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섣달 그믐날의 황실 연회는 예년에 비해 한층 조용했다.제 황후는 하루 동안 금족령이 풀렸으나 거의 말을 하지 않았으며, 걱정이 태산인 듯한 모습이었다.황자와 공주들이 그녀에게 차례로 문안 인사를 드릴때도 그녀는 그저 무심하게 대응할 뿐이었다.숙청제 또한 기력이 좋지 않았다. 새벽부터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여기저기 바쁘게 움직이느라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태후는 감기에 걸려 일찍이 혜 태비와 함께 연회를 떠났다.태후가 떠날 때, 제 황후는 급히 사람을 시켜 말했다."대황자를 지안궁에 데려가 태후께서 편히 쉬실 수 있도록 곁에서 모시게 하십시오."이에 숙청제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태후께서 편찮으신데, 그를 곁에 두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오?"제 황후는 단정한 태도로 대답했다."태후께서 대황자를 무척이나 아끼시지 않습니까. 그런 태후께서 아프신데 어찌 곁에서 병시중을 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그러고는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본디 신첩이 직접 모셨어야 하나, 신첩이 무능하여 그리하지 못하니 대황자가 대신 효를 다하도록 하려는 것뿐입니다."숙청제는 싸늘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황후가 한 걸음 물러서는 듯하며 금족령을 풀고자 하는 속셈이라는 것을 알았으나, 굳이 막을 이유도 없으니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황후의 말이 일리가 있군. 대황자를 지안궁으로 데리고 가라. 태후께서 완쾌하실 때까지 밤낮으로 곁에서 시중 들게 하라."제 황후의는 곧바로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그저 오 대반이 마지못해 따라 나서는 대황자를 데리고 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그녀는 황제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애써 두 눈에 맺힌 눈물을 꾹 참아냈다.송석석은 아무것도 보지 않은 척 고개를 숙이고는, 조용히 차가워진 음식을 먹을 뿐이었다.한편, 일곱째 아가씨 사건과 관련하여 황제는 제 황후를 따로 처벌하지 않았다.오 대반의 말에 따르면, 황제가 크게 노하긴 했으나 대황자를 태자로 책봉할 가능성을 고려해 이 시점에
장춘궁 안은 지열이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송석석이 막 도착했을 때, 궁인들ㅇ 황후가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며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기에 그녀는 외투를 벗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한편, 제 황후는 침전에서 제비집을 먹고 있었다. 란주 상궁이 계속 재촉하자, 그녀는 짜증스럽게 대꾸했다."조금 기다리게 하면 뭐가 어떻다고 자꾸 재촉하는 것이냐?!"란주 상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마마, 전에는 왕비님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안된다고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모셔왔으니, 이야기를 잘 나누시고 오해를 풀면 더 이상 문제될 일이 없을 것입니다."제 황후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본궁도 본래 그렇게 생각했었지. 하지만 아까 폐하께서 뭐라고 하셨는지 너도 들었지 않느냐? 폐하께서는 송석석이 본궁을 치든 욕하든 다 받아들이라고 하셨다. 애초에 본궁을 황후로 여기지도 않고, 그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사람이 분을 풀 수 있도록 하려는 거야."황후는 분에 못 이겨 제비집도 더 이상 먹지 않고 앞으로 밀어버렸다.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폐하께서는 병 때문에 정신이 흐려지신 것이냐, 아니면 정말 그렇게까지 송석석을 좋아하시는 것이냐?"그러자 란주 상궁이 그녀를 부드럽게 달래며 말했다."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건, 북명왕비께서 감히 마마를 치지는 못할 거라는 걸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저 마음속에 쌓인 분을 마마께 푸시는 거지요. 그러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누구는 화가 없는 줄 아느냐?"제 황후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본궁은 속이 안 타겠냐는 말이다. 본궁이 무슨 큰 악행을 저질렀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이나 금족령을 당하고, 후궁의 권한도 빼앗겼으며 대황자의 양육권마저 잃었다. 이제는 명부의 화까지 받아줘야 하다니, 이렇게 초라한 황후 자리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란주 상궁은 점점 초조해져 한숨을 쉬며 말했다."마마, 더 이상 고집을 부리시면 안 됩
사실 황후는 자신이 말을 하면, 송석석이 바로 화를 낼 것이라 생각하고, 그대로 내버려 두려고 했다.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송석석은 그저 오해였다면 더 말할 필요 없다며 담담하게 받아넘겼다. 그 태도에 오히려 황후와 란주 상궁이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란주 상궁은 무안해하며 감사를 표하고 한쪽으로 물러났다. 그녀는 혹시라도 송석석이 다시 그 문제를 끄집어내려는 기색이 있는지 조용히 살폈지만, 송석석은 여전히 아무 말없이 차를 마실 뿐이었다. 그럼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 되는 것인가? 그렇다고 이것으로 정말 오해가 풀린 것이라 할 수 있을까, 화해한 걸로 칠 수 있단 말인가?제 황후와 란주 상궁 모두 그런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대화가 끊긴 이상 더 이어나갈 수도 없었다. 괜히 말을 보탰다가는 오히려 변명처럼 보일 것이었다.제 황후가 얼굴을 굳힌 채 말했다."차가 식었구나. 왕비께 따뜻한 차를 다시 올려라."그녀는 속으로 몹시 불쾌했다. 송석석이 마치 단단한 벽을 세우고, 자신이 건네려던 화해의 손길을 차단해 버린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먼저 나서서 강하게 말할 수도 없었다.송석석은 여전히 차를 마시며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그녀는 황후와 나란히 앉아 말없이 있다가 묻는 말에만 간결하게 대답할 뿐, 먼저 화제를 꺼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황후를 거스르지도 않았다.그녀는 조금도 조급해 하지 않았다. 어차피 장춘궁을 나가면 다른 궁에서 또 그녀를 초대할 것이었기에, 그곳에서 형식적인 응대를 하며 빠져나갈 핑계를 찾느니, 차라리 이곳에서 조용히 있는 편이 더 나았기 때문이다.그녀는 문득 어떠한 생각이 들었다.‘올해와 작년의 차이가 정말 크구나. 사제가 곁에 없는 것도 서운한데, 불만이 가득한 황후와 함께 이곳에 갇혀 함께 설날을 맞아야 하다니.’화해? 그것은 그저 체면을 위한 것일 뿐,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 일은 오해가 아니었기에 화해할 이유 또한 없었다.게다가 황제가 정말 그녀를 두둔하며 둘이 화해하기를 바
황실로 돌아오니 비로소 설날 분위기가 느껴졌다.사람들은 폭죽을 터뜨리며 투호와 활쏘기를 즐겼고, 각각의 놀이에는 상금과 특별한 보상이 걸려 있었다.폭죽 놀이는 폭죽을 손에 들고 있다가 터지기 전에 던져야 했는데, 반드시 공중에서 터져야 했다. 만약 땅에 떨어진 후 터지면 패배로 간주되었다. 물론 손에서 터져도 상을 받을 수 있었는데, 이는 손이 다 터질 정도로 아픈데도 상을 못 받는 건 말이 안 된다는 몽동이의 주장 때문이었다.송석석이 돌아왔을 때, 그들은 이미 한 시진이 넘도록 놀고 있었다. 땅에는 붉은 종이 조각들이 두껍게 깔려 있어, 그 위를 걸으면 푹신한 느낌이 들었다. 발을 떼고 나면 신발 바닥이 붉게 물들어 한층 더 명절 분위기가 살아났다.송석석은 이런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기에, 곧 함께 어울려 즐겁게 놀았다.그녀는 한 번도 손에서 폭죽을 터뜨린 적이 없었다. 항상 터지기 직전에 정확하게 던져 공중에서 맑고 경쾌한 펑! 소리와 함께 터뜨렸기 때문이다. 몽동이의 두 손도 벌겋게 부어 올랐지만,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미 상을 한가득 받아서 탁자 위가 꽉 찰 정도였다.염선생도 한동안 함께 어울려 놀다가, 한쪽에 앉아 심청화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심청화의 화폭 속에는 젊고 열정적인 얼굴들이 담겨 있었다. 활짝 웃는 그들의 얼굴과 땅을 가득 덮은 붉은 종이 조각들이 한데 어우러져, 설날 분위기가 그대로 화폭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그 사이, 양 마마가 교자와 탕원을 준비해 따끈따끈한 상태로 내왔다.탕원은 시만자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그녀는 탕원이 가족의 화합과 온전함을 상징한다며, 설날이면 반드시 탕원을 먹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반면, 교자는 원보를 닮아 부귀를 상징하기에 송석석은 교자를 가장 좋아했다. 시만자가 그런 송석석에게 계속 탕원을 먹으라고 강요하자, 송석석 또한 시만자에게 교자를 먹으라고 강요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서로 얼굴이 붉어지도록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엔 마주 보고 크게 웃어 버렸다
하지만 모두가 여전히 그녀의 목을 조르고 귀를 잡아당기며 다그치자, 결국 시만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설명했다. "앞뒤 사정 같은 건 없어! 그냥 우리 둘이 왕경루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가 갑자기 사람들 인생의 꿈이라는 게 결국 단순히 혼인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이 아닐까 하고 묻길래, 그냥 맞장구치면서 그렇다고 했을 뿐이야. 그랬더니 날 보면서 그럼 우리도 한 번 해보자고 하기에 나도 알겠다고 한 거야."그녀는 다시 털썩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말을 덧붙였다."난 그저 장난인 줄 알았어. 그런데 연말에 갑자기 그가 혼사를 준비해야겠다면서 매산으로 돌아가 사부께 허락을 구하고, 그 다음 내 사부께 인사를 드린 뒤 시씨 가문에 정식으로 청혼하겠다고 하더라고. 내가……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어?송석석이 단호하게 말했다."왜 말을 못 해? 네가 혼인할 생각이 없으면 거절하면 되잖아. 오해라면 바로잡으면 되고! 지금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그가 정식으로 청혼하러 갔을 때 너희 아버지와 사부께서 다 허락하신 후에 그때 가서 네가 거절하겠다고 하면…… 그건 그냥 장난치는 거 아니야?"신신이 손을 내밀어 그녀를 제지하며 말했다."잠깐, 잠깐. 시만자, 내가 물어볼게. 너 오사형과 혼인하고 싶어?"시만자의 눈빛이 흔들렸다."모르겠어.""이걸 모를 수가 있어?""진짜 모르겠어."그러자 신신이 몽동이처럼 허리에 손을 올리고는 화가 난 듯 말했다."그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는 알 거 아니야?"시만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히 말했다."그것도 모르겠어."모두가 얼이 빠졌다. 신신은 이를 악물고 마지막으로 물었다."그럼 넌 그와 혼인할 거야?"하지만 시만자는 여전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모르겠어."신신은 어이없는 듯, 입을 떡 벌린 채 끝내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이 애매한 태도 진짜…! 한 대 치고 싶다!"그러나 송석석이 다른 누군가가 시만자를 때리게 놔둘 리 없었다. 누군가 때려야 한다면, 그건 그녀 자
하지만 시만자는 바로 답을 내리지 못하고, 하룻밤을 고민했다.그리고 다음 날이 되자, 송석석에게 말했다."그가 정말로 청혼을 하고 집에서도 허락한다면…… 난 혼인할 거야. 하지만 내가 정말 원하느냐고 묻는다면…… 아직 내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어. 그때와 지금의 마음이 같지 않으니까."송석석은 그녀를 위로해 준 뒤, 그날 바로 보주를 데리고 매산으로 향했다. 첫째는 직접 오사형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오랜만에 매산에서 설날을 지내고 싶었기 때문이며, 셋째는 평 사저도 매산으로 돌아갔기에 그녀를 직접 만나 남강의 소식을 물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평 사저가 무언가 나쁜 소식을 들었지만 차마 자신에게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직접 만나 묻는다면 평 사저가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그렇게 그녀가 보주를 데리고 매산에 도착하자, 임양운과 무소위는 깜짝 놀라 황급히 그녀를 안으로 데리고 갔다. 혹시라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부터 앞섰다.송석석은 사부와 사숙의 긴장된 표정을 보자 코끝이 시큰해졌다. 진성에서는 늘 강하게 버텨야 했지만, 만종문에 오면 그녀는 언제까지나 사부 앞에서 어린아이가 됐다.그녀는 눈가를 닦고는 일부러 애교 섞인 말투로 말했다."그냥 오랜만에 보고 싶어서 왔어요. 사부랑 사숙도 뵙고, 사형과 사저들이랑도 모처럼 함께 지내려고요."무소위는 꾸짖으며 말했다."우리가 진성에서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겨우 그걸 핑계로 돌아왔다는 거냐? 그런데 어째서 보주만 데리고 왔지? 다른 놈들은? 길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누가 널 보호한단 말이냐? 설마 네가 이제 제법 실력 좀 쌓았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직 한참 멀었대도!""네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원한을 샀는지 생각해봤느냐? 남아있는 세력들이 다 정리된 것도 아닐 텐데, 하물며 네 남편이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와중에 널 잡아 위협하려는 놈들이 없을 거라고 생각……"임양운이 손을 들어 무소위
송석석은 애써 눈물을 삼키며, 감정을 잡고 말했다."그럼 그들은 계속 아타목산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는 건가요? 이쯤 되면 군량이 이미 바닥났을 텐데, 대군은 도대체 뭘 먹고 버티고 있는 거죠?""그 부분은 걱정 안 해도 된다. 초원 쪽에서 지원을 안 한다고 말은 했지만, 결국 말린 고기 전부를 내줬어. 게다가 그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군량과 밀전병도 있으니 당분간은 버틸 수 있을 거다. 게다가 아타목산의 깊고 긴 산맥과 빙호에서, 무기도 있으니 사냥을 해서라도 먹을 건 구할 수 있을 거고. 그러니 지금은 대충 배를 곯으면서 버티고 있겠지."그녀는 말을 마치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오래 버티기는 어려울 거다."송석석은 고개를 들고 단호하게 말했다."사국이야말로 더 버티지 못할 겁니다."두 나라의 상황은 거의 비슷했다. 남강군이 그나마 나았지만, 빅토르가 군량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결국 남강군과 정면으로 맞서려고 할 것이었다.어떻게든 승패가 갈릴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하지만 지금은 군대가 뿔뿔이 흩어져 있어, 사국의 주력 부대와 정면으로 맞붙는 것은 쉽지 않을 터였다.도대체 어쩌다 매복에 걸린 것일까? 사제는 그렇게 부주의한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자, 그녀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녀는 곧장 평무종에게 물었다."남강군이 매복당한 뒤, 사상자가 많았나요?"평무종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답했다. "그건 아니다. 사상자는 한명도 없었고, 그냥 뿔뿔이 흩어진 것 뿐이야."송석석은 곧바로 아타목 일대의 지형을 떠올리며, 현재 양측의 상황을 정리했다.사국 군대는 이미 오래전부터 버티기 어려운 상태였으며, 추격을 당해 도망친 끝에 결국 궁지에 몰렸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최후의 발악으로 매복을 설치한 것으로 봐도 무방했다.그렇다면 사제가 일부러 매복에 걸린 것은 아닐까? 사국군이 승리를 착각하고 방심하게 만든 뒤, 군대를 분산시켜 포위 작전을 펼치는 거라면?송석석이 자신의 추측을 평무종에게 말하
왕이장은 말했다. "청혼은 좀 충동적으로 했다. 돌아보니 그 때를 이용한 것 같기도 해. 그 당시 그녀는 기분이 우울했으니, 승낙했어도 진심으로 혼인하고 싶었던 건 아닐 거야. 매산으로 돌아가서 사숙께 한바탕 혼나고 나니 나도 좀 진정이 됐다."송석석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미 사숙께 말했다고요?""돌아가자마자 말했지. 그때는 열정이 넘쳤거든."그러자 송석석이 궁금한듯 물었다. "그럼 사숙은 뭐라고 하며 혼내셨나요? 반대하셨나요?"왕이장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반대한다 만다 할 단계도 아니었어. 그냥 혼냈지. 욕은 평소에 듣던 그런 말들이었고.""어떤 말들이요?"왕이장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나를 두꺼비라고 부르시면서, 내 피부에 난 여드름을 보라고 하시더라."송석석이 낄낄대며 말했다."사숙이 사형에게 조금은 자비를 베풀었나 봅니다."그녀는 시만자가 말한 것을 전해줬다. 왕이장은 이를 들은 후,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웃었다. 그의 눈빛은 마치 꿀이 담긴 듯 달콤하게 빛났다."괜찮아, 나는 기다릴 수 있어. 천천히 기다릴 수 있고 말고. 인생은 길잖아. 안 그래?"송석석은 그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렇게 자유롭고 과감한 오사형이 시만자의 손안에 있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가 인생을 논하다니!매산에서 편안히 지낸 지 4일째, 매산의 문파들을 모두 방문하자 사숙은 그들을 쫓아내기 시작했다.당연히 송석석과 보주 두 사람끼리 돌아가지는 못하게 하였기에, 그는 또다시 평무종을 시켜 운익각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보호하게 했다. 그리고 왕이장의 상태가 괜찮아진 것을 확인하자, 그 역시 함께 쫓겨나 버렸다.진성으로 돌아온 후, 일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음에도 여러 가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송석석을 방문했고, 그녀는 그들을 매일 대면하며 이전보다 더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왕이장과 시만자의 상황에 대해서는 그녀가 개입하지 않았고, 그들이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