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봐도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어디서 본 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꼬마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몹시 예쁘장하게 생겼다. 연예계에서 수많은 꼬마 연예인들을 봤지만, 이렇게 예쁜 아이는 처음 본 것 같았다.그는 마치 한눈에 이미 그녀에게 어떤 배역을 줄지 생각이 난 것 같았다. “아빠!”대답을 듣지 못한 꼬마는 또 한 번 말했다.그러자 계지원은 웃으며 몸을 숙였다.비록 지팡이를 짚어서 불편하긴 했지만, 그는 최대한 여자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고 말했다. “꼬마야, 지금 날 부르는 거니?”“네.” 하연이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심지어는 그대로 계지원의 품에 안겼다.계지원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이 느낌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느낌이 그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였다.그는 살짝 아이를 밀쳐냈다.그러자 하연이는 동그란 눈으로 그를 보며 상처받은 듯한 얼굴로 말했다. “아빠는 제가 미워서 밀어내는 거예요?”“아니야...” 계지원이 급히 말했다.이렇게 억울해하는 꼬마의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를 연예계로 데려가면 어떤 작품이라도 다 잘 될 것 같았다.“네가 사람을 잘 못 본 것 같아. 난 네 아빠가 아니야.”“왜 아니에요?” 하연이가 그에게 되물었다.이 말을 들은 계지원은 멍해졌다.3살짜리 꼬마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아빠가 안 계시니?” 계지원은 착하고 부드럽게 물었다.“있어요.” 하연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 있잖아요.”“......” 계지원은 당황했다. “아빠, 아빠 다리 다쳐서 저랑 엄마 안 찾아온 거 아니에요?” 하연이는 그가 지팡이를 짚고 있는 모습을 보고 진지하게 물었다.“꼬마야, 난 네 아빠가 아니야. 사람 잘 못 봤어.” 계지원은 어이가 없었지만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오늘 누구랑 밥 먹으러 왔어? 엄마? 아니면 다른 사람? 내가 데려다줄까?”그리고 설명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가족들에게 데려다주면 가족들이 당연히 설명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엄마랑 밥
예수진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녀가 언제 TV에 나온 그 누군가에게 그녀의 아빠라고 했는가?!“제가 보여줄게요.” 하연이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급히 엄마를 데리고 나가 아빠를 찾기 시작했다.예수진은 하연이에게 끌려가 남자 화장실에 들어갔다.그녀는 급히 하연이를 안아들고 말했다. “하연아, 여자는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면 안 돼.”“하지만 아빠가 안에 있어요.”“너 아빠가 어디 있다고?” 예수진은 어이가 없었다.그녀는 하연이를 안고 나가며 말했다.“유치원 친구들은 다 아빠가 있는데, 전 왜 없어요?” 하연이가 그녀에게 물었다.“...... 너도 없는 건 아니야. 그냥 아빠가 명이 짧아서 조금 일찍 돌아가신 것뿐이지.” 예수진은 말을 지어냈다.“근데 방금 진짜 아빠 봤다고요!” 하연이는 작은 미간을 찌푸리며 조금 화를 냈다.예수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정말 하연이의 돌발행동이라고만 생각했다.3살짜리 꼬마니까 가끔 예상 밖의 생각을 하는 것도 정상적인 일이다. 예수진은 하연이를 안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하연이는 아직 그 일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엄마가 못 믿는 것 같으니, 큰 소리로 할머니에게도말했다. “할머니, 저 방금 아빠 봤어요.”가연은 조금 놀라 말했다. “아빠?”무슨 아빠?!그녀 역시 하연이의 아빠가 누군지 모르고 있는데ㅊ고작 3살짜리 하연이가 자기 아빠가 누군지 어떻게 알지?가연은 고개를 돌려 예수진을 보았다.“하연이가 그냥 아무렇게나 말하는 거예요.” 예수진은 여전히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그러자 하연이는 조금 화가 나서 말했다. “저 아무렇게나 말한 거 아니에요. 못 믿겠으면 제가 데려가서 보여줄게요.”하연이는 예수진을 끌고 아빠를 찾으러 가려고 의자 위에 올라섰다.예수진은 당연히 가고 싶지 않았지만 하연이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기에 하연이를 따라 두 걸음 걸어갔다.딱 두 걸음만에 그녀는 급히 몸을 돌렸다.계지원이 보였기 때문이다.설마, 오늘 회식 장소가 여기인가?더 분위기
예수진은 머리를 짜내도 도대체 언제 하연이에게 계지원이 아빠라는 말을 했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하지만 이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지금 당장 하연이를 데리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불필요한 귀찮은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때, 직원이 주문한 음식을 가지고 왔다.그 모습을 본 예수진은 바로 직원에게 말했다. “혹시 포장되나요?”“네?” 직원은 멍해져 말했다. “손님, 저희는 포장말고 배달이 가능하긴 합니다. 다만 별도의 배송비를 지불하셔야 합니다......”“네.” 예수진은 급히 지폐를 꺼내 직원에게 건넸다. “이 주소로 부탁드려요.”“네.” 직원은 가져온 음식을 다시 가지고 갔다.“엄마, 저희 가요?” 하연이는 놀라서 물었다.“응, 가자.”“왜요? 싫어요. 저 생일파티해야 되는데…. 엄마 미워…!” 하연이는 바로 기분이 상해 버렸다.겨우 생일파티를 하려던 참인데 절대 안 가.“착하지 하연아. 집에 가서 엄마랑 같이 생일파티하자. 엄마가 엄청 크고 예쁜 케이크 사줄게. 응?”“싫어요. 하연이는 아빠랑도 같이 할 거예요.” 말을 하면서 하연이는 의자 위에 올라서서 계지원을 찾고 있었다.그 순간 예수진은 놀라서 얼굴까지 창백해졌다.그녀는 급히 하연이를 안아 들었다.하연이는 작은 손과 발로 반항을 했는데,억울한 얼굴로 눈시울이 붉어진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엄마 진짜 미워......”“착하지. 엄마가 집에 가서 생일파티해줄게. 응? 뭐 가지고 싶은 장난감 있어? 엄마가 사줄까?”“아빠 가지고 싶어요.”“그 사람은 정말로 아빠 아니야.” 예수진은 엄숙하게 말했다.“엉엉….” 하연이는 큰 소리로 울었다.예수진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하연이의 울고 싶을 때 우는 이 능력은 연예계에 발 들이지 않는 게 아까울 정도였다.그러자 그녀는 주변의 많은 손님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고급 레스토랑이라서 작은 소리도 아주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진도 하연이의 나쁜 버릇을 받아주지 않았다.원칙상으로 참
“엄마.” 그녀는 온 얼굴에 거품을 묻히고 흥분한 채 말했다.예수진은 그녀를 살살 닦아주었다.“엄마, 다음에는 아빠 불러서 같이 씻으면 안 돼요?” 하연이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말했다.“......”아빠 얘기 좀 그만할 수 없는 건가..하연이의 말에 예수진은 거품 목욕으로 좋아진 기분이 싹 사라졌다.그녀는 하연이를 욕조에서 꺼내 깨끗이 씻기고 잠을 청했고, 예수진은 옆에서 왕자와 공주 이야기를 해주었다.“엄마, 다음에는 아빠한테 해달라고 하면 안 돼요? 저 아빠가 해주는 옛날이야기 듣고 싶어요.” 하연이는 하품을 하며 예수진에게 물었다.“......”도대체 몇 번을 더 얘기해야 할까. 아빠가 없다고.다행히 하연이는 지쳤는지 곧바로 잠이 들었는데, 잠에 들어서도 계속 중얼거렸다. “아빠..... 아빠...”예수진은 정말 어아가 없었다.그녀는 하연이에게 이불을 잘 덮어주고 거실로 가 물을 마셨고, 가연은 그들이 할 일을 다 끝낸 것을 보고는 방을 정리했다. 집에 아이가 있으니 집은 항상 엉망이었고, 가연은 모두 잠에 들면 정리를 시작했다.예전에 예수진이 가정부를 부르자는 얘기도 했었지만, 가연이 모두 거절했다.가연은 혼자서도 다 할 수 있다고 했다.사실 예수진도 가연이 돈을 아까워하고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3년 동안, 예수진은 수중에 남는 돈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가만히 앉아서 놀고먹기만 하고,힘들게 벌어서 본전도 못 찾고 실패할까 봐 두려워 투자도 쉽게 할 수 없었다.밖에 나가서 일을 하기에는 사람들이 알아보거나 잘못이라도 할까 봐 못 했고, 게다가 하연이도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다.“일찍 주무세요.” 예수진은 물을 마시며 냉담하게 말했다.“곧 잘 거야.” 가연도 급히 말했다.그녀에게는 항상 조심스러웠다.예수진은 답답했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연은 정리를 다 끝낸 뒤, 마치 한참을 고민했다는 듯 말했다. “오늘 하연이가 아빠를 본 거야?”“켁, 켁.”그녀의 갑작스러운 물은에 예수진은 그만 사레
가연은 지금 돌이켜보면 뭔가 아쉬웠다. 그때 왜 예수진과 더 같이 있지 않고 설거지를 하러 갔는지 말이다. 하연이의 친아빠가 누군지 놓쳤어!이제 하연이에게 설명하려고 해도 못 알아들을 것 같았다.예수진의 모습을 보니, 아마 정말 하연이에게 아빠가 누군지 알려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때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예수진은 휴대폰 화면을 보고 받을지 말지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전화를 받았다. “수진 씨, 어디예요?”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유청하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있었다.“왜요?”“일 다 끝났죠?” 그쪽에서 물었다.“음......” 예수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경험상, 유청하는 나와서 술을 먹자고 할 것이다.역시 아니나 다를까.“노래방으로 와요. 우리 이제 2차 왔어요.” 유청하는 들뜬 목소리로 같이 만나자면 권했다. “전 그냥 안 갈게요......”“아무리 대단한 일이라도 얼굴은 비춰야죠. 계 감독님도 아직 안 갔어요. 혼자만 안 오는 게 말이 돼요?빨리 와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제가 주소 보내줄게요.” 말이 끝나자마자 전화는 끊겼다.곧이어 유청하의 메시지가 왔다. GPS 정보였다.예수진은 정말 도저히 가고 싶지 않아 고민이 되었다.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갔는데 자신만 안 간다면...... 너무 마음대로인 것 같았다.중요한 건 지금 그녀는 마음대로 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이다.그녀는 계지원에게 미움받을 것이 두려운 게 아니다. 어차피 계지원과는 이미 이렇게 된 사이니까......그녀는 그저 다른 배우들과 거리가 생기는 것이 싫었다. 마치 그녀가 스스로 잘난 듯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연예계에서는 인맥이 가장 중요한 법이다. 특히 투명하게 드러나는 자리에서는 더더욱!결국 예수진은 타협했다.하연이도 잠들었고, 비록 완벽하진 않지만 하연이에게 이미 생일 파티도 해준 셈이었다.그녀는 물컵을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고 나가려고 했다.“다시 나가려고?” 가연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물었다.“네, 친
압도적인 차이로 경기에서 우승했다.예수진은 잔에 술을 가득 채우고 계지원에게 술을 권하면서 말했다.“감독님, 제가 너무 늦었죠? 죄송한 마음을 담아 제가 먼저 원샷 할게요.”건배사가 끝나기 무섭게 예수진은 술잔을 비웠다.계지원은 그런 예수진을 한번 바라보고 잔을 들어 같이 원샷을 했다.예수진이 기억하는 계지원은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 아니었다.‘몇 년 사이에 술이 는 건가.’하지만 이 또한 그녀의 큰 관심사는 아니었다.잔을 비우고 나서 계지원이 물었다.“오늘 일 있다고 하지 않았어?”예수진은 그 어떠한 설명도 없이 간단하게 답했다.“다 처리했어.”“응, 그래.”계지원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유청하의 손에 이끌려 다른 사람들과 술을 마셨다.술자리에 늦게 합류한 예수진은 술을 거부하기는커녕 사람들과 건배하면서 계속 술을 마셨다.이미 다들 취한 상태라, 그 누구도 술을 거부하지 않고 채워진 술잔을 비웠다.건배하고 마시기를 반복한 지 1시간도 안 돼서 다들 인사불성이 되었다.여기저기서 토하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술자리는 이렇게 끝이 났다.예수진은 사람들의 과분한 총애에 기뻤지만, 마음 한편의 불안감을 떨칠 수는 없었다.요즘 라는 예능도 인기 급상승 중이라 혹여나 연예인이 인사불성이 된 사진을 찍히면 안 된다고 생각한 예수진은 술자리에 남아있던 사람들에게 택시를 불러주면서 배웅까지 했다.다들 배웅하고 나서야 예수진은 룸에 가방을 두고 나온 것이 생각나서 서둘러 가지러 갔다.룸 안에 들어가자, 화장실에서 목이 찢어질 듯한 구토 소리가 들렸다.‘아직 누가 안 갔지?’다들 안전하게 배웅을 해줬다고 생각한 예수진은 의혹을 품은 채 화장실로 향했다.그 안에는 계지원이 변기에 축 늘어진 채 힘들게 구토하고 있었다.회식이 끝날 때쯤 계지원이 보이지 않자, 그가 일찍 자리를 떠난 거로 생각했다.감독으로서 힘들면 중도에 빠져나갈 수도 있고, 매니저가 데리러 올 수도 있는
예수진이 다급하게 물었다.“괜찮아?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그녀는 미친 듯이 뛰고 있는 계지원의 심장 소리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아니야, 괜찮아.”계지원은 간신히 목소리를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술을 많이 마셔서 그래.”“심장이 이렇게 빨리 뛰는데 심근경색이나 뇌출혈이 올 수도 있단 말이야.”진지한 표정을 하면서 말하고 있는 예수진을 보며 계지원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넌 내가 죽기를 얼마나 바라고 있는거야?”“...”예수진은 그를 저주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다 큰 어른이 자기 몸 정도는 추스를 수 있다고 생각한 예수진은 계지원에게 더 이상의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휴대폰 어디 있어? 매니저한테 너 데리러 오라고 연락할게.”“바지 주머니에 있을걸.”예수진은 술에 취해서 미동도 없는 계지원을 답답하고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다 직접 그의 바지 주머니를 뒤졌지만, 양쪽 주머니에 휴대폰은 없었다.“장난해?”예수진의 생각지도 못한 터치에 계지원의 얼굴은 화끈거리며 붉어졌다.하지만 술기운에 얼굴이 이미 붉어진 상태였던 계지원이기에 예수진은 차마 눈치채지 못했다.계지원이 붉어진 얼굴을 하고 되물었다.“없어? 어디 갔지?”예수진은 계지원의 상의 주머니도 샅샅이 뒤졌지만, 휴대폰은 없었다.‘밖에 있는 거 아니야?’예수진이 밖에 나가려고 부축하고 있던 몸을 일으키는 순간, 계지원은 힘없이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다.예수진은 다급히 그를 다시 안으면서 부축했다.그녀의 행동에 계지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예수진은 무거운 계지원을 부축한 상태에서 화장실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는 지팡이를 집어 들기에는 너무 무리라고 생각하고는 물었다.“지팡이 없이 걸을 수 있겠어?”“응, 괜찮아.”계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내가 부축해 줄 테니까 일단 여기서 나가자.”“고마워.”예수진은 힘겹게 계지원을 부축해 화장실에서 빠져나와 그를 소파에 앉혔다.그러고 나서 다시 화장실로 향해 바닥에 있던 지팡이를 들고나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계지원은 토하지도 않고 조용하게 있었다.목적지에 도착하자 예수진은 택시 기사님에게 돈을 내고 계지원을 부축해 차에서 내린 후 물었다.“혼자 들어갈 수 있지?”계지원은 몸을 휘청거리며 말했다.“모르겠어.”그의 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수진도 알아챘다.계지원은 남을 귀찮게 하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정작 또 신경이 쓰이게 만드는 사람이었다.예수진은 이를 악물고 또다시 계지원을 부축해 그를 집까지 바래다줬다.그가 사는 집도, 장안시에 위치한 부자 동네였다.대문을 열자, 끝도 없이 펼쳐진 대평층에 통창 유리가 270도로 둘러싸여 있어 사치스러우면서도 뻥 뚫린 시원한 느낌을 줬다. 럭셔리한 곳에, 오랜만에 온 예수진은 저도 모르게 몇 번 더 집안 곳곳에 눈길을 주면서 속으로 감탄했다. 한때 코웃음을 치면서 봐왔던 곳이 지금의 그녀에게는 꿈만 같은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계지원을 부축해서 그의 초호화 침실로 향했다.방안에 들어오자마자, 계지원은 속이 울렁거린다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토하기 시작했다. 의식적으로 그녀의 옷에 토하지 않으려고 몸을 비틀었지만, 그의 노력과는 달리 그녀의 옷에는 구토 자국으로 얼룩졌다.토를 다하고 나서 계지원은 죄를 지은 사람처럼 조용하게 있었다.‘뭐야? 서른도 넘은 사람이 융통성 없게 이게 뭐 하는 짓이란 말이야.’속이 울렁거린다고 미리 말했으면 그를 먼저 화장실로 데려갈 수도 있었는데, 이런 꼴을 하고 택시를 잡고 집 갈 생각을 하니 예수진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일부러 그러려던 게 아니야.”계지원이 사과했다.그의 사과에 더 이상 욕하기도 민망해진 예수진은 화를 삼키며 물었다.“아직도 속이 울렁거려?”“아니, 괜찮아.”“화장실 좀 쓸게.”“옷 가져다줄까?”계지원의 말에 예수진은 놀라면서 물었다.“여자 옷 있어?”늦은 시간에 옷 살 곳도 마땅치 않고, 이렇게 입고 나갈 수도 없으니 갈아입을 여자 옷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식이었다.그런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