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 그럴 리가 있겠어요? 방금 제가 청하 씨한테 전화했더니 그때서야 일어났어다고 하던데요?" 원빈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예수진도 청하가 애초에 오지 않아 그에게 뭐라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결국 그녀가 잘못한 일이였기에 할 말이 없었다. "배우들이 아침 일찍 와서 리허설 준비하느라 아침도 안 먹었을 것 같다면서 계 감독님이 아침 식사를 사준다고 했대요. 매니저한테 시켜서 연습실마다 아침식사를 많이 가져다줬어요." 원빈은 맛있게 먹으며 설명했다. “계 감독님이 이렇게나 사려 깊으실 줄은 몰랐네요.” 계지원은 오랜 세월 육씨 가문에서 생활했고, 가족들의 요구를 가장 잘 들어주었기에 개인 생활을 토대로 그는 사회에서도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잘 어울린 편이였다. "그런데 아까 스태프들 얘기 들었어요?” "뭐요?” "계 감독님이 어젯밤 이곳에 갇혀 있었대요.” "어, 정말요? 전 못 들었어요." 예수진은 그들의 얘기를 들으며 태연하게 아침을 계속 먹었다. 그녀가 계지원과 있다가 바로 나간 것도 혹시라도 누군가가 그 모습을 볼 까봐 걱정해서였다. 연예계 사람이 많이 있는 곳은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그들의 생각에 뉴스로서 가치가 있다면 모두 사실이 된다. "듣기로는 혼자 있었던 것 같지 않던데… 설마 계 감독님 몰래 연애 하시는 중은 아니겠죠? 설마 우리 배우들 중 한 명인가?” "푸...!"예수진은 마시던 우유를 내뿜었고 원빈의 몸에 우유가 다 튀었다. 예수진은 얼른 냅킨을 꺼내 그를 닦아주며 말했다. "허걱! 미안해요... 고의가 아니었어요.” "고의 아닌 거 알아요. 그런데, 뭘 그렇게 당황해요?” "당황한 거 아니에요. 우유를 잘못 삼킨 것 뿐이예요.” "그래요?" 원빈은 예수진을 바라보았다. 예수진은 재빨리 화제를 돌리며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상대가 누군지 알아요?” "수진 씨도 이런 소문에 관심 있었어요?” "저도 여자잖아요. 원빈 씨야 말로 무슨 남자가 이렇게나 소문을 좋아해요?” "다 나를 지키기
원빈이 힘껏 입으로 바람을 불자 예수진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됐어요?" 원빈이 긴장하며 물었다. 예수진은 이제 다 빠져나간 듯 조심스럽게 눈을 깜박거렸다. 그녀의 입꼬리에 행복한 미소가 번졌고 그때 그녀의 시선이 대기실 입구에 머물렀다. 원빈도 같이 예수진의 시선이 머문 곳을 보았다. 대기실 입구에 프로그램 감독 스태프들과 몇몇 심사위원들이 서있었고, 원빈과 예수진은 서둘러 거리를 벌려 앉았다. 두 사람 사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방금 이 행동이 사람들을 오해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담당 감독이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예수진 씨랑 원빈 씨, 벌써 그렇게나 가까워진 거야?” "하하. 상대역이잖아요." 원빈은 서둘러 설명했다. "유청하 씨는 아직 안 왔어요?" 계지원이 화제를 돌렸다. 계지원은 예수진을 보지 않았다. 예수진은 계지원이 어젯밤에 여기서 갇혀 있었기에 그가 집으로 돌아가서 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배우들에게 아침 식사를 보내며 얼굴도장을 찍고, 지금도 이곳에 나타났다. 예수진은 계지원이 언제부터 이렇게 적극적이었는지 생각했다. 계지원은 이전에는 그가 집중하고 있는 영화 말고는 다른 사업을 확장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설마 육씨 가문에서 지내지 않아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변하기 시작한 것일까? 그녀처럼? 예수진은 지금 연예계에 복귀하며 배고픈 늑대처럼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청하씨 지금 오고 있는 길인데 차가 좀 막힌데요." 예수진이 설명했다. 담당 감독은 계지원의 불편한 기분을 눈치챌 수 있었지만 원래 말을 잘하는 계지원ㅇ라 왜 기분이 나쁜지는 알 수 없었다. 연출을 고민하다 보면 촬영 전에 가끔 진지해질 때가 있다. 그리고 계지원은 자신이 특별히 여러 번 섭외한 끝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었다. 계지원이 참여한다고 비록 시청률이 많이 오르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프로그램의 수준을 끌어올려 주었기에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담당 감독이 조감독에게 말했다. "유
"날 함정에 빠뜨리지 말아요." 예수진은 정신을 차리고 더 이상 불리한 말은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장 선생님은 정말 연기에만 보는 분이라, 연기를 잘 못한다고 지적 받아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예수진 씨, 정말 변했네요!” 원빈은 고개를 떨구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예전에 예수진이 최정상에 있을 때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예수진은 야망과 도도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는 '연예계의 강아지'라는 글자를 예수진의 이마 위에 써주고 싶었다. ...... 일주일 뒤. 소이연은 육민을 데리고 서울로 갈 생각이였고, 서울로 가기 전에 예수진과 하지수를 함께 만났다. 예수진은 계속 하품을 해댔고 눈에는 피로로 가득차 있었다. "그렇게나 힘들어?” 하지수는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정말 힘들면 바로 그만둬.” "안 돼. 이건 내가 다시 데뷔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야. 겨우 잡은 기회라고." 예수진은 바로 거절했다. “그리고 이건 예전에 톱스타였을 때, 스케줄이 있을 때마다 마찬가지였어.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원래 이렇게 힘들게 돈을 버는 직업이라고.” "쯧쯧." 하지수도 어이없어 하며 혀를 찼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힘든 직업이기는 해도 그만큼 수익성이 있어서 괜찮지만은 유명해지기 전까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들을 받는 직업이기도 하다. "계지원이 뒤에서 좀 도와주면 안 돼?" 하지수는 투덜거리며 불평했다. 하지수는 예전에 계지원에 대한 예수진의 사랑과 구애를 목격했지만, 계지원에 대한 인상은 절대 좋지 않았다. 하도경과는 비교도 안 된다."그가 도와준다고 해도 받을 수가 없어. 이건 경쟁이야. 현장과 TV로 지켜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나도 뒤에서 연기 못한다고 욕먹을 까봐 정말 무서워.”하지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그러자 소이연이 옆에서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아주 좋은데요. 인생의 목표도 있고, 꿈도 있잖아요.”이런 사람은 적어도 긍정
저녁식사를 마치고 소이연은 바로 서울로 갔다. 그녀는 예수진과 하지수에게 그녀의 진짜 신분을 단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소이연은 그냥 그곳이 자신과 별로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고 그저 그곳에 돌아갈 때마다 잘 대처하고, 그쪽 생활에 녹아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서울에 도착하니 서울은 아직 추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소이연은 미리 두꺼운 옷을 준비해 입었다. 천우진이 그녀와 육민을 데리러 나왔다. 차에 탄 뒤 천우진이 말했다. "이번에는 민민을 데리고 호텔에 묵을 생각은 절대 하지 말아요. 할아버지가 방을 준비해 놓으셨으니깐요.” "네, 알겠어요." 소이연은 한 입으로 두말할 생각이 없었다. 말을 뱉었으니 마음속으로 거부감을 느껴도 지켜야 한다. 천우진도 소이연에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에 육민에게 물었다. "민민, 서울에 왔는데 외삼촌이랑 어디 데리고 놀러 가고 싶어?” "서울에 과학기술 박물관이 새로 생겼다고 들었는데 가보고 싶어요." 그러자 육민이 대답했다. "과학기술 박물관? 그래, 알았어" 급한 성격의 천우진은 육민의 대답에 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과학기술 박물관 입장권으로 세 장 예약해 줘요. 시간은 내일 오전으로요.” “네, 천 사장님.” 천우진은 전화를 끊은 뒤 육민에게 말했다. "과학기술박물관은 내일 오전에 가자. 오늘은 비행기를 타느라 힘들었을 테니까 집에 가서 좀 쉬고.” "네." 육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육현경에게 가정교육을 잘 받은 육민은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사랑을 받았다. 천씨 주택에 도착했다. 세 사람은 함께 차에서 내려 로비로 들어갔다. 소이연이 올 때마다 대가족이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는 사실 이런 겉치레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외할아버지는 소이연이 이 가문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려주고 싶어 이런 방식의 환영인사를 좋아하는 듯했다. 이런 환영 방식은 소이연이 아니라 소이연의 어머니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었기에 소이연은 거절할 이유
외출할 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신이 팔려버려서 완전히 잊어버렸어요. 소이연은 한숨을 쉬었다. 할 수 없다, 잊으면 되고 이따가 나가서 수면제를 사 오면 된다. 소이연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방을 다 정리하자 도우미가 와서 식사가 준비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온 가족이 한자리에 앉았다. 식탁 앞에서 가족들은 의외로 조용했다. "민민, 무슨 음식을 좋아해? 외증조 할아버지가 네가 먹고 싶은 거 준비해 달라고 할게.” 천씨 어르신께서 육민에게 적극적이게 행동했다. 그는 육민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가끔 육민이 이곳에 오면 항상 그녀에게 안부를 묻기도 했다. 육민 전에는 육씨 어르신과도 잘 지냈기 때문에 노인들을 대하는 데도 능숙했다. "감사합니다. 외 증조할아버지. 지금 준비된 음식들도 다 좋아하는 음식이에요." 육민이 재빨리 말했다. "말투가 네 외할머니랑 똑같아." 천씨 어르신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천씨 어르신은 소이연의 어머니를 그리워한다는 것을 모두 다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당시 집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외 증조할아버지도 많이 드세요." 똑똑한 육민은 식탁의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을 눈치채자 바로 천씨 어르신께 음식을 집어 드렸다. 천씨 어르신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치. 민민아 , 너는 지금 키가 크는 시기이니까 많이 먹어야 한단다.” "네.” 육민 덕분에 식탁의 분위기가 많이 풀어졌다. 식탁 앞에 함께 앉아있던 사람들은 어린 육민이 이렇게 침착하게 처신하는 모습을 보며 놀라고 감탄하고,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천씨 가문과 육씨 가문에서 육민 세대는 가장 늦게 결혼하고 가장 늦게 아이를 낳은 천우진을 제외하고는 그 세대의 맏이가 육민보다 나이가 1살, 그리고 3살 많았기에 경쟁에서 자유로웠다.이치대로라면 천씨 가문 같은 대가족의 장손인 천우진은 법적으로 성인이 되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는데, 그는 거의 40살이 될 때까지 결혼을 질질 끌었다. 하지만 소이연은 그 이유에 대해 묻지 않았다.
천우진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이런 어린 아가씨가 좋아하는 것을 소이연도 좋아한다고? 하지만 천우진은 거절하지 않고 육민에게도 물었다. "민민도 마실래?” "네, 마셔보고 싶어요!”육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육민은 군것질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바깥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엄마가 좋아하는 것이니까 순간 먹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 천우진은 밀크티 가게의 문 앞으로 갔는데, 그때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천우진은 순간 멍해졌고, 방금 나온 그 한 남자인 루카스도 똑같이 멍해졌다. 두 사람이 마주하는 순간, 루카스는 거리 입구에 서있는 소이연과 육민을 보았다. 소이연과 육민도 당연히 그를 보았다. 루카스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육민은, 그를 보자마자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급하게 외쳤다. "아빠!” 루카스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루카스는 아빠가 아니라고 이미 육민에게 몇 번 말했었기에 그는 육민에게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밀크티를 마시던 소녀는 활짝 웃으며 루카스에게 다가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었다. 아가씨의 눈이 부드럽게 초승달처럼 휘어져 사랑스러웠으며 매우 순수해 보였다. 소이연의 눈동자가 살짝 움직였다. "샀어?” 루카스는 젊은 아가씨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그냥 먹는데, 다음부터는 먹지 마.”그는 말을 하며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 콘을 젊은 아가씨에게 건네주었다. "겨울에 아이스크림 먹으면 감기에 걸리기 쉬워, 그리고 넌 원래 몸도 좋지 않잖아.” "알았어, 알았어요." 젊은 여자는 애교를 부리며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네가 우리 아빠인 줄 알겠어.” 그러자 루카스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소이연과 육민은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특히 소이연은 비교적 침착하게 그들을 보았다. 루카스는 이미 몇 번이나 그녀에게 여자친구가 있다고 했었지만 육민은 믿기지 않다는듯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빠가 정말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졌
육민은 엄마의 담담한 표정을 보면서 엄마가 일부러 가면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엄마, 화났어요?" 육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화났어." 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가 기억을 잃으셨나 봐요......” "민민, 루카스는 네 아빠가 아니야. 그러니깐 다음에는 그렇게 부르지 마. 누군가에게 오해받는 건 기분을 좋지 않게 해." 소이연이 다시 육민에게 상기시켰다. 이번에는 다행히 그 젊은 아가씨는 육민이 루카스에게 아빠라고 부른 것을 몰랐다. 하지만 혹시라도 알게 되면 설명하기 곤란했다. "네." 육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화난 이유는 루카스가 여자친구가 있어서가 아니야. 엄마는 이미 루카스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엄마가 화가 난 건, 그 얼굴로 우리 아들보다 자기가 더 잘 생겼다고 말해서야." 말을 하면서 소이연은 더 화가 났다. 그녀의 아들은 분명 아무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잘생겼기 때문이다. 좋다, 엄마로서 육민이 잘 생겨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루카스가 자신의 아들보다 잘생겼다고 말한 것은 절대 인정할 수가 없다. “...... 어, 저는 아빠, 아니, 루카스가 나보다 더 잘생겼다고 생각해요." 육민이의 작은 얼굴이 약간 빨개졌다. "어떻게 너 자신을 과소평가해?! 루카스가 대체 어디가 너보다 잘생겼어? 루카스도 잘생기긴 했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네 아빠만큼 잘생기지 않았어.”“아빠의 외모가 변했어요. 맞아요. 확실히 이전의 아빠가 좀 더 잘생겼었어요. “그 순간, 천우진은 밀크티 세 잔을 사서 밖으로 나왔다. 원래 천우진은 밀크티를 마실 생각이 없었지만, 소이연이 마신다고 하자 자신의 것도 한 잔 샀다. 세 사람은 각자 밀크티를 한 잔씩 손에 들었다. 소이연은 밀크티 한 모금을 마셨다. 뭔가 맛이 없었다. "그것도 맛없나 보네요." 천우진의 표정은 그녀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 "너무 달아요.” 소이연은 너무 달다며 미소를 지었다. 역시!밀크티의
밀크티 걸은 소이연이 대답하지 않자 어색하게 말했다. "언니, 저 기억 안 나세요?” 그녀는 단지 상대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긴, 이렇게 예쁘신 언니가 이렇게 평범한 저를 어떻게 기억할 수 있겠어요.” 밀크티 걸은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어제 야시장에 있는 밀크티 가게 앞에서 만났는데, 언니가 가게 밖에서 기다릴 때 저도 기다리고 있어요.” 밀크티 걸은 빙그레 웃으며 소이연에게 말했다. 소이연은 낯선 사람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말하는데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소이연은 웃으며 대답했다. "네, 기억나요.” "정말요?" "예쁜 언니가 저를 기억해 주시다니! 정말 기뻐요.” 소이연은 그저 담담하게 웃기만 했다. 그러고는 루카스를 힐끗 쳐다보았다. 루카스가 밀크티 걸 옆에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이연이 밀크티 걸에게 말이라도 잘못할까 봐 두려운 거야? ! 걱정하지 마. 소이연은 루카스를 매우 싫어하지만, 절대 그에게 나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언니도 제 남자친구가 언니 아들과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밀크티 걸이 신이 나서 물었다. 소이연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육민을 한번 보았을 뿐인데 루카스와 닮은 것을 발견했다고? 밀크티 걸은 분명히 주도적으로 말하면서도 어색하게 하지 않게 말을 했고, 감성지수가 정말 높은 것 같았다. "응." 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닮았다는데 루카스는 안 닮았다고 그래요. 잘생긴 아들은요? 언니랑 같이 왔죠?” "저쪽에 있어요." 소이연이 손가락으로 육민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육민은 과학기술 박물관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팔려 소이연 쪽의 상황을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육민 옆에 있던 천우진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저분이 언니 남편이에요?" 밀크티 여자가 천우진을 보며 말했다. "잘생겼어요. 언니랑 잘 어울려요.” "네, 두 분도 잘 어울려요.” 소이연은 오해를 바로잡지 않았다.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
백일잔치가 시작되기 전 예수진은 소이연과 친구들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급히 다가왔다.“왜 혼자와?”“그럼 누구랑 와?”“우리 조카는?”“아, 엄마한테 맡겨놨어. 먹고 싸는 것밖에 할 줄 몰라서 재미없어.”“...”“그러는 너는 좀 어때?”“뭐가 어떠냐고?”“네 애 말이야.”예수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의 찻잔이 쨍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아직 파티가 시작되기 전이라 차만 마시고 있던 남자들이었는데 송문수의 손에 들려있던 찻잔이 미끄러지면서 안에 있던 차가 흘러나온 것이다.송문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찻잔을 집어 들더니 휴지로 물기를 닦아내기 시작했다.그 얼굴에서 당황스러움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찻잔을 떨군 건 그저 우연이라는 듯 하도경, 육현경과도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그를 보며 하지수도 입을 열었다.“잘 있지. 전에는 좀 힘들었는데 이젠 잘 먹고 잘 자.”“너 살 좀 찐 것 같아.”“응, 2킬로 넘게 쪘어.”“그럼 됐어.”하지수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던 예수진은 파티가 곧 시작한다는 말에 계지원과 함께 자리를 떴고 그녀가 떠나가 테이블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아마도 얘기를 다 나눈 남자들 때문인 것 같았다.가만히 있기도 뻘쭘했던 하지수가 주전자를 들려 하자 송문수가 빠르게 그녀에게 차를 따라주었다.“고마워.”하지수의 인사에 송문수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한참 동안 둘 사이에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그러다가 결국 송문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너 임신했어?”“응.”“빠르네.”송문수는 의미 없는 웃음으로 자신의 착잡한 마음을 감추려 했다.적어도 결혼한 다음에야 임신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송승우의 아이를 가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인신고만 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송문수는 자신의 생각이 점점 커지는 게 싫어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너 혼자 온 거야? 송승우는?”“서울 갔어.”“몸은 괜찮아졌어?”“응, 의족 해서 이젠 잘 다녀.”오랫동안
예수진은 빠르게 소이연에게 문자를 보냈다.[이연 언니, 송문수 왔어요. 진짜 올 줄은 몰랐는데 방금 안으로 들어갔어요!][내가 진짜 올 거라고 했잖아요.][내 매력이 그 정도일 줄 몰랐죠.]역시나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예수진에 어이없다는 이모티콘을 보내고 난 소이연은 송문수의 인영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하도 큰 키 덕분에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도 우뚝 솟아있는 송문수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문수야.”마찬가지로 그를 알아본 육현경이 인사를 건네자 송문수는 빠르게 그들에게로 다가갔다.“언제 왔어?”“어제 오후에.”“왔는데 왜 말도 안 해? 사업 잘된다고 이젠 우리도 모른 척하는 거야?”“아무리 잘 되봤자 내가 현경이만큼 돈이 많진 않아.”볼멘소리를 하는 하도경에 맞는 말로 반박하자 하도경도 딱히 할 말이 없는지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언제 가?”“모레 비행기야, 내일 집 가서 부모님만 뵙고 가려고.”“그래서 우리 만날 시간은 없다 이거지?”“이번엔 시간이 좀 빠듯해, 거기 일도 많고. 오늘 보지 뭐, 술 제대로 마시자 한번.”“너 진짜 많이 변했어 송문수, 이렇게 진지하진 말아 줄래?”적응되지 않는 송문수의 말투에 하도경이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그럼 어쩌라고.”“나는...”판을 깔아주니 말하기 어려웠는지 하도경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술 마셔 그냥.”“그래.”또 무슨 바람이 분 건지 둘은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파티의 주인공이 자리하기도 전에 술부터 마시기 시작했다.육현경이 그런 그들을 말리려 할 때 송문수의 옆에 문득 한 여자가 앉았다.그에 술잔을 들고 있던 송문수도 잠시 멈칫했다.굳이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아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을 주며 술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송문수를 한번 보던 소이연은 하지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지수 씨, 왔어요?”“네.”“혼자예요?”“네.”혼자라는 말에 송문수의 손은 아까보다 더 하얗게 질려버렸다.“혼자니까 더 조심해요 다닐 때.”“그
그로부터 반년이 지나서야 송문수는 마침내 국내로 돌아올 수 있었다.캐나다에 있는 회사도 이제 정상적으로 흘러가자 귀국한 거였지만 그도 그냥 예수진 아들의 백일을 축하하러 온 것뿐이었다.시간이 어찌나 빠른지 송문수가 나갈 때까지만 해도 배가 부른 채로 있던 예수진이 벌써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백일까지 맞이하게 된 것이다.오랜만에 온 장안시였지만 송문수는 자신의 귀국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저 본인의 집으로 향했다.오랫동안 비워둔 집이라 그런지 온통 먼지투성이여서 일단 도우미부터 부른 송문수는 아주머니가 정리를 마친 다음에야 침대에 몸을 뉘일 수 있었다.떠나기 전만 해도 이곳에서 사랑하던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는데.이제는 그 모든 게 다시는 들춰선 안 될 과거가 돼버린 것 같았다.해외에 있던 시간 동안 송문수는 부단히 하지수를 잊으려 애쓰고 있었다.물론 정말 잊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하지만 하지수와 송문수가 반년 동안 연락을 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었다.부모님과 영상통화를 할 때도 같은 집에 살던 하지수는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그저 우연히 한 번, 그녀의 뒷모습이 화면에 스친 게 전부였다.몸을 뒤척이던 송문수는 내일의 백일잔치에 대해 생각했다.내일 가면 친구들이 무조건 술을 권할 텐데, 오랫동안 술을 마시지 않은 탓에 송문수는 지금 자신의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그래도 푹 쉬면 조금은 낫겠지 싶어 그대로 잠을 청한 송문수는 이튿날 아침이 돼서야 눈을 떴다.언제부턴지 부모님처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배어버린 탓에 송문수는 이젠 밤을 새우는 게 오히려 힘겨웠다.그렇게 여유롭게 준비를 마친 그는 한 번 더 깔끔하게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선물을 한 아름 안고 집을 나섰다.너무 이르지도 않고 너무 늦지도 않은 딱 적당한 시각에 집을 나선 그는 문득 옛날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을 지었다.예전에는 어쩜 그리 특이하게 살아왔는지, 참으로 유치했던 것 같다.해외에서 반년 동안 혼자 살아서
“보름 넘게 준비한 건데 서두르는 건 아니지.”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고향을 떠나는 일인데도 송문수는 참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갔다가 언제 와?”“그건 몰라. 상황 봐서 잘 되면 빨리 오는 거고 잘 안되면 못 오는 거지.”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송문수에 그의 결심이 바뀔 리 없다는 걸 알아챈 송승우는 그만 입을 다물고 하지수의 손을 맞잡았다.무의식중에 눈물을 흘리던 하지수는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빠르게 표정을 감췄다.“가자.”그리고는 송승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그녀는 송문수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마지막 작별인사도 전하지 않은 채 그렇게 헤어졌다.하지수의 몸에 감히 시선을 두지 못하던 송문수도 그녀가 송승우와 함께 차에 타서야 차창 너머로 비치는 그 뒷모습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그는 한참 동안 자신에게서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사실 캐나다도 송문수가 직접 갈 필요는 없었다.회사에 유능한 사람은 널리고 널렸으니 아무에게나 CEO라는 직급을 쥐어 보내면 될 일이었지만 송문수는 본인이 가겠다고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여기서 다정하게 지내는 둘을 보고 있는 게 더 가슴 아플 것 같아서, 눈에 보이지 않으면 조금은 낫지 않을까 싶어서.손 하나 잡았다고 이렇게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은데 이런 모습을 계속 보는 건 정말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는 이곳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송문수는 캐나다에 도착해서야 육현경과 소이연을 비롯한 친구들에게 자신의 출국 소식을 알렸다.그리고 언제 돌아갈지는 모른다는 말까지 남기자 다들 깜짝 놀랐지만 별말은 하지 않고 몸 잘 챙기라는 소리들뿐이었다.그리고 시간 되면 놀러 오라는 얘기들로 대화가 마무리되었는데 역시나 예수진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그녀는 굳이 송문수에게 따로 문자까지 보내며 물었다.[너 진짜 어쩌려고 그래? 이렇게 가겠다고? 다 버리고? 송문수, 너 언제부터 이렇게 나약해졌니? 내가 너였으면 당장이라도 송승우랑 싸웠어!][어차피 못 이
둘의 이혼은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고 두 사람은 각각 손에 이혼 증명서를 들고 법원에서 나왔다.“이제 끝난 거지?”“네.”하지수에게 건네받은 이혼 증명서를 들춰보던 송승우는 안에 적힌 내용을 다 확인한 후에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혹시라도 돌발상황이 생길까 봐 따라온 건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두 사람의 이혼은 순조롭게 진행됐다.송문수는 하지수를 보고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절차대로 서류만 제출했다.아무 감정도 없는 것 같은 두 사람의 모습에 송승우는 감정이란 게 저렇게 쉽게 사라질 수도 있나 싶었다.둘 사이에 다른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이혼만 하면 그만이었기에 송승우는 다른 건 묻지 않았다.이제 두 사람이 이혼했으니 송승우는 저와 하지수도 떳떳해진 것 같았다.그리고 그는 송문수만 연락을 끊는다면 하지수를 다시 자기 여자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그래서 법원에서 나오자마자 송승우가 먼저 송문수를 불러세웠다.“시간 되면 집에 와서 밥이라도 먹어. 엄마 아빠가 전화해도 안 오던데, 많이 바쁜 거야?”“응.”“바쁘다고 가족들도 다 내팽개치는 건 아니지. 워라벨도 신경 써야지.”어른스러운 말투로 나무라듯 말하는 송승우를 송문수는 쳐다보지도 않았다.서울에서 일할 때 1년이 넘도록 안 오던 게 누군데.부모님이 굳이 송승우를 부르지 않은 건 그의 일에 방해가 될까 봐서였다.무튼 송승우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이 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고 다른 사람들의 일은 언제든지 시간을 뺄 수 있는 여유 적적한 일이라 여기는 사람.“언제 시간 되는지 알려주면 도우미들 시켜서 너 좋아하는 거...”“나 해외에 잠깐 나가봐야 해.”“뭐라고?”송문수가 송승우의 지루한 말을 끊으며 대답하자 송승우는 당황하며 물었다.“엄마 아빠가 말 안 했어?”“무슨 말이야 그게?”금시초문이었던 송승우는 하지수를 쳐다보았지만 그녀의 반응을 보니 그녀 역시 처음 듣는 말인 것 같았다.“우리 회사 전기차 해외 매출이 자꾸 오르니까 전
그런데 그때, 협탁에 놓인 물과 알약 한 알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그 옆에 나란히 놓여있는 쪽지에는 “단기 피임약”이라는 말도 적혀있었다.그 약과 물을 번갈아 보던 하지수는 피가 차게 식는다는 게 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너무나도 명확한 송문수의 의사에 하지수는 가슴이 아려왔다.성인 남녀 둘이 충동적으로 서로를 원해서 가졌던 하룻밤이니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을 것이고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걸 이렇게 약으로 알려주다니.알약을 집어 든 하지수는 참으로 처량하게 웃어 보였다....그렇게 점심이 다돼서야 하지수는 별장으로 돌아갔다.핸드폰 배터리가 다 된 탓에 그녀는 송승우가 몇 통의 전화를 했는지도 모른 채 별장 안으로 들어섰는데 송승우는 아니나 다를까 어두운 얼굴로 이제야 들어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와 달리 허영지와 송기명은 살갑게 하지수를 걱정해주었다.“지수야, 어제 어디 갔었어? 전화는 왜 꺼놓고. 수진이한테 전화했는데 네가 문수랑 같이 갔다고 해서 문수한테 연락해보니까 문수는 또 너랑 같이 있는 거 아니라고 그러던데.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어디 다친 데는 없지?”“없어요. 어제 술을 좀 많이 마셔서 문수 씨 집에서 잔 것뿐이에요.”송문수 집에서 잤다는 하지수의 말에 송승우는 더는 못 참겠는지 언성을 높였다.“하지수, 너 나랑 한 약속 잊었어? 네가 어떻게 거기서 잠을 자!”“내가 무슨 약속을 했는데요?”송승우는 아무리 화가 났어도 저 질문에만큼은 답을 할 수 없었다.가스라이팅으로 어렵게 얻어낸 기회라는 걸 다른 사람한테는 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나 문수 씨랑 아직 이혼 안 했어요. 그러니까 아직은 뭘 하든 합법적이란 소리죠.”“하지만...”“이혼하고 나서 얘기해요. 나 피곤해서 먼저 올라 가볼 게요.”몸도 마음도 다 힘들었던 하지수는 송승우를 화를 살필 겨를이 없었기에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그렇게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으니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몸을 뒤척이며 이불을 목 끝까지 끌
“너 내일 후회할 거야.”이런 하지수를 앞에 두고 참는 건 송문수에게도 곤욕이었다.온몸이 떨릴 정도로 힘을 주고 있는 것보다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는 게 더 힘들었다.“후회 안 해.”“딱 하나 후회되는 게 있다면 내가 이 나이 먹도록 한번 밖에 못 해봤다는 거야. 그리고 그 한 번도 진짜 별로였어.”“뭐?”아까부터 한번을 강조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그 한 번도 다 너한테 맞춘 거였잖아.”고작 한 번이라니, 그럴 리가.그런데 또 곱씹어 보니 둘이 함께 잔 건 한 번뿐인 것 같긴 했다.하지만 송승우와 그렇게 오래도록 사귀면서 송승우 방까지 들락날락하던 게 하지수인데 그런 그녀의 인생에서 저와 한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이번엔 내가 움직일 거야.”하지수는 잔뜩 풀린 눈으로 당차게 말했지만 그녀의 말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나 또 밀어내면 그땐 진짜 물어버릴 거야.”말을 마친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닥에 눕힌 뒤 그 위에 올라탔다.“반항하지 마.”곧바로 하지수의 입술이 자신에게 다가왔지만 송문수는 정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이 상황에 그녀를 밀어내면 하지수가 정말 울어버릴 것만 같아서.그녀의 우는 모습을 보는 건 언제나 가슴 아픈 일이었기에 송문수는 그냥 가만히 있는 걸 택했다.그렇게 내일 그녀의 원망도 다 받아낼 심산으로 송문수는 하지수의 움직임에 몸을 맡겼다.뜨거운 하룻밤을 보낸 뒤, 아침이 밝아오자 하지수는 몸을 뒤척였다.온몸에 차에 깔리기라도 한 듯 무거웠고 발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던 그녀는 힘겹게 눈부터 떠보았다.익숙하고도 낯선 이곳은 그녀의 기억 속에 있던 송문수의 집이었다.그리고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니 어제의 기억 조각들이 하나하나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그것들이 마침내 온전한 하나가 되었을 때, 하지수는 얼굴을 붉혔다.본인도 몰랐던 자신의 대담한 모습을 그녀는 차마 깊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술이 깬 지금에 와서는 절대 못 할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