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따라가 볼게요.”하도경은 급히 소파에서 일어나 계지원을 쫓아갔다.육가희도 한마디 하려다 입을 닫고 침묵했다.육가희는 하도경이 자기보다 항상 먼저 주위 사람들을 챙긴다는 생각이 들었다....하도경은 운전을 해 계지원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돌아가는 차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하도경이 차 안의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아까 수진이 말로는 너랑 다시 만나는 게 아니라고 했어.”“응.”“아직 다시 만나는 것도 아닌데 오늘 아주머니랑은 왜 그렇게 다툰 거야?”하도원은 오늘의 계지원의 행동이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종래로 드러내지 않던 계지원이 오늘처럼 흥분했던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계지원이 하도경에게 물었다.“누나가 수진이를 평등하게 대한다고 생각해?”“아니.”“나도 많이 참았어.”“하지만 아주머니 입장에서는...”하도경은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그래, 나도 사실 오늘 아주 속시원했어, 나도 많이 참았거든. 솔직히 말해서 아주머니랑 수진이 다 같은 피해자잖아! 왜 자꾸 자신의 고통을 수진이 탓으로 돌리려는지 모르겠어. 가희 씨 어머니만 아니었다면 나도 진작에 연락 끊었을 거야.”“응.”계지원은 담담하게 답했다.창밖을 바라보는 계지원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듯 얼굴색이 점점 어두워졌다.하도경이 다시 물었다.“너 아직 수진이 좋아하지?”계지원의 목젖이 미세하게 떨렸고 하도경은 차를 계속 몰면서 담담하게 말했다.“수진이는 자기가 날 별로 좋아하지 않고 나랑 있는 시간이 부담스러워서 지원이 너랑 다시 만나는 연기를 했다고 하던데.”계지원은 하도경의 말에도 계속 침묵했다.그의 침묵은 사실 묵인이었다.“그럼, 왜 수진이를 계속 밀어내는 거야? 수진이랑 내가 만나고 나서야 네 마음을알았다고 하지는 마! 너 처음부터 수진이를 좋아한 거잖아? 사실 전에 너랑 수진이랑 육씨 가문 집 앞에서 키스하는 걸 봤어.”창밖만 응시하던 계지원이 고개를 돌려 하도경을 봤다.하도경은
차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계지원은 줄곧 입을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도경도 계지원이 자발적으로 털어놓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도 말하기 꺼린 집안 사정이 있을 테니까 말이다.한참이 지나서야, 하도경이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말했다.“그동안 어찌 됐든, 이제 수진이가 돌아왔으니 알아야 할 건 알고 넘어가. 인생 생각보다 많이 짧아, 한번 놓치면 평생 후회할 거야.”계지원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하도경, 내가 지금 수진이를 무슨 자격으로 잡겠어?”“네가 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나 다리 한쪽 병신 됐어.”계지원의 감정이 요동치는 게 확연하게 느껴졌다.“수진이가 사라진 지 3년이 지났어도 네가 수진이를 찾아 나서지 않은 게 아픈 다리 때문이라고는 하지 마.”계지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넌 수진이가 이렇게 얄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해?”흥분한 하도경이 말을 덧붙였다.“오히려 오늘 수진이를 데려다 줄 때, 수진이가 너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된 것도 모르고 단순한 골절상 정도로만 알고 있었어.”계지원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하도경은 서둘러 말을 이어나갔다.“물론 조금 의외였지만, 네가 한쪽 다리 못 쓰는 거에 대해 큰 거부감은 보이지 않았어. 난 수진이가 얄팍한 사람이라고는 생각 안 해.”“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내가 그 사람한테 맞는 사람인지, 내가 그 사람 옆에 있을 자격이 있는지 자꾸 나 자신을 의심하게 돼.”계지원이 처음으로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놨다.하도경은 계지원이 예수진을 사랑하고 있고 지금 열등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음을 확신했다.하도경은 당당하지 못한 계지원이 너무 답답했다.“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수진이가 너의 맘을 받아줄지 안 줄지 어떻게 알아?”하도경은 계지원이 예수진이 좋으면 거절을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그녀에게 대시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예수진이 좋아하는 사람이 계지원이라는 걸 알았을 때 자신조차도 지질
계지원은 예수진의 생활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다시 내려놓았다....서울.천제진은 병실에 누워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의 담당 전문의는 식물인간으로 살아갈 확률도 있지만,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르다고 했다.소이연은 육민이를 데리고 천제진을 보러 병원에 갔다.병원에 도착한 후, 병원 무균복으로 갈아입은 소이연은 혼자 중환자실로 들어갔다.소이연은 병실에 누워있는 천제진이 너무 편하게 누워있어 그의 몸에 파이프만 꽂혀 있지 않으면 그냥 곤히 잠자는 것 같았다.소이연은 울먹이면서 말했다.“할아버지 오랜만이에요, 의사 선생님이 곁에서 자주 말을 걸어주면 깨어날 수도 있다고 해서 뵈러 왔어요.”소이연은 살아오면서 자기가 감정 조절에 능한 사람이라 여겼고, 차분했던 자신이 입을 열자마자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펑펑 쏟을 줄 생각도 못 했다.소이연은 그녀가 사랑했던 엄마를 떠나보내고, 이젠 외할아버지를 떠나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문득 두려워졌다.한동안 침묵하던 소이연이 다시 말을 꺼냈다.“제가 외손녀라고 찾아와서 얘기한 날, 당시 엄마가 왜 집을 나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할아버지 탓이라고 생각해서 너무 미웠어요.”“엄마가 떠난 이유를 알아내고 복수하고 싶었던 마음에 할아버지가 미웠으면서도 만남을 거절하지 않은 거예요.”소이연은 수년간 억눈렀던 마음을 털어놓았다.“마음 같아서는 모든 걸 엎어버리고 싶었지만, 날 보면서 미소를 짓는 할아버지를 보고 진실을 마주하기가 너무 두려웠어요. 그리고 할아버지를 진심으로 미워할 수가 없었어요.”소이연은 말하면서도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복수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할아버지한테 의지하다니 너무 웃기지 않나요?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점점 할아버지의 존재와 저한테서 천씨 집안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그 이후로는 엄마가 떠난 이유도 조사하지 않았어요.”소이연은 의식이 없이 누워있는 천제진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깨어나기를 바랐다.소이연의 바람과는 달리 천제진은 아무런 반응이
천우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변호사님 쪽은 안 통하는 것 같아요.”소이연이 답했다.“그럴지도 몰라요. 계좌에서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으니, 사람을 시켜서 미행하는 건 어때요? 변호사가 그 사람이랑 앞으로 연락 안 한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전 변호사가 이렇게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 한 행동이라면 이익 이외에 감정적인 관계가 얽혀 있을 거라 봐요.”천우진은 주저하지 않고 단번에 승낙했다.“알겠어요, 일단은 몰래 사람을 시켜서 미행하고 단서를 찾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뒷조사도 같이 해볼게요.”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 사실 간단한 방법이 생각났어요.”“절대 간단한 방법이 아닐 것 같은데요.”냉정하고도 치밀한 소이연이 심사숙고해서 생각해 낸 방법이란 걸 아는 천우진이 웃으면서 말했다.소이연은 천우진에게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놨다.“우리 경찰에 신고하는 건 어때요?”천우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아직은 너무 경솔한 행동이 아닐까요?”“지금처럼 아무런 돌파구가 없는 상황에서 상대를 패닉에 빠뜨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같아요.”“그래도 그건 위험해요, 더 경계할 수 있잖아요.”“그래서 연기가 필요한 거죠.”천우진은 심각한 표정으로 소이연을 바라보았다.사실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호텔에 도착한 소이연은 육민이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소이연은 빠른 속도로 달려가서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문을 잡고 들어서려던 순간, 엘리베이터 안에서 휠체어에 앉아있는 루카스를 보았다.소이연은 루카스와의 사이는 정말 악연이 아닐까 하는 생각하면서 엘리베이터에 탔다.루카스 또한 이제는 이 호텔에 묵지 않을 것 같았던 소이연의 등장에 놀랐다.소이연도 입원한 루카스가 돌봐줄 사람이 필요한데 임씨 가문에서 지내지 않고 호텔에 투숙하고 있는 이유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자리를 빨리 뜨고 싶은 소이연과는 달리 육민이는 기분이 좋은 듯 루카스에게 다가가 물
육민이는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예전에 육민이의 아빠는 그를 어린아이로만 여겼을 뿐, 친구처럼 편하게 지냈던 적이 없었다.육민이는 사실 한동안 아빠의 인정을 받고 싶었지만, 너무 대단한 아빠 앞에서 엄마를 즐겁게 해주는 걸 빼고는 내세울 만한 것이 없어서 서러웠다.루카스가 태연하게 말했다.“그렇지 않으면?”“그럼 이따 방으로 놀러 갈게요.”“그래, 기다릴게.”소이연이 한마디도 끼어들지 못한 채 약속을 한 두 사람은 서로의 방으로 향했다.방으로 들어오자, 육민이는 바로 자리를 뜨려고 하면서 말했다.“엄마, 빨리 루카스한테 가서 놀아요.”마침내 합리적인 핑계를 찾은 소이연이 말했다.“엄마는 네가 낯선 곳에 혼자 가는 게 마음에 걸려.”“루카스는 낯선 사람이 아니라 아빠잖아요.”육민이는 단호하게 이어 말했다.“좋아요, 아직은 아빠가 아니지만, 전에도 여러 번 만났는데 낯선 사람이 아닌 건 맞잖아요.”“나쁜 사람들이 갖은 수법으로 어린이를 유괴하는 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엄마, 루카스가 아무리 나쁘다고 해도 인신매매범은 아니잖아요.”육민은 소이연의 말이 너무 어이없었다.“아무튼 너 혼자 가면 엄마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저 휴대폰 챙겼어요, 위험한 일 있으면 전화할게요.”“위험한 일이 닥쳤는데 무슨 정신에 엄마한테 전화한다고 그러는 거야?”“아무도 발견할 수 없는 옷 안 깊숙한 곳에 엄마가 주문 제작해서 준 위치추적기도 챙겼어요, 언제든지 제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어요.”육민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엄마가 준 헬프키트도 언제든지 누를 수 있도록 바지 주머니에 넣었고, 엄마가 저의 일거수일투족을 볼 수 있도록 초소형 감시 카메라도 제 옷깃에 걸었어요.”육민의 연이은 말과 몸짓에 소이연은 말을 잇지 못하고 그냥 바라만 볼 뿐이다.앞서 일어났던 사고로 소이연은 육민을 철저하게 보호했고 여러 가지 안전장치도 주문 제작했지만, 열 살이니만큼 사생활도 있다고 생각해서 육민이에게 강요하지 않았는데 루카스한테 가기 위해 스스
카메라와 연결된 앱을 켠 소이연은 루카스가 육민이의 도움을 받으면서 목욕하는 장면이 나오자 깜짝 놀라 다급하게 화면을 꺼버렸다.‘내 아들을 뭐로 보는 거야! 감히 민이를 부려 먹다니! 어린애 앞에서 벌거벗고 샤워를 하는 게 부끄럽지도 않은가.’화면을 다급하게 꺼버린 것과 달리, 소이연의 머릿속에는 그 장면이 너무 선명하게 떠올랐다.분노와 수줍음으로 상기되었던 얼굴이 서서히 돌아오자, 소이연은 아까 보았던 루카스의 모습이 너무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두 손을 떨며 다시 카메라 앱을 켰다.하지만 루카스가 이미 가운을 입고 육민이의 도움으로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소이연은 평소 루카스의 외모, 성격, 몸매가 믿기지 않게 육현경과 똑같다고 느꼈지만, 기대한 만큼 크게 실망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의 마음을 다잡아 왔다. 하지만 은밀한 곳까지 똑 닮은 루카스를 보는 순간, 그녀의 가슴은 미친 듯이 빨리 뛰었다.소이연은 망설임 없이 방을 뛰쳐나와 루카스의 방으로 향했다.육민이가 소이연에게 방문을 열어주었다.갑자기 등장한 소이연때문에 긴장한 육민이는 급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엄마, 저 괜찮아요. 그냥 루카스가 샤워하는 걸 도와주다 늦은 거예요.”한 쪽 다리가 불편한 루카스가 혼자 샤워하겠다고 하자, 걱정되었던 육민이 극구 사양하는 그를 도와주겠다고 따라나섰고 루카스도 소이연이 걱정할까 봐 엄청난 속도로 샤워를 끝냈었다.하지만 소이연은 육민이의 설명도 듣지 않고 무작정 방으로 들어갔다.처음으로 소이연에게 무시당한 육민이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자신의 엄마가 다짜고짜 루카스를 향해 화를 낼 것만 같아 바로 쫓아 들어갔다.하지만 뒤쫓아 들어온 육민이는 루카스의 가운을 헤치는 소이연을 보았다.당황한 루카스가 멍한 상태로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긴장한 채 루카스의 몸을 바라보는 소이연의 심장 박동은 빨라지고 손도 떨렸다.소이연이 아픈 루카스를 돌봐줬던 날, 그의 몸을 닦아줄 때도 아무런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지금 이 순간...그
루카스가 이를 갈며 말했다.“너 변태야?”루카스는 소이연이 육민이의 앞에서 자기 바지를 벗기려 하자 엄청나게 놀랐다.육민이도 보면 안 될 걸 뻔히 알면서 궁금한지 눈을 떼지 못했다.‘정신 차리고 빨리 소이연의 행동을 막아야 해!’루카스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정신을 가다듬었다.그때였을까. 소이연도 자신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것 같았다.그냥 진실을 알고 싶어서 한 행동이, 자신이 거절했던 루카스를 추행하는 짓이었기 때문이다.“귀신 들렸어?”루카스가 소이연을 힘껏 밀어냈지만,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소이연은 루카스와 육현경이 같은 사람인지 너무 확인하고 싶었다.소이연에게 있어서 육현경은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는 존재였다.고통은 그녀를 더욱 단호하게 만들었고 바지를 잡은 손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루카스는 분노가 섞인 얼굴을 하고 다시 말했다.“소이연, 그만해! 민이도 있는데 이게 무슨 짓이야!”육민이 다급하게 말했다.“저 아무것도 못 봤어요.”육민이는 소이연의 행동이 궁금하고 의아했지만, 두 사람을 이어주기 위해 궁금증을 참고 잽싸게 달아났다.떠날 때는 방문을 닫아주는 자상함도 보였다.육민이는 집안이 시끌벅적해지게 동생이 생겼으면 했다.육민이가 떠나고 난 뒤, 방안은 조용했다.루카스는 필사적으로 자기 바지를 감쌌고, 소이연 또한 계속 손을 놓지 않았다.그는 엽기적인 행동을 하는 소이연이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소이연, 정신 차려!”“나 멀쩡해.”소이연은 똑바로 말했다.“정신 멀쩡하면 빨리 이거 놔줘...”소이연이 루카스의 말을 끊었다.“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하고 싶어.”당황한 나머지 루카스는 하마터면 사레가 들려 죽을 뻔했다.‘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지? 소이연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고?’루카스는 자신을 싫어하고, 간호하면서 몸을 닦았던 수건조차 버렸던 소이연이 갑자기 자기 몸을 보고 싶다고 하니, 그녀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소이연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이어
루카스는 소이연이 강제 키스를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가 한 손으로 자기 바지를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 소이연을 밀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그녀의 키스는 너무나 거칠고 무모했다.전에 루카스가 화를 참지 못하고 소이연에게 키스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루카스의 몸은 조금씩 뜨거워졌고 말할 수 없는 설렘이 그로 하여금 소이연을 밀어내고 싶지 않게 만들었다.하지만 여자 친구가 있는 루카스에게 이 행동은 자신의 신념과 도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이 여자한테 유혹되어서는 안 돼!’루카스는 간신히 자신을 진정시키고 타일렀다.루카스가 소이연을 밀어내려는 순간, 대담한 그녀의 손이 옷 속으로 들어왔다.평소 10미터 밖에서부터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얼음장처럼 차갑던 그녀가 불덩이처럼 뜨겁게 행동하니, 루카스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정신도 혼미해졌다.하지만 그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두 손을 뻗어 힘껏 소이연을 밀쳐냈다.그러자 무방비 상태였던 소이연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루카스는 서둘러 소이연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그 순간, 눈빛이 뚜렷하게 변한 소이연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아래를 내려다본 루카스는 그녀에게 당했다는 걸 알았다.루카스의 바지를 쉽게 벗길 수 없다고 생각한 소이연이 그가 자신을 밀치게 하려고 일부러 키스했기 때문이다.‘음흉한 여자 같으니라고!’루카스는 손으로 자기 몸을 덥석 감싸며 말했다.“소이연, 너 진짜 변태야!”소이연은 바보가 된 것처럼 바닥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루카스가 아무리 빨리 몸을 가렸지만,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그의 몸이 육현경과 똑같다는걸.‘다른 곳은 다 변해도, 여긴 변할 수가 없잖아.’하지만 소이연의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정말 그녀를 모르는 눈치였다.소이연은 루카스가 시치미를 떼는 게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섬뜩한 생각이 갑자기 소이연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