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만큼 맞은 안왕안왕은 인생에서 가장 굴욕적인 하루를 맞았다. 자기 형제에게 맞아서 반쯤 죽게 된 데다 말 등에 묶여 경성으로 돌아왔다.경성으로 들어올 때 성을 지키는 군사 모두 저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고 위왕이 엄청난 대도를 잡아와서 잘 보이려고 하는 건가보다 생각했다.위왕이 안왕을 데리고 바로 경조부로 가서 그를 말에서 내린 후 안으로 밀어 넣더니 낭랑한 목소리로, “태자 전하께 아룁니다. 말씀하신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제왕이 먼저 나와 한참 후에야 바닥에 누워 끊어질 듯 숨을 쉬는 자가 안왕 임을 겨우 알아보고, 깜짝 놀라, “아이고머니나, 이게 사람 꼴입니까?”“사람이죠, 눈 귀 입 코 다 있으니까, 좀 크긴 하지만.” 위왕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마음이 많이 편안해 져서 말하는 것도 예전처럼 그렇게 우울하지 않다.제왕은 그들 사이의 원한을 알고 있어서 넷째가 셋째에게 한 일을 생각하고 이 정도 맞은 건 하나도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제왕은 안왕을 관아 뒤뜰로 옮기도록 분부하고 우문호도 마침 도착했다.우문호가 안왕을 보더니 사람을 시켜 뜨거운 물을 가져오게 해서 다른 사람을 다 물리고 혼자 안에서 안왕의 상처를 돌봤다.안왕은 고통으로 이를 갈며 눈은 거의 뜨지 못한 채 우문호라는 것을 알고 이를 악물고, “호야, 너 이건 형 목숨을 빼앗은 거야.”우문호는 손에 뜨거운 물수건을 들고 얼굴에 핏자국을 닦으며 담담하게, “어차피 언젠가 맞을 일이었어. 빨리 맞으면 빨리 끝나고, 아니면 평생 셋째형한테 빚지고 사는 거지.”안왕은 억지로 겨우 실낱만큼 눈을 뜨는데 고통스럽게, “맞았으니 이제 끝인가? 아닐 걸, 앞으로…… 살살해, 날 죽일 셈이야……”우문호는 안왕의 이런 모습에 화도 나도 웃기기도 했다. 전에 안왕에게 당했을 때는 잡아오면 가만 안 두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꼴을 보니 그럴 기분도 들지 않고 어쨌든 나중에 또 협력해야 하니 만약 협조를 안 하면 그때 두들겨 패도 늦지 않겠다 싶다.“셋째형도 이만하면 괜
안왕의 변명“그래? 예를 들면 어떤 일을 종 잡을 수가 없는데? 얘기해 봐 분석 좀 해 보게.”안왕이 약간 눈을 피하며, “네가 믿던 안 믿던 난 지금 야심 없어, 이 사건은 내가 관여한 적이 있는 셈쳐도 벌써 지난간 일이고 지금은 맡은 일 잘해서 아바마마의 시름을 덜어드리고 싶을 뿐이야. 우리 형제가 전에도 얘기했듯이 일단 서로 간의 악감정을 버리고 대외적으로 일치 단결 해야지. 집안싸움이 되서는 안돼, 아바마마 옥체가 좋지 않으시니까.”우문호가, “넷째 형, 우리가 아직 형제라고 하니까 형제의 정에 따라 얘기할 게. 난 아바마마 앞에서 형을 지켜주고 싶지만, 알고 있는 건 반드시 나에게 얘기 해야 해. 지금은 병여도를 다시 가져오는 게 제일 중요한 임무로 나머지는 전부 괜찮아.”안왕이 우문호를 보고 아무 말이 없다.우문호가 계속, “뭘 걱정하는지 알아, 말 안 하면 형이 전에 한 일을 내가 못 찾아낼 것 같아? 만약 정말 조사하고 들면 사흘을 못 가서 안왕부 구석구석을 싹 다 뒤져내면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일이 꼽을 수도 없이 많겠지? 나는 아주 구체적으로 형제의 정을 생각해서, 셋째형이 체포해 와서 개인적으로 묻는 거야. 진짜 대대적으로 일을 벌이기로 들면 형은 경조부 법정에 서야만 할 걸.”안왕이 우문호를 보고 한숨을 쉬며, “진짜 한 끝차이로 쟁반에 가득한 걸 다 쏟았네. 대부분 내가 한 게 아니고 아라가 한 거야. 보친왕부에 있던 첩자도 아라가 심어 놓은 거고, 아라 생각에 일이 간단하지 않으니 몰래 알아보고 몇 사람을 보친왕부에 잠입시켜 놨어.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나중에 아라가 죽은 후에 명단을 받아 들고 비로소 알았어. 그들은 아라에 충성을 다하는 자들로 나에게 충성을 바치는 자가 아니야. 아라가 죽었으니 그들은 비록 내 관리 하에 들어왔지만 아라의 죽음이 그들의 마음을 냉담하게 만든 나머지 나에게 겉으로는 복종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배신하고 있어. 진짜야. 아라가 이렇게 깊숙하게 포진해 놓았을 줄 몰랐어. 게다가 아라가 꽂아
안왕과 우문호의 딜우문호가 계속, “이 얘긴 잠시 접어두고, 박씨 집안 쪽엔 형이 해명해. 지켜볼 거야, 만약 박씨 집안에 가서 똑바로 해명하지 않으면 형에 대해 다 불어버릴 줄 알아. 그리고 보친왕부에 있는 양대 세력 중에 나머지 한 세력은 홍엽공자 아냐?”안왕은 화가 나서 우문호의 말을 듣고 아예 얼굴도 돌리지 않고 답이 없다.우문호는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좋은 말로 할 때 알고 있는 걸 남김없이 다 말해. 형도 알겠지만 형 주변에 전부 목숨 걸고 충성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거든. 형한테서 원하는 걸 얻지 못하면 형 주변의 사람을 찾아갈 거야. 어쩌면 형수에게 물어볼 수도 있고, 형수는 좀 알고 계시겠지?”“우문호,” 안왕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입술이 찢어지던 말던 상관하지 않고 분노해서, “형수는 아무것도 몰라, 형수를 찾아가는 날엔 널 가만두지 않을 줄 알아.”“안 가도 된다니까. 형이 협조하면 돼.” 우문호는 스스로 차를 끓여 마시며 일어나 안왕보다 높이 앉아 굽어보며 말했다.안왕이 차갑게, “네가 무슨 생각인지 내가 모를 줄 같아? 홍엽이 북당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다고 말하기만 하면 넌 나를 훼방할 게 분명해. 내가 속을 줄 알고. 홍엽 일은 난 일체 몰라, 네가 누구한테 가서 물어보던 내 대답은 하나야. 호야, 네 형을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라. 네가 맡은 일에 공을 세우는 건 네 일이니, 말할 수 있는 건 나도 협조하지만 홍엽 일은 모른다면 모르는 거야. 만약 네가 형수를 귀찮게 하러 갈 생각이라면 나중에 내가 너한테 따질 테니까.”우문호가 콧방귀를 뀌며, “형, 천하에 실속은 형 혼자 다 차리고. 난 셋째 형에게 형을 체포해 오라고 했는데, 형은 나한테 박원 사건만 불고 계산 끝내려고 했어? 형 입에서 홍엽 일을 듣지 못하면 쉽게 형을 놔줄 수 없지. 어디 나랑 한번 시간을 끌어봐, 일단 안왕부 사람을 하나씩 데려와서 취조를 하지, 그들이 전부 형에게 충성해야 할 텐데 말이야. 아니면 그들 입에서 나오는 거랑 형
안왕과 아라의 비밀명단을 가져와서 귀영위에게 전해주고 조사하게 했다.곧 소홍천 쪽에서 한방에 7~8명을 잡아와서 귀영위 쪽과 전부 더하니 20명이 넘었다.사람을 잡아 들인 후 바로 취조를 시작해 이날 하룻밤에 우문호는 경조부 사람을 데리고 이 사람들과 두뇌싸움과 배짱을 겨루며 조금씩 파 들어가기 시작했다. 알아 낸 건 기록한 뒤 다시 다른 진술과 대조했다. 삼일 밤낮을 써서 이들의 심문을 마치고 모둔 정보를 대조해보고 이틀 간의 시간 동안 다시 완전한 정보와 증거 사슬로 정리해 냈다.우문호는 5일간 초왕부로 돌아가지 않다가 이 날 새벽 드디어 피곤에 지친 몸을 이끌고 초왕부로 돌아갔는데 전신에서 시큼한 냄새가 나고 수염까지 덥수룩한 모습이 영락없는 떠돌이다.서일이 먼저 돌아와 초왕부에서는 야식을 만들고 원경릉도 기다리고 있었다.우문호는 들어오자 마자 얼른 한 그릇 후딱 먹어 치우고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원경릉이 수염을 깎아주자 그제서야 원래의 잘생긴 얼굴이 되살아 났다.“살짝 졸고 5경(새벽3시~5시)에 조정에 가서 아침조회를 하고 어서방에서 보고 해야 해.” 우문호가 나한상에 널브러졌다. 일에 찌든 얼굴엔 다크 서클이 콧구멍까지 내려왔다.“말끔하게 조사한 거야?” 원경릉이 가슴 아파하며 물었다.“병여도는 아직 못 찾아왔지만 희망이 있어.” 우문호가 눈을 감고 중얼거리듯, “나중에 얘기 해. 너무 졸려, 내일 얘기할 게.”원경릉이 우문호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그래, 일단 자. 오경에 깨워줄 게.” 우문호는 답도 없이 벌써 잠에 빠졌다. 우문호는 사실 피곤이 너무 쌓이고 며칠 간의 심문으로 목소리까지 갈라졌다.우문호는 5경이 되도록 자다가 일어나서 대충 입을 씻고 조복을 입고 찬바람을 맞으며 문을 나섰다.아침 조회 때 우문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어서방에서 공무를 논의할 때 독대를 청했다.명원제는 우문호의 보고를 듣고 눈살을 찌푸리며, “그 말은 병여도가 진짜 선비족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거냐?”우문호가, “맞습니
새로운 계획명원제의 마음은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했다. 제왕의 자식들은 왕위를 놓고 다투는 것이 역대 왕조 대대로 피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누구나 마음 속에 요행을 바라듯이 명원제도 자기가 낳은 아들은 예외일 거란 천진한 생각을 가졌었다.하지만 2년 연달아 계속 발생한 일들을 보고 아주 똑똑히 현실을 인식하고 큰 아들을 폐위하기에 이르렀다. 분노로 결정했던 일이지만 심사숙고해서 결정했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그런데 큰 아들 일이 정리된 지 며칠 됐다고 넷째가 또 분란을 일으켰다.명원제는 넷째의 아심을 알고 있어 권한을 뺏고 군영으로 쫓아 보내며 경고 했다.하지만 소위 경고라는 것은 그저 방임에 지나지 않았음을 이제 깨달았다.“아바마마 고정 하소서,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병여도를 되찾아 오는 일입니다.” 우문호가 말했다.명원제가 싸늘하게, “선비에서 우리 북당에 두 갈래로 첩자를 포석해 두었다는 건 국경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왔다는 게 아니냐, 네가 반성해야는 거 아냐?”우문호가 잘못을 시인하며, “제 감찰이 부족해서 선비족이 기회를 틈탔습니다.”“그럼 어떻게 병여도를 되찾겠다는 거지?” 명원제는 원래 화가 잔뜩 났으나 아들 얼굴에 피로가 가득하고 요 며칠간 얼마나 힘들었을 지 생각하니 마음이 짠한 것이 화를 꾹 참고 물었다.“소자에게 이미 계획이 있습니다.”“얘기해 봐!”우문호의 계획을 다 듣고 명원제는 우문호를 한동안 바라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우문호는 명원제가 찬성하지 않는 줄 알고, “아바마마, 저희가 지금 선비에 사람을 보내 잠입시키면 사전 포석을 하지 못해 병여도를 되찾기 어렵습니다. 그럼 홍엽에게 알려서 홍엽이 빼앗도록 하는 수밖에 없는데 홍엽 수중에서 빼앗아 오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기회를 봐서 못 쓰게 만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못 쓰게 만드는 건 너무 아깝지만 제가 계속 대주 쪽과 연락을 유지하고 있으니 대주의 섭정왕 수중에서 병여도를 다시 얻어내겠습니다.”병여도를 못 쓰게 만드는 건 명원제 입장에서
홍엽공자의 편지그 편지는 우문호가 압수해 다 읽은 뒤 완전 뚜껑이 열려서 구겨버린 다음 구석에 던져버리고 사람을 시켜 원경릉에게 가져다 주게 했다.서신을 받아 든 원경릉은 도저히 알아보기 힘들어서 서신을 펼쳐 다린 후에야 겨우 안에 문제를 읽을 수 있었다.이 편지엔 수백개의 글자가 써 있는데 그야말로 한편의 서정문으로 헤어진 뒤 얼마나 절절하게 마음을 놓지 못하고 걱정했는지 토로하고 있었다. 원경릉은 다 읽은 후 사랑에 빠진 소년의 모습이 눈 앞에 그려졌는데 이 사람이 아무리 생각해도 홍엽공자와 매칭이 되지 않았다.홍엽은 문장의 마지막에 우리의 인연은 이미 10년전에 정해졌으니 이 생엔 당신이 있는 곳이 내가 돌아갈 곳이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원경릉은 이 말에 닭살이 쫙 돋았다.그렇게 심오한 모략을 짜는 사람이, 이런 병신 돋는 문장도 쓰다니 정말 난해한 사람이다.“태자비 마마, 전하께서 밖에서 보고 계십니다.” 만아가 작은 소리로 알려줬다.원경릉이 창문을 힐끔 보니 과연 사람 그림자가 쌩하고 지나간다.원경릉이 어이없이 웃으며 아직도 안심이 안돼? 몰래 내 반응을 지켜봐야 할 만큼?“문을 활짝 열어서 태자 전하께 들어오시라고 해.” 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만아가 가서 문을 열자 우문호가 아직 분이 사그라지지 않는지, 훤칠한 얼굴에 싸늘한 표정으로 뒷짐을 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원경릉 곁에서 한바퀴 휙 도는 게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큰 늑대 개 같다.“다 본 감상이 어때?” 우문호가 앉아서 물었다.원경릉이 편지를 찢어서 탁자에 쌓아 두고, “응, 글씨 잘 쓰네, 필력도 좋고.”“글자도 보통이고 필력은 완전 괴발개발이야!” 우문호가 코웃음을 치더니 화가 나서, “그 밖에는? 서신에 쓰여진 말에 무슨 감흥 없어? 그런 걸 사랑에 빠졌다고 하지.”“그거 말고는……”원경릉이 미간을 찌푸리며 근심에 쌓여, “홍엽 공자란 사람의 인품이 안 좋은 걸 알아볼 수 있겠어.”“인품이 안 좋은 걸 알아보다니? 어느 구절에서?” 우문호가 당황해서 찢어진
병여도 사건 이후이틀 후 경조부에서 판결이 내려져, 보친왕은 독주를 받아 사사되었고 시체는 온전하게 보전되었다.홍엽은 경성을 떠났고, 보친왕은 벌을 받았으며, 안왕은 감금되어 이 사건은 일견 수습된 것처럼 보였다.하지만 다들 알고 있었다. 이건 두 나라가 대전하기 위한 폭풍 전야에 불과함을, 북당이 패배해서 귀퉁이가 찢어졌다는 것을 말이다.이 안정돼 보이는 솥은 아래로 물이 이미 부글부글 끓어올라 언제 넘쳐서 평온한 솥을 발칵 뒤집을지 알 수 없었다.우문호는 아직 경조부 부윤으로 있지만 이미 내각에 들어갔고 관아의 많은 사안은 제왕에게 맡겨 관리하도록 했다. 우문호는 종일 주재상, 냉정언 등과 회의를 하고 가끔 출궁해 주씨 집에 갔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원경릉도 의대 일로 바빠서 부부 두사람은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았는데, 우문호가 집에 돌아올 때 원경릉은 이미 잠들어 있고, 원경릉이 나갈 때 우문호는 막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두 사람이 유일하게 교류할 때가 우문호가 돌아와서 원경릉에게 뽀뽀할 때와 원경릉이 학교 가며 우문호에게 뽀뽀할 때다.원경릉은 우문호가 선비에 역간첩 작전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람을 선정하고 전체적인 배치를 하는데 상당히 치밀해야 하는 것이 행로에 약간의 착오만 있어도 공을 거둘 수 없음은 물론이고 간첩의 목숨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북당과 대주의 무역은 맹렬한 기세로 진행되고 있다.이리 나리는 대주로부터 수많은 주문을 받고 시장의 절반을 잠식해 본부도 수도권 직례에서 경성으로 옮겨, 전열을 가다듬고 자리를 잡았다.천자의 사위로 이리 나리는 충분한 영향력이 있어, 경성 상인들의 신임을 순식간에 얻을 수 있었고 이리 나리 성격이 후해서 다들 그와 장사하기를 좋아했다.하지만 이리 나리와 공주가 결혼한지도 꽤 되었는데 공주의 배가 불러 오지 않는다고 암암리에 수근대는 사람도 있었다.이 유언비어는 우문령을 곤란하게 만들었는데 원경릉이 가서 다독여 주었다. 이 시대는 혼인하고 3개월이 지났는데
박원과 제왕여러차례 고민 끝에 제왕은 역시 가기로 했다.박원은 미리 원용의를 따돌렸는데, 그러니까 이 얘기는 두 남자들끼리 나눈 것으로 다른 사람은 없었다.날이 이미 추워져 큰 일을 겪은 후라 박원은 원래보다 몸이 많이 약해져서 안색이 아직 예전의 붉고 윤기나는 모습으로 회복하지 못하고 눈가가 아직 창백하다.박원이 직접 술을 데워 제왕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불렀다.박원은 시원시원한데 반해 제왕은 쭈뼛쭈뼛, 제왕은 말도 신중하고 깍듯하게, “평안후 작위를 받으신 걸 미쳐 축하 드리지 못했습니다.” “고마워요!” 박원이 씨익 웃자, 비로서 예전의 빛나는 기백이 느껴졌다. “평안이란 두 글자가 각별하게 느껴지네요.”“예.” 제왕이 딱히 할 말도 없고 앉아서 술만 마셨다.박원은 제왕의 이런 모습을 보고 웃으며, “왕야께서 제 귀에 주절주절 쉬지 않고 얘기해 주시는 것도 좋았는데.”제왕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다 들었습니까?”“정말 신기하죠, 다 들렸어요.” 박원이 웃으며 갈수록 명랑해 지더니, “그리고 왕야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음 속에 남았죠, 하지만 안심하세요. 동생한테 말한 적 없으니까요.”제왕은 부끄러운 나머지 얼굴을 들 수 없는 게 그때 한 말은 누구에게도 하지 못하고 박원이 듣지 못하는 줄 알고 반응할 리 없어서 편하게 말한 건데, 그걸 전부 듣고 있었고 심지어 기억하고 있을 줄 상상도 못했다.“왕야께서 동생을 깊이 연모하는 마음에 저도 감탄했습니다. 하지만 왕야는 행동이 유약해서 얕잡아 보기도 했어요.” 제왕은 단숨에 술을 털어 넣더니, 술을 마셔서 얼굴이 빨갛게 된 것처럼 속으로 깜짝 놀란 걸 숨기며, “그……그러니까 정말 남녀로서 감정이 없는 겁니까?”박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더니, “처음엔 확실히 가슴 떨림이 있어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죠. 만약 내가 이생에 아내를 맞아야 한다면 그녀 같은 여자를 맞겠다고. 그리고 우리 두 집이 정혼을 하고 우리 관계가 확정되자 전 오히려 좀 망설여
체온을 측정해 보니 무려 40도였다.“고열이오. 또 다른 증상은 없소?”원경릉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바쁜 와중에 병까지 든 다섯째가 안쓰러워졌다.우문호가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말했다.“걱정할 필요 없소. 그저 재채기 몇 번에 조금 어지럽고, 코가 막히며 목이 약간 찌릿한 정도네. 별일 아니네.”원경릉은 서둘러 청진기를 꺼내 심장과 폐를 확인해 보았는데, 다행히 특별한 이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비를 맞아 감기에 걸려 열이 나는 듯했고, 바이러스가 호흡기를 공격하는 것으로 보였다.그녀가 말했다.“해열제를 먼저 먹고 주사를 맞은 후, 푹 자고 나면 내일 괜찮아질 것이오.”그녀는 해열제를 찾아내자, 서일이 바로 물을 준비해 왔다. 우문호는 해열제를 삼킨 뒤, 바로 물을 마셨다.이는 그가 약을 먹을 때 늘 하는 습관이었다.원경릉은 주사기를 꺼내 약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주사기를 손에 들자마자, 우문호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꼭 이걸 맞아야 하오?”“주사를 맞으면 빨리 낫습니다. 바쁘다 하지 않았소?”원경릉이 부드럽게 그를 달랬다. 우문호는 약은 한 움큼씩 먹을 수 있는 반면, 주사는 몹시 무서워했다.옆에서 서일도 말을 보탰다.“아프지 않습니다. 금방 끝날 겁니다.”“근육 주사가 제일 빠르오. 정말 안 아플 거라네.”원경릉이 웃으며 덧붙였다.우문호는 바쁜 나랏일을 떠올리며 더 이상 아프면 안 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주사의 아픔을 참기만 하면 내일 나은 몸으로 조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좋소. 그럼 빨리 낫게 두 대 놓으시게!”우문호가 용기를 내어 웃으며 말했다.“마마…!“그때 밖에서 녹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쥐들이 갑자기 우리를 부수고 탈출했습니다. 궁녀를 시켜 잡았지만, 두 마리나 놓쳐 버렸습니다.”원경릉은 쥐들이 대나무 우리를 부술 정도로 강해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다급히 주사기를 약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다섯째, 조금 있다가 돌아와서 다시 주사 놓겠소.”그러자 우문호
이 약은 사실 원경릉이 맡은 프로젝트가 아닌, 그녀의 실험실에 있던 다른 전문가팀이 진행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전문가가 뜻밖의 사고로 행방불명이 되면서 양여혜가 그녀에게 팀을 이끌고 연구를 이어가도록 했다.원경릉은 연구 단계에 처한 약을 약상자에 넣어 가져온 후 실험용 쥐에게 주사했다. 그녀는 궁에 간단한 실험실을 마련해 실험용 쥐를 관찰하고 데이터를 정리하는 기본적인 작업을 했다. 하지만 심도 있는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현대로 돌아가야만 했다.부부는 각자의 일로 바삐 보내며, 이삼일 동안 식사도 함께하지 못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다.전형적인 바쁜 부부의 모습이었다.며칠 밤을 상의한 끝에 우문호는 과거시험 문제를 정하고 주 시험관을 명했다. 그리고 천제를 올려, 이번 과거시험에서 나라에 유용한 인재를 선발할 수 있도록 하늘에 기원했다.그렇게 천제 의식이 반쯤 진행되었을 때, 갑작스럽게 쏟아진 폭우로 의식은 중단되었다. 제단 위에 있는 우문호와 대신들은 비에 흠뻑 젖었지만, 의식을 끝까지 마쳐야 했다. 천제를 마치고 궁으로 돌아온 우문호는 비를 맞은 탓에 연신 재채기 했다.그는 궁으로 돌아가자마자 녹주가 끓여준 생강차를 연거푸 두 그릇 마셨다. 원경릉이 아직 돌아오지 않자, 우문호는 다시 어서방으로 가서 내각에서 올린 상소문을 검토했다. 내각에서 올리는 상소문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일반적인 문제는 냉정언이 먼저 확인한 후, 바로 처리했다.자시까지 바삐 보내고 난 후, 우문호는 몸 상태가 점점 이상하고 어지럽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문턱에 앉아서 졸고 있는 목여 태감을 보며, 그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버거움을 느꼈다.황위에 오른 후, 우문호는 거의 아픈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연달아 밤을 새우고 비까지 맞은 데다 환절기에 찬바람을 맞으니 감당하기에 더욱 어려웠다.하지만 우문호는 일을 마저 처리하려 억지로 애를 썼다.목이 조금 말랐지만, 목여 태감을 깨우기 귀찮아진 그는 차갑게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일을 이어갔다. 상소문을 보자마
우문호가 원경릉에게 물었다.“참, 아이들과 그룹… 채팅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계란이가 이 일을 안다고 한 적 있소?”“우린 그런 이야기를 나누지 않소.”원경릉이 웃으며 대답했다.“그럼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이오? 나도 들어갈 수 있소?”우문호가 물었다.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마 안 될 것이오. 그룹 채팅은 단지 별칭일 뿐, 당신이 현대에서 본 통신 앱과 같은 것이 아니오. 우리는 의식으로 소통하는 것이라, 당신은 함께할 수 없소.”“그렇군.”우문호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원경릉은 그가 조금 서운해하는 것을 눈치채고는 그를 안고 말했다.“당신도 참. 지금까지 아이들과 나눈 이야기를 당신한테 숨긴 적 없이 모두 말해줬으니, 기분 나빠하지 마시오.”“기분 나쁜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계란이가 모르고 있다가 속상해할까 봐 걱정되는 것 뿐이라네.”우문호가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시오. 계란이는 아직 사내를 좋아할 나이가 아니오.”우문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저 한 아이의 아버지의 노파심으로 인해 작은 문제도 크게 보기 마련이었다.이 드넓은 세상을 아이들이 마음껏 탐험하는 것은 괜찮지만, 혹여나 아이들이 속상해할까 봐 늘 걱정이었다.한편, 요즘 다섯째는 과거시험으로 인해 바쁜 일상에 조금 지쳐 있었다.과거 시험장은 항상 부정행위로 난무하는 곳이었다. 과거로 인재를 등용하려는 조정의 목적과 달리, 일부 관리들은 그저 돈 벌 기회로 여길 뿐이었다.그래서 지금 주 시험관 자리를 차지하려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지난해까지는 냉 수보가 항상 주 시험관을 맡았지만, 그럼에도 다른 시험관들의 부정행위가 적발된 적이 있었다.이 일로 우문호는 3년에 한 번씩 화를 내곤 했다.올해 냉 수보는 주 시험관을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겠다고 말하고 이 직책을 내려놓았다.최근 새로운 세금 제도를 추진하느라 바쁜 터라, 주 시험관직까지 겸할 시간이 없었다. 이에 우문호가 직접 시험관 선발 과정을 엄격히 관리하기로 했다.북당
택란은 순간 단순히 목숨을 구해준 은혜에 대한 보답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어린 황제는 어린 시절부터 외롭고 힘들었을 것이기에, 란이라는 자의 언니와 몇 년을 함께 보내며 정이 생겼을 가능성이 충분했다.어쨌든, 단순히 은혜를 갚기 위해 은인의 언니와 결혼하는 것은 말이 안 되었고, 다소 억지스러웠다. 게다가 그가 왜 그 란이라는 사람이 정말 자신의 은인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사람을 데려갔을지도 의문이었다. 어쩌면 일을 맡은 부하가 임무를 대충 하며 거짓말을 꾸며냈으니, 어린 황제가 그 란이라는 사람에 대한 은혜 때문에 섣불리 믿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어린 시절의 감정이 가장 순수한 법이니까.“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오직 발전만을 목표로 합니다!”주 아가씨도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감정 문제는 공주에게 어울리지 않았고 아직 어리기도 하기에 혼담은 스무 살까지 미뤄도 늦지 않았다. 아니면 그녀처럼 혼자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한편, 출발 준비를 하는 동안 냉명여가 짐을 싸는 택란을 보며 물었다.“누나, 멀리 가는 것입니까?”“금국 량주에 다녀오려고 한다.”택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짐을 싸는 손을 멈추지 않고 답했다.그러자 냉명여의 눈이 반짝였다.“량주요? 그럼 나도 데려가면 안 됩니까? 량주에 변신술을 잘하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습니다!”“가고 싶으냐? 그래. 데리고 갈 수는 있지만 말을 잘 들어야 한다!”택란이 웃으며 말했다.“잘 듣겠습니다! 꼭 약속하지요!”냉명여가 급히 다짐했다.“좋다. 그럼 가서 짐을 싸거라. 내일 출발할 것이니 서둘러야 할 것이다.”택란의 말이 끝나자마자 냉명여는 기쁜 얼굴로 쏜살같이 방으로 달려가 짐을 싸기 시작했다.이때, 이를 본 주 아가씨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데려간다니요? 아직 어린아이인데… 귀찮게 굴지 않을까요?”“괜찮소. 지금 아직 어리니 더 많은 세상을 경험해야 하오. 계속 저택 안에만 두면 아무것도 스스로 못하는 아이로 자랄 뿐이네. 그건 냉 대인과 홍엽 아
세월이 흘러, 택란이 열한 살 되던 해에 드디어 만두가 돌아왔다.어린 나이에 집을 떠난 그는 이제 완전한 청년으로 성장해 돌아왔다. 그리고 떡들 세 명은 만으로 따지면 이미 열일곱 살이 되었다.만두는 도착하자마자 먼저 황제의 허락을 받고 군에서 수련을 시작했다. 비록 국경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국력이 항상 군사력의 안정에 의해 뒷받침되기 때문에 군 경험이 매우 중요했다.나라를 안정적으로 통치하려면 먼저 군심을 얻어야 한다.우문호는 그의 선택을 전폭 지지하며, 국가에 대한 소속감을 키워주기 위해서 그를 작은 병사로 임명하여 군에 들여보냈다. 약도성은 이미 재건이 대부분 완료된 상태였다. 백성들도 마음을 다잡았고, 이제는 본격적인 발전만 남아 있었다. 이리 나리와 홍엽이 이곳에 왔을 때, 냉명여를 약도성에 남겨두었는데, 호명이 챙기려 했으나, 냉명여는 택란 곁에서 그녀를 보호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꽤 고집이 센 아이기에 그는 그저 놔두기로 했다. 변경은 심지를 단련하기에 좋은 곳이었고, 호명이 보살펴 주며 저택 안에 거주했기에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한편, 금나라에서는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진국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 황제가 본격적으로 조정을 이끌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도는 원래 약도성 접경 지역에 새롭게 지은 곳으로 옮겨졌고, 이름 또한 량주로 바뀌었다. 금나라는 이제 공식적으로 량주를 수도로 정했다.이 소식이 약도성에 전해지자, 택란은 무척 기뻐하며 주 아가씨에게 물었다.“이제 본격적으로 채굴을 시작해도 될 것 같소. 금나라에 한 번 가볼 생각인데, 자네도 같이 가는 것이 어떻소?”그 해 택란은 훌쩍 성장해 주 아가씨보다 조금 더 커 있었다. 주 아가씨는 때때로 그녀를 보며, 대나무가 환생한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며칠 사이에 또 훌쩍 자란 것이다.택란의 아이 같던 분위기는 사라졌고, 훨씬 차분하고 성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약도성의 거센 바람과 강한 햇빛 때문에 원래 하얗던 피부는 건강한 빛을
우문호는 정정이 계란이를 언급하지 않은 것을 보고 마음이 조금 놓였다. 보아하니 혼인 문제에 있어 두 사람은 합의를 봐 더는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 같았다.정정 대장군 부부는 경성에서 반 달 동안 머물렀고, 그동안 정정과 우문호는 시간이 날 때마다 말을 타거나, 군영과 산을 누비며 백성들을 살폈다.대두는 아이들과 즐겁게 지냈다. 비록 처음 이틀 동안은 계속 만두를 보고 싶다고 떼를 썼지만, 이제는 만두를 완전히 잊은 듯했다.그는 란이와도 갈등을 풀었고, 오히려 제일 친해져서 무엇을 하든 항상 함께했다.그렇게 2주가 지나 정정이 작별을 고하기 전, 우문호에게 대두의 배필을 찾은 것 같다고 말하며, 대두는 그녀가 자랄 때까지 잘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그의 말에 우문호가 어리둥절하며 물었다.“누구요?”정정이 웃으며 말했다.“지금은 말할 수 없소. 아직 확정된 일이 아니라, 나중에 잘못되면 감정이 상할 수도 있네.”“우리 사이에 말 못 할 게 어딨소?”우문호는 그의 말에 이미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그러자 정정이 더욱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들으면 자네가 조급해질까 봐 그러네!”우문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난 지금 이미 엄청 조급하네.”정정은 크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철썩 때리며 위로했다.“걱정하지 마시게. 계란이는 아니네. 계란이는 내 딸이기도 하니, 절대 며느리가 될 수 없소.”다른 남자가 계란이를 자기 딸이라 부른 건 처음이었지만, 우문호는 반감 없이 오히려 매우 기뻐, 활짝 웃으며 말했다.“맞네, 자네 말이 맞아. 계란이는 자네 딸이기도 하네. 우리 모두의 착한 딸이지.”근영군주는 이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리며 원경릉에게 말했다.“보아하니, 우리가 여기서 제일 쓸모없는 존재 같습니다…”“맞는 말입니다!”원경릉이 진지한 표정으로 맞장구치자 근영군주가 그녀를 가볍게 안으며 말했다.“앞으로는 자주 만나지 말고, 1년에 한 번만 봅시다! 시간이 어찌 이리 빨리 흐른다는 말입니까?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눈
목장에서는 전보다 훨씬 뛰어난 전투마들을 사육했기에, 우문호는 마치 보물을 자랑하고 싶은 어린아이처럼 당장이라도 정정과 함께 보러 가고 싶어 했다.그러자 근영군주가 웃으며 말했다.“폐하께서 아직도 소년 같은 순수함을 지니시고 있다니, 참 보기 드물고 귀한 일이군요.”하지만 원경릉의 귀에는 이 말이 남편이 어린아이 같다는 말로만 들렸다.그녀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하하하. 사내들이 가끔 저렇게 유치할 때가 있잖습니까.”근영군주도 깊이 공감하며 말했다.“예. 평소엔 유치하다가도, 필요할 때는 놀라운 배짱과 결단력을 보여주지요. 집안을 지탱하기도 하고, 나라를 떠받치기도 하고. 안 그렇습니까?”원경릉도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습니다.”남자들이 말을 타러 나가자, 원경릉과 근영군주는 궁전 안에서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대두가 몹시 심심해하자 원경릉은 친왕비들에게 아이를 궁으로 데려와 아이들끼리 놀게 했다.대주의 손님을 정성껏 대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에 친왕비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궁에 들어왔다.사실 대두와 비슷한 나이의 아이는 많지 않았다. 미색의 두 아이와, 원용의의 아이 모두 대두보다 어렸지만, 놀 벗이 없는 상황에 나이가 어린 것은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대두는 외동아들로 자라 성격이 다소 거칠었다. 하지만 미색의 딸인 란이 역시 성격이 강하고 고집스러웠다. 어머니인 미색을 닮아 태생이 강한 성격을 타고난 것이었다.게다가 그녀에게 무술을 배워 한창 센 척을 할 시기라 대두와 몇 마디 말다툼 끝에 결국 몸싸움으로 번져 버렸다.란이가 대두를 때리자, 대두는 얼굴이 퉁퉁 부어오를 정도로 맞으면서도 전혀 반격하지 않고 그저 참고만 있었다. 끝까지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란이는 평소 늑대파에서 무술 대련을 했기에 상대가 반격하지 않고 그저 제자리에서 맞고만 있는 멍청한 모습을 경험한 적이 없었기에, 부어오른 대두의 뺨을 발견하곤 깜짝 놀라며 물었다.“어찌... 반격하지 않는 것입니까?”대두는 화난 표정으로 대답했다.“어찌
생각해 보면 이렇게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혼사를 정하는 것이 얼마나 황당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이가 남녀인지도 모르면서 성급한 부모들이 충동적으로 혼사를 결정해 버리다니 말이다. “대두가 아직 이리도 어린데, 벌써 혼사를 이야기하다니요, 우리 만두는 아직 애 입니다.”우문호는 괜히 기분이 답답해졌다.현대로 다녀온 뒤, 사람들이 늦은 결혼과 출산을 선호하는 것을 본 그는 생각이 바뀌었다. 열몇 살에 혼사를 하는 것은 성장의 억압이나 다름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혼사 이야기를 한다고 당장 하는 건 아니오. 그저 약속만 하고, 몇 년 후에 하겠다는 거네.”“어찌 이리도 태연한 것이오?”우문호가 원경릉의 여유로운 표정을 보며 그녀가 그들이 빚을 받으러 온 걸 모르는 건가 싶었다.“난 걱정 없소. 딸을 보내고 싶지 않으면 당신처럼 쓸데없는 부담감 없이 그냥 바로 거절할 것이오. 형제간의 정이 거절로 인해 상할까 봐 고민한다니, 억지로 혼사를 성사하는 것이 더 정을 상하게 할 것이오.”그러자 우문호가 말했다.“이론적으로는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마음이 편치가 않소.”후궁에서의 우문호는 조정에서의 단호하고 강력한 모습과는 완전히 딴 사람이었다. 조정에 나서기만 하면 단호하고 과감하며, 마치 번개 같은 결단력을 보여주는 반면, 후궁에서의 그는 망설임도 많고 잔소리도 많은 사람이었다. 원경릉이 다른 왕비들과 대화할 때, 그들도 가끔씩 이 얘기를 꺼내곤 했었다. 다들 다섯째의 평소 잔소리가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다며 놀라했다. 하지만 다른 친왕들의 의견은 달랐다. 그들은 그가 예전보다 훨씬 결단력이 있어졌다고 말했다.이런 얘기가 나올 때마다 이리 나리는 한숨을 쉬며, 결국 결단력 넘치는 황제도 결국 자식들 문제에서는 고민에 빠지는구나 싶었다.8월 14일, 정정 대장군 가족이 북당의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초왕부에 머물렀다.그들은 초왕부에 머문 직후 탕양의 안내로 우문호를 만나기 위해 궁으로 들어갔다.아무리 큰 걱정도 오래된 벗 앞에서
예전에 원가에서 온 가문이 강북부로 이주한 적이 있었다.북쪽은 바람과 모래가 거셌지만 원가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았고, 오히려 고향과 비슷한 정감을 느끼게 했다.이리 나리는 원가의 사업을 줄이도록 도우며, 관리하기 쉬운 몇몇 가게만 남겼다.탕양은 일곱째 아가씨에게 장사를 내려놓아도 괜찮은지 물은 적 있었는데, 그때 일곱째 아가씨가 말했었다.“그런 말 마시오. 내 능력을 충분히 증명했으니 이제 만족스럽소. 열심히 해서 큰 성과를 얻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오. 평생 바삐 지낼 수도 없잖소. 그렇게 돈을 많이 벌어서 뭐 하겠소? 다 잘 살기 위해 번 것이오. 가업을 나눠 받은 돈만 해도 평생 다 못 쓸 만큼 많소. 그리고 가게들도 계속 돈을 벌 텐데 뭐가 아쉽겠소?”탕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손에 익은 일이라, 혹시라도 아쉬워할까봐 걱정했소. 사실 나도 당신이 이렇게 고생하는 것이 싫었소. 당신만 괜찮다면 다행이오.”일곱째 아가씨는 미소를 지었고, 그의 말에 모두가 기뻐했다.“한가해지는 것도 괜찮소. 1년에 두세 달은 약도성에 가서 지내면 얼마나 여유롭겠소.”하지만 탕양이 눈살을 찌푸렸다. 1년에 두세 달이면, 왕복하는 시간까지 더해 최소 반년은 걸릴 것이고, 그 말은 반년 동안이나 그의 곁에 없다는 뜻이었다.게다가 그도 경성을 몇 달씩 떠나는 건 불가능했다. 지금은 황제 곁을 하루라도 떠나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하지만 그는 그녀가 행복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물론 그는 늘 함께하고 싶었지만, 오래된 부부였기에 항상 붙어있을 필요는 없었다.북당은 점점 부유해지고 있었다. 원가가 일부 사업을 매각하면서 그 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가게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싸웠고, 좋은 위치에 있는 가게들은 더더욱 귀한 존재가 되었다.원래 원가는 모든 가게를 이리 나리에게 넘기려 했지만, 이리 나리는 거절했다.그리고 안풍친왕이 먼저 나서서 이리 나리가 이미 너무 많은 가게를 보유하고 있고, 특히 경성에서의 비중이 지나치게 높아 독점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