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그녀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사방은 어두컴컴하고 조용했고 차창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 들려왔다. 힘들게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아무런 기척도 없자 강은하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훌쩍거렸다. 이런 환경 속에서 고양이 같은 울음소리가 마치 깃털처럼 남자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둠 속에서 잔뜩 굳어있던 남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자 그녀가 남자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성민 씨, 왜 키스 안 해줘요? 내가 싫어요?”어둠 속에서 조롱 섞인 웃음이 터져 나왔고 그녀는 그의 입술을 덮쳤다.그 순간,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당신이 자초한 일이야.”한편, 차를 몰고 온 주성민이 송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었지만 송우진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뭐예요? 한밤중에 나한테 이런 걸 보여주려고 전화한 거예요?”“주성민, 왜 이렇게 늦었어?”송우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주성민한테 전화를 걸었을 때, 고연석은 이미 주성민의 집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그런데 서진태가 중간에서 가로챘고 주성민은 이제야 나타났다. 하여간 꾸물대는 성격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허구한 날 뭐가 그렇게 바쁜 건지...“형이 뭘 알아요? 나 지금 좋은 남자가 되려고 엄청 노력 중이란 말이에요. 은하 씨가 책들을 많이 추천해 줬어요. 집에서 책 읽고 필기까지 다 했단 말이에요.”송우진은 말문이 막혔다. 한동안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사람과 사람의 인연이라는 게 참 애쓴다고 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차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한번 확인해 봐.”송우진은 그를 위해 이 악연을 끊어줄 생각이었다. 아직 그렇게 깊이 빠지지 않았으니까 얼른 발을 빼는 것이 덜 고통스러울 것이다. “내가요? 좀 아니지 않나?”멀지 않은 곳에 있는 새 차를 보니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 느낌이었다. “저건 형이 엊그제 새로 산 차 아니에요?”주성민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그녀의 가슴을 때리는 듯했다.주성민이 밖에서 안을 볼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머리가 복잡해진 그녀는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그런 눈빛을 거부할 수 있는 남자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저 눈빛, 그가 고개를 숙이고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네 성의를 보여줘. 그럼 주성민은 내가 돌려보낼게.”강은하는 가까이 다가가 그에게 키스했다. 눈빛이 짙은 그가 황재민에게 문자를 보냈다. [와서 주성민 좀 데리고 가.]한편, 차 밖에 서 있던 주성민은 짜증이 난 얼굴로 창문을 다시 두드렸다.“내려와 봐. 감히 누구의 여자를 건드리고 있는 거야?”주성민의 목소리는 가까워진 듯하다가 다시 멀어졌다.그녀는 마음이 괴로웠다. 다만 그게 주성민 때문에 그런 건지 아니면 자신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차 밖에서 주성민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우산을 던져버리고 자기 차를 향해 달려갔다.강은하는 살짝 고개를 돌리고 빗속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그림자를 쳐다보았다.서진태가 어떤 방법으로 주성민을 돌려보냈는지 모르겠다.“이제 그만 돌아가요.”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좌석 아래에 있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 드는 그녀를 서진태는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주위는 다시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고 핸드폰 화면의 빛이 유난히 밝았다. 화면에 주성민이라는 이름이 떴고 강은하는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야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은하 씨? 지금 어느 병원이에요? 많이 다쳤어요?”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괜찮아요. 나 지금 병원 아니에요.”“거짓말하지 말아요. 재민 씨가 사진 한 장을 보냈어요. 은하 씨가 많이 다쳤다고 나더러 가보라고 하더라고요.”조급하고 걱정스러운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그녀는 마음이 약해졌다.주성민은 엄청난 속도로 차를 몰고 있었다.“운전 중이에요? 운전 조심해요.”이때, 서진태가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고 그녀의 핸드폰은 다시
“왜요? 지금 농담하는 거죠?”주성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그녀의 손등을 낚아챘다. “은하 씨, 방금 한 말 취소해요. 난 은하 씨를 안 보고 살 수가 없어요. 내가 미칠 것 같단 말이에요.”목이 멘 그녀는 눈가의 눈물을 닦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성민 씨, 바로 얼마 전에 나...”끝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아무리 약물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그녀가 원하지 않았던 일이라고 하더라도...“알아요.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요? 그건 은하 씨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나한테 미안하다는 생각 하지 말아요. 당신이 이렇게 무사히 내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난 좋아요. 아까 은하 씨를 찾지 못했을 때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진 그녀는 결국 눈물을 왈칵 쏟았다. 그가 가까이 다가와서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울지 말아요. 얼굴이 한껏 부어올랐네. 울면 더 아플 거예요.”그의 말에 그녀는 피식 웃었다.“그런 일로 다시는 날 안 만나겠다고 하면 어떡해요?”그가 침대 옆에 앉아 링거 주머니를 올려다보았다. 손을 뻗어 링거 튜브를 잡고 있자 그의 따뜻한 손길에 떨어지는 물약이 그렇게 차갑지 않았다. “그럼 내가 너무 나쁜 놈이잖아요. 나더러 어떻게 은하 씨 앞에 서 있으라는 거예요?”말을 하던 그가 갑자기 눈을 내리깔았다.“당신을 이렇게 만날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당신이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었을 거라고요.”“그건 성민 씨 과거잖아요. 내가 없던 시간들인데 왜 신경을 써요?”강은하는 오히려 그를 위로했다.그 순간, 그가 눈빛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강은하 씨, 처음 뵙겠습니다. 주성민이라고 합니다.”울고 있던 그녀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진지할수록, 진심일수록 그녀는 더 마음이 아팠다. 처음부터 잘못이었다. 그날 처음 본 클럽에서 주성민과의 연락처를 교환한
한편, 황재민이 서진태를 발견했을 때, 그는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그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한껏 흐트러진 그의 모습은 한눈에 보기에도 퇴폐적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황재민은 낯설기만 했다. 인기척 소리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주성민은 갔어?”“네. 성민 도련님이 정말 은하 씨한테 진심이었던 같습니다.”황재민은 병실에서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그에게 말해주었다. 서진태는 아무 말도 없이 피우고 있던 담배를 땅에 버리고 담뱃불을 껐다.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송우진의 차는 내가 가져갈 거야.”황재민은 어이가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송 대표님이 다시 그 차를 가져가겠는가? 새로 산 차 안에 두 사람이 그런 짓을 벌였는데...전화를 받고 운전하러 갔을 때, 황재민은 차 문을 열자마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백미러로 뒤를 훑어보았는데 그때의 서진태은 지금보다도 훨씬 퇴폐적이었고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셔츠 단추는 다 풀려있었고 가슴에 긁힌 자국들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서진태는 입원실로 들어갔고 황재민은 더 이상 따라가지 않았다. 병실에 도착하니 강은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 그가 들어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였다. 주성민이 진심이었다면 그럼 이 여자는? 이 여자의 마음도 흔들렸던 걸까?손을 들어 눈가의 눈물을 닦던 그녀는 그제야 서진태를 발견하였고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그가 앞으로 다가와 링거 주머니를 들여다보며 물었다.“몸은 좀 어때?”“괜찮아요.”“그래?”그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피검사 결과 약물의 복용량이 꽤 많았다고 했다. 이 여자가 또 거짓말이군.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그의 시선이 불편하여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자리에 누웠다.손목을 덥석 잡는 남자 때문에 그녀는 당황스러웠고 이내 손에서 통증이 전해졌다. 그는 링거 바늘을 뽑고 손등에 피가 나지 않을 때까지 꾹 눌러주었다. “내가 도와줄게. 이것보다는 더
강은하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방 안은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어젯밤, 서진태는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완전히 기운이 빠졌던 그녀는 자신을 씻겨주는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문득 약에 중독된 사람이 자신인지 아니면 눈앞의 이 남자인지 헷갈리게 되었다. 갑자기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밖에서 설인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모님, 깨어나셨어요?”“들어오세요.”입을 여는데 자신의 목소리가 많이 쉬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안으로 들어 온 설인숙이 커튼을 열자 밝은 빛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한편, 설인숙은 강은하의 모습을 보고 놀란 표정이었다. 이 집에 들어와 일하면서 안주인이 대단한 미인이라는 걸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긴 생머리는 나른하게 늘어져 있었고 훤히 파인 잠옷은 어깨까지 느슨하게 흘러내려 있었다. 백옥같이 하얀 피부에는 어젯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고 여자가 봐도 가슴이 설렐 정도였다. 한쪽이 부어올라 멍이 든 뺨은 전혀 그녀의 미모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오히려 보는 자의 마음을 더 안타깝게 만들었다. “많이 피곤하시죠. 대표님께서 약을 발라 드리라고 하셨어요.”설인숙은 기쁜 표정을 지으며 침대로 다가가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그녀는 민망한 마음에 무의식적으로 옷깃을 여몄다. “제가 할게요. 약 바르고 식사하세요. 벌써 오후 한 시입니다.”오후까지 잠이 들 줄은 몰랐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아주머니가 약을 발라주길 기다렸다.설인숙은 조심스럽게 연고를 발랐고 연고가 얼굴에 닿자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두 분이 결혼하자마자 제가 이곳에 와서 일하게 되었잖아요. 그동안 사모님께서 얼마나 힘드셨는지 전 다 알고 있어요. 남녀 사이는 그런 일이 있고 나서부터 관계가 확 달라질 거예요.”강은하는 눈을 들어 설인숙을 쳐다보았다.결혼 1년 차 때, 그녀를 대하는 서진태의 태도는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때마다 설인숙은 그녀보다 더 조급해했다.“사모님, 대표님 들어오
얼굴의 상처 때문에 그녀는 회사에 나갈 수 없었고 급한 일은 양윤아를 통해 처리하고는 집에서 며칠 푹 쉬었다. 이튿날 밤에 되어서도 서진태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설인숙은 그녀가 서운해할까 봐 그녀를 다독였다.“대표님은 회사 일로 바쁘실 거예요. 남자가 그런 일에 너무 밝히는 것도 안 좋아요.”강은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계속해서 책을 읽었다.그가 돌아오든 말든 솔직히 상관없었다.넷째 날, 얼굴이 거의 다 나은 그녀는 회사로 출근하기 시작했고 그는 여전히 돌아오지도 않고 전화 한 통도 없었다.그녀 또한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가끔 뜨거웠던 그날 밤을 생각하면 아직도 꿈만 같았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또다시 냉랭한 결혼 생활로 돌아갔다.하루하루가 지루한 날들이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바보같이 3년 동안이나 기대와 희망을 품고 살았다. 한편, 회사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려는데 빌딩 입구에 서 있는 서유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상대하고 싶지 않았던 강은하는 운전기사한테 지하 주차장으로 가라고 했다. 강은하를 보지 못한 서유미는 마음이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김지환이 모든 것을 인정했고 강은하는 혼수상태였기 때문에 증거가 없다. 아무리 그녀를 의심한다고 하더라도 강은하가 자신을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녀는 유통업체 쪽의 사람이었고 이런 큰 업체들의 도움을 받아야 물건을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강은하가 바로 합작을 중단할 줄은 몰랐다. 서유미는 억울한 마음에 고연석을 찾아갔다.그러나 고연석은 그리 배짱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강은하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하였고 현재는 모든 일을 강은하한테 미루고 도망쳤다. 서유미는 지금 조급해 죽일 지경이었다. 보통은 먼저 주문을 받고 물건을 발송한다. 주문을 받은 뒤 72시간이 넘도록 물건을 발송하지 못했으니 현재 클라이언트 쪽에 난리가 난 상황이다.어쩔 수 없었던 그녀는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상대방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입
단호하게 거절하는 그녀를 보고 양윤아는 한숨을 내뱉었다. 양윤아는 강은하가 기대에 찬 모습으로 결혼하는 것도 지켜봤고 혼자 하염없이 서진태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지켜봤다. 겨우 돌아왔는데 강은하는 더 이상 그를 개의치 않아 했다. 서진태의 얘기를 꺼낼 때면 예전처럼 눈빛을 반짝이지도 않았다. 양윤아는 그런 강은하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 지금의 강은하는 6년 전 강민우가 돌아갔을 때처럼 연약하고 부서질 것만 같았다.그러나 그 당시 강은하는 울지도 않고 진채영을 위로하며 아버지의 뒷일을 챙겼다. 그녀는 운명이 정해 준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앞으로 나아가려고 발버둥 쳤다.“안 가면 배후를 찾아낼 기회를 놓치는 게 아닐까요?”“배후가 그리 쉽게 찾아지겠어요? 조금만 더 기다려보죠.”양윤아도 더 이상 뭐라 하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 30분 후, 황재민이 찾아왔다.양윤아는 그를 보며 무뚝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우리 대표님은 안 가신대요.”“안 가면 어떡합니까? 지금 밖에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 줄은 알기나 해요? 강 대표님이 서씨 가문의 세를 등에 업고 횡포를 부리고 있다고 합니다. 납품한 물건에 문제가 있으면서도 사람을 만나주지 않고 있다고...”그 말을 들은 양윤아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서유미 이 뻔뻔스러운 인간, 어떻게 우리 대표님 탓으로 돌릴 수가 있는 거야?“그동안 우리 대표님에 관해 소문이 적었었나요? 하나하나 다 해명하면 다른 일을 어떻게 해요? 대표님께서 왜 안 가시겠다고 했는지 이제는 알 것 같네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서 대표님까지...”양윤아는 말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어갔다.“서 대표님까지 나서는 건 우리 대표님한테 잘못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 아닌가요? 가봤자 마음만 상하죠.”“아니요. 서 대표님은 그런 뜻이 아니라.”황재민이 뭔가 변명을 하려는데 양윤아는 듣지도 않고 바로 자리를 떴다. 한숨을 내쉬던 그가 한마디 더 보탰다.“강 대표님한테 물어봐요. 주성민 씨한테 일이라도 생기면 후회 안
숨을 들이마시던 서유미가 서진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서 대표님...”비록 강은하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고집이 센 그녀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어찌 잘못을 인정할 수가 있겠는가?하지만 사과하지 않고 계속 물고 늘어진다면 이 바닥에서 공공의 적이 될 것이다. 그럼 앞으로 사업하는 게 많이 곤란해질 것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대신해 일을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강 대표의 일은...”강은하는 팔을 빼고 손에 든 가방을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지고는 자리에 앉아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유미를 쳐다보았다.“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말 안 해도 잘 알고 있겠죠?”서유미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져 버렸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눈치 백단인 사람들이었다. 서유미의 안색을 보고 그녀의 잘못이라는 걸 그들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잘못이 없다면 진작에 변명을 했을 테니까. 강은하는 고개를 돌리고 그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제가 좀 늦었습니다. 한잔 받으세요.”사람들은 웃음을 지으며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서진태는 옆에서 예쁜 아내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기본 스웨터에 정장바지 차림인 그녀는 긴 머리를 시원하게 묶어 하얀 목덜미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맑고 새까맣고 지혜로운 눈망울이 참으로 예뻤다. 하마터면 큰일이 일어날 뻔했지만 강은하는 여전히 중심을 잡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일을 해결해 나갔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진작에 서유미한테 말려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몇 마디 말로 서유미를 제압하였고 그 일을 해결했다.똑똑한 여자라니까. 어디서 저런 보물이 나타난 거지?“김지환는 죄를 지었고 3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을 선고받게 될 겁니다. 안 그래요? 오빠?”“맞아.”그녀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강은하는 그자 협조할 줄 몰랐다. 10분 뒤, 사람들이 서진태에게 아부를 떠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떴다. 룸에서 나와 주차장으로 간 그녀는 한쪽 귀에 마스크를 걸치고
서진태는 손을 들어 올려 강은하의 뒷목을 잡고 피하지 못하게 했다.이불이 툭 떨어지고 은은한 노란 조명 아래 예쁜 그녀의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팔을 뻗어 그녀를 품 안에 가두었다.강압적이면서도 다정한 키스였지만 금방 막 잠에서 깬 그녀에겐 적당한 키스였다.강은하는 더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어찌할 수 없었다...그동안 두 사람은 하루도 빠짐없이 싸워댔다. 그가 키스하려고 하면 그녀는 휙 피해버리기도 했다.그런데 지금 피하지 못하게 잡고 키스를 하니 서진태는 이성을 유지하기 어려웠고 그녀를 삼켜버릴 듯 입안을 헤집고 있었다.피할 수 없는 강은하는 점차 숨이 막혀왔고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방 안에는 은은한 조명뿐이었지만 그녀에겐 여전히 너무도 밝은 조명이었다.“제가 동의하지 않으면 억지로 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요?”그녀는 그가 지난번 집에 있었을 때처럼 키스할까 봐 두려웠다.그의 키스에는 묘한 감정이 담겨 있었고 그녀가 착각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라고.그러나 눈앞에 있는 사람은 서진태였다. 그녀를 진심으로 아낄 리가 없지 않은가.서진태가 제일 잘하는 것은 연기였고 그가 원하는 것은 그녀의 몸일 뿐이었다.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탐욕스럽게 그녀의 반응을 끌어냈다. 그녀가 작게 신음을 내가 그제야 그는 머리를 들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쓸어냈다. 그녀의 두 눈에는 약간의 어쩔 줄 모르는 수줍음이 남아 있어 매혹적이었다.“오늘 분위기가 아주 좋네.”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한다면 더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었다.강은하는 그를 보며 말했다.“하지만 당신은 더럽잖아요.”...강은하는 예쁘고, 머리도 똑똑하고, 끈기도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서진태에게 그런 그녀의 장점들보다 분위기를 깨는 능력이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서진태의 표정이 차가워지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 뒤로 더는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강은하도 똑같이 행동하면서 잠을 자려고 했지만 졸리
“아니요.”강은하는 단박에 거절하곤 어깨에 있는 그의 손을 쳐냈다.서진태는 품이 너른 니트를 입고 있었고 두 손은 소파에 내려놓은 채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눈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는 기분이 좋은 듯했다.한참 지나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무슨 생각해? 내가 그렇게 짐승인 줄 아는 거야? 난 말했어. 네 동의가 없으면 하지 않겠다고. 그 약속을 지킬 거야.”그를 잠깐 오해했다는 생각에 강은하는 민망해졌다.“전 이만 잘 거니까 당신은 소파에서 자요.”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서진태는 얼른 손목을 잡았다.“가자. 더 편하게 쉬게 해줄게.”강은하는 그가 어제 일로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더는 별다른 감정은 생기지 않았다.“안 갈 거예요. 아무 데도 안 가고 잘 거예요.”“가자. 안 가면 널 안아서라도 데리고 갈 거야.”서진태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있었지만 강압적이었다.강은하는 이런 그가 너무도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서진태는 여자가 무조건적으로 자신에게 복종하길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진태 씨, 전 힘으로 진태 씨를 이길 수 없어요. 하지만 제 삶에 간섭하려는 생각은 접어두세요.”그는 목적을 이루지 않으면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결국 강은하는 마지못해 그의 뜻을 따랐다.그러나 그녀의 예상과 달리 그가 그녀를 데리고 간 곳은 스파숍이었다.방 안에 은은한 노란 조명이 켜져 있어 긴장을 풀기에 좋았고 오렌지꽃 오일을 떨군 가습기가 뿜어내는 향기로운 기운에 그녀는 온몸의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강은하는 옷을 벗고 푹신한 침대에 엎드리며 생각했다.‘이렇게 세심하게 준비한 걸 보니 예전에 홍수아한테도 똑같이 해줬겠지?'서진태가 방으로 들어왔을 때 마사지사가 들고 있던 오일을 강은하의 하얗고 보드라운 등에 발라주는 장면을 보았다. 이불은 그녀의 허리 아래까지 내려가 있었기에 예쁜 허리라인이 그대로 드러났다.그는 소파에 앉아 아주 다정하게 마사지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
사진을 서진태에게 전송한 후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송했다....최형준이 보낸 사진을 받았을 때 서진태는 협력 업체와 함께 식사하던 중이었다.강은하는 전에 그가 봤던 검은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머리는 자연스럽게 풀어헤친 모습이었다. 빗줄기가 약한 탓인지 아니면 광선 탓인지 모르겠지만 강은하의 머리카락은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았지만 몸에서 느껴지는 피곤함 때문에 처연하면서도 연약해 보이기도 했다. 정말이지 보는 사람마저 안쓰러운 기분이 들게 했다.그는 사진 속 강은하의 얼굴을 한참 빤히 보았다. 아무런 영혼이 없는 공허한 눈빛을 짓던 어제가 떠올랐다.술을 한 모금 마시니 오늘따라 유난히도 쓰고 독한 것 같았다.“죄송해요. 급한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네요. 벌주로 석 잔을 마시고 갈 테니까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볼게요. 내일 회사에서 뵙죠.”그가 있던 식당은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호텔 입구에서 차를 기다리는 강은하를 발견했다. 그녀는 우산을 쓰지 않고 보슬보슬 내리는 빗속에 서 있었다.어제부터 그녀는 주성민에게 문자를 보내 안부를 묻고 싶었다. 하지만 보내는 것도, 보내지 않는 것도 이상해 계속 미루고 있었다.그 순간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녀는 호텔 안으로 우산을 가지러 간 양윤아가 돌아온 것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우산은 저 주시고 윤아 씨는 이만 올라가서 쉬어도 돼요. 그쪽은 저 혼자 가도 되니까요.”이승연이 비록 미풍과 협력하겠다고 하지 않았지만 다른 브랜드 책임자를 소개해 주었기에 그녀는 가서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윤아 씨.”양윤아가 반응이 없자 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서진태의 잘생겼지만 차가운 얼굴이 보였다.“당신이 여긴...”그녀는 뒷말을 삼켜버렸다.서씨 가문의 셋째 아들인 서진태는 단순히 영화에 투자하는 것뿐만 아니라 직접 회사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업계에서 소문난 최상위에 있는 투자자였고 그가 투자만 했다면 대박을
홍수아의 계약 해지에 관한 기사는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강은하는 회사 업무를 보고 있었고 브랜드 사를 만나고 와도 아무런 진전이 없어 골치 아파하고 있었다.샤워를 마친 안서연은 소파에 앉아 책을 보다가 강은하의 앞으로 다가가 기웃댔다. 강은하가 아주 바빠 보이자 다시 책을 들어 읽었다.강은하는 그런 친구를 힐끗 보았다.“무슨 일 있어?”소파에 누워있던 안서연은 강은하의 목소리에 얼른 일어나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인데?”안서연은 빠르게 그녀의 앞으로 달려갔다.“자, 봐. 홍수아 이름이 아직도 인터넷에 도배되었어.”“도배되면 도배된 거지 그게 뭐라고.”“그냥... 서진태가 홍수아를 도와주지 않았잖아. 안 기뻐?”안서연의 말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내가 그런 일에 기뻐할 시간이 어디 있어. 난 바빠. 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고.”안서연은 간단히 대답했다. 서진태에게 관심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일찍 방에 가서 쉬어. 내일 촬영이 있을 거야. 밤을 새우면 피부 상태도 안 좋게 나올 수 있거든.”안서연은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은하 책상에 가득한 명품 브랜드 리스트를 보니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자신이 이 분야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안 그녀는 방해라도 하지 않기 위해 얌전히 방으로 들어갔다.집안이 드디어 조용해지자 강은하는 잠깐 멍을 때리게 되었다. 서진태가 홍수아를 애지중지하는 모습은 많이 보았다. 예전에 뜬 기사도 서진태는 두 시간 내에 전부 인터넷에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처리해버렸다.하지만 지금은 뜻밖에도 가만히 손 놓고 있었다.다만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이제 그녀와는 더 이상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었다....6시가 되자 강은하는 침대에서 일어난 뒤 짐을 정리했다. 출장 가야 했기 때문이다.안서연은 그런 그녀를 보니 안쓰러워 베개에 누운 채 말했다.“은하야, 내가 도와줄 건 없어?”그러자 강은하가 고개를 돌렸다.“네가 촬영을 잘해주면 날 도와주는 거야.
서진태는 성하시에 도착하자마자 서진우의 연락을 받게 되었다.“나한테 99억 2천만 원을 줘. 숫자가 너무 길지? 그냥 100억을 주면 돼.”“알았어.”서진태는 바로 대답했다.“은하가 나한테 어떤 도움을 청하고 이 돈을 줬든지 물어보지도 않아? 이렇게 통쾌하게 준다고? 은하랑 이혼 안 할 생각인 거야?”서진우가 물었다.그러나 서진태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 강은하를 만나기 전까지 그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하지만 강은하와 주성민이 웃고 떠들며 온천 리조트에서 나란히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니 이혼하기 싫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그는 강은하와 주성민에 관해 아주 잘 알고 있었고 어떻게든 자신의 목적을 빠르게 달성할 수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망설임도 없이 웃고 떠드는 두 사람을 보며 절대 그렇게 놔두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이혼하지 않으면 그와 강은하의 관계는 말하기 힘들어질 정도가 되겠지만 곤란해질 사람도 그였다.“잊지 말고 입금해. 그럼 끊을게.”통화는 여기서 끝이 났다. 황재민에게 이 일을 시키자 황재민은 한숨을 내쉬었다.“왜 사모님께 말해주지 않으시는 겁니까?”서진태를 그를 보았다.“내가 뭘 설명해야 하는 거지?”“사모님을 찾아가서 설명하셔야죠. 이미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보셨잖아요. 그럼 만회하셔야죠.”황재민은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은하가 믿어줄 것 같아?”그 말에 황재민은 단답했다. 확실히 오늘 강은하가 화를 내는 모습은 그는 처음 보았다.더 의외였던 것은 서진태였다. 항상 무덤덤하던 사람이 오늘 강은하와 함께 있는 주성민을 보자마자 감정을 드러내며 충동적인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저녁이 되자 강은하는 퇴근했고 안서연은 이미 그녀의 집에서 맛있는 저녁을 만들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자, 공주님. 수저 여기 있사옵니다.”강은하는 안서연의 말과 행동에 웃음이 터졌고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윤아 씨가 네 기분이 아주 안 좋다고 해서 내가 왔어. 무슨 일이
사무실로 돌아온 강은하는 양윤아에게 말했다.“조수호 씨에게 전해요. 제 이혼을 맡을 필요가 없다고요. 비용은 넉넉하게 주고 그동안 고생했다고 전해주세요.”“왜요?”양윤아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강은하는 코끝이 시큰해지며 서진태가 그녀를 속여 가지고 있던 홍수아를 상대할 수 있는 증거를 빼앗아 갔다고 말했다. 그 말인즉슨 복사본이 없다던 주성민의 CCTV 영상도 따로 있다는 의미였다.그녀는 서진태가 이렇듯 비열하고 치졸한 사람일 줄을 몰랐다. 만약 알았다면 결혼하지도 않았을 거고 지금처럼 초라한 처지가 되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그가 이렇듯 그녀의 행복을 방해한다면 절대 그도 행복할 수 없게 만들겠다고 다짐한 그녀였다.“마케팅 부서로 가서 홍수아와 계약 해지한다고 알리세요. 회사 공식 계정으로 계약 해지에 관한 글도 올리고 새로운 광고 모델로 안서연으로 교체한다고 하세요.”“그렇게 하면... 홍수아의 팬들이 난리를 치지 않을까요?”양윤아는 회사의 평판이 걱정되었다.“홍수아는 지금 위험한 상태가 아니던가요?”강은하의 말에 양윤아는 바로 의미를 알아챘다.점심이 되자 강은하는 명품 브랜드 책임자를 만나 다시 미풍 플라자에 입점하고 싶다고 말했다.강민우가 살아 있었을 때 미풍 플라자는 해성시에서 인기 있는 쇼핑센터였지만 2년 동안 매년 400억의 손해를 보았고 입지도 점차 흔들리고 있어 많은 브랜드들이 떠나갔다.다른 사업 부문들도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고 특별히 뛰어난 사업은 없었다. 회사를 물려받은 뒤로 그녀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바로 브랜드 정리였다.명품 브랜드 L.S의 책임자 윤우연은 강은하를 보기만 해도 진절머리가 났다. 두 달이라는 시간 동안 강은하가 그와 8번이나 약속을 잡았기 때문이다.그가 아무리 거절을 해도 강은하는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찾아와 약속을 잡았기에 그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강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만 L.S가 원하는 건 만상입니다. 지금의 미풍 플라자는 만상에 비하면 훨씬 떨어졌죠.”최근 몇
오늘 영상을 보고 나서야 서진태는 만약 그녀의 머리가 똑똑하지 않았다면, 만약 운이 좋아 송우진을 만나게 된 것이 아니라면 그녀가 어떤 고통과 공포를 느꼈을지를 알게 되었다.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홍수아를 ‘처벌'하면 이 일을 가볍게 넘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전부 그의 착각이었다. 고작 그의 처벌로 강은하 마음속에 남은 상처가 사라질 리가 없지 않은가. 이 일로 강은하가 그에게 느끼고 있던 자그마한 사랑의 감정도 전부 사라지게 되었다......주성민은 강은하의 가방을 들고 강은하와 함께 온천 리조트에서 나오다가 우연히 서진태의 사나운 눈빛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강은하 앞으로 나서며 지켜주려고 했다.그런 그의 행동에 서진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주성민, 이리 와.”그러나 주성민은 움직이지 않고 여전히 어두워진 눈빛으로 그와 대치했다.“전 이미 말했어요. 대표님과 저는 더 이상 친한 형과 동생 사이가 아니라고요.”그랬으니 그가 서진태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그 말을 들은 서진태는 나직하게 웃었다.“넌 네 방식대로 강은하를 지켜주겠다고 하지 않았었나? 하지만 지금까지 네가 한 게 뭐가 있지? 강은하에게 뒤처리를 맡기는 거? 주성민, 넌 강은하한테 한참 부족한 사람이야!”주성민을 이를 빠득 갈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가고 싶지 않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만약 강은하가 아니었다면, 서진태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가 지금 이곳에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말이다.“그럼 당신은요? 남편으로서 제게 뭘 해줬죠?”강은하가 앞으로 나서며 웃는 얼굴로 서진태에게 물었다.“성민 씨는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걸 최선을 다해줬어요. 전 성민 씨가 앞으로도 더 잘해줄 거라고 믿어요. 하지만... 대표님은요?”서진태는 차 문을 열고 내린 후 강은하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자 강은하는 바로 미간을 확 구겼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또 미친 거예요?”주성민이 앞으로 나서자 서진태는 강은하를 품에 가뒀다. 집착이 드
강은하는 양윤아에게 급한 일 처리하러 가라고 한 뒤 주성민과 아침을 먹었다.“은하 씨네 회사 구내식당 음식은 아주 맛있네요.”강은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를 묵묵히 보고만 있었다.주성민은 한숨을 내쉬었다.“앞으로 생각 좀 하고 움직여야겠어요.”“밥이나 드세요.”강은하는 이 일에 멋대로 끼어든 그에게 뭐라 따져 물을 수가 없었다.10분 뒤 양윤아는 쇼핑백을 들고 나타났다.“식사 마쳤으면 샤워하러 가요.”주성민은 당황한 표정이었다.“샤, 샤워요?”‘그, 그래도 되는 건가?'강은하는 빨개진 주성민의 귀를 보곤 이마를 짚었다. 이런 사람이 정말로 여자를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사람이 맞는 걸까?양윤아는 나직하게 웃었다.“주 대표님, 금방 경찰서에서 나왔으니 그 기운을 씻어내셔야죠.”주성민은 살짝 헛기침하면서 머릿속에 든 생각을 지운 뒤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강은하는 사무실로 돌아가 녹음 파일과 영상을 양윤아에게 건넸다.양윤아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대표님, 이건...”“이걸 황재민 씨한테 주세요.”강은하는 서진태에게 빚을 지고 싶지 않았다.그런 그녀의 생각과 달리 양윤아는 마음이 괴로웠다....양윤아가 녹음 파일과 영상을 황재민에게 건넸을 때 그는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출장 준비하고 있던 서진태는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겠으나 열어보게 되었다.식탁에 앉아 서로 인사를 나누던 모습과 강은하가 김지환에게 끌려가 소파에 던져지는 모습까지 전부 찍혔다.그는 강은하가 거실 테이블에 있던 재떨이를 들고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김지환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았다.“얼굴도 찍으라고?”김지환의 뺨을 맞은 강은하는 그대로 식탁에 부딪히며 넘어지게 되자 그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초라한 모습도 전부 찍혔다...짧은 몇 분의 영상이었지만 황재민은 잔뜩 긴장하면서 봤던지라 등줄기에 어느새 식은땀이 났다.“대표님...”“은하 지금 어디에 있지?”그의 입에서 흘러
강은하는 여기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하지만 이미 서진태와 이 지경이 된 이상 이런 행동을 해도 그녀는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처참한 기분만 들었다.서진태는 그녀의 표정이 보고 싶어져 고개를 들자 베개에 가만히 머리를 대고 누워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않는 그녀의 두 눈빛을 보고 말았다.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이렇게까지 여자를 탐한 것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그 사람'에게도 말이다...하지만 이미 너무도 늦어버렸고 강은하는 그의 손길이 불쾌하게 느껴졌다.서진태는 이불을 끌어당겨 그녀의 몸에 덮어준 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침대 끝에 앉았다.“은하야, 미안해.”그는 그녀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이다. 단호하지 못한 자신에게 말이다.분명 그녀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는 그녀를 괴롭히고 처참하게 만들었다.강은하는 움직이지도 않았고 그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공허한 눈빛으로 커튼만 보았다.서진태는 시선을 떨구고 이불 밖으로 나온 그녀의 어깨를 보았다. 초라하게 이불 속으로 움츠러들었다.한숨을 내 쉰 그는 그녀의 곁으로 가 손끝으로 그녀의 머리를 쓸어넘겨 주었다. 코끝이 붉어진 모습을 보니 퍽 가련해 보였다.“앞으로 네가 원하지 않으면 방금처럼 억지로 하진 않을 거야.”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며 다정한 말을 하고 있었다.물론 알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그에게서 가장 원하는 대답은 이혼 서류에 사인해주겠다는 것임을. 이미 오래전에 그녀와의 결혼 생활을 유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사인해주겠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는 아직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제 기분을 신경 쓰든 말든 전 아무래나 상관없어요.”서진태는 더는 말을 잇지 않았고 그녀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머리만 쓸어넘겨 주고 있었다.“오늘은 여기서 자.”강은하는 드레스룸으로 들어간 서진태가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모습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