진을 볼 거야.” “이 사진 앞에서 맹세할게. 내가 꼭 돌아와서 너 데리러 갈 거라고!” 그 말에 속아 넘어간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예쁜, 하지만 지금 보면 우스꽝스러운 미소를 카메라 앞에
나는 고시환의 눈을 마주치다가 어색해서 고개를 돌렸다. ‘분위기가 왜 이리 묘하지?’ 결국 나는 가볍게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저기, 나 여기까지 오느라 너무 힘들었거든. 우선 올라가서 쉬어야겠어.” 말을 마치자마자 헐레벌떡 위층으로 올라갔지만, 막상 내 방이 어딘지 몰라서 다시 내려와야 했다. “그... 어디서 자면 돼?” 고시환은 나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 자고 싶은 방에서 자. 당신이 이 집의 주인인데.” 그 말에 나도 순간 눈썹이 꿈틀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돌아 적당한 방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나는 넓고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지금 고시환한테 갖고 있는 감정이 어떤 건지 잘 모르겠어. 예전처럼 그저 복수를 위해 이용하려는 건 아닌 것 같아.’ ‘하지만 지금 내 육체는 임하나고, 영혼은 강민아잖아.’ ‘내가 정말 어린 시절의 정 때문에 고시환을 좋아하게 된 건지, 아니면 지금의 또 다른 고시환에게 끌리는 건지 헷갈려.’ 고시환도 똑같이 알 수 없었다. ‘그 사람이 날 보는 이유가 이 얼굴 때문인지, 아니면 지금의 나 때문인지 모르겠어.’ 다시 한번 몸과 영혼 사이의 갈등에 빠진 나는 하늘을 향해 소리를 내지르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복잡한 거 그만 생각하자.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아야지.’ 며칠 동안 꽉 조였던 긴장감이 풀린 탓인지, 나는 모처럼 완전히 편히 쉬었고 눈을 떠보니 이미 정오가 넘어 있었다. 내가 낯선 침실을 잠시 바라보다가 지금 어디 있는지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집 안을 돌아다녀 봤지만 고시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전화를 걸었는데, 또다시 통화 중이라는 신호음이 들려왔다. ‘대체 뭘 하길래 통화 중이야?’ 나는 찡그린 얼굴로 SL 그룹의 주소를 검색했고,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SL그룹 건물 앞에 도착해 KM 그룹보다도 훨씬 크고 높은 건물을
고시환은 두 팔로 나를 끌어안으며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얼마나 억울한지, 너는 알기나 할까...” 나는 코끝을 훌쩍이며 남자의 품에서 몸을 빼내면서 고시환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남자의 얼굴이 창백한 것 말고는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이자 안도의 숨이 나왔다. “그동안 어디 있었어? 왜 내가 그렇게 전화했는데 단 한 통도 안 받았냐고!” “대체 나를 당신의...” 내가 말을 하다 갑자기 멈췄다. “나의 뭐?” 고시환이 장난스레 물었다. 나는 얼굴이 조금 달아오르며 말했다. “당신의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는 거야?” “민아의 시신을 찾아주자마자 나 같은 파트너는 버리고 팽개치려는 건 아니겠지?” “아직 민아를 죽인 범인을 못 찾았잖아. 우리의 비즈니스 관계는 끝난 게 아니야!” 고시환은 나를 바라보며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 같은 파트너를 잊을 리가. 다만 내가 재벌이니까 쉬고만 있을 순 없잖아.” “안 그러면 재벌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기 힘들겠지. 그러면 너, 임씨 가문의 귀한 딸의 얼굴에 먹칠하게 될 텐데.” 나는 고개를 홱 돌려버리고, 고영훈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근데 고영훈이 했던 말은 뭐야? 얼른 솔직히 말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고시환은 나를 Y 시의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본인의 입을 통해서야 나는 고시환이 자리를 비웠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 장례식이 열리고 있던 동안, 고시환의 회사인 SL 그룹에서 개발한 약품이 누군가를 죽게 만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유족들이 SL 그룹에 찾아와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이 사건이 커지면서, 주가도 끝없이 추락했다. 결국 고시환은 회사를 수습하고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급히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고영훈이 했던 말도 이와 관련 있었다. 유족들은 고시환의 제안에 불만을 품고 사람을 시켜 그를 납치하려 했지만, 고시환은 이를 미리 알아채고 역으로 유족 측을 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