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씨 가문이 육현경과 임아영의 결혼식에 계략을 꾸몄다는 뜻인가요?’소이연이 물음에 천우진은 두 눈을 번쩍거렸다.“이건 좋은 기회야.”소이연은 그의 말에 침묵을 지켰고 천우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이번 결혼식을 망치려는 건가?”“네.”천우진에게 소이연은 항상 솔직했다.“문제는 네가 망칠 수 있어?”소이연은 얼굴색이 조금 변했다.“너한테 상처 주려는 건 아니야. 지금 상황으로 보면 네가 임청하를 상대로 이길 가능성은 지극히 낮아.”“혹시 모르잖아요?”“혹시 이긴다면 우리는 다른 기회를 찾을 수 있겠지.”그녀가 이번 결혼식을 막을 수 있다면 천우진이 소이연의 행복을 축복해 주겠다는 뜻이기도 하다.“후회하지 말아요.”“후회하지 않아. 원래부터 육현경과 같은 편이고 싶었어.”“알아요.”“그 사람이 말해 준 건가?”“네.”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자는 모든 걸 너한테 말해 주었네.”“전에는 나를 사랑했으니까요.”“그것도 다 예전이지.”“지금은 단지 기억을 잃은 것뿐이에요.”천우진의 말에 소이연은 발끈했다.그녀의 모습에 천우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천씨 가문은 사이가 좋은데 굳이 육현경더러 도우라고 하는 이유가 뭐죠? 천씨 가문에 깊은 내부 갈등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소이연은 그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육현경의 말에 따르면 천씨 가문은 갈등이 첨예하여 그가 천우진을 도와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심씨 가문의 일에서 육현경이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으니 말이다.“아니. 나는 단지 천씨 가문에서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할아버지가 일을 당하면 가문이 망하게 될가 두려운 거야.”“자신도 믿지 못하는 건가요?”소이연은 미간을 찌푸렸다.“나랑 오랫동안 알고 지냈으면서 내가 가업에 흥미가 없다는 것을 몰라? 오래전에 이미 할아버지에게 말했어. 천씨 가문의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고.”천우진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왜요? 권력에 욕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데요.”“내가 그렇
“육현경은 제일 적합한 사람이야. 심씨 가문과 맞설 때 그의 능력을 나는 이미 알아봤어. 그후에 얘기를 나눌때도 그가 내가 찾는 사람임을 알아 차렸어.”“왜 물려받으려고 하지 않는 거예요?”천씨 가문의 장손으로서 능력도 뛰여나고 나이도 적당한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소이연은 이해할 수 없었다.천씨 가문에서도 그의 능력을 인정한 것이다. 그렇게 아니꼽게 보던 천정엽도 그를 후계자로 생각한 것을 보면 말이다.이렇게 큰 기회를 버릴 이유가 있단 말인가?“나의 이미지를 망칠까봐 지금 말하지는 않을게.”천우진은 웃어 보였다.“걱정하지 마요. 그렇게 좋은 이미지도 아니니깐.”“그래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천우진의 말은 소이연의 구미를 당기게 했다.“상상하지 마. 시간이 지나면 내가 알려줄게.”“언제요?”“때가 되면.”소이연은 더이상 캐묻지 않았다.말하기 싫은 것을 굳이 묻고 싶지 않았다.단지 천우진의 일이기에 더욱 마음이 가기는 했다.“다섯 날 후에 육현경과 임아영이 결혼식을 올릴거야. 행운을 빌어.”천우진의 말에 소이연은 언짢아졌다.천우진이 떠난 후 그녀는 침대 위에서 한참이나 멍을 때렸다.그렇다.어떻게 해야 육현경의 마음을 돌리고 그가 임아영과 헤어지게 할수 있을가.임아영이란 여자는 참 쉽지 않았다.소이연은 입술을 꽉 깨물며 침대에서 자세를 바로잡고 앉았다.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끝까지 가봐야 아는 것이다.소이연은 핸드폰을 꺼내들어 육현경과의 대화내용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몇 글자 적었다.[퇴원해요.]메세지를 전송한 후 그녀의 심장은 빠르게 뛰여왔다.그리고 한참이 지났음에도 육현경에게서 문자는 되돌아 오지 않았다.화가 난 그녀는 다시 문자를 적어 내려갔다.[오늘 교통사고가 날뻔했어요.]전송 버튼을 누르자 대화창은 전송불가라는 알림이 떴다.소이연은 그가 자신을 차단했음을 여러번 인터넷을 검색한 끝에 알아차렸다.육현경이 자신을 차단하다니…소이연은 호흡이 가빠왔다.그녀는 정말 그에게 달려가 그의 뺨을
“나는 빨리 퇴원하고 당신이랑 결혼하고 싶어요.”“결혼일은 미뤄도 괜찮아요.”“안 돼요. 어렵게 좋은 날자를 정했는데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어요. 부정 타요.”“당신의 몸이 더 중요해요.”“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요. 결혼은 내 몸을 더욱 좋게 만들 거예요. 내 주치의가 한 말 기억하죠? 행복해야 오래 산다잖아요.”육현경은 어쩔 수 없었다.“그럼 그렇게 해요.”“루카스, 당신을 정말 사랑해요.”임아영은 적극적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육현경의 손은 눈에 띄게 떨려왔지만 그녀를 밀치지는 않았다.…다음날.소이연은 휠체어를 이끌고 육현경을 보러 병원에 갔다.천우진은 그녀가 걱정되어 굳이 따라나섰다.그들은 그렇게 육현경의 병실 앞에 멈춰 섰다.육현경은 대부분의 시간을 임아영의 병실에 있었다. 그가 가지 않으면 임아영이 기어코 그를 찾으러 왔기 때문이다.그러나 임앙영의 몸은 그렇게 움직일 만큼 건강하지 않았기에 육현경은 그녀의 병실로 가서 임아영이 잠에 든 후에야 나왔다.오늘도 그러했다.그는 자신의 병실로 돌아온 후 소이연과 천우진을 마주치자 깜짝 놀랐다.천우진은 그에게 결코 친절하지 않았고 그가 나타나자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소이연도 어두운 얼굴로 다짜고짜 물었다.“왜 나를 차단한 거예요?”“연락할 필요가 없어서요.”“당신을 거슬리게 했나요?”“아영 씨를 거슬리게 했죠.”육현경은 직설적으로 내뱉었다.그의 말에 소이연은 가슴이 아파왔다.원래 성격대로라면 몸을 돌려 떠났겠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그 자리를 지켰다.“다시 추가하면 안 되나요?”소이연은 물었다.“싫다면 앞으로 문자 보내지 않을게요.”육현경은 바늘에 찔린 듯 가슴이 아파왔다.콧대 높던 그녀가 지금 그의 앞에서 이렇듯 비굴해진 것이다.육현경은 하마터면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그녀를 안을 뻔했다.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그런 생각을 멈추고 숨겨진 카메라를 힐끗 보며 냉담하게 입을 열었다.“소이연, 우리는 앞으로 가능성이 없어요. 나한테 시간 낭비하지 말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나요?”소이연은 눈물 어린 모습으로 그에게 물었다.“안 돼요.”“정말 후회할 거예요.”소이연은 진지하게 그에게 말했다.“후회하더라도 아영 씨와 결혼할 겁니다.”육현경은 말에 소이연은 입술을 깨물었다.할 말이 많았지만 할 수 없었다.그의 태도는 무섭도록 강경했다.더 이상 육현경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다른 방법이 없었다...“나에게 시간 낭비하지 마요.”육현경은 소이연을 보며 마음이 아팠지만 태연한 듯 말을 뱉었다.“그럴 자격이 나는 없어요.”말을 마치고 그는 그렇게 몸을 돌렸다.소이연은 눈물이 차올라 결국 뺨을 타고 흘렀다.그녀는 자신이 항상 단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의 거절을 태연하게 맞이할 수 있을 줄 알았다.만약 육현경이 그렇게 쉽게 타협한다면 임아영이 그렇게 죽기 살기로 그를 내몰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매번 그의 잔인함을 겪을 때면 소이연은 가슴이 칼로 베인듯 아파왔다...천우진은 큰 보폭으로 쫓아갔다.“육현경!”병원의 복도에서 천우진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육현경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나를 한 대 때리고 싶은가요?”저번에 심문헌은 소이연 때문에 그를 쳤었다.천우진도 그러려고 하는 것인가?그도 그러할 것이 그는 정말 얄미웠다.“나는 그렇게 폭력적이지 않아요.”천우진은 차갑게 말했다.육현경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그냥 말해주고 싶었어요. 선택을 했다면 끝까지 밀고 나가라고.”“알아요.”육현경은 대답을 한 후 자리를 뜨고 임아영의 병실로 향했다.소이연은 휠체어를 끌고 나와 그런 육현경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천우진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돌아보았다.“이길 수 없다고 했잖아.”소이연은 이미 눈물을 추슬렀다. 그녀는 항상 자신에게 독햇다.“그래요. 도와주셔서 참 고맙네요.”소이연은 천우진과 육현경이 한 대화를 들었다.“다 너를 위해서야.”“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어요.”소이연은 뒤를 돌아 자리를 떴다.천우진은 그런 그녀의 휠체어를 잡으며 말했다
소이연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천우진의 걱정을 잘 알았다.육현경과 임아영이 결혼한 뒤 그녀가 계속 육현경에게 매달린다면 임아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를 괴롭힐 것이다.그래서 그녀는 반드시 그들의 결혼을 막아야 한다.이튿날 소이연은 다시 병원으로 찾아갔다.천우진은 그런 그녀의 고집에 감탄했다.어제 금방 그에게 거절을 당해서 기분이 상한 듯 보여도 오늘 다시 그를 찾으러 온 것이다.소이연이 육현경의 병실로 들어설 때 그가 나왔다.그녀를 만나자 육현경은 꽤 놀란 눈치였다.그녀가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다시 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소이연...”“오바하지 말아요. 당신 찾으러 온 것 아니니까.”소이연은 육현경의 말을 끊으며 콧대 높은 표정으로 말했다.그 모습에 육현경은 입술을 깨물었다.천우진은 옆에서 경악했다.오늘부터 막 나가는 것인가?그러나 천우진은 이 방법도 통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마음대로 해요.”육현경은 그 말만 남겨두고 떠났다.“기다려요.”소이연은 그를 불러 세웠다.그 소리에 육현경은 멈칫했다.그녀의 부름에 한 발짝도 걸음을 뗄 수 없었다.할 수만 있다면 그는 소이연을 품 안에 가두고 평생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임아영을 만나러 가는 거죠?”“네.”소이연의 직설적인 물음에 육현경이 답했다.“안 돼요.”육현경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내 말은, 내가 할 말이 있으니까 기다리라고요.”소이연의 사나운 태도에 육현경은 멍해졌다.천우진 또한 깜짝 놀랐다.소이연이 또 무슨 일을 만들려고 하는 거지?직접 겪지 않으면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소이연 같은 냉미인이 남자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다니.육현경을 이기지 못하니 적수에게 반격을 하는 것인가?“밀어줘요.”소이연은 천우진에게 말했|다.천우진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와 소이연을 밀어 멍하게 있는 육현경의 앞을 지나쳐 왔다.“소이연...”“여자들의 싸움에 남자는 끼지 마요!”소이연은 육현경에게 끼여들 기회를 주지
“당연하죠.”임아영은 아무런 주저 없이 대답했다.그녀는 가지고 싶은 걸 놓친 적이 없었다.상대가 누구라도 말이다.“거래를 하지.”소이연은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다.“우리 둘이요?”“응.”임아영은 살짝 망설였다.소이연이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그녀는 겁먹지 않았다.여러 번 그녀와 맞섰을 때 소이연은 항상 졌었다.“그래요.”임아영은 소이연이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 제안을 하는지 궁금했다.“두 분은 나가주세요.”소이연은 육현경과 천우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둘은 미간을 찌푸리며 병실을 나갔다.그렇게 병실 안에는 소이연과 임아영만 남았다.“말해요.”임아영이 소이연을 보며 입을 열었다.“오랫동안 알고 지내면서 나에 대해 충분히 조사했다고 생각해.”“어떤 면에서요?”“모든 면에서.”소이연의 말에 임아영은 입술을 깨물었다.임아영은 항상 상대에 대해 꽤나 깊숙히 조사를 했다.“나에 대해 잘 알거라고 생각하지만 너랑 싸워서 이길 거야.”“나를 협박하는 건가요?”“협박은 아니고 알려주는 거야. 나 그렇게 만만한 상대는 아니야.”“그래서요?”“두 날만 시간을 줘. 나랑 루카스가 만나게...”“절대 안 돼!”임아영은 소이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번에 거절했다.“두 날 뒤에도 루카스가 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게.”소이연은 또박또박 말했다.임아영은 잠시 주저했다.“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면 너희들이 결혼 후에도 내가 가만히 두지는 않을 거야.”임아영은 소이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소이연의 말에 두려움으로 긴장되었다.지금까지 그녀와 이런 ‘불공평한’ 거래를 하려는 사람은 없었다.어렸을 때부터 져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그러나 지금 소이연은 그녀가 손해인 거래를 하려고 하고 있다.무슨 자격으로 그녀의 약혼자와 함께 할 기회를 주겠는가!루카스는 원래 그녀의 남자다. 결혼하든 하지 않든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소이연에게 루카스를 ‘빌려줄’ 이유는 없는 것이다.임아영은 잠
두 사람의 거래가 달성되자 소이연도 더 이상 그 자리에 남아있지 않고 병실을 나갔다.육현경과 천우진은 일정한 보폭을 유지하며 복도를 걸어갔다.서로 가까이하려 하지 않는 게 느껴졌다.특히 천우진은 육현경을 더욱 아니꼬와했다.“얘기 끝났어?”천우진이 먼저 물었다.“네.”“무슨 얘기 했어?”“조금 있다가 알려줄게요. 먼저 돌아가요.”육현경은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그는 매번 묵묵히 소이연의 뒷모습을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루카스.”임아영이 그를 불러세웠다.육현경은 그대로 몸을 돌려 그녀의 병실로 들어섰다.“소이연이 한 얘기가 궁금하지 않아요?”임아영은 그를 바라보았다.소이연이 나타난 후 루카스는 그 전보다 더욱 말이 적었다.그녀의 일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것처럼 말이다.“알려주고 싶으면 알려주겠죠. 내가 묻든 말든.”육현경은 담담히 말했다.임아영처럼 그의 이런 냉담한 태도를 견디는 여자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소이연이 당신을 이틀 빌려 가고 싶다네요. 이 두 날 당신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하면 우리들의 세계에서 빠져주겠다고 하는데요.”육현경의 손가락은 떨려왔다.그는 낮게 물었다.“그래서 허락했어요?”“내가 허락한 걸 눈치챘잖아요?”임아영도 숨기지 않았다.“이 두 날로 우리 앞으로의 평화를 가져오는 거라면 나는 환영이에요.”육현경은 아무 말이 없었다.“루카스,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죠?”임아영은 그윽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당신을 믿기 때문에 허락한 거에요. 나를 실망하게 하지 않을 거죠?”“허락하지 않았어야 했어요.”육현경은 그녀의 물음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아니요, 나는 자신 있어요.”“그럼 나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겠네요.”육현경의 차가운 말에 임아영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녀는 두 날만 버티면 이 모든 게 끝난다고 되뇌었다....차 안.천우진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임아영과 뭘 얘기한 거야? 임아영이 순순히 따르지 않았을 텐데.”“허락했어요.”소이
이튿날 아침.소이연은 육현경에게 전화를 걸었다.카카오톡에서 그녀를 차단을 했기에 전화번호도 차단했을까 봐 그녀는 긴장되었다.다행히도 전화는 통했다.“소이연.”“어제 임아영이 말해줬죠? 이틀은 내 거예요, 당신.”소이연은 자랑스럽게 말했다.핸드폰을 쥐던 육현경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그녀의 것이라…그는 침을 꼴깍 삼켰다.“어디 있어요?”“거부하지 않네요?”“이틀 후에 당신이 평생 따라다니지 않는다면 이것도 괜찮은 거래죠.”차가운 그의 말에 소이연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참았다.“병원 아래에요. 내려와요.”소이연은 자신의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자 육현경은 전화를 내려놓았다.“소이연이 왔대요?”임아영이 물었다.“네.”“이틀이에요. 내일 자정 12시 전엔 반드시 돌아와야 해요.”꽤 중압감이 느껴지는 말투였다.“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결과는 감당해야 할 거예요.”육현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일반적으로 그에게 있어 침묵은 승낙이었다.임아영은 이미 그의 침묵에 익숙해졌다.그녀는 떠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따라붙어. 그리고 실시간으로 상황 보고 해. 그들이 뭘 하고 다니는지.”“네.”지시를 마치며 핸드폰을 내려놓은 그녀의 눈은 살기로 가득했다.소이연이 아무리 난다 긴다 한들 임아영의 상대로는 역부족이었다.…병원 앞.소이연은 발에 깁스를 감은 상태였지만 섹시한 검은 원피스를 입었다.그녀의 모습을 육현경은 힐끗 쳐다보았다.“별로예요?”소이연은 무표정인 육현경을 보며 살짝 서운했다.“아니에요.”육현경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그의 태도는 아까까지 날아갈 것만 같던 그녀의 기분을 망쳤다.소이연은 이를 악물고 화를 참았다.차 안은 조용했다.육현경은 시선을 계속 창밖으로 두었다.“내가 당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궁금하지 않나요?”“내게 선택권이 있나요?”“아니요.”“그럼 물을 이유도 없죠.”육현경은 담담히 답했다.“당신의 뒤통수를 보고 싶지 않아요. 나를 바라봐 줄 수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
백일잔치가 시작되기 전 예수진은 소이연과 친구들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급히 다가왔다.“왜 혼자와?”“그럼 누구랑 와?”“우리 조카는?”“아, 엄마한테 맡겨놨어. 먹고 싸는 것밖에 할 줄 몰라서 재미없어.”“...”“그러는 너는 좀 어때?”“뭐가 어떠냐고?”“네 애 말이야.”예수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의 찻잔이 쨍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아직 파티가 시작되기 전이라 차만 마시고 있던 남자들이었는데 송문수의 손에 들려있던 찻잔이 미끄러지면서 안에 있던 차가 흘러나온 것이다.송문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찻잔을 집어 들더니 휴지로 물기를 닦아내기 시작했다.그 얼굴에서 당황스러움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찻잔을 떨군 건 그저 우연이라는 듯 하도경, 육현경과도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그를 보며 하지수도 입을 열었다.“잘 있지. 전에는 좀 힘들었는데 이젠 잘 먹고 잘 자.”“너 살 좀 찐 것 같아.”“응, 2킬로 넘게 쪘어.”“그럼 됐어.”하지수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던 예수진은 파티가 곧 시작한다는 말에 계지원과 함께 자리를 떴고 그녀가 떠나가 테이블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아마도 얘기를 다 나눈 남자들 때문인 것 같았다.가만히 있기도 뻘쭘했던 하지수가 주전자를 들려 하자 송문수가 빠르게 그녀에게 차를 따라주었다.“고마워.”하지수의 인사에 송문수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한참 동안 둘 사이에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그러다가 결국 송문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너 임신했어?”“응.”“빠르네.”송문수는 의미 없는 웃음으로 자신의 착잡한 마음을 감추려 했다.적어도 결혼한 다음에야 임신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송승우의 아이를 가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인신고만 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송문수는 자신의 생각이 점점 커지는 게 싫어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너 혼자 온 거야? 송승우는?”“서울 갔어.”“몸은 괜찮아졌어?”“응, 의족 해서 이젠 잘 다녀.”오랫동안
예수진은 빠르게 소이연에게 문자를 보냈다.[이연 언니, 송문수 왔어요. 진짜 올 줄은 몰랐는데 방금 안으로 들어갔어요!][내가 진짜 올 거라고 했잖아요.][내 매력이 그 정도일 줄 몰랐죠.]역시나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예수진에 어이없다는 이모티콘을 보내고 난 소이연은 송문수의 인영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하도 큰 키 덕분에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도 우뚝 솟아있는 송문수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문수야.”마찬가지로 그를 알아본 육현경이 인사를 건네자 송문수는 빠르게 그들에게로 다가갔다.“언제 왔어?”“어제 오후에.”“왔는데 왜 말도 안 해? 사업 잘된다고 이젠 우리도 모른 척하는 거야?”“아무리 잘 되봤자 내가 현경이만큼 돈이 많진 않아.”볼멘소리를 하는 하도경에 맞는 말로 반박하자 하도경도 딱히 할 말이 없는지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언제 가?”“모레 비행기야, 내일 집 가서 부모님만 뵙고 가려고.”“그래서 우리 만날 시간은 없다 이거지?”“이번엔 시간이 좀 빠듯해, 거기 일도 많고. 오늘 보지 뭐, 술 제대로 마시자 한번.”“너 진짜 많이 변했어 송문수, 이렇게 진지하진 말아 줄래?”적응되지 않는 송문수의 말투에 하도경이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그럼 어쩌라고.”“나는...”판을 깔아주니 말하기 어려웠는지 하도경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술 마셔 그냥.”“그래.”또 무슨 바람이 분 건지 둘은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파티의 주인공이 자리하기도 전에 술부터 마시기 시작했다.육현경이 그런 그들을 말리려 할 때 송문수의 옆에 문득 한 여자가 앉았다.그에 술잔을 들고 있던 송문수도 잠시 멈칫했다.굳이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아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을 주며 술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송문수를 한번 보던 소이연은 하지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지수 씨, 왔어요?”“네.”“혼자예요?”“네.”혼자라는 말에 송문수의 손은 아까보다 더 하얗게 질려버렸다.“혼자니까 더 조심해요 다닐 때.”“그
그로부터 반년이 지나서야 송문수는 마침내 국내로 돌아올 수 있었다.캐나다에 있는 회사도 이제 정상적으로 흘러가자 귀국한 거였지만 그도 그냥 예수진 아들의 백일을 축하하러 온 것뿐이었다.시간이 어찌나 빠른지 송문수가 나갈 때까지만 해도 배가 부른 채로 있던 예수진이 벌써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백일까지 맞이하게 된 것이다.오랜만에 온 장안시였지만 송문수는 자신의 귀국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저 본인의 집으로 향했다.오랫동안 비워둔 집이라 그런지 온통 먼지투성이여서 일단 도우미부터 부른 송문수는 아주머니가 정리를 마친 다음에야 침대에 몸을 뉘일 수 있었다.떠나기 전만 해도 이곳에서 사랑하던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는데.이제는 그 모든 게 다시는 들춰선 안 될 과거가 돼버린 것 같았다.해외에 있던 시간 동안 송문수는 부단히 하지수를 잊으려 애쓰고 있었다.물론 정말 잊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하지만 하지수와 송문수가 반년 동안 연락을 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었다.부모님과 영상통화를 할 때도 같은 집에 살던 하지수는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그저 우연히 한 번, 그녀의 뒷모습이 화면에 스친 게 전부였다.몸을 뒤척이던 송문수는 내일의 백일잔치에 대해 생각했다.내일 가면 친구들이 무조건 술을 권할 텐데, 오랫동안 술을 마시지 않은 탓에 송문수는 지금 자신의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그래도 푹 쉬면 조금은 낫겠지 싶어 그대로 잠을 청한 송문수는 이튿날 아침이 돼서야 눈을 떴다.언제부턴지 부모님처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배어버린 탓에 송문수는 이젠 밤을 새우는 게 오히려 힘겨웠다.그렇게 여유롭게 준비를 마친 그는 한 번 더 깔끔하게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선물을 한 아름 안고 집을 나섰다.너무 이르지도 않고 너무 늦지도 않은 딱 적당한 시각에 집을 나선 그는 문득 옛날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을 지었다.예전에는 어쩜 그리 특이하게 살아왔는지, 참으로 유치했던 것 같다.해외에서 반년 동안 혼자 살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