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온 사람은 바로 택란의 스승인 기화였다.하지만 원경릉은 그를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금나라 복장을 하고 있었으며, 넉넉한 옷자락에 얼굴도 훨씬 희고 깨끗해졌으며 수염까지 길렀기 때문이다. 그의 날카롭고 빛나는 눈빛이 아니었다면, 정말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었다."스승님,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택란이 기쁘게 묻자, 기화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미소를 지었다."이곳에 온 지 좀 됐다. 금나라에서 국사를 하며, 네 사모를 잠시 피할 겸 말이다. 금나라에 무슨 일로 온 거냐?""금나라에 온 지 오래되셨습니까? 어찌 저를 찾아오지 않았습니까?"택란이 물었다."그동안 조금 바빴다."기화는 예전보다 훨씬 더 신중해진 모습이었다. 말투에서 마저도 국사의 위엄이 느껴질 정도였다. 원경릉은 문득 예전에 양여혜가 그를 이상한 사기꾼이라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이제 보니 꽤 그럴싸한 평가였다."택란아, 네 어머니와 함께 내 저택으로 가서 이야기하자꾸나."기화가 말을 이었다.택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이제 저택까지 있으세요?"기화는 여전히 태연하게 말했다."국사인데 저택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예. 스승님의 저택도 구경하고, 며칠 머물면서 스승님과 함께 한잔... 과일주 한잔해야겠습니다."택란은 너무 기쁜 나머지 실수로 '술 한잔'이라고 말할 뻔했다.기화는 눈치를 보며 원경릉을 힐끗 보았다. 원경릉에게 택란과 술을 마시는 걸 들키면 안 된다.원경릉은 못 들은 척 넘어갔다. 사실 택란이 어린 나이에 술을 즐기는 것이 신경 쓰였지만, 직접 나설 필요는 없었다. 이 문제는 양여혜에게 전해, 기화의 부인에게 귀띔하라 말하면 된다.기화의 부인 월아는 보수적인 성격이라, 택란이 술 마시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그들은 마차를 타고 국사인 기화의 저택으로 향했다.저택은 아주 컸고, 내부는 새롭게 단장되어 있었다. 고급스러운 가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금나라 황제가 기화를 상당히 신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기화는 택란에게
"생사도 팔자에 달린 것인데 무서울 필요가 뭐 있습니까? 사람은 언젠가 죽는 법입니다. 완안 가문은 저주를 받아, 대대로 한 명씩 열여덟 살 이전에 모두 죽었지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운명이 정해져 있었고, 그래서 사원에 보내졌습니다. 이 저주를 피하려 했지만, 결국 소용이 없었지요.""추측입니까?"원경릉이 물었다."아니요. 안풍친왕의 장인이 알려준 것입니다.""그분도 여기 계십니까?""아니요. 이 대륙의 나라들, 그리고 이 근방의 연안까지, 전부 용인 그들이 관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이곳에 온 이유도, 택란이 금나라 어린 황제가 혼사를 이야기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오기 전, 안풍친왕의 장인 라진이 경천을 황제가 되도록 도와주라 했습니다. 금나라의 정권을 안정시킨 후, 그의 동생을 후계자로 키우라고요. 아시다시피, 그들은 모든 나라가 큰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국사, 대사, 법사, 그리고 도사들이 갑자기 나타난 장군을 파견하여 권력을 쥐고 하지요. 역사를 공부했으니 아시잖습니까? 시대마다 등장한 엄청난 인물들은 대부분 그가 보낸 자들입니다. 각 나라에 다 있지요."원경릉은 놀라 입을 떡하고 벌렸다."용이라니요? 안풍친왕의 장인이 용이고, 여러 나라를 관장한다고요? 술을 너무 많이 드신 것 아닙니까?""아직 한 잔도 마시지 않았습니다!"기화는 다시 수염을 만지작거렸는데, 그 모습이 원경릉에게는 너무나도 어색하고 위화감이 들게 만들었다.털털하던 사람이 국사 행세를 하고 있으니, 도무지 습관 되지 않았다."어쨌든 상황은 이러합니다. 경천은 열여덟이 되기 전, 죽을 운명이지요. 하지만 죽기 전에 금나라를 안정적으로 발전하게 만들 능력이 있지요. 나라가 안정되면, 그도 죽을 것입니다."원경릉이 숨을 들이쉬었다."그 사실을 본인은 알고 있습니까?"어찌 상황이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되는 걸까?"모르지요. 알고 있다면 택란을 황후로 책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은 백 살까지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기화는 피식 웃었
그러자 원경릉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녀는 기화가 말한 고차원 문명이 아무리 들어도 이상하게만 느껴졌다.인류는 고차원 문명에 대해 단지 추측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심지어 그 존재 여부조차 검증할 수 없다.누군가 고차원 문명이 신계 문명과 동일하다고 주장했지만, 그녀는 신계 문명을 접할 방법조차 갖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신계의 시선으로 이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겠는가?그녀는 점점 자신이 주제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원경릉은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화제를 경천 황제에게 돌리려 했다."그를 구할 방법이 없습니까? 아직 젊은데 그냥 죽게 내버려두는 건 너무 아깝잖습니까?"아깝긴. 큰 공덕을 쌓았으니, 그는 죽고 윤회할 것입니다.""윤회라..."원경릉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미간을 문질렀다."아까는 고차원 문명 얘기를 하시더니, 이번엔 윤회라. 사고방식이 너무 빠르게 바뀌시니, 따라가기가 힘듭니다."하지만 기화는 오히려 태연하게 말했다."뭐가 어렵습니까? 과학의 끝엔 결국 신학이라 하지 않습니까? 어찌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십니까?""그럼, 고차원 문명의 관점에서 이 저주에 관해 설명해 주시지요."이렇게 특별한 이유를 과연 그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기화가 답했다."사실 이해하기엔 쉽습니다. 저주라는 건 하나의 힘이고, 그 가문은 힘을 어지럽혀 반작용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저주라는 게 바로 그런 것이지요. 하지만 가문의 기운이 달라지며 이 반작용의 힘도 점점 약해지게 되고, 이 세대에서 거의 끝이 보입니다. 그를 큰 공덕을 쌓은 사람이라고 한 이유는, 나라를 다스리고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고, 나라 발전에도 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가 쌓은 덕이 반작용보다 커지면, 반작용의 힘도 점점 약해질 것이고, 결국 동화될 것입니다. 그럼, 윤회한다 해도 그는 복이 가득한 사람일 것입니다."원경릉은 그의 말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는데, 그때 기화가 한마디 덧붙였다."누군가는 화를 입으려 태어났고, 누군가는 운명을
기화가 말했다."형인 경천보다 크게 부족하지는 않지만, 아직 경천만큼의 패기는 없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경천과 대등해질 것입니다!""성격은 어떻습니까?""괜찮습니다."기화는 대부분의 사람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괜찮다"고 했으니, 정말 괜찮은 사람일 것이었다.이후 기화는 원경릉과 함께 다른 도성을 방문했다. 원경릉은 미리 능력으로 소식을 보내 그들을 한곳에 모이게 했다. 한편 기화는 계란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동행했다. 그도 어쩌다 조금 여유가 생겼다.소년들은 어머니가 오자 무척 기뻐했다. 하지만 저녁이 되자, 그들은 어머니를 데리고 방으로 향했다. 그들은 그녀가 이유 없이 이렇게 먼 곳까지 올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원경릉은 아이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일을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약을 잘못 쓰고, 얼음 벌레에 감염되고 현대에서 사용한 약까지, 모든 것을 알려주었으며, 경천의 저주까지 전부 털어놓았다.경단과 찰떡은 이 말을 듣고 무척 놀랐다. 그들은 위기에 처한 아버지의 상황에 대해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반면, 환타와 칠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깊은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원경릉은 이 두 아이가 떡들보다 신비로운 일에 대해 더 잘 이해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이 능력은 정말 타고난 것 같았다.잠시 후, 칠성이 입을 열었다."사실, 경천이 감염된 얼음 벌레가 저주의 일종일 가능성이 큽니다. 비록 기화 스승께서 연관 없다고 하셨지만, 저주도 일정한 형태와 매개체를 가지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형태나 매개체가 있으니, 분명 저주를 풀 방법도 있지요. 큰 공덕을 지닌 자가 필요하다고 했으니, 어쩌면 어마마마일 수도 있습니다. 어마마마가 얼음 벌레의 저주를 없앨 방법을 연구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내가?"원경릉은 깜짝 놀랐다."아니면 아바마마일 수도 있습니다."옆에서 듣고 있던 환타가 말을 보탰다."아바마마 혈액 속 마커가 사라졌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이들과 밤새 각자 도성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원경릉은 다음 날 아침 서둘러 경성으로 돌아가기로 했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경천의 혈액과 호수 에서 채취한 얼음물에 얼음 벌레가 존재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기화가 아직 돌아가지 않았기에, 원경릉은 그를 불러내어 계란에게 그 일을 비밀로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기화는 가슴을 두드리며 절대로 말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다.하지만 원경릉은 그의 진지한 모습을 보며 더욱 불안해져, 왠지 모르게 그가 말실수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서 다시 한번 당부하자, 기화는 슬슬 짜증이 나는 듯했다."정말 저를 못 믿는 것입니까? 분명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원경릉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예. 꼭 비밀로 하십시오.""예. 어서 아이들과 인사나 하시지요."기화는 성가신 듯 손을 휘저으며 속으로 투덜거렸다.'나이도 어린 황후가 어쩜 이렇게 잔소리가 많지?'원경릉은 아이들과 작별을 마친 후, 바로 경성으로 떠났다.하루도 채 걸리지 않아, 그녀는 황궁으로 돌아왔다.그녀는 돌아오자마자 간단히 다섯째에게 상황을 설명한 후, 바로 실험실로 향했다.경천의 혈액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니, 역시나 얼음 벌레가 있었다. 비록 과거 다섯째의 혈액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하긴 했으나, 다섯째의 것보다 더욱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이어서 호수에서 가져온 얼음물을 현미경으로 확인해 보기도 했지만 얼음 벌레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호수 근처에서 채취한 물도 마찬가지이므로, 호수에서 감염된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얼음 벌레의 감염원을 추적할 수 없게 되자, 원경릉은 꽤 실망스러웠다.하지만 우선 경천의 혈액 속 얼음 벌레를 연구할 수 있기에, 그녀는 벌레를 분리하여 다양한 온도에서 번식력과 생존력을 실험해 보려 했다.이 일을 마무리한 뒤, 원경릉은 드디어 다섯째에게 능력에 대해 알려줄 때가 왔다는 결정을 내렸다.그저 그가 놀라서 기절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그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소월궁으로
왕비 합방하다북당(北唐), 초왕부(楚王府) 봉의각(鳳儀閣)일렁이는 촛불에 방안 곳곳에 붙여 놓은 낡은 붉은 ‘희(喜, 축 결혼)’종이가 비치고, 금박의 대조가 어슴푸레한 느낌을 떨쳐내는 가운데 벽에 한 쌍의 그림자가 떠오른다.원경릉(元卿淩)은 원하지 않는 것을 참고 또 참는 얼굴이다.결혼한지 어언 1년, 그는 원경릉의 털 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제 입궁했을 때 태후(太后)가 원경릉의 밋밋한 배를 보고 실망한 기색으로 후궁(侧妃)을 들이는 것에 대한 말을 꺼내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태후께 하는 수 없이 둘이 결혼한지 1년이 되었지만, 아직 합방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털어놓을 수 밖에 없었다. 원경릉은 울고불고 고자질하는 것이 싫었다. 그러니까 그냥, 내키지 않았을 뿐이다.13살에 처음 그를 본 이래, 마음을 온통 그에게 빼앗겨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해 결국 그의 정비가 되었다. 제 아무리 차가운 돌덩이라도 뜨겁게 타오르게 하리라 믿었건만, 그건 단단히 착각한 거였다.서로 부부이고, 낭군이 분명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단 한 가닥 연민조차 없이, 오히려 집착에 가까운 증오만 있을 뿐이었다.“윽……”마음 속에 알 수 없는 원망이 솟구치며 그녀는 있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선혈이 배어 나와 비릿한 피가 입안으로 방울져 들어갔다.그는 낮게 깔린 눈빛으로 훤칠한 몸을 일으켜, 한 손을 그녀의 얼굴 옆에 바짝 댄 채 얼음같이 냉정하게, “원경릉, 네가 바라던 대로 짐이 너와 합방했으니, 이제부터 짐은 너와 일체 타인이다.”원경릉은 절망과 슬픔의 웃음을 띄우며, “당신은 결국 절 미워하는군요.”푸른 옷자락 아래 초왕(楚王)의 건장한 몸매와 늘씬한 다리로 쭉 걷어차니, 탁자고 의자고 우당탕탕 넘어지며 물건이 사방에 떨어지고 깨지는 가운데 그는 경멸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미워한다고? 당치도 않은 소릴. 짐은 네가 혐오스러워. 짐의 눈에 너는, 더러운 벌레만도 못한 존재야. 사람을 증오심에 불타게 한다고. 아니면 짐이 약의 힘까지 빌려 너와
두 명의 원경릉그녀는 자신이 개발한 약을 스스로에게 주사한 후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 보니, 여기였다.그리고 머리 속에 자신의 것이 아닌 기억이 본인의 기억과 서서히 뒤섞이기 시작했다. 정후(靜候)의 적녀(嫡女, 정실부인의 큰 딸) 원경릉은 초왕 우문호(宇文皓)를 사모한지 오래다. 15살에 성인식을 올리고, 공주부 연회에서 치밀한 음모로 초왕이 그녀를 ‘범하도록’ 함정에 빠뜨렸다. 원경릉은 죽네 사네 한바탕 연극 끝에 댓가로 소원하던 왕비의 자리를 얻어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가 왕부에 시집 와서 1년동안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초왕은 원경릉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공대 여자로 연애를 해 본적은 없지만, 몸이 말해주고 있었다. 몸의 원래 주인 원경릉이 죽기 전에 한 차례 성적 행위를 당했다는 사실을.몸의 원래 주인 원경릉이 뇌에 남긴 기억도 이를 뒷받침했다.현대의 천재 박사에서 이름도 알 수 없는 어느 왕조의 초왕비가 된, 그녀의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수중에 있던 연구과제를 계속 진행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영혼이 시공을 초월한다는, 과학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는 일이 그녀의 몸에 일어난 지금,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걱정하기는 커녕, 만약 다시 현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심령학을 연구할 텐데 하는 아쉬움 뿐이다.원경릉은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나머지, 사고가 점점 흐릿해져 아예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침대로 돌아가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어서, 어서 가서 의원을 불러 오너라!”문밖에 기상궁의 다급하고 혼란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비릿한 피냄새가 대충 닫아 둔 문틈으로 스며 들었다.원경릉은 두 손으로 의자에 기대 덜덜 떨리는 발을 간신히 딛고 서서 밖을 내다 보았다.보이는 건 기상궁과 시녀 하나가 어린 시동 하나를 복도에서 부축하고 있는 것으로, 그 시동의 눈에서 철철 피가 흐르고, 시동의 눈에 뭐가 박혔는지 격한 통증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기상궁은 다급히 시동이 그러쥐고 있는 눈 가에 손을 뻗으려 다가, 예리한
연구실로 돌아갔다 다시 왕비로원래 주인이 몸이 많이 약했는지, 원경릉은 정신을 잃은 채 깊은 잠에 빠졌다.그런데 꿈에 뜻밖에도 현대 연구실에 돌아와 있었다.회사가 마련해 준 연구실은 극비로, 회장과 그녀의 어시스턴트 외에 연구실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 책상, PC, 현미경을 만져보다가 자신의 몸에 주사를 놓던 때 사용한 주사기가 한쪽 시험관에 버려져 있는 것을 봤다.PC는 켜져 있고, 카톡은 온라인 상태로 창이 즐비하게 떠 있는데 전부 가족들이 보낸 것으로 그녀가 어디 있는지 묻는 내용이다.그녀가 키보드를 만지자, 그제서야 마음 저 밑에 있던 죽음에 대한 실감과 슬픔이 밀려왔다. 다시는 부모님과 가족을 볼 수 없다.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책상에 요오드팅크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건 주사를 놓기 전에 자리에 가져온 것으로, 연구소에 틀어박혀 있다 보니 연구소 안은 여기저기 할 것없이 온통 약품 투성이다. 약상자를 열어보니 약품은 거의 아무도 손댄 흔적이 없다.만약 이 약품만 있으면, 그 아이는, 어쩌면 살릴 수 있을지 모른다.얼마나 잠이 들었을까, 영차 하고 문 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시녀가 등을 들고 들어왔는데, 손에 찐빵 한 접시를 가져 와 탕하고 탁자에 놓고는 쌀쌀맞게: “왕비님 식사하시지요!”말을 마치고, 등은 탁자 위에 그냥 두고 나가버렸다.원경릉은 적잖이 당황했다. 그게 꿈이었다니!원경릉은 배가 고파 침대에서 일어나다가, 그만 발이 걸려 앞으로 고꾸라지는데 바닥에 놓인 약상자를 봤다.순간 온 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이 약상자는, 연구실에 있던 그 약상자와 똑같다.황급히 약상자를 집어 탁자에 올려놓고 열어 젖혔다. 떨리는 손 끝으로 약 상자 안에 약품을 만지는데, 똑같다, 완전 똑같다, 연구실에 있던 바로 그 약 상자다.눈 앞에 펼쳐진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어 원경릉은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영혼이 시공을 넘나드는 것도 이미 충분히 상식밖의 판타지인데, 약 상자까
아이들과 밤새 각자 도성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원경릉은 다음 날 아침 서둘러 경성으로 돌아가기로 했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경천의 혈액과 호수 에서 채취한 얼음물에 얼음 벌레가 존재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기화가 아직 돌아가지 않았기에, 원경릉은 그를 불러내어 계란에게 그 일을 비밀로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기화는 가슴을 두드리며 절대로 말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다.하지만 원경릉은 그의 진지한 모습을 보며 더욱 불안해져, 왠지 모르게 그가 말실수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서 다시 한번 당부하자, 기화는 슬슬 짜증이 나는 듯했다."정말 저를 못 믿는 것입니까? 분명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원경릉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예. 꼭 비밀로 하십시오.""예. 어서 아이들과 인사나 하시지요."기화는 성가신 듯 손을 휘저으며 속으로 투덜거렸다.'나이도 어린 황후가 어쩜 이렇게 잔소리가 많지?'원경릉은 아이들과 작별을 마친 후, 바로 경성으로 떠났다.하루도 채 걸리지 않아, 그녀는 황궁으로 돌아왔다.그녀는 돌아오자마자 간단히 다섯째에게 상황을 설명한 후, 바로 실험실로 향했다.경천의 혈액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니, 역시나 얼음 벌레가 있었다. 비록 과거 다섯째의 혈액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하긴 했으나, 다섯째의 것보다 더욱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이어서 호수에서 가져온 얼음물을 현미경으로 확인해 보기도 했지만 얼음 벌레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호수 근처에서 채취한 물도 마찬가지이므로, 호수에서 감염된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얼음 벌레의 감염원을 추적할 수 없게 되자, 원경릉은 꽤 실망스러웠다.하지만 우선 경천의 혈액 속 얼음 벌레를 연구할 수 있기에, 그녀는 벌레를 분리하여 다양한 온도에서 번식력과 생존력을 실험해 보려 했다.이 일을 마무리한 뒤, 원경릉은 드디어 다섯째에게 능력에 대해 알려줄 때가 왔다는 결정을 내렸다.그저 그가 놀라서 기절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그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소월궁으로
기화가 말했다."형인 경천보다 크게 부족하지는 않지만, 아직 경천만큼의 패기는 없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경천과 대등해질 것입니다!""성격은 어떻습니까?""괜찮습니다."기화는 대부분의 사람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괜찮다"고 했으니, 정말 괜찮은 사람일 것이었다.이후 기화는 원경릉과 함께 다른 도성을 방문했다. 원경릉은 미리 능력으로 소식을 보내 그들을 한곳에 모이게 했다. 한편 기화는 계란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동행했다. 그도 어쩌다 조금 여유가 생겼다.소년들은 어머니가 오자 무척 기뻐했다. 하지만 저녁이 되자, 그들은 어머니를 데리고 방으로 향했다. 그들은 그녀가 이유 없이 이렇게 먼 곳까지 올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원경릉은 아이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일을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약을 잘못 쓰고, 얼음 벌레에 감염되고 현대에서 사용한 약까지, 모든 것을 알려주었으며, 경천의 저주까지 전부 털어놓았다.경단과 찰떡은 이 말을 듣고 무척 놀랐다. 그들은 위기에 처한 아버지의 상황에 대해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반면, 환타와 칠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깊은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원경릉은 이 두 아이가 떡들보다 신비로운 일에 대해 더 잘 이해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이 능력은 정말 타고난 것 같았다.잠시 후, 칠성이 입을 열었다."사실, 경천이 감염된 얼음 벌레가 저주의 일종일 가능성이 큽니다. 비록 기화 스승께서 연관 없다고 하셨지만, 저주도 일정한 형태와 매개체를 가지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형태나 매개체가 있으니, 분명 저주를 풀 방법도 있지요. 큰 공덕을 지닌 자가 필요하다고 했으니, 어쩌면 어마마마일 수도 있습니다. 어마마마가 얼음 벌레의 저주를 없앨 방법을 연구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내가?"원경릉은 깜짝 놀랐다."아니면 아바마마일 수도 있습니다."옆에서 듣고 있던 환타가 말을 보탰다."아바마마 혈액 속 마커가 사라졌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원경릉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녀는 기화가 말한 고차원 문명이 아무리 들어도 이상하게만 느껴졌다.인류는 고차원 문명에 대해 단지 추측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심지어 그 존재 여부조차 검증할 수 없다.누군가 고차원 문명이 신계 문명과 동일하다고 주장했지만, 그녀는 신계 문명을 접할 방법조차 갖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신계의 시선으로 이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겠는가?그녀는 점점 자신이 주제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원경릉은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화제를 경천 황제에게 돌리려 했다."그를 구할 방법이 없습니까? 아직 젊은데 그냥 죽게 내버려두는 건 너무 아깝잖습니까?"아깝긴. 큰 공덕을 쌓았으니, 그는 죽고 윤회할 것입니다.""윤회라..."원경릉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미간을 문질렀다."아까는 고차원 문명 얘기를 하시더니, 이번엔 윤회라. 사고방식이 너무 빠르게 바뀌시니, 따라가기가 힘듭니다."하지만 기화는 오히려 태연하게 말했다."뭐가 어렵습니까? 과학의 끝엔 결국 신학이라 하지 않습니까? 어찌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십니까?""그럼, 고차원 문명의 관점에서 이 저주에 관해 설명해 주시지요."이렇게 특별한 이유를 과연 그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기화가 답했다."사실 이해하기엔 쉽습니다. 저주라는 건 하나의 힘이고, 그 가문은 힘을 어지럽혀 반작용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저주라는 게 바로 그런 것이지요. 하지만 가문의 기운이 달라지며 이 반작용의 힘도 점점 약해지게 되고, 이 세대에서 거의 끝이 보입니다. 그를 큰 공덕을 쌓은 사람이라고 한 이유는, 나라를 다스리고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고, 나라 발전에도 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가 쌓은 덕이 반작용보다 커지면, 반작용의 힘도 점점 약해질 것이고, 결국 동화될 것입니다. 그럼, 윤회한다 해도 그는 복이 가득한 사람일 것입니다."원경릉은 그의 말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는데, 그때 기화가 한마디 덧붙였다."누군가는 화를 입으려 태어났고, 누군가는 운명을
"생사도 팔자에 달린 것인데 무서울 필요가 뭐 있습니까? 사람은 언젠가 죽는 법입니다. 완안 가문은 저주를 받아, 대대로 한 명씩 열여덟 살 이전에 모두 죽었지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운명이 정해져 있었고, 그래서 사원에 보내졌습니다. 이 저주를 피하려 했지만, 결국 소용이 없었지요.""추측입니까?"원경릉이 물었다."아니요. 안풍친왕의 장인이 알려준 것입니다.""그분도 여기 계십니까?""아니요. 이 대륙의 나라들, 그리고 이 근방의 연안까지, 전부 용인 그들이 관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이곳에 온 이유도, 택란이 금나라 어린 황제가 혼사를 이야기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오기 전, 안풍친왕의 장인 라진이 경천을 황제가 되도록 도와주라 했습니다. 금나라의 정권을 안정시킨 후, 그의 동생을 후계자로 키우라고요. 아시다시피, 그들은 모든 나라가 큰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국사, 대사, 법사, 그리고 도사들이 갑자기 나타난 장군을 파견하여 권력을 쥐고 하지요. 역사를 공부했으니 아시잖습니까? 시대마다 등장한 엄청난 인물들은 대부분 그가 보낸 자들입니다. 각 나라에 다 있지요."원경릉은 놀라 입을 떡하고 벌렸다."용이라니요? 안풍친왕의 장인이 용이고, 여러 나라를 관장한다고요? 술을 너무 많이 드신 것 아닙니까?""아직 한 잔도 마시지 않았습니다!"기화는 다시 수염을 만지작거렸는데, 그 모습이 원경릉에게는 너무나도 어색하고 위화감이 들게 만들었다.털털하던 사람이 국사 행세를 하고 있으니, 도무지 습관 되지 않았다."어쨌든 상황은 이러합니다. 경천은 열여덟이 되기 전, 죽을 운명이지요. 하지만 죽기 전에 금나라를 안정적으로 발전하게 만들 능력이 있지요. 나라가 안정되면, 그도 죽을 것입니다."원경릉이 숨을 들이쉬었다."그 사실을 본인은 알고 있습니까?"어찌 상황이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되는 걸까?"모르지요. 알고 있다면 택란을 황후로 책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은 백 살까지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기화는 피식 웃었
찾아온 사람은 바로 택란의 스승인 기화였다.하지만 원경릉은 그를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금나라 복장을 하고 있었으며, 넉넉한 옷자락에 얼굴도 훨씬 희고 깨끗해졌으며 수염까지 길렀기 때문이다. 그의 날카롭고 빛나는 눈빛이 아니었다면, 정말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었다."스승님,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택란이 기쁘게 묻자, 기화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미소를 지었다."이곳에 온 지 좀 됐다. 금나라에서 국사를 하며, 네 사모를 잠시 피할 겸 말이다. 금나라에 무슨 일로 온 거냐?""금나라에 온 지 오래되셨습니까? 어찌 저를 찾아오지 않았습니까?"택란이 물었다."그동안 조금 바빴다."기화는 예전보다 훨씬 더 신중해진 모습이었다. 말투에서 마저도 국사의 위엄이 느껴질 정도였다. 원경릉은 문득 예전에 양여혜가 그를 이상한 사기꾼이라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이제 보니 꽤 그럴싸한 평가였다."택란아, 네 어머니와 함께 내 저택으로 가서 이야기하자꾸나."기화가 말을 이었다.택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이제 저택까지 있으세요?"기화는 여전히 태연하게 말했다."국사인데 저택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예. 스승님의 저택도 구경하고, 며칠 머물면서 스승님과 함께 한잔... 과일주 한잔해야겠습니다."택란은 너무 기쁜 나머지 실수로 '술 한잔'이라고 말할 뻔했다.기화는 눈치를 보며 원경릉을 힐끗 보았다. 원경릉에게 택란과 술을 마시는 걸 들키면 안 된다.원경릉은 못 들은 척 넘어갔다. 사실 택란이 어린 나이에 술을 즐기는 것이 신경 쓰였지만, 직접 나설 필요는 없었다. 이 문제는 양여혜에게 전해, 기화의 부인에게 귀띔하라 말하면 된다.기화의 부인 월아는 보수적인 성격이라, 택란이 술 마시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그들은 마차를 타고 국사인 기화의 저택으로 향했다.저택은 아주 컸고, 내부는 새롭게 단장되어 있었다. 고급스러운 가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금나라 황제가 기화를 상당히 신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기화는 택란에게
하지만 얼음 벌레의 발원지는 금나라 아닌가? 그렇다면 경천이 물을 다루는 능력은 다섯째보다 더 뛰어나야 할 텐데, 어찌 반대일까?원경릉은 옆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그럼 이 잔 속의 물이라면, 넘치게 할 수 있겠느냐?"경천은 고개를 끄덕였다."한 잔이라면, 가능합니다."그가 생각을 집중하자, 찻잔 속의 물이 서서히 넘쳐흘렀다. 일정한 속도로 보아, 그가 통제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그러니 바깥의 호숫물은 마음대로 조종하기 어렵다는 것이냐?"원경릉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물었다."가끔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물을 얼리기가 훨씬 쉽습니다."경천이 솔직히 대답했다.원경릉이 다시 물었다."그럼, 언제부터 이런 능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느냐?"경천이 답했다."다섯 살 때부터였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능력을 갖추게 됐는지는 모릅니다. 어릴 때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고요.""혹시 큰 병을 앓은 적이 있거나, 특별한 만남을 겪은 적이 있느냐? 예를 들면, 아주 대단한 인물을 만난다든가."경천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특별한 만남은 없었다만, 병에 걸린 적은 있습니다. 유모의 말로는, 어릴 적에 큰 병을 앓았고, 거의 죽을 뻔했다고 합니다."그러자 원경릉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그럼 그 큰 병을 앓은 이후부터, 이 물을 다루는…… 즉, 물을 얼리는 능력이 생긴 것이더냐?"경천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그즈음이었을 것입니다."원경릉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너의 피를 조금 뽑아도 괜찮겠느냐? 많지는 않을 것이다."경천은 그녀의 말에 덤덤히 시중을 불렀다."여봐라, 비수와 사발을 가지고 오거라."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괜찮다. 채혈 도구가 있으니, 네가 동의만 하면 된다."경천은 짧게 대답한 후, 그녀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그녀는 작은 약상자를 들고 돌아온 후, 경천이 전혀 본 적 없는 물건들을 꺼냈다. 그녀는 가느다
다음 날이 되자마자 모녀는 바로 금나라로 떠났다.택란은 원경릉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황후로서 금나라에 방문한다면, 책봉 문제 때문이라고 오해를 사서 논란이 더욱 커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원경릉도 그런 택란의 말에 동의했다. 어차피 그녀의 옷차림이 워낙 소박하여 전혀 북당의 황후처럼 보이지 않기도 했다. 경천이 그녀의 신분을 눈치채더라도, 입 밖에 내지 않게 하면 그만이다.모녀는 초능력을 사용하여 빠르게 량주에 도착했다.택란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지 않고 곧장 황궁으로 가서 황제를 만나겠다고 밝혔다.황궁 호위들은 그녀의 신분을 알고 있어, 감히 태만히 할 수 없었기에, 즉시 두 사람을 궁 안으로 안내했다.경천은 택란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정무를 마친 후 그녀를 만나러 광명전으로 향했다.문에 들어설 때, 그의 눈에는 오직 택란만이 담겨 있었다. 그는 흥분한 채로 빠르게 다가와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왔느냐?""예. 잠시 할 말이 있습니다."택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올리며 말했다."인사드립니다."경천은 그제야 원경릉을 보았다. 그는 서둘러 기쁨 어린 눈빛을 거두고 공손해졌다. 그러고는 즉시 궁인들을 나가라고 명한 뒤, 문을 닫고 원경릉에게 정중히 예를 올렸다."북당의 황후마마를 뵙사옵니다!"그는 택란에 대해 오래전부터 조사해 왔기에, 북당 황제와 황후의 초상화도 이미 알고 있었다. 비록 만나본 적은 없어도 그들의 얼굴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한편, 원경릉은 그가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녀는 침착한 태도로 그를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준수한 외모와 온화한 눈매 속에 황제의 위엄이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예를 갖추지 않아도 된다. 앉아서 이야기하자꾸나.""예!"경천은 잔뜩 긴장이라도 한듯 다시 한번 허리를 숙였다."먼저 앉으시지요."원경릉이 먼저 자리에 앉자, 그는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으며 택란을 흘깃 바라보았다.그는 황후가
원경릉은 딸의 반응을 보고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그녀는 마음이 점점 아려와, 딸을 꼭 끌어안고는, 눈시울을 붉히며 웃었다."깜짝 놀라게 해 주려 했지, 기쁘냐?""기뻐요! 너무 기뻐서 정신을 잃을 지경입니다!"택란은 원경릉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 답했는데,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에 홍조가 떠올라 기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주 아가씨와 냉명여도 원경릉을 찾아와 인사를 했다. 원경릉은 격식을 차리지 않고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고, 함께 안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나눴다.택란은 급히 주 아가씨에게 말했다."관아에 가서 호명 오라버니를 부르시오. 함께 식사하겠네.""예. 바로 다녀오겠습니다!”주 아가씨는 손을 모아 예를 올리고는 곧장 떠났다.그러자 냉명여는 눈치껏 모녀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하며, 같이 따라 들어가지 않다. 잠시 후, 원경릉은 택란에게 금나라 황제가 벌인 약혼식과 황후 책봉에 대해서 물었다. 비록 택란이 오라버니들에게 속마음까지 다 말하지 않았어도, 그녀에게는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그는 정말 많이 변했습니다. 큰 오라버니만큼 키가 컸고, 비록 오라버니보다는 못하지만, 여전히 잘생겼습니다. 게다가 아바마마가 이야기할 때처럼 저한테 정말 다정했습니다. 하지만 아바마마처럼 위엄 있고 패기가 넘치진 않았습니다.""그래?"원경릉은 택란의 표정을 살폈다. 열한 살 아이가 감정을 다 안다고 할 순 없지만, 누군가의 헌신에 쉽게 감동할 수는 있었다."예. 사실 예전에는 진국왕에게 억눌린 그가 불쌍하다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금나라를 홀로 통치하고 있고, 근 2년 만에 금나라는 그의 다스림 하에 질서정연해지고 빠르게 발전하였습니다. 무엇보다 함께 광산을 개발하는 일에도 방해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아주 좋은 조건도 제시했습니다. 마침 아바마마에게 글을 올리려고 했는데, 어마마마께서 오신 것입니다.""그래. 보아하니 그 아이에 대한 평가가 좋구나."원경릉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을 다섯째가 들었다면 분명
택란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우문호가 바로 말했다."네가 직무를 무단이탈한 일은, 돌아가서 장군에게 처벌받도록 해라. 군율은 허울뿐인 것이 아니다. 네 신분이 무엇이든, 군에 들어갔으면 법을 지켜야 한다. 앞으로 또 나가고 싶다면, 미리 자리를 비우겠다고 청을 하거라.""예. 알겠습니다."우문예가 답했다.그러자 우문호는 아들을 보며, 속으로 뿌듯함을 느꼈다."가자. 어서 네 어머니와 함께 저녁을 먹자."원경릉은 소월궁으로 돌아온 아들을 보고 기뻐했다. 그녀는 즉시 사람들에게 요리를 몇 가지 더 준비하게 했다. 직무이탈에 대해서는 어차피 다섯째가 잔뜩 잔소리했을 테니, 따로 말하지 않았다.그녀가 약도성의 상황을 묻자, 우문예가 대답했다."지금 약도성의 민생은 많이 안정되었고, 모두 발전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게다가 계란이가 금나라와의 협약까지 체결해, 함께 광물을 개발하기로 했습니다. 약도성은 앞으로 점점 더 발전될 것입니다."이 말을 들으며, 우문호는 늘 그렇듯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식들이 이렇게 유능하고, 훌륭하게 성장했다는 것이 그에게는 더없는 자랑이었다.약도성은 그가 가장 걱정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지진으로, 오히려 국면이 바뀌었다. 이 모든 일에 계란이의 공이 크다.저녁 식사를 마친 후, 우문예는 곧바로 군영으로 돌아갔다.한편, 원경릉은 다음날 바로 약도성으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그러자 다섯째는 밤새 그녀를 붙잡고 끝없는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길 조심해야 하고, 식사 거르지 말고, 추위 조심하고, 모래바람도 조심해야 한다고 말을 늘어놓았다.밤새워 잔소리하던 그는 갑자기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사실… 나도 가고 싶소."원경릉은 그는 위로하며 입을 열었다."아이들을 보고 싶어 하는 거 알고 있소. 이번에 모두 데려오는 것이 어떻소?""하지만 아이들을 데려온다면, 굳이 당신이 직접 갈 필요가 없지 않소? 편지를 보내서 불러오면 되잖소?""음… 그래도 직접 가야 하네. 약도성이 얼마나 발전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