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아.”그녀의 뒤쪽에서 육현경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소이연의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육현경 이 남자, 언제 내 뒤에 온 거지?너무 긴장되어서 뒤돌아보지도 못하겠어.심장이 빨리 뛰다 못해 터질 것만 같아…그녀는 심호흡으로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뒤로 돌았다.눈 앞에 검은색 정장 차림을 한 육현경이 커다란 장미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알록달록한 등불과 어우러져 분위기가 로맨틱했다.평정심을 찾은지 얼마 안 되어서 그녀의 가슴이 또다시 콩닥콩닥 뛰었다.“오래 기다렸지?”육현경이 웃으면서 말했다.그의 미소는 단번에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소이연은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대답했다.“오늘 하루 종일 안 오길래 뭐하나 했는데 업무 보러 간 게 아니라 서프라이즈를 준비한 거야?”“이것도 일종 업무지.”육현경이 미소를 지었다.“나 지금 협업 건을 위해 노력하고 있잖아?”“응?”날 협업회사 취급을 하다니…육현경이 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식탁 앞으로 왔다.발리는 열대지역이지만 저녁에는 선선했다.두 사람은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여유롭게 식탁에서 식사를 나누었다.육현경이 낭만적인 남자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저 며칠 놀다가 여행을 마무리하는 줄 알았는데 육현경은 그녀에게 최고의 엔딩을 선물해 주었다.그래서 몇 년 뒤에도 그녀는 이 밤의 설렘을 추억하곤 했다.갑자기 해변가에 바이올린 소리가 울려 퍼졌다.소이연이 그쪽으로 바라볼 때 육현경은 나이프를 내려놓고 그녀 앞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이연아, 나랑 춤추지 않을래?”소이연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천천히 육현경의 손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두 사람은 부드러운 바이올린 선율에 따라 춤을 췄다.무거운 호흡이 서로 얽힐 만큼 가까워졌다.“이연아, 이번 여행 어땠어?”육현경이 그녀에게 물었다.그 덕에 긴장되고 어딘가 간지러운 분위기를 깼다.“좋았어.”소이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난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육현경의 직설적인 발언에 소이연은 인상을 찌푸렸다.“더 놀고
아름답고 여유로운 행복한 밤.두 그림자가 얽혀 있었다.육현경은 오래도록 반응하지 못했다.오히려 소이연의 리드하에 진한 키스를 이어가고 있었다.생소하고 긴장해하던 육현경이 침을 삼키더니 큰 손으로 천천히 그녀의 작고 여린 몸을 꽉 끌어안았다.그리고 머리를 숙여 더 깊게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두 사람은 여기가 어디인지도 잊을 정도로 서로에게 집중했다.깊고 뜨겁게 하나가 되었다.소이연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힘 풀릴 정도로 키스할 줄이야.그때 육현경이 어린 아이를 안은 것처럼 번쩍 들어올려서 소이연은 깜짝 놀랐다.그가 그녀를 옆에 있던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육현경은 그녀에게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다시 키스를 퍼부었다.오래도록 깊은 숨결을 나누었다.밤이 더 깊어갔다.소이연의 여린 몸은 이미 육현경한테 밀려 식탁에 닿았다.육현경은 식탁의 식기와 그릇을 땅에 떨어뜨리고 아름다운 소이연을 올려 놓았다.가녀린 몸매 그리고 키스로 인해 빨개진 두 볼은 그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유혹이었다.그녀를 안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져만 갔다.그 마음은 불이 붙은 장작처럼 소이연을 뜨겁게 달굴 것만 같았다.성인 남녀 사이는 눈빛 하나만으로도 분위기가 바뀐다.소이연은 너무 긴장해 거친 호흡을 몰아쉬었다.거친 호흡 탓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그 모습을 본 육현경은 당장 그녀를 덮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그녀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이 남자의 갈증을 자극하는지 모를 것이다.이 갈증과 욕구를 참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참아야 할까?육현경의 몸이 천천히 소이연에게 다가가 그녀의 입술을 깨물었다.그가 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아. 그것도 아주 많이.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갑자기 18살 때 겪은 악몽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공포가 밀려왔다.하지만 육현경이 가까이에 왔을 때 그녀는 눈을 감았다.주먹을 꽉 주었지만 그를 밀어낼 생각은 없었다.억지로라도 버티면서 받아주고 싶었다.한참 후. 예상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녀를 누르던 중력도 사라졌다.소
소이연이 해변가에 서서 불렀다.“육현경!”육현경은 바다 안에서 고개를 내밀었다.하얀 셔츠가 젖어 몸에 딱 달라붙어 그의 탄탄한 근육과 몸매 라인을 돋보이게 했다.“이제는 나오지 그래?”소이연은 그에게 말했다.“그러려고.”“나와.”소이연이 손을 뻗어 그를 잡으려 했다.“이연아, 아직 날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은데.”육현경의 경고에 소이연의 손이 멈칫했다.그 말속의 뜻을 알아차렸다.“내가 알아서 나갈게.”육현경은 바다 속에서 나왔다.저녁이라 바닷물이 차가웠다.그 속에서 나온 육현경은 온몸이 얼음장 같았는데 이때 마침 바닷바람이 불어왔다.육현경이 재채기를 했다.그 모습이 좀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소이연은 참지 못하고 웃었다.“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육현경은 어이가 없었다.“방에 들어가자.”소이연은 기분이 좋은지 웃으면서 대답했다.두 사람은 앞뒤로 나란히 걸어서 별장으로 들어갔다.육현경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따뜻한 물에 씻고 쉬려고 했다.“육현경.”육현경은 고개를 돌렸다.“고마워.”소이연이 환하게 웃었다.오늘 밤 그의 행동에 너무 감동을 받았어.육현경은 어이가 없었지만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날 욕해줬으면 했는데.”소이연이 인상을 찌푸렸다.이 사람, 혹시 학대 경향이 있어?“짐승보다 못하다고.”육현경은 이 말만을 남겨놓고 뒤돌아 갔다.굳게 닫힌 그의 방문을 보고서 소이연이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말 뜻을 알고 있었다.아마도 다음번에 할지도 몰라.소이연은 방으로 돌아와 씻고 누웠다.여행 온 내내 피곤해서 누우면 바로 자는 편이었다.그런데 오늘 밤은 왠지 잠이 오지 않아서 머리 위에 있는 하늘을 쳐다보며 눈만 깜빡였다.그녀는 아직도 부어있는 입술을 깨물었다.방금 육현경과 진한 키스를 했던 장면을 떠올렸더니 마음이 간질거렸다.이번 키스는 반항도 하지 않고…그전에 두 번의 키스는 가벼운 터치였다면 이번은…소이연이 이불 속으로 숨었다.더 생각하면 안 돼.다음 날.소이연의 눈 밑에 다크서클
결국, 소이연과 육현경은 돌아가는 비행기에 올랐다.장안시에 도착했을 때 이미 오후 3시였다.어젯밤 잠을 설친 두 사람은 비행기에서 잠을 보충해서야 정신이 들었다.육현경의 검은색 마이바흐가 비행기 옆에 주차되어 있었다.이명진이 그 옆에 서서 정중하게 그들을 맞이했다.그가 공손히 차 문을 열며 말했다. “대표님, 사모님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사모님......소이연의 얼굴이 달아올랐다.두 사람은 차에 올라탔다.이명진이 보조석에 앉아 업무 보고를 시작했다. “대표님께서 자리를 비운 동안, 원래 잡혀 있던 접대 자리를 미뤄두었습니다. 시키신 대로 다시 내일 저녁과 모레 저녁, 글피 저녁으로 조율해 두었습니다.”육현경이 짧게 대답했다.“그리고, 오늘 저녁 육씨 그룹의 창립 기념 행사가 있습니다. 중요한 손님들이 많이 오시는 자리이고, 할아버님께서 특별히 다시 한번 꼭 참여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정장은 이미 준비해 두었으니 갈아입기만 하시면 됩니다.” 이명진이 보고를 마치고 이어서 말했다. “사모님의 드레스도 요청하신 대로 준비해 두었습니다.”소이연이 어리둥절했다. “나도 가야 돼?”“당연하지.” 육현경이 대답했다. “육씨 그룹의 미래 사모님인데, 당연히 가서 얼굴을 익혀 놔 야지.”소이연은 이명진도 있는 자리에서 정말 당혹스러웠다.“사모님.” 명진은 정중히 말했다. “은하 패션과 방송국의 협업 관련 미팅은 제가 내일 오전 10시로 미뤄두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미 마무리되었고, 이건 계약서입니다. 만약 사모님께서 아무 문제없다고 여기시면, 내일 직접 방송국에 가셔서 서명하시면 됩니다.”이명진이 계약서를 소이연에게 건넸다.소이연은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정말 어쩔 줄 몰랐다.며칠 나가서 놀았는데도 일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소이연은 서류를 보며 말했다. “명진 씨, 대표님이 월급 많이 주세요?”이명진이 입을 열기 전에 육현경이 말했다. “네가 못 빼돌릴 만큼.”소이연이 눈을 크게 뜨고 육현경을 보았다.까불
굉장히 바빴다.연회장의 작은 소동이 일어난다 해도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없었다. 그래서 소이연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별 반응이 없었다.사람들 틈으로 지나갈 때는 아름다운 금빛 자태로 시선을 사로잡긴 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고위층 권력자들끼리 서로의 접대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기 때문이다.소이연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가 아는 사람도 몇몇 있었지만 많지 않았다. 오늘 육씨 가문 창립 기념 행사에 온 사람들은 장안시 사람들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당연히 그녀는 여기에 집중하지 않았다. 그녀의 주요 목적은 육민을 찾는 것이었다.오랫동안 못 봐서, 너무 보고 싶었다.소이연은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소이연?” 갑자기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이연이 고개를 돌려보니, 낯은 익은데 누군지 정말 생각이 안 나는 사람이 서 있었다.남자도 실망한 듯한 얼굴이 드러났다.“나 장지원.” 장지원이 떨떠름하게 자기소개를 했다.그새 나를 잊어버렸어?아니, 이 여자가 일부러 그럴 수도 있어.여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방법이 잡기 위해 일부러 놓아주는 것이 아닌가?소이연은 여전히 의아했다. 장지원이 누군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일하다 만난 사람인가?하지만 그녀와 일을 하다가 만난 사람들은 보통 마지막에 잘되지 않거나 잠시 스쳤더라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하기 전에 만나야 할 사람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고 있어서 아무런 기억도 없을 리가 없었다.장지원은 소이연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화를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소이연, 남자들이 일부러 봐준다고 너무 심하면 그것도 별로야!”소이연은 인사라도 잘해보려고 했다.그가 그녀를 안다고 하니 이런 상황에서 당연히 상대의 체면을 살려주는 것이 연회 주최자에 대한 존중이라 생각했다.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는 상호 관계이므로, 어느 한 사람이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은 없다.그녀는 몸을 돌렸다.“소이연
소이연이 차가운 얼굴로 장지원을 보았다.원래 우연히 알게 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사람을 화나게 할 줄 몰랐다.“오늘 저녁 행사에 온 사람들은 다들 부자 아니면 중요한 인물들이야.” 장지원이 당당히 말했다.“그래서?” 소이연이 되물었다.“그래서 나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장지원은 화가 치밀어 목소리가 커졌다.소이연이 비웃으며 말했다.진심으로 너무 웃겼다.그녀가 말했다. “우리 지금 그런 행사장에서 만난 거 아니야?”장지원은 멍해졌다.소이연의 비웃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근데 너는 소씨 그룹에 빌붙은 거잖아.” 장지원은 자신을 치켜세울 만한 부분을 찾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나 스스로 초대받고 온 거야.”“그럼 넌 소씨 가문 사람들 봤겠네?” 소이연이 물었다.소씨 가문 사람뿐만 아니라, 문씨 가문 사람들도 보지 못했다.장안시에서 그들의 지위 정도면 초대받아서 오는 것이 정상이다.그리고 일단 초대를 받으면 당연히 서둘러 왔지 늦거나 참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연회장 전체를 둘러봐도 두 가문의 사람들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2층이나 3층에 있을 가능성도 없다.대부분의 사람들은 1층에 있었고 인맥을 넓히기에도 더 편리했다. 그러니 워낙 접대를 좋아하는 두 가문에서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유일한 가능성은, 그들이 정말 초대받지 못했다는 것.왜 초대를 받지 못했을까...... 소이연은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육현경의 단독 행동이었을 것이다.속으로 또 한 번 감동했다.장지원은 소이연의 말을 듣고서야 정말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식했다. 그가 연회장에 도착한 지 꽤 되었는데 못 봤을 리는 없다.“그래도 저번 대회에서 우승한 덕에 육씨 가문이 마지못해 초대한 거겠지. 너 그거 잠깐이야. 좀만 지나면 육씨 가문 눈에 들기도 힘들 걸!” 장지원은 여러 가지 이유를 억지로 끼워 맞춰 소이연을 비하했다. “넌 뭐가 그렇게 당당해?!”“진짜 내로남불이네.” 소이연은 차갑게
장지원은 소이연이 비꼬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이연, 너 지금 그것도 잠깐이야. 네 과거도 깨끗하진 않잖아. 좀만 지나면, 넌 다시 사람들이 안 좋게 볼 거고. 내가 받아주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너랑 만나면 네 지위로 내가 장안시에서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해주겠다?” 소이연이 물었다.“그래서 나랑 만나면 너는 이득이지......”“장 총괄.” 뒤에 서 있던 남자는 더 이상 들어줄 수 없었다.장지원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명진이 그의 뒤에 서 있던 것을 발견하고 순식간에 얼굴이 어두워졌다. 방금 떵떵거리던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금세 굽실거렸다. “명진 비서님, 안녕하십니까.”장지원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이명진이 육현경의 개인 비서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즉, 육씨 그룹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존재였다.그의 앞에서 굽신거리지 않는 사람은 없다.이명진은 흘끗 쳐다볼 뿐 대꾸도 하지 않았다.조금 민망해진 장지원이 천천히 손을 내렸다.“육씨 그룹이 언제부터 장 총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었는지 모르겠네.” 이명진은 뜨뜻미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괴상한 목소리였다.장지원은 순식간에 당황한 얼굴로 급히 설명했다. “비서님 오해입니다. 전 그냥, 그냥...... 그러니까, 이 사람은 제 맞선 상대였습니다. 이 사람이 작은 사업을 하는데, 저한테 도와달라고 해서. 당연히 저도 여자 하나 때문에 공과 사를 분간 못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방금은 그냥 좀 놀라게 해주려고 그랬던 겁니다.”“이분이 정말 도와달라고 했다고?” 이명진은 눈을 치켜 떴다.“여자잖습니까. 조금만 예쁘면 지름길로 가려고 하는......”“장지원, 이분은 네가 그렇게 무시할 사람이 아니야.” 이명진이 차가운 목소리로 장지원의 말을 끊었다.장지원은 자신이 무엇을 들은 건지 믿을 수 없어 황급히 말했다. “비서님, 이 외모에 속지 마세요. 애초에 그렇게 좋은 사람도 아니고 남녀관계도 복잡합니다. 현혹당하지 마십시오
명진이 갑자기 나타나 구해준 것은 육현경의 지시였다.너무 바빠 직접 곁에 있어 줄 수 없기 때문에 원만하게 해결될 때까지 위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그가 떠난 뒤, 소이연의 눈빛이 흔들렸다.육현경의 곁에 있는 여자가 소이연을 덤덤하게 돌아보았다. 마치 흘겨보는 것 같았다.하지만 여자라면 직감이라는 것이 있다. 자연스럽게 생기는 그런 것이었다.......연회장은 점점 더 떠들썩해졌다.저녁 8시.드디어 연회장의 주인이 도착했다.할아버지는 육현경의 부모님이 돌아갈 때 충격으로 뇌출혈로 쓰러지신 뒤 겨우 정신을 차리셨지만 하반신이 불능이 되어 평생 의자에 앉은 채로 생활해야 했다.소이연은 갑자기 그들이 발리에 있을 때를 떠올렸다. 육현경이 지나가는 말로 육씨 가문에 사건이 터졌을 때 그가 모두 감당해야 했었다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당시 그는 얼마나 고생했을까?속으로 마음이 조금 아팠다.그때 육현경이 정장을 빼입고 위풍당당하게 그의 할아버지를 모시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2층의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와 1층의 무대 중앙 조명 아래로 갔다. 그의 주변에는 당연히 육현경의 고모 육은숙, 고모부 예준모와 계지원도 있었다.오늘 저녁 육민을 보지는 못했지만 어린아이는 이런 곳에 오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예수진도 보이지 않았다.소이연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예수진이 샴페인을 들고 그녀에게 건배를 했다.마치 소이연이 그녀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예수진과 알게 된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이상하게 친근하고 잘 맞는 느낌이다.그녀와 예수진은 틈틈이 건배를 하며 술을 마셨다.예수진이 소이연에게 무대를 보라고 손짓을 했다.그녀 오빠의 멋진 순간을 놓칠까 봐.그래도 예수진은 오빠를 좋아했다.무대 위.육현경이 옆에 있는 마이크 석을 향해 다가갔다. 육현경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와 함께 대형 LED 스크린에서 육씨 가문 창립 60주년 역사, 사회 공헌, 성과와 업적에 관한 영상이 약 3
하지수의 전화를 받은 소이연은 그녀의 목소리만 듣고도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지수 씨, 무슨 일 있어요?”“문수 씨가 오늘 어머님이랑 좀 다퉜는데 핸드폰도 다 깨져버려서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나도 문수 씨가 걱정되는 데 아버님이 승우 오빠 먼저 설득해달라고 해서 지금 병원으로 가는 중이거든요.”“그래서 현경이랑 친구분들더러 문수 씨 찾아달라고 하라는 거죠? 혹시 문수 씨가 안 좋은 생각 할까 봐?”“네.”아직 본론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바로 알아맞히는 소이연이 제 친구라서 하지수는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내가 현경이한테 말할 테니까 지수 씨는 걱정 말고 승우 씨한테 가요. 찾으면 연락할게요.”“고마워요 언니.”“아니에요.”전화를 마친 하지수는 아무리 심호흡을 해봐도 답답한 가슴을 안고 병원에 들어섰다.바로 중환자실로 향한 그녀 눈에 보이는 건 복도에 앉아 쉴 틈 없이 울고 있는 허영지였다.하지수가 병원을 나설 때도 울고 있더니 아직까지도 진행 중인 것 같았다.저 눈물이 송승우를 위해 흘리는 건지 아니면 송문수와 다퉈서 흘리는 건지는 몰라도 하지수는 어떻게 위로를 전해야 할지 몰랐다.솔직히 말하면 별로 위로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허영지가 송문수를 대하는 태도는 하지수마저도 눈살을 찌푸리게 했기 때문이다.“지수 왔구나”“네, 아버님.”“승우가 너 빼곤 아무도 보지 않겠대. 승우 아니었으면 너 이렇게 급하게 오라고 하지도 않았을 거야.”“네.”그들은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아들을 위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사람이었으니 하지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옷 갈아입고 들어가 볼게요.”고개를 끄덕이는 송기명에 하지수가 몸을 돌리던 찰나, 허영지가 아직도 화난듯한 어투로 물었다.“송문수는 안 온대?”“모르겠어요.”“어디 갔어?”“그것도 몰라요.”“걔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지? 지금이 어떤 상황인 줄 뻔히 알면서 뭐 하는 짓이야!”하지수는 눈물을 흘리며 발악하는 허영지를
“무슨 일로 전화한 거냐니? 넌 동정심이라곤 없니? 네 형이 지금 중환자실에 있다고!”하지만 계속해서 화를 내는 허영지에 송문수의 인내심도 결국 바닥나버렸다.“그럼 엄마는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데요? 형 병실 앞에서 매일 밤낮으로 지키길 바라세요? 아니면 사고 난 게 형이 아니라 나였으면 하는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나는 이 집안의 쓰레기 같은 존재였잖아요, 그런 내가 죽으면 다들 아무렇지도 않았겠죠!”담아뒀던 서러움이 터지듯 말을 쏟아내는 송문수에 잠에서 깬 하지수가 그를 말리기 시작했다.“문수 씨.”하지만 송문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다.한동안 조용하다가 입을 연 허영지는 목이 멘 채로 말했다.“송문수, 너까지 나 힘들게 할 거야? 내가 죽는 꼴이라도 봐야겠어?”“내가 엄마를 죽이는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날 죽으라고 내몰았던 사람이 엄마 아빠예요.”말을 마치고 나서 바로 핸드폰을 내던지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바닥에는 깨진 핸드폰이 나뒹굴고 있었고 송문수는 방문을 세게 닫으며 밖으로 나갔다.어릴 때부터 참지 않던 송문수라도 그가 이렇게 화내는 건 처음 본 하지수는 다급히 뒤쫓아가려 했지만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 때문에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네, 아버님.”“지수야, 너 지금 문수랑 같이 있어?”“아까까진 같이 있었는데 문수 씨 방금 나갔어요.”“문수 괜찮은 거야?”“모르겠어요. 어머님은 좀 어떠세요?”“화나서 계속 울지 뭐.”제 아내를 말릴 수도 없었던 송기명은 뒤늦게 허영지를 대신해 해명했다.“사실 이 사람도 문수한테 뭐라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너무 슬퍼서 순간 아무 말이나 막 한 것 같아.”“알아요.”하지수도 허영지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송문수에게는 상처가 되었을 거라 마음이 안 좋았다.“지금 병원으로 좀 올래?”“문수 씨 핸드폰도 안 가지고 나가서 전 문수 씨 찾으러 가야겠어요.”“걘 아무 일도 없을 거니까 걱정 마.”“왜 문수 씨는 아무
“송승우가 또 수술받으니까 어머님 아버님이 못 버틸 것 같아서 그냥 입 다물고 있은 거잖아. 그렇게라도 응어리 좀 풀라고.”“나 그 정도로 속 깊은 사람 아니야. 그냥 말하기 싫었을 뿐이지.”“난 못 속인다니까.”매번 거짓말을 할 때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송문수이기에 하지수는 그가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 다 알 수 있었다.“문수 씨는 진짜 좋은 사람이야.”하지수는 송승우보다 송문수가 더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물론 송승우도 부모님을 아주 공경했지만 어릴 때부터 사랑을 독차지해온 그는 다 커서도 집안의 관심만 바랐지 집안에는 그 어떠한 공헌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늘 형에게 밀려나 찬밥신세이던 송문수는 항상 부모님 곁을 지키며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해결하는데 발 벗고 나서곤 했다.“나 이제 잘 거야.”그래서 대견스러워서 한 말인데 송문수는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는 게 부끄러웠는지 귀가 빨개져서는 욕실로 도망가버렸다.그런 송문수의 뒷모습을 보던 하지수는 자신이 따라온 게 정말 다행이라고 여겨졌다.만약 송문수를 혼자 보냈다면 그는 지금까지도 가족들의 이해를 받지 못한 사실에 괴로워하고 있었을 텐데 하지수 덕분에 조금이나마 나아진 것 같았다.어릴 때부터 모든 사람의 시선은 송승우에게 집중되어있었다, 물론 그 사람들 중에 하지수도 포함이었다.그럼 송문수도 질투하고 부러워할 만도 할 텐데 하지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송문수가 송승우의 것을 탐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그래서 그 속이 얼마나 문드러졌을까 싶어 하지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지금은 송승우도 중환자실에 누워있고 시부모님도 아들을 지키겠다고 몸을 혹사시키고 있었기에 하지수가 이런 슬픔에 잠겨있을 때가 아니었다.그래서 그녀는 이런 생각이 일파만파 퍼져나가는 걸 막고자 눈을 감았다 뜨며 모든 일이 제자리로 돌아온 다음에 송문수를 제대로 달려줘야겠다고 다짐했다.샤워를 마친 송문수는 잠을 청하려고 침대에 누웠지만 자신이 정말 잘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눈만 감으
병원을 나선 송문수가 택시를 잡아타려고 할 때 하지수가 뛰어나오며 그를 불렀다.“문수 씨!”하지수를 본 송문수는 당장이라도 차를 출발시키고 싶었지만 그녀가 아주 다급해 보여서, 그녀에게 욕을 먹더라도 그냥 돌려보내고 싶지는 않아서 문을 연 채로 하지수가 탈 때까지 기다렸다.사실 하지수도 송문수가 저를 기다리지 않고 그냥 가버릴까 봐 걱정됐는데 여전히 멈춰있는 차에 안심하며 빠르게 올라탔다.기분이 나빠서 호텔이든 어디든 가서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건 알겠지만 그러다가 연락이라도 안 되면 하지수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기에 이렇게 따라 나온 거였다.하지수가 차에 앉은 걸 확인한 송문수가 차를 출발시켰고 둘은 정적 속에서 호텔로 향했다.하지수는 몇 번이나 그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무심히 창밖만 내다보는 송문수에 차마 입을 뗄 용기가 생기지 않아 그저 침묵을 유지했다.송문수에게도 혼자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그런데 호텔 방으로 들어오자 송문수는 하지수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하지수, 나 욕할 거면 빨리해. 참을 필요 없어. 욕 다 하면 나도 잘 거야.”“뭐?”예기치 못한 말에 하지수가 어리둥절해 하며 묻자 송문수가 말을 이었다.“송승우가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와중에 잠이나 자겠다는 내가 이해 안될 수도 있지만 나도 어제부터 못 자서 지금 좀 피곤해. 사람이 오랫동안 잠을 못 자도 심장마비로 죽거든.”“나 당신이랑 같이 자러 온 거야. 어제 나도 잘 못 잤어.”“당신이 마음 불편해서 못 잘까 봐 온 거라고. 나는 당신이 안 잔다고 버틸까 봐 그게 더 걱정됐어.”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하지수의 반응에 송문수는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나도 당신한테 화낼 줄 알았어?”“화내는 게 당연하잖아.”씁쓸한 투로 말하며 시선을 돌리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어차피 송승우도 언젠가는 알게 될 사실이었어.”그 말을 들은 송문수는 역시나 하지수도 제가 송
“왜 이래? 왜 갑자기 안 보이는 거야?”눈도 깜빡이지 않고 송승우를 바라보던 허영지는 갑자기 내려진 커튼에 슬픈 눈을 하고 병실을 나서는 간호사에게 물었다.“환자분 쉬셔야 하니까 일단은 다들 돌아가 계세요.”“난 안 가요. 내 아들 옆에 있을 거예요.”“환자분이 가족들 보는 걸 원치 않습니다.”간호사의 입에서 나온 믿기지 않는 말에 허영지는 또 눈물을 터뜨렸다.“왜 우릴 안 보겠다는 거예요? 안에서 혼자 있으면 힘들 텐데...”“환자분한테도 혼자만의 시간을 줘야죠.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드릴 테니까 일단은 돌아가 계세요.”“난 안 가요.”허영지가 고집을 피우자 마찬가지로 송승우 옆에 있고 싶었던 송기명도 움직이지 않았다.“문수 넌 이제 그만 가.”“어젯밤도 샜으니 돌아가서 자.”쌀쌀맞은 엄마의 말투에서 저건 관심이 아니라 타박임을 눈치챈 송문수는 엄마가 저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전 호텔에 가 있을게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세요. 바로 올게요.”하지만 송문수의 말에도 허영지는 대답 없이 차가운 등을 보일 뿐이었다.그에 고개를 떨군 송문수는 돌아서기 전 마지막으로 줄곧 허영지의 곁을 지키며 한마디도 않고 있던 하지수를 쳐다보았다.말없이 눈물만 흘리던 그녀도 제가 송승우에게 사실을 말해버렸다고 원망하는 것 같아서 송문수는 결국 씁쓸하게 발걸음을 돌렸다.하지만 하지수는 원망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송문수를 안쓰럽게 쳐다보고 있었다.송문수가 먼저 다리를 잘라냈다는 말을 했을 리가 없다고 믿고 있던 하지수는 그가 해야 할 말을 못하고 혼자 속앓이를 하는 것 같아 입술을 말아 물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예전의 송문수라면 모르겠지만 함께 일 하면서 봐왔던 송문수는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만약 그가 정말 상황파악도 못 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큰 회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지는 못했을 것이다.혹시라도 너무 속상해서 해명하길 거부하는 것일까 봐 하지수는 용기를 내어 시부모님을 보며 말했다
의사의 질문에 송문수는 입술을 말아 물며 답했다.“오른쪽 다리가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그걸 말하면 어떡합니까! 아직은 회복도 채 안 됐고 그런 큰 충격을 받으면 회복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가족분들이 그 정도는 주의해주셔야죠.”의사의 말이 끝나자 허영지도 분노의 화살을 송문수에게로 돌려버렸다.“넌 어쩜 아직도 이러니? 승우가 어떤 상황인지 뻔히 알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그 나이 먹었으면 할 말 못 할 말 정도는 가려야지. 만약 승우가 너 때문에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도 따라 죽을 거야!”허영지가 목놓아 울자 송기명도 미간을 찌푸린 채로 허영지를 다독이며 말했다.“오늘 일은 나도 실망이다 너한테. 서른 살 넘으면 뒤도 안 보고 일부터 저지르는 버릇은 좀 고칠 줄 알았는데.”가족들의 질타에 해명을 하려던 송문수는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어릴 때부터 송승우와 송문수가 싸울 때면 부모님은 늘 송승우의 편만 들어줬기에 송문수는 지금 이 상황에 송승우가 스스로 알아챘다고 한들 저를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그래서 입 아프게 더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선생님, 그럼 이제 어떡해요?”“애가 제 몸 상태를 알았으니 죽겠다고 하면 어떡해요... 선생님, 우리 아들 좀 살려주세요, 이제 고작 서른 좀 넘은 앤데 미래가 창창한 애를 제가 먼저 보낼 순 없잖아요...”대성통곡을 하는 허영지를 향해 의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지금은 별문제 없는데 계속 이렇게 우울해하다가 갑자기 이성을 잃으면 그땐 정말 위험할 수도 있어요. 이미 환자분이 본인 몸 상태를 다 알게 됐으니 가족분들은 위로해주면서 환자분이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주세요.”“우리 아들 국내 최고 연구기관에서 일하는 애예요, 어릴 때부터 1등을 놓친 적이 없던 애라 절대 받아들이지 못할 텐데... 승우가 제 몸 상태를 알게 됐을 때 얼마나 충격이 컸을지만 생각하면 저도 죽을 것 같아요...”“차라리 그냥 내가 다치고 말지,
장기들은 다 있는 것 같은데 오른쪽 다리에만 느낌이 없는 게 아무래도 불길했다.“형, 진정하라니까.”“마취가 아직 안 풀려서 그런 거야. 마취만 풀리면 정상으로 돌아올 거니까 좀 기다려봐.”“아니야, 아무 느낌도 안 나잖아. 그냥 없어진 것 같아...”송문수의 위로에도 흥분하며 몸을 움직이던 송승우는 점차 제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지금 송승우는 자신이 다리를 잃었다는 생각에 송문수의 말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환자의 강한 움직임에 여러 가지 중요한 수치가 변하자 중환자실에서부터 경보음이 울려고 빠르게 뛰어온 의사들은 모니터에 표시된 수치들을 보더니 곧바로 송승우를 수술실로 데려갔다.송승우의 심장박동이 놀라울 정도로 느려진 걸 본 송문수는 깜짝 놀라며 재빨리 의료진들을 도와 송승우를 수술실로 옮겼다.한편 하지수의 거듭되는 설득에 밥을 먹고는 송기명과 허영지는 아들 걱정에 일찌감치 병원으로 나왔는데 때마침 수술실로 뛰어가는 송문수와 침대에 누워있는 송승우를 보게 되었다.위험한 고비는 넘겼다더니 또 무슨 일로 수술실에 가는지 몰랐던 그들은 어두워진 의료진들의 안색을 살피며 놀란 심장을 부여잡았다.마음 약한 허영지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 하자 송기명과 하지수가 그녀를 부축했고 하지수는 괜찮을 거라고 허영지를 다독이며 그녀와 함께 수술실 앞으로 다가갔다.가족들이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초조하게 문 앞을 서성이던 송문수를 하지수가 나지막하게 불렀다.“문수 씨.”그에 고개를 홱 돌린 송문수는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아까 의료진들을 도와 송승우를 수술실로 옮길 때 송승우의 손이 그의 손에 닿았는데 그게 사람의 손이라고는 전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차가워서 송문수는 아직도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왜 그래, 말 좀 해봐.”“승우, 우리 승우 괜찮은 거지?”하지수는 하얗게 질린 송문수가 걱정됐지만 허영지는 송문수의 안색은 신경 쓰지 못하고 송승우의 안부를 물었다.송문수는 가족들의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송승우가 본
“너 혼자야?”힘겹게 내뱉은 목소리였지만 그게 너무나도 미약해서 송문수는 송승우에게로 가까이 붙은 채 몸을 숙여야만 그가 뭐라고 하는지 그나마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엄마 아빠도 너 걱정했어.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당분간은 면회 못한다고 해서 어제 호텔로 먼저 보냈어. 보고 싶으면 지금 바로 전화할게.”송문수의 말에 괜찮다며 고개를 젓던 송승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나 많이 다쳤어?”“생명엔 지장 없대, 그런데 교통사고가 워낙 크게 나서 장기들이 많이 손상됐대. 그래서 여기 당분간 있는 건데 최고로 좋은 의료진들만 붙였으니까 걱정 마, 곧 괜찮아질 거야.”“나 얼굴은 멀쩡해?”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멈칫하던 송문수는 솔직하게 말해주었다.“얼굴이 붕대로 다 감겨있어서 안 보여.”“눈, 코, 입, 귀는 멀쩡한 것 같아.”“팔다리는 다 있어?”하지만 또다시 들려온 질문에는 곧바로 답을 하지 못하는 송문수였다.이렇게 빨리 저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지만 교통사고에서 깨어난 환자가 가장 궁금해할 게 본인의 목숨과 몸 상태일 테니 송문수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교통사고에서 가장 흔한 후유증이 얼굴 흉터와 장애라서 저런 질문을 하는 건 알겠지만 송문수는 바로 대답을 못 하고 눈을 피하기만 했다.“송문수.”“다 있어.”결국 의사의 당부 때문에 송승우의 회복을 돕고자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송문수의 긴장한듯한 반응에서부터 송승우는 무언가 눈치를 챈 듯했다.그 힘든 와중에도 그는 흥분을 한 건지 언성을 살짝 높였다.“너 아까 망설였어.”“거짓말이지?”“아니야. 정말 다 멀쩡해.”“맹세해 그럼.”“맹세할게.”죄책감이 점점 켜졌지만 송승우의 감정변화를 느낀 송문수는 아직은 중환자라 큰 충격은 피해야 하는 송승우를 위해 일부러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그게 거짓말이면 넌 평생 하지수랑 같이 못 있어.”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하는 송승우에 송문수는 마른 침을 삼켜냈다.제 목숨을 담보로는 맹세할 수 있어도 하지수와의 감정을
예수진:[그럼 너랑 지수 다 서울에 있는 거야? 아직 병원이야?]예수진:[부모님은 좀 어떠셔? 충격이 크시지?]그들의 문자에 하나하나 답장을 하던 송문수는 점점 더 침울해졌다.누구한테 일어나도 참혹한 비극인데 그 일이 제 형한테 일어났으니 송문수는 어떻게 송승우를 바라봐야 할지 몰랐다.근심 속에서 밤이 깊어지자 하지수가 송문수에게 문자를 보냈다.[자?][아니.][병원에서 잘 수 있으면 어디서 눈이라도 좀 붙여. 문수 씨도 쉬어야지, 어머님 아버님이 못 버티시면 남은 건 당신뿐이야.][알아 나도. 넌 왜 아직 안 자? 시간 늦었는데.][당신이 걱정돼서.][뭐하러 날 걱정해, 난 괜찮아. 송승우가 문제지...]그의 문자에 어떤 말로 답을 해야 할지 몰랐던 하지수는 말을 잇지 못했고 송문수도 그만 대화를 끝내려 했다.[늦었으니까 얼른 자.][응.][나 대신 부모님 좀 잘 챙겨줘, 엄마 아빠 쓰러질까 봐 나 너무 무서워.][내가 계속 옆에 있을 거니까 걱정 마.]핸드폰을 내려놓은 송문수는 중환자실 앞에 놓인 딱딱한 의자에서 밤을 지새웠다.중환자실에서 나온 송승우가 바로 입원할 수 있게 병원에서 VIP 병실을 열어줬지만 송문수는 그 편한 곳도 마다하고 굳이 송승우 옆을 지키고 있었다.아무리 송승우라 해도 이런 곳에 혼자 있으면 무서울까 봐.불편한 잠자리 때문에 아침까지도 제대로 정신을 못 차리던 송문수는 간호사의 친절한 부름에 서서히 눈을 떴다.“보호자분?”잔뜩 충혈된 눈을 하고 몸을 일으킨 송문수는 의아한 눈으로 간호사를 바라보았다.“환자분이 보호자분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송승우 씨가요?”중환자실을 가리키며 당황한 듯 묻는 송문수를 향해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송문수 씨가 중환자실로 와줬으면 하세요.”“면회 안된다면서요?”“좀 전에 선생님이 또 몸 상태 체크하셨는데 이젠 다 정상수치로 돌아와서 면회 가능하시대요. 대신 시간만 좀 주의해주세요. 아직 몸이 약하셔서 이럴 때는 저희도 환자분 부탁이라면 뭐든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