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는 기름만큼이나 귀중해서 4월에 내리는 비도 늦지 않았다.숙청제는 황실 서재 밖의 복도 앞에 서서 비바람에 흔들리는 풍등을 보며 눈앞의 화면이 꿈결 같기도 하며 현실 같기도 했다.사여묵의 그림자는 벌써 빗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그는 마음속으로 씁쓸했다. 사여묵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약을 복용할 때, 안심이 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내가 사여묵을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그들 부부는 아직 젊어서 첩을 들이지 않아도 아이를 두 세명을 낳을 수 있을 텐데. 그 약을 먹으면 다신 아이를 갖지 못할 것인데. 설령 양자로 들일 수 있다고 해도 결국 자신의 친자식이 아니니 어찌 후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형으로서 그는 더없이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지만 황제로서 그는 드디어 안심할 수 있었다.모순적인 생각에 그는 한숨을 내쉬며 혼자 중얼거렸다.“세상에 어찌 완벽한 방법이 있겠는가? 어떻게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부분이 있기 마련인데.”그의 목소리는 너무 작고 빗소리에 가려져 그의 뒤에 서 있던 오 대반조차도 듣지 못했다.봄이 가고 겨울이 왔다. 음력 12월 8일이 되자 집집마다 팥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숙청제는 새로운 황후를 들였다.새로 들인 황후의 이름은 진의춘이었는데 그녀의 오라버니가 바로 대리사 소경인 진이였다.진 씨 가문이 귀한 집안은 아니었다. 조상들이 사업을 했었고 진 황후의 할아버지가 독서를 좋아했기에 진 씨 가문에서 그녀를 키워낸 것이어서 뿌리가 깊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진이가 대리사 소경이 되어서야 진 씨 가문이 서서히 번창하기 시작했다.진 씨 가문의 방계가 여전히 사업을 하고 있긴 했지만 숙청제는 조사한 결과 진 씨 가문은 관리와 결탁한 정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가문은 숙청제의 요구에 꼭 부합했다. 진 황후는 올해 열아홉 살이 되었는데 집안일에 지장을 받아 줄곧 혼담을 나누지 않았다. 진모는 몸이 좋지 않아 집안일을 책임질 수 없었고 진이의 부인은 몇 년 전 난산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2월 2일이 되자, 단신의가 신약산장에서 돌아왔다. 먼 길을 돌아 진성으로 돌아왔는데, 그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바로 입궁했다. 숙청제는 서재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단신의의 청을 듣자 즉시 대신을 물리치고 사여묵만 남긴 후 단신의를 모셔오라고 했다. 단신의는 진성을 떠난 지 1년이 되었는데 그 사이에 많이 늙어 머리카락도 희끗희끗했다. 숙청제는 내려와 절을 올리려는 그를 부축했다. 일 년의 기다림 끝에 답을 듣는 날이 오자 그는 오히려 두려워졌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단신의의 말에 숙청제와 사여묵은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편지를 보낼 땐 대황자의 병세가 안정되어 생명에 지장이 없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패혈증으로 인해 병세가 급속히 발전하였습니다. 전 처음에 그가 버텨내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임종에 들어서기까지 했는데 뜻밖에도 그가 다시 견뎌낸 것이죠! 1년 동안 그는 모든 어려움을 하나하나 돌파했습니다. 정말 대단하지요.” 숙청제는 단신의의 말을 들으며 눈가가 촉촉해지고 마음이 아팠지만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비록 걸을 수는 없지만 휠체어로 밖에 나갈 수 있으니 방에 틀어박혀 있지 않아도 된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가 공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의리학에 매우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탕약노래를 따라 배우고, 약초를 배우더니 지금은 냄새만 맡아도 무슨 약인지 알아맞출 수 있답니다. 그리고 제가 떠날 땐 진맥을 배우고 있었지요.”숙청제는 그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에게 그런 재능도 있었소?” 그러자 단신의가 말을 덧붙였다. “훌륭한 의사나 연약사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으로 따분한 시간을 때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숙청제는 그가 너무나도 그리웠지만 거리가 먼 탓에 자신이 쉽게 갈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대황자가 이곳으로 올 수도 없었다. 그러니 관심이 있다면 그것으로 시간을 때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
황금빛이 물드는 10월은 왕이장과 시만자의 결혼 날이였다. 작년 추석 때 시만자는 왕이장의 청혼을 받아들였고, 함께 동행하며 왕이장이 진심을 베풀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승낙했을 땐 그 순간의 느낌으로 진심으로 결혼하고 싶었다. 그런데 꼬박 1년이 지나서야 혼례를 치르는 건 혼수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은 아니었다.시만자가 태어난 해부터 시 씨 가문에서 그녀의 혼수를 장만하기 시작했고 해마다 늘여가 이제는 진성에서 집과 장원까지 샀기 때문이다. 그리고 혼례에 관해서는 매산에서도 이미 준비를 마쳤다. 혼사를 지금까지 미룬 것은 시 씨 가문, 적염문, 만종문, 그리고 시만자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만자는 황실에서 시집가서 왕이장이 그녀를 그녀의 저택으로 맞이하길 바랐다. 그렇게 하면 편리한 데다 긴 여정을 거쳐 강남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 가주는 시 씨 가문이 대 가문이니 반드시 크게 치러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크게 치르려면 강남에서 시집을 가야 맞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연회를 열흘 밤낮을 열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만자가 적염문의 제자이고, 왕이장은 만종문의 제자이니 그렇게 복잡하게 할 필요 없이 적염문에서 만종문으로 시집을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적염문의 명성을 얻기 위해 무림의 친구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열고 싶었다. 만종문의 무소위는 왕이장은 왕 씨 가문의 사람이고, 그의 뿌리도 진성에 있기 때문에 혼사를 진성에서 치르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솔직히 말해서 만종문이 성대한 혼사를 치르려 한다면 무소위는 지쳐 죽게 될 것이었다.그는 돈은 지원할 수 있지만 힘은 쓰기 싫었다. 사람들과 왕래하는 걸 좋아하지 않던 임양운은 애초에 그의 소중한 제자였던 송석석이 매산에서 연회를 열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만종문에는 제자가 많은 탓에 연회를 열기 시작하면 해마다 연회를 열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속세를 피해 매산으로 간 그에겐 매일
송석석은 오늘 시만자와 이야기할 시간이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결혼식에는 여러 가지 번거로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특별히 화장하는 낭자를 찾아 화장을 하고 머리를 빗는 것만 해도 한 시진은 훌쩍 지나갔다. 시만자가 원래 아름답고 요염한 데다, 화장하는 낭자의 손재주가 좋아 더욱 아름다워졌다. 점심을 대충 때우자, 시집보내는 손님들이 잇달아 찾아오기 시작했다. 원래 최 씨 부인은 남자 쪽 형수라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최숙심은 기어코 오려고 했다. 그녀는 남자 쪽이자 여자 쪽이니 충돌하지 않는다고 했다. 좋은 날이기도 하니 아무도 그런 걸 따지지 않았다. 신부 옷을 입었을 때 시만자는 이유 없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시집가는 것인가? 시집을 가는 순간 집안일을 도맡아하고 아이를 낳아야 할 텐데, 그렇게 되면 다신 지금처럼 자유롭고 제멋대로 살 수는 없겠지? 그런데… 보주는 예전에 시집간다더니 왜 아직 안 간 거지?’ 시만자는 이런 생각에 갑자기 보주를 보며 물었다. “너 왜 아직까지도 시집 안 갔어?” 그러자 보주가 놀라서 말했다. “말했잖아요. 아직 인연을 만나지 못했다고.” 시만자가 중얼거렸다. “괜히 내가 약속을 어긴 것 같잖아.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인데 말이야.” 송석석은 그런 그녀를 보더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꿰뚫은 듯 말했다. “그래. 넌 한다면 하는 사람이지. 오 사형에게 시집간다고 했으니 후회하면 안 돼.” 시만자는 자신의 봉관을 바로 하고 옷을 정리하며 말했다. “후회라니? 내가 시집간다고 했으면 꼭 가는 거야!”‘난 평생 다채롭게 살 거야. 전쟁터도 두렵지 않은데 결혼을 두려워하겠어?’ 그녀도 주장이 없는 사람이 아니니 왕이장이 잘해주지 않으면 이혼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불안한 느낌은 그녀의 강한 마음에 의해 사라져갔다. 그녀는 기쁜 날이니 안 좋은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다시 다짐했다. 송석석이 위로를 하려고 했는데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시만자가 턱을 치켜
시 가주는 그녀가 세 번 절을 한 후에야 비로소 울먹이며 말했다. “양심도 없는 녀석, 어서 일어나거라.” 시만자는 천천히 일어나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내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고는 순간 후회했다. ‘내가 왜 가족과 친척도 없는데 굳이 편리만 추구해서 진성에서 결혼한다고 했을까?’ “아버지, 오늘 결혼식이 끝나면 아버지를 따라 집에 가서 연회를 한 번 열고, 집에서 연회를 마친 후 다시 스승님에게 가서 연회를 한 번 더 열겠습니다.” 시 가주는 당연히 기뻤지만 그녀가 이리저리 다니며 고생하는 것이 싫었다. “강남에 친구가 없어서, 그곳에서 연회를 열기 싫다고 하지 않았느냐?” “제 친구는 얼마 없지만 아버지, 그리고 시 씨 가문의 친구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 이기적으로 아버지의 체면을 깎을 순 없지 않습니까?” 시 가주는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이 흐뭇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내 딸이 드디어 철이 들었는데… 오늘 시집가서 다른 집 며느리가 되다니.” 시만자는 앞으로 다가가 시 가주의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 혹시 잊으셨어요? 제가 시집가는 건 맞지만 저의 저택으로 가는 것이니 아버지께 사위를 데려온 것이나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그러자 시 가주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희 둘이 잘 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데릴사위는 필요 없단다. 그가 이렇게까지 양보하는 것을 보니 너에게 잘해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겠다.” 시만자는 웃으며 말했다. “그가 잘해주지 않으면 내가 왜 시집을 가겠습니까?”왕이장에 대해서 시 가주도 당연히 조사해 본 적이 있었다. 예전에 약간의 소문이 있었지만 조사한 결과 심각한 행동은 없었고 사람은 성실했다. 게다가 만종문 출신인 데다 만종문에서 손에 꼽히는 실력이기에 그에 대해서는 만족했다. “자, 시간이 다 되었으니 사위 보고 들어와서 절을 하게 하고 꽃가마에 올라가거라.” 왕이장은 장인을 뵈러 강남에 갈 준비를 했었는데, 오늘 갑자기 만나니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첫눈이 내리던 날, 숙청제는 갑자기 기발한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조정에 가지 않은 그는 의자에 앉아 미복 차림으로 상국의 아름다운 강산을 보겠다고 했다. 조정은 여전히 섭정왕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숙청제는 매우 초췌하고 여윈 상태였기에, 대신들은 너도나도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그는 이미 결정을 내린 뒤였다. 그는 송석석과 척귀, 그리고 단신의와 금태의를 데리고 다음 날 바로 출발했다. 숙청제는 이번에 미복으로 외출하는 건 문득 떠오른 생각이 아니었다. 그는 진작에 사여묵과 송석석과 상의했었다. 단신의는 제안하지 않았지만 그가 고집스럽게 가려고 해서 단신의 또한 어쩔 수 없이 함께 가기로 한 것이었다. 숙청제는 아름다운 강산을 더 보고 싶었지만 그의 진정한 목적은 신약산장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아들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단신의는 사적으로 사여묵과 송석석에게 황제가 이번에 가면 신약산장에 도착할 수는 있지만 진성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그리고 최악의 결과는 그가 살아서 신약산장에도 도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생각에 사여묵 부부도 안 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황제가 미복으로 외출한다고 해도, 외출하면 반드시 사람들의 주의를 끌 것이었다. 그날 역적의 잔당이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대황자 때문이었는데, 대황자가 앞으로 안정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는 외부인들에게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려서는 안 되었다.하지만 마약 황제가 신약산장으로 간다면 의심을 불러일으킬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단신의가 전에 신약산장에서 1년 동안이나 머물렀기 때문에 곰곰이 생각해 보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도리는 도리일 뿐, 아버지로서 마지막으로 아들을 한 번 보고 싶다는데 감히 누가 막을까.출발하기 전날 밤, 송석석은 사여묵에게 서우가 대황자를 많이 그리워하는데 함께 데리고 가면 안 되는지 물었다. 하지만 사여묵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지
숙청제가 진성을 떠나기 전에 사여묵은 이미 섭정왕으로서 대리 조정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에겐 전공이 많아 그에게 불복하는 문무백관들이 없었고, 심지어 모두가 그를 존경했다. 하지만 지금 황제가 병을 무릅쓰고 미복 외출을 하자, 조정에서 섭정왕을 경계해야 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를 경계하는 것은 태자가 어려서 섭정왕이 어린 왕을 괴롭히고 그 자리를 대신할 마음이 생길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의심과 소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사여묵을 존경하지 않고, 그에게 겉으로는 복종하는 척하며 뒤에서는 호박씨를 깠다. 이덕회는 몇몇 대신들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마음이 조급해져서 먼저 형부상서인 이택을 찾아갔다. 이택은 태자의 외조부이자 돌아가신 수빈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섭정왕에게 이런 소문이 돌았으니 이덕회는 이택이 나서서 모범을 보여 섭정왕을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또한 지금 소문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었다. 딸이 세상을 떠난 후 그는 오랫동안 슬퍼했다. 비록 태자가 수빈의 친 아들이 아니긴 했지만 수빈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던 사람이었다. 그는 섭정왕의 인품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권세가 가져온 영향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전의 역왕은 가문과 생명도 아랑곳하지 않고,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수년 동안 계획했었다. 하지만 지금 섭정왕에게 이렇게 좋은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가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는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덕회에게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헛소문일 뿐이니 섭정왕께서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자네도 신경 쓸 필요 없소.”그러자 이덕회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유언비어가 호랑이처럼 퍼져 섭정왕의 위신에 영향을 미쳤고, 더 나아가 시정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소. 섭정왕은 황제폐하께서 직접 선택해서 나라를 감독하고 태자를 지지하라고 한 사람이오. 그가 위신이 없다면 앞으로 태자가 어찌 자리를 잡을 수 있겠소? 외조부가 되어서 어찌 조금도 걱정되지 않는 단 말
신약산장으로 가는 길이 멀고 험한 탓에 숙청제의 병세도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단신의는 그에게 침을 놓고, 처방을 내려도 그저 완화될 뿐이기에, 계속 간다면 병세는 점점 더 심각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숙청제는 의지가 강해서 가는 길이 아무리 힘들어도 이를 악물고 참았다.신약산장은 남쪽 명주에 위치해 있으며, 기후가 사계절 봄과 같아서 몸을 추스르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그래서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춥기는커녕 금방 가을에 들어선 것 같았다.명주 현지인들은 신약산장에 대해 별로 들어본 적이 없지만 명주에 가장 큰 약국인 약왕당이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사실, 신약산장이 명주에만 있는 건 아니지만 명주의 신약산장이 귀중한 약재를 가장 많이 생산한 곳이었다.끊임없이 기복이 있는 산에 많은 보물이 숨겨져 있었다.신약산장은 산속에 위치해 있어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곡경이 깊었다. 길에도 온통 꽃들로 가득 차 있었고, 눈에 띄는 곳마다 다양한 색상의 꽃들이 피어났다.숙청제는 평생 동안 이렇게 많은 꽃을 본 적이 없어 구경하느라 바빴다. 동백꽃부터 장미, 진달래에 수국까지,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들도 많았다.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황금 은행길도 있었다.그의 정신도 갑자기 많이 좋아진 것 같았고 기분도 좋아졌다. 비록 정이가 여기서 평생을 지내야 하긴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라면 나쁘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앞으로 더 나아가자 커다란 은행나무 숲 속에 가려져 있는 산장이 보였다.산장은 흰 벽과 푸른 지붕으로 되어 있었고 매우 컸다. 바로 산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위로 올려다보면 구름과 안개가 피어올라 산꼭대기를 덮고 있었다.햇빛이 그의 어깨와 길을 비추어 구름과 극도의 조화와 매력을 형성했다. 이내 산바람이 불자, 그는 약간 쌀쌀한 느낌이 들어 옷깃을 여미고 멀지 않은 산장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낀 그는 결국 그를 만난다고 생각했다. 송석석은 사람들에게 밖에서 대기하라고 한 후 숙청제를 모시고 들어갔
어릴 때부터 친했던 두 친구는 각자의 분야에서 항상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수철이 약을 접하게 되면서 약과 의리는 그가 신약산장을 의지하는 모든 것이 되었다. 산에 내려가 의관을 차리고 사람들을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매번 참기만 했는데 서우가 왔다 간 후 보내온 편지를 본 그는 산에서 내려갈 희망이 생겨 마음이 부풀어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예전에 부상에 시달린 적이 있어서 열심히 통증과 부상을 치료하는 약을 연구했는데, 의술이 전면적인 나머지 뒤처지지도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지난 몇 년동안 한 번도 타오르지 않았던 한 줄기의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신약산장에 도착한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설령 살아갈 수 있다 하더라도 이번 생은 그곳에서 지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신분과 얼굴을 바꾸고, 배운 것을 가지고 산에서 내려갈 수 있다면, 그는 유용한 사람이 될 수 있고 더 이상 숨지 않고 떳떳하게 살 수 있었다. 그 생각에 그는 며칠 동안 흥분한 상태로 제약 공장에서 먹고 마셨다. 사부님은 그런 그의 모습이 조금 두렵게 느껴져 사공에게 편지를 써 알리려고 했다. 그는 사부에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환한 미소를 띠었다. 그 웃음에 놀란 사부님은 심지어 무당을 불러 귀신이 씐 건 아닌지 보려고까지 했다. 하지만 서우 형이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그는 사부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비록 그가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나중에 너무 실망하지 않도록 마음의 준비를 항상 해야 했다. 날이 지나고 더위와 추위가 오가더니 벌써 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추분, 날씨가 상쾌한 어느 가을, 하늘의 밝은 태양은 사람을 뜨겁게 하지 않았고 하얀 구름들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불어 들어오고 있었다. 서우는 다시 한번 신약산장에 발을 들였는데, 이번엔 그의 서동인 진소설을 데리고 왔다. 진소설은 몽동이를 따라 무술을 익혔다. 그런데 노력한 사람은 역시 보답을 받는다고, 비록
“사정언, 너 말 좀 그만해.” 송석석은 눈살을 찌푸리고 서우에게 매달려 쉴 새 없이 말하는 딸을 혼냈다. 새빨갛게 그을린 작은 얼굴에 닭장처럼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한 눈에 봐도 밖에서 뛰어놀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우가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쉬지도 않고 사촌 오빠에게 길에서 본 재미있는 일들을 물었다. “어머니.” 사정언은 눈을 크게 떴다.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니 왠지 억울해 보였다. 그녀의 외모는 부모님의 장점만 닮아 있었다. “제가 이렇게 오랫동안 사촌 오라버니를 만나지 못했으니, 당연히 할 말이 많지요. 하루만 못 봐도 3년 못 본 것처럼 길게 느껴진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대체 누가 그런 말을 가르쳐줬어?” 송석석이 눈살을 더욱 찌푸렸다. “왕사백이요. 그가 며칠 전에 매산으로 갔었는데, 돌아오자마자 시 고모를 안고 그렇게 말했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시만자는 고개를 숙여 송석석의 눈빛을 피했다. 그녀는 그때 정언이 나무 위에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알았다면 아이 앞에서 껴안고 그런 오글거리는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녀는 이 아이가 말을 따라 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나이의 아이들이 왜 어른들의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는 이맘때쯤에 최대한 어른들과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말이다. 사정언은 대답한 후에도 계속 서우를 잡고 말했다. “오라버니, 혹시 상서에 갔어? 상서에서 시신 업는 것을 봤어? 정말 소국이 말한 것처럼 앞에서 종을 흔드는 도인이 있고, 뒤에 좀비들이 따라가는 거야? 그들은 걸어가 아님 뛰어가? 꼭 밤에만 볼 수 있는 거야? 낮에는 햇볕이 쨍쨍해서 볼 수 없는 거야? 그들은 말할 줄 알아? 뭘 먹어? 그리고 그곳엔 주술을 잘한다고 들었는데 혹시 미인을 본 적이 있어? 그런 미인은 오라버니가 마음에 드는지…….” “그만해!” 송석석도 이내 참지 못하고 호통을 쳤다. “보주, 서주, 어서
송석석은 이번에 외출할 때 황제에게 유람하러 간다고 했다.하지만 그녀는 신약산장에 오래 머물지 않고 7일 만에 떠나 만종문으로 향했다.그녀는 원래 진성으로 돌아가 홍현 고모를 찾고 싶었지만 평무종 고모를 직접 찾아가서 분장술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분장술은 어렵지 않지만 능숙하게,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하려면 한두 달 만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간단한 분장술은 기존의 얼굴에도 할 수 있었지만 비가 오기만 해도 쉽게 흔적이 드러날 수 있었다.그러니 간단한 분장술만 배워서는 안 되었다.그리고 또 다른 미용술은 가면을 만드는 것인데 일반적인 가면은 일정한 두께가 있어 답답하고 오랫동안 착용하면 얼굴에 상처가 날 수 있다.게다가 가면을 착용할 때는 특수 물약을 묻혀야 했기에, 뜯을 때도 얼굴에 상처가 입을 수 있었다.운익각 사람들은 가면을 착용할 때 오래 착용하지 않았다. 게다가 정탐꾼들은 무공도 괜찮고 경공도 높아 임무를 수행할 때만 가면을 착용해서 물약을 묻힐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벗겨져도 얼굴에 검은 천으로 복면을 쓰고 있어서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리고 일반인들이 변장해서 탐문할 때 사용하는 것은 변장의 첫 번째 방법이었다.평무종은 서우의 요구를 듣고 말했다.“얼굴에 오래 쓰고 있을 수 있으면서도 원래 피부를 해치지 않고 잘 벗겨지지 않는 가면이라, 그럼 상어가죽으로 만드는 것은 어떠냐.”“상어가죽이 무엇입니까?”서우는 매미의 날개처럼 얇고 물에 젖어도 흔들리지 않는 상어비단은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그건 엄청 귀중한 비단이었다.그러자 평무종이 설명했다.“상어가죽은 분장술에서 쓰이는 가장 좋은 소재이다. 통풍이 잘 되고, 얼굴에 단단히 붙어 쉽게 떨어지지 않아 빗물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심지어 눈으로 보나 만지나 모두 진짜 피부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상어가죽으로 가면을 만들려면 상어 눈물을 사용해서 실을 짜내고 다시 밑감을 만들어야 해서 매우 번거롭다.”그러자 서우가 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촛불을 들고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조정의 일은 일절 말해주지 않은 탓에, 수철은 지금 나라가 안정적이라는 사실만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미 대황자가 아니다. 따라서 지금 그가 지켜야 할 것은 자신의 목숨뿐이고, 다른 것은 이미 그와 상관이 없어졌다. 그는 조정에 관한 화제를 꺼내면 모두가 예민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릴 때 그는 왜 자신이 죽어야 하는지 몰랐지만, 나중에 단 사공이 와서 조금씩 분석해 주었고, 그의 사부님도 이해관계에 대해 이야기해준 적이 있었다. 그와 셋째 동생 사이에 가족의 정으로 목숨을 걸고 불안정한 여생을 걸어야 한다면 결코 모두에게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받아들기로 한 것이었다. 삶은 계속될 텐데, 매일을 의미 있게 잘 보내야 목숨을 건진 보람이 있기 때문이다. 서우가 그의 다리에 대해 물었다. “내가 오기 전에, 고모가 그러던데 넌 다리를 다쳐서 일어날 수 없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걸을 수 있게 된 거야?” 그러자 수철이 말했다. “부황께서 승하하신 해에 산장에서 몇 사람이 와서 진찰해 보더니 정말 심하게 다쳤다며 이대로 두었다가는 계속 아플 테니 반드시 극단적인 방법으로 치료해야 한다고 하더군.” 그러자 서우는 호기심에 물었다. “어디서 온 신의야? 그럼 그때부터 치료한 거야?” 그 물음에 수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북당에서 왔는데 그 사람은 그 말만 하고 날 치료해주지 않고 당일에 떠났어. 그러다가 지난달에 와서 약주를 줘서 그걸 마셨는데, 난 하루 종일 혼수상태에 빠졌어. 심지어 깨어나니 다리가 아파 죽을 것 같았지.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점점 좋아지더니 누군가 부축하면 일어날 수 있게 되었어. 처음에는 잘 일어나지 못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점점 똑바로 설 수 있게 되었지. 그리고 지금은 혼자 몇 걸음은 걸을 수 있게 됐어.” 그러자 서우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북당신의? 그분께서 아직 살아 계셔?” “아니, 돌아가셨어. 내가 일어나
[번외편]신약산장의 진달래가 온 산천지에 피었다. 다채로운 경치는 사람들로 하여금 황홀하게 만들었다. 특히 신약산장에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마저 그곳에 살고 싶어 할 정도였다. 하지만 예외인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는 말을 타고 산 아래에 도착해 말을 잘 배치한 후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직 눈앞의 길만 보았고 찬란한 꽃들은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빠르게 걸으며, 가끔 경공을 사용하기도 했다. 신약산장이 비록 높지는 않았지만 은밀하게 숨겨져 있었고 많은 갈림길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도를 수도 없이 봐 온 덕분에 신약산장으로 향하는 길을 이미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있었다. 약관 때 그가 작위를 계승했을 당시, 작은 고모가 많은 선물을 주었는데 그중 가장 큰 선물이 바로 지도였다. 그리고 그에게 온몸의 피가 끓게 하는 소식을 알려주었는데 바로 수철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그는 한숨도 자지 못했고 옛날의 모든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작위를 받은 후 입궁해서 사은하고 선조들에게 제사를 지낸 후 답방 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작은 고모의 말로는 인맥을 굳건히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래서 무려 보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신약산장으로 출발했다. 산 아래에 도착하자 그는 날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산문을 본 순간, 강한 슬픔에 휩싸여 발걸음을 멈추고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작은 고모는 그에게 수철이가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었고, 불행 중 다행히 치료 후에 목숨은 건졌지만 약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그것은 평생 약을 달고 의자에 앉아 있거나 침대에 누워서 지낼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그의 기억 속의 수철의 모습은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제멋대로며 횡포한 모습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실하고 열심히 공부하며 태후마마와 황제폐하를 실망시킬까 봐 무술이든 공부든 최선을 다 했던 모습이었다. 특히 무술은 고모부가 재미있게 가르쳐 준 덕분에 그들은 항상 활기차게 뛰어다닐 수
사여묵이 그 옷을 바라보며 말했다.“그거 내 옷이잖아. 그럼 내가 살이 쪘다는 말이오? 나 살 안 쪘는데.”“당신 것이었습니까? 그럼 나중에 길이를 고쳐야겠군요.”그러자 사여묵이 다시 투덜거렸다. “헐렁한 옷을 입고 싶으면 사람 시켜 만들어 입으면 되지, 왜 내 낡은 옷을 고쳐 입으려는 것이오?”“내가 매산으로 돌아가서 1년 동안 있을 텐데 당신 옷을 입어야 당신이 내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 아닙니까?”송석석은 마치 평생을 떠나는 사람처럼 말했다.“1년? 왜 매산에서 1년이나 있어야 하지?”“당연히 사부님이 날 보고 싶어하셔서지요.”송석석은 허리를 짚고 옆에서 웃고 있는 보주에게 옷을 건넸다.“하지만 당장 간다는 건 아닙니다. 서우가 국공부를 계승할 예정이니 그 일이 끝난 후에 매산으로 돌아갈 것입니다.”“왜 그렇게 오래 있어야 하는 것이오?”사여묵은 그녀의 자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에 대해 묻지는 않았다.송석석은 자리에 앉아 느릿느릿 말했다.“매산으로 돌아가 1년 살다가 아이를 하나 주워 와서 우리가 낳았다고 하려고요.”“뭐가 그렇게 번거롭소? 황족 중에 한 명을 양자로 삼으면 되지 않소?”사여묵은 잠시 생각하더니 계속 말을 이어갔다.“게다가 주워 와서 우리가 낳았다고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소?”송석석은 퉁명스럽게 그를 한 번 쏘아보았다.‘이렇게 분명하게 말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그러자 보주가 웃으며 말했다.“왕야님. 왕비님께서 지금 임신 중이셔서 매산으로 돌아가서 아기를 낳을 때까지 휴양하시려고 하는 겁니다.”“뭐?”사여묵의 놀란 목소리는 지붕을 떠날 것 같이 컸다.그는 가능성이 그렇게 작은 인연이 그들에게 찾아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그는 이내 쪼그려 앉아 조심스럽게 손바닥으로 송석석의 배를 만졌다.‘이 안에 나와 송석석의 아이가 있다니, 말도 안 돼.’그러고는 약간 믿을 수 없다는듯 물었다.“정말이야? 당신도 낳고 싶어?”송석석은 눈을 내리깔고 그를 바라보며 웃으며 말했다.“물론
동월 13일이 되자, 그는 갑자기 정신이 맑아져 배가 고프다며 고기 죽과 크림과자를 먹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오 대반은 급히 사람을 시켜 고기 죽과 크림과자를 준비하도록 했다. 진 황후는 평소처럼 침대 옆에 앉아 그에게 먹여주려고 했지만 그는 오히려 앉아서 먹겠다고 했다. 오 대반은 얼른 앞으로 나서서 일으켜 세우고 등 뒤에 두꺼운 쿠션을 깔아주었다. 숙청제는 여위어서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어 앉아있을 때도 몸이 계속 미끄러지는 탓에 오 대반은 어쩔 수 없이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그의 허리를 받쳤다. 그는 죽 한 그릇을 조금도 남기지 않고 모두 먹고는, 과자도 한 점 먹더니 느끼한 지 더 이상 손을 대지 않았다. 단신의는 태후를 모시고 몇 마디 하자 태후는 안색이 급히 변하더니 눈물이 쏟아졌다. 비록 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막상 때가 되자 태후의 마음은 칼에 도려낸 듯 아파진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 후에야 사람을 시켜 섭정왕과 태자, 그리고 후궁의 공주와 마마들까지 모셔오라고 했다. 숙청제는 마치 자신의 병이 심각한지 전혀 모르는 듯 많은 사람들이 온 것을 보자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는 이내 상냥하게 모든 사람에게 한 마디씩 한 후,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오 대반에게 물었다. “왜 대황자와 이황자가 보이지 않느냐?” 그 말이 나오자마자 일부 후궁들이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오 대반은 웃으면서 말했다.“황제폐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이미 사람을 보내 모시러 갔으니 곧 도착할 것입니다.” “너무 서두르지 말고 수업에 집중하라고 하거라. 태부에게 욕먹지 말고.” 숙청제는 두 손을 들어 올리려 애썼지만, 힘이 없었다. “좀 피곤하구나. 쉴 테니 눕혀다오. 한잠 자고 서재로 가도 늦지 않을 것이다.” 오 대반이 급히 그를 부축해 눕혀 주었다.이내 흐느끼는 소리가 나자 숙청제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누가 우는 것이냐? 무슨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이냐?”진 황후가 몸을 돌려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람들을
하지만, 궁으로 돌아온 후 그는 다신 일어나지 못했다. 단신의는 태후에게 몇 마디 말했는데 요 이틀에 돌아가실지 모르니 황제폐하께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빨리 만나게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황제가 가장 먼저 보고 싶은 사람은 태후였다. “그 아이가 날 보자마자 가장 먼저 황조모에 대해 물었습니다. 모후께서 그를 아끼셨던 보람이 있군요.” 그러자 태후가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불쌍한 녀석, 평생 산에 숨어 살 수밖에 없게 되었구나. 그나저나 그의 다리는 정말 가망이 없는 것이냐?” “예, 희망은 없는 것 같습니다.” 숙청제의 입술에는 핏기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제가 떠나기 전에 그가 말했습니다. 의술을 배워서 나중에 제 병을 고쳐주겠다고요.” 그의 말을 들은 태후는 가슴이 쓰리고 아파왔다. “참으로 착한 아이구나.” 숙청제는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렇지요. 참 착한 아이예요.” 그는 태후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사여묵에게 태자를 데리고 들어오라고 했다. 숙청제는 병세가 엄중하지 않았을 때, 태자를 데리고 조정에 가고 상주문을 수정하고 그를 데리고 대신들과 논의를 했다. 숙청제는 그가 강제로 성장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생모를 일찍 잃은 데다 모가는 세력이 약해 조금의 도움도 되지 못했다. 수빈은 그를 친자식처럼 여겼고, 그를 보호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니 이 씨 가문만 남았는데 그들은 어떻게 해야 태자에게 좋은 건 지 모르는 것 같았다. 병상 앞에서 그는 태자를 사여묵에게 정중히 넘겼다. 하지만 이번엔 그에게 맹세하라고 하지 않고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태자를 너에게 맡길 테니 잘 가르쳐 줘. 말을 듣지 않으면 숙부로서 혼낼 때는 혼 내고 때릴 일이 있으면 때려도 된다. 너희는 군신 사이가 아니라, 숙부와 조카니까.”사여묵이 눈물을 참고 말했다. “황형, 걱정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황형의 부탁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태자.” 숙청제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숙청제는 신약산장에 잠시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는 없는 약이 없었지만 그의 병은 이미 약효가 들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하지만 이곳에 남아 있으니 그는 마음이 홀가분하고 마치 진정으로 무거운 짐을 벗어 놓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평범한 부친처럼 매일 아들과 함께했으니 더욱 좋았다.병문안을 올 수 있어, 송석석은 안으로 들어가 대황자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대황자는 계속 서우에게 새로운 친구가 생겼는지 물었다.그가 질투하는 줄 알았던 송석석은 서우에게 대황자 말고는 다른 친구가 없다고 답했다.그러자 대황자는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이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전 새로운 친구가 생겼습니다… 길상이 바로 제 친구입니다. 서우도 새로운 친구가 생겨야 할 텐데요. 그가 걱정되긴 하지만 이번 생에는 아마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말을 마친 그는 실망으로 가득해 보였다.그러자 송석석이 물었다.“왜 앞으로 서우를 못 볼 것이라고 생각하느냐?”“어른들이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요. 어른들은 항상 고려할 것도 많고 두려운 것도 많으니까요.”송석석은 말했다.“앞으로 너희도 어른이 될 테니 그땐 너희 스스로 결정하였으면 한다.”그러자 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서우는 저를 잊을 것이고, 길상도 언젠간 신약산장을 떠나겠지요. 하지만 전 평생 여길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그가 낙마하여 부상당한 후로부터 지금까지 그의 인생은 아주 큰 변화를 겪었다. 모든 변고가 갑작스럽게 일어나 그는 지금까지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다만 산장의 사람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위장한 것이었다.송석석은 그를 바라보았다. 예전엔 모두가 그가 철이 들기를 바랐지만 이젠 너무 철이 들어 마음이 아팠다.“너흰 이미 서로를 마음에 두었으니,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서우든 길상이든 그들은 평생 너의 친구이다.”송석석은 어떻게 아이를 달래야 할지 몰랐지만, 단호하게 말을 하면 설득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그러자 대황자가 그녀를 향해 웃으며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