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민이는 달콤하게 자는 육현경을 깨우고 싶지 않은지 애석해하는 얼굴로 급히 소이연에게 목소리를 낮추라고 손짓했다.소이연은 이내 입술을 오므리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민아, 네 아빠가 소파에서 하룻밤을 자도 괜찮지만...”육민이는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러면 아빠한테 제 방에 들어가서 주무시라고 해도 돼요?”“그게 아니라 은지 이모한테 연락해서 데리러 오라고 하면 어떨까? 술에 취했으니 돌봐줄 사람이 필요할 거야.”육민이는 곧장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제가 돌보면 안 돼요?”“민이는 아직 어려서 안 돼.”“그러면 엄마가 돌봐줄 수 없나요?”소이연은 진지한 말투로 그의 물음에 답했다.“지금 엄마 아빠의 관계로는 도를 넘는 행동이야.”육민이는 솔직히 기분이 언짢았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곧이어 소이연은 전에 연락처를 교환한 적 있는 진은지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냈고 한참이 지나도 답장이 없자, 결국 통화를 걸었다.몇 번의 통화연결음 끝에 진은지가 연락을 받았고, 전화기 너머로 엄청나게 시끄럽다가 조용해졌다.“이연 언니, 무슨 일이에요?”“육현경이 지금 술에 취해서 자고 있는데 데리러 올 수 있어요?”“죄송해요, 제가 지금 친구를 위로해 줘야 해서 갈 수가 없네요. 하룻밤만 언니 집에 묵게 해도 괜찮을까요?”소이연은 그녀의 안일한 태도에 화가 나서 센 말투로 되물었다.“은지 씨, 아무리 그래도 남자 친구를 전 애인의 집에 묵게 하는 건 부적절하지 않아요?”사실 소이연은 진은지가 남자 친구를 버리고 놀러 간 걸 자기의 세계관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답답하기만 했다.그러나 진은지도 덩달아 언성을 높이면서 말했다.“뭐가 부적절하다는 거죠? 민이의 아빠로서 아들이랑 하룻밤 자는 게 어때서요? 저는 오히려 두 사람을 같이 살지 못하게 하는 언니가 잔인하다고 생각하는데요.”소이연은 진은지가 정말로 단순한 건지 아니면 두 사람 사이를 개의치 않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분통이 터졌다.“은지 씨, 내가 육현경
육민이는 소이연과 함께 육현경을 가까스로 침대에 눕히자마자 경악했다.“큰일 났어요!”소이연도 덩달아 긴장한 모습으로 걱정스럽게 물었다.“무슨 일이야?”육민이는 곧이어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시간이 벌써 이렇게 늦었다니, 내일 브이로그를 제출해야 하는데 편집하지 못했단 말이에요.”“그러면 빨리 가서 편집해.”육민이가 또다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제가 편집을 하면 아빠를 돌봐줄 사람이 없잖아요...”소이연을 계속 바라보는 육민이의 눈빛은 분명히 도움을 바라는 거였다.소이연은 사랑하는 아들의 간절한 눈길을 거절할 수 없어서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알겠어, 그러면 엄마가 돌볼게.”“고마워요, 엄마! 엄마는 정말로 너무 좋아요!”육민이는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나갔고, 소이연은 문득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해적선에 올라탄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이내 한숨을 쉰 후, 육현경의 겉옷과 양말을 벗겨줬고 화장실로 가서 수건을 젖혀서 그의 얼굴을 닦아주면서 속으로 신세한탄했다.‘육현경이 뭐라고 내가 돌봐줘야 하지? 솔직히 내가 술을 마시게 한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얘는 왜 혼자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술을 마신 거야!’마음속으로 한참 동안 불평을 늘어놓다가 문득 진은지가 지금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 모르지만, 다른 남자와 같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소이연은 곧장 육현경의 잘생긴 얼굴을 주시하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이 잘생긴 얼굴로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매료시켰을까? 결국은 어린 여자한테 속아 넘어갔군.’그녀는 좋은 마음이 우러나왔는지 육현경의 윗옷을 벗겨주고 얼굴과 윗몸을 수건으로 닦아주면서 정성껏 돌봤다.곧이어 소이연은 문득 이상함을 감지했다.그도 그럴 것이, 육현경의 심장 소리가 멀리서도 들릴 것처럼 컸고 심박수도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뛰었기 때문이었다.그녀는 육현경이 알코올 알레르기 때문에 혈액 공급이 안 돼서 심근경색이 온 건 아닌지 걱정되었고 이내 머리를 그의 심장 가까이에 대고 확인하고는 고개를 들어
육현경은 그녀의 반짝이는 눈빛에 고개를 숙여 자기의 상체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걸 발견하고 얼른 옆에 있는 옷가지를 집어 상반신을 가렸다.소이연은 마치 그녀가 이득을 본 것처럼 격한 반응을 보이는 그에게 마음이 편치 않아서 눈살을 찌푸렸다.‘알몸을 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이럴 필요까지 있을까?’그녀는 다급하게 옷을 입는 육현경을 가만히 바라봤고, 육현경은 옷을 다 입은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나도 내가 왜 윗옷을 벗고 있는지 모르겠어, 고의적인 행동은 아니야...”그는 일어나는 동작이 너무 과했는지 아니면 술에 취해서 머리가 어지러운 탓인지 중심을 잃고 넘어질 것처럼 비틀거렸다.소이연이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부축하자,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손길을 황급히 피하다가 결국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넘어졌다.그 모습은 난처하기 그지없었고, 육현경도 당황한 나머지 바닥에 엎드린 채 한참 동안 멍해서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한편, 소이연은 그가 스스로 넘어져 죽을지언정 자기의 도움을 거부한다는 생각에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사실 그녀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에게 절대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하고 연신 심호흡하면서 속으로 화내지 말라고 다독였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천천히 일어났고 방 안의 분위기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그도 그럴 것이 평소 육현경한테 이 정도로 창피한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육현경은 어색한 나머지 부랴부랴 한마디 했다.“시간도 늦었으니까 이만 돌아갈게.”그는 곧이어 말을 이어 나갔다.“이따가 은지를 데리러 가야 하거든.”소이연은 진은지가 지금쯤 다른 남자랑 쾌락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육현경이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일지 정확히 짐작 가지 않아도 아마 열받아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에게 알리지 않으려고 극도의 통제력을 발휘하면서 입술만 오므렸다.게다가 남녀 사이에 선을 지키는 것이 맞다고 판단하고는 막지 않았다.“그러면 기사님한테 널 데려다주라고 할게.”“고마워.”소이연은
소이연은 육현경을 부축하면서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입구까지 배웅해 줬고 운전기사에게 그를 집까지 바래다 달라고 부탁했다.육현경이 차에 올라탄 후에도 인사 한마디 없이 매정하게 떠나자, 그녀는 크게 심호흡하면서 생각했다.“남자는 역시!’그 이후로 한동안 그녀는 육현경을 보지 못했고 가끔 육민이를 데리러 올 때 의례적으로 메시지를 보낼 뿐, 다른 때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어느 날 주말, 육씨 가문의 별장에서 돌아온 육민이가 그녀에게 한마디 했다.“엄마, 아빠가 은지 이모랑 결혼할 거래요.”마침, 물을 마시던 소이연은 갑작스러운 발언에 놀라 물을 그대로 육민이의 얼굴에 뿜었고 그의 억울한 표정에 급하게 사과했다.“미안해, 네 아빠가 은지 이모를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런 결정을 내린 걸 듣고 조금 놀라서 그랬어.”이때 육민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엄마, 솔직히 기분이 나쁘죠?”“아니야.”“그럼, 왜 이렇게 흥분했어요?”“조금 놀랐을 뿐이야.”육민이도 별생각 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아빠가 나이 때문에 빨리 결혼하고 싶어 하는데 은지 이모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은지 이모가 아직 젊어도 아빠를 사랑하니까 거절하지 않겠죠?”소이연은 육민이에게 육현경에 대한 진은지의 마음이 순수한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말해줘야 할지 말지 고민되어서 마음이 덩달아 서글퍼졌다.게다가 그녀의 한마디에 육현경과 육민이가 진은지의 실체를 알고 얼마나 실망할지 상상하기도 두려웠다.육민이는 그녀의 마음도 모른 채 아무런 반응이 없자, 다급하게 다시 물었다.“엄마, 왜 그래요?”“아무것도 아니야. 사실 엄마는 결혼이 인생에서 큰 선택이니까 무엇보다 신중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감정에 휩싸여서 하는 건 아니라고 봐...”육민이도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엄마의 말에 동의하지만, 아빠는 급한 모양이에요. 아빠가 은지 이모를 만나고 나서부터 많이 젊어진 것 같아요, 저
“주말이 아니라 오늘 밤?”“네가 사장인데 시간은 자유롭게 쓸 수 있잖아.”소이연은 예수진의 갑작스러운 제안을 받은 지 너무나 오래되어서 놀랄 따름이었다.“왜 갑자기 오늘 밤에 술을 마시자는 거야?”예수진은 신이 난 목소리로 답했다.“지원이가 출장을 갔거든.”소이연은 어이가 없어서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지원 씨가 알면 화낼 것 같은데 안 두려워?”“너랑 마시는데 뭐, 우리 지수도 부르자! 저번에 없어서 너무 아쉬웠단 말이야!”“좋아, 그런데 나 오후에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조금 늦을 것 같아.”예수진은 예상외로 순순히 동의했다.“괜찮아, 우리가 기다릴게.”“알겠어.”소이연은 휴대폰을 끈 후, 피곤함이 몰려오는지 관자놀이를 연신 주물렀다.그동안 일을 힘들게 해서인지 긴장을 풀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그녀는 회의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고는 퇴근하자마자 약속 장소로 향했다.예수진이 있는 자리에 과음은 빠질 수 없었기에 세 여자는 만나서 예전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술을 마셨다.얼마 후, 다들 취한 상황에서 예수지이 계속 술집에 가서 노래를 부르자고 제안했다.시간이 늦었다는 핑계로 안 가겠다던 하지수는 예수지가 끝까지 밀어붙이자, 결국 옆에 있던 소이연에게 의견을 물었다.소이연도 솔직히 너무 늦은 시간이라서 집에 가고 싶었지만, 스트레스를 풀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컸다.“그냥 가서 앉아 있자.”소이연이 당연히 거절할 거라고 믿었던 하지수는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반응에 놀랐고 결국 두 사람을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세 사람은 곧장 방 안에 들어가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면서 술을 마셨다.사실 대부분의 시간을, 술을 마시는 데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이때 예수진이 갑자기 소이연을 바라보면서 물었다.“이연아, 너 요즘 마음이 답답하지 않아?”소이연은 자기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굳게 믿었는데 그녀의 날카로운 질문에 놀란 나머지 눈살을 찌푸렸다.“응?”예수진은 확신에 찬 얼굴로 다시 물었다.“내 말이
묵묵히 지켜보던 소이연의 다리가 뻐근해져서야 접착제처럼 붙어서 키스하던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두 사람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했고, 진은지는 남자의 품에서 나와 손을 잡고 떠나려다가 소이연과 눈이 마주치고 놀라서 짧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아!”놀란 마음을 좀처럼 진정시키지 못하는 진은지와 달리 소이연은 오히려 담담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이때 남자가 하얗게 질린 진은지의 얼굴을 보고 놀라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자기야, 왜 그래?”진은지는 도둑이 제 발 저린 듯 나지막하게 답했다.“아니, 아무것도 아니야.”그러나 그 남자는 계속 진은지에게 물었다.“저 여자 누구야? 네 친구야?”진은지는 한참을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내가 조금 있다가 찾아갈 테니까 먼저 저쪽 가서 기다릴래?”“우리 호텔을 가기로 약속했잖아. 자기야, 나 못 기다리겠단 말이야.”그녀는 난처한 상황에서 남자가 몸까지 비벼대자, 당황해서 얼른 밀쳐냈다.“빨리 내 말대로, 저쪽으로 가줄래?”남자는 단호한 그녀의 태도에 어쩔 수 없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럼, 기다릴게.”곧이어 진은지는 소이연이 떠나가는 남자의 뒷모습과 자기를 번갈아 보자,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애써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이연 언니를 여기서 만나다니 너무 뜻밖인데요.”소이연도 덩달아 조롱 섞인 말투로 받아쳤다.“그러게요, 정말로 공교롭네요.”“혼자 왔어요?”“그게 중요한가요?”“전 친구들이랑 같이 왔거든요. 잘생긴 남자애들도 많은데, 이참에 같이 놀래요?”소이연의 눈빛이 차가워지고 안색도 어두워진 걸 발견한 그녀는 결국 이실직고했다.“이연 언니도 알다시피 제가 아직 젊어서 때로는 노는 걸 주체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가볍게 놀기도 하지만, 현경 씨에 대한 내 마음은 진심에요. 그러니까 오늘 일은 비밀로 하면 안 될까요?”그러나 소이연은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그럴 수는 없죠.”진은지는 결국 필살기인 애교까지 부렸다.“다 같은 여자끼리 이
소이연은 예전의 성격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육현경에게 연락했겠지만, 문득 육현경이 진은지에게 프러포즈할 거라는 육민이의 말이 떠올라 침묵을 지켰다.‘만약 육현경이 은지 씨의 실체를 알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겠다는 그녀의 말이 진심인 걸까?’진은지는 또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이연 언니, 지금 당장 여기를 나간 후부터 다시는 클럽에 발을 들이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현경 씨한테 제발 말하지 말아 주세요!”소이연은 결국 그녀의 말에 타협하고 말았다.“다음에는 정말로 봐주지 않을 거예요.”진은지는 그제야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정말 고마워요! 그러면 전 이만 가볼 테니까 안녕히 계세요.”소이연은 총총히 떠나는 진은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육현경은 어쩌다가 은지 씨를 좋아하게 됐을까...’그녀는 이내 화장실을 갔다가 방으로 돌아갔고 여전히 술을 마시던 예수진과 하지수는 황급히 그녀를 잡아당겨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그런데 술을 마시던 중, 예수진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이연아, 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소이연은 순간 어리둥절했다.‘그렇게 티 났나?’“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어?”“아무것도 아니야, 시간도 늦었는데 우리 이제 가자.”“아직 12시도 안 됐단 말이야.”소이연은 결국 계지원을 핑계 대면서 협박했다.“다음에 다시 모이면 되지. 네가 오늘 인사불성이 된다면 지원 씨가 다음부터 널 못 나오게 할 거야.”예수진은 이내 불쾌한 듯 입을 삐쭉 내밀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하지수도 이성적인 성격이었기에 집으로 가자는 제안에 금방 마음을 추스르고 떠날 준비를 했다.곧이어 세 사람은 술집을 나섰고 한 차에 올라타서 집으로 향했고 소이연의 별장이 가장 멀다는 이유로 그녀는 예수진과 하지수를 차례로 바래다줬다.얼마 후, 차 안에 혼자 남겨진 그녀는 마음을 더 이상 감추지 못했고 휴대전화를 꺼내 번호를 눌렀다, 지우기를 계속 반복하다가 마침내 용기를
집으로 돌아온 소이연은 밤새도록 진은지가 육현경을 배신하고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장면이 떠올라 잠을 설쳤다.그러다가 다음 날 오전 진은지한테서 온 연락을 본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평소보다 격양된 소리로 물었다.“은지 씨, 어젯밤 저와 했던 약속을 잊은 건 아니죠?”진은지는 얼른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이연 언니, 내 말 좀 들어보세요. 어젯밤 술에 취한 채로 집에 들어갈 수 없어서 본가에 가서 잤어요. 현경 씨한테 미안할 일을 하지 않았으니까 제발 믿어 주세요.”그러나 소이연은 냉소적인 태도로 다시 물었다.“내가 은지 씨의 말을 어떻게 믿죠?”“그게...”진은지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태도를 확 바꿨다.“언니 설마 아직도 현경 씨를 좋아해요?”어젯밤 황당한 상황에서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육현경에게 알리지도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던 소이연은 그녀의 한마디에 이성을 잃고 눈에 띄게 흥분하면서 되물었다.“무슨 소리예요?”이때 진은지가 더욱 세게 밀어붙였다.“설마 수치심 때문에 화내는 건 아니죠?”“진은지 씨!”“난 사실 언니의 인품을 굳게 믿었어요. 언니랑 현경 씨가 헤어졌음에도 가끔 연락하는 걸 보고 민이 때문이라고 믿으면서 존중했고 더욱이 민이의 존재를 받아들이려고 노력까지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언니가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드네요.”소이연도 진은지의 말에 화가 나긴 마찬가지였다.“은지 씨, 내가 정상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으로서 당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충고하는 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내가 아닌 그 누구라도 어젯밤의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는 없었을 거예요.”진은지는 아까보다 더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하는 건 오버 아닌가요? 난 언니가 우리의 일에 끼어드는 걸 원치 않아요.”“내가 끼어들었다고요?”소이연은 문득 진은지와 정상적인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내 말이 틀렸나요? 현경 씨랑 잘 만나고 있는 와중에 끼어드는 건
“문수 씨.”하지수는 송문수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지금 송문수가 화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송승우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어쨌든 한 가족이 아닌가.그녀는 가정의 불화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그래도 승우 오빠를 병원에 보내야 하잖아.”하지수는 큰 소리로 송문수에게 말하자 송문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사실 송승우는 별일 없었다. 송문수는 격투기를 배운 적이 있기에 사람의 어느 부위가 다치면 안 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송승우를 이성을 잃을 정도로 때렸어도 급소를 때리지 않았다.하지수는 송문수의 대답을 듣지 못하자 다급히 핸드폰을 꺼내서 긴급구조 요청을 하였다.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하지수는 송승우에게 다가가지 않았다.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바닥에 쓰러진 송승우를 바라보았다.송승우의 분노가 극도에 이르렀지만 송문수와 싸울 힘이 없었다.사실 하지수도 요새 송승우와 송문수가 자주 싸우는 이유를 몰랐다. 오늘은 벌써 두 번째였다.어렸을 때 두 형제의 관계가 그다지 친밀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지금 어른이 되었는데 아직 유치하게 싸우다니!이윽고 구급차가 도착했고 구조대원들은 들것으로 송승우를 구급차에 태웠다.하지수도 따라서 올라탔지만 송문수는 타지 않았다.하지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내려와서 송문수를 잡아당겨서 같이 구급차에 올라탔다.구급차 안은 매우 조용하였다.아무도 말하지 않았고 차 안의 분위기에 아직 분노의 불꽃이 튕기는 것 같았다.병원에 도착한 후 송승우는 응급실로 옮겼다.하지수와 송문수는 로비에서 기다렸다. 송문수는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면서 한쪽에 서 있었다.사실 하지수는 송문수의 얼굴에도 상처가 있는 것을 보았다. “문수 씨도 얼굴과 몸에 난 상처를 검사하지 않을래?”“필요 없어. 외상이라 금방 나을 거야”송문수가 이렇게 말하자 하지수도 강요하지 않았다.잠시 후, 송승우는 응급실에서 나왔고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모두 외상이라 별문제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지금 입원 수속
“놓지 못해?”송문수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면서 송승우를 바라보았다.서로 마주 본 두 사람의 눈에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일촉즉발의 분위기였다.“이거 놔요.”하지수도 송승우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 그러자 송승우의 눈빛에 분노로 이글이글 타올랐다.그는 더욱 세게 하지수를 잡아당겼다.하지수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아파요!”송문수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놓으라고 했다!”그는 송승우의 팔을 끌어당기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이에 송승우는 통증을 느꼈으나 승부욕 때문에 쉽게 놓을 수가 없었다.송문수가 힘을 줄수록 그도 더욱 힘을 줘서 하지수를 잡아당겼다.하지수는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송승우는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이걸 놔. 나와 지수의 일에 끼어들지 마.”“끼어들지 말라고?”송문수는 냉소를 지으면서 말했다.“형이 잊은 것 같은데 지수는 내 와이프야. 우린 부부이지만 형과 지수는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지금 형이 내 와이프를 데려가려고 하는데 나보고 끼어들지 말라고?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너!”송문수의 쏘아붙인 말에 송승우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예전에 송승우는 하지수가 자신을 좋아했기 때문에 송문수를 안중에 넣지도 않았고 그들의 결혼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한 적도 없었다.그러나 지금 송문수에게 이런 모욕을 당하다니!“지수가 좋아한 사람은 나야!”송승우는 수치심에 더 약이 올라서 노기어린 목소리로 외쳤다.하지수는 너무 아파서 반박할 힘도 없었고 송문수의 말이 들려왔다.“지수가 누구를 좋아하든 지금은 내 여자야. 누구도 데려갈 수 없고 누구도 지수를 괴롭힐 수 없다고! 셋까지 셀 테니 지수를 놓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송승우는 끄덕하지도 않고 송문수를 노려보았다.“하나.”“둘.”송문수는 ‘셋’을 세는 대신 주먹을 들고 송승우의 얼굴을 세게 강타했다.송문수의 한 방을 맞은 송승우는 코피를 흘렸고 아픔으로 이내 하지수를 놓아주었다.그러나 송승우는 소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늘
‘내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건가?’“승우 씨, 사과 따위 이제 필요 없어요. 지금 제가 바라는 건 아무 탈 없이 우리 사이의 관계를 끝내는 거예요. 승우 씨는 문수 씨 형이잖아요. 게다가 저도 어릴 때부터 송씨 가문에서 자란 사람이고요. 그러니까 우리 그냥 친척 같은 관계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하지수는 인내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말했다.송승우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수는 더 이상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망상에 빠진 사람은 무슨 말을 하든 헤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으니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하지수는 뒤를 돌아 송문수 쪽으로 다가가려 했다. 늦은 시간이었고 그녀도 여전히 많이 피곤했다. 송문수랑 같이 집으로 가서 자고 싶었다.크레지가 아직 오지 않은 이상, 기술 투자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은 이상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짬짬이 시간을 내서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막 돌아서려는 순간, 그녀의 손은 또다시 송승우에 의해 붙잡혔다.하지수가 아무리 팔을 흔들어도 벗어날 수 없었다.송문수는 차가운 눈빛으로 송승우의 행동을 지켜보며 주먹을 꽉 움켜잡았다.그가 앞으로 다가가 하지수를 데려오려던 순간, 송승우가 갑자기 말했다.“지수 씨, 방금 당신의 행동은 모든 걸 말해줬어요!”“무슨 행동이요?”하지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방금 제가 불렀을 때, 제 쪽으로 다가왔잖아요. 그게 지수 씨 마음속에 있는 진심이에요. 더 이상 숨기지 말고 저한테로 오세요. 하지수 씨, 제가 잘 해줄게요. 지수 씨를 혼자 두는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제가 맹세할게요...”“아니요.”하지수는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하지수를 바라보는 송승우의 눈빛은 분노로 가득 찼다.“승우 씨가 불었을 때 따라간 건 무의식적으로 간 거예요. 잠에서 덜 깬 상태라서 누가 불렀어도 갔을 거예요. 승우 씨인 줄도 몰랐어요.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할게요. 낯선 목
송문수는 하지수가 일어나서 송승우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송승우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생각했다.‘그래, 지수 씨도 아직 날 신경 쓰고 있다니까. 숨기려 해도 어떻게 숨기겠어? 이런 상태에서야 비로소 진심이 드러나는 거지.’송문수는 멀어져 가는 하지수를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옷자락에 손이 닿았을 때 살짝 멈칫했다. 하지수를 강제로 붙잡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사실 그는 항상 하지수의 선택을 존중해 왔다. 지금까지 변함없이 말이다.하지수는 송승우 앞으로 걸어갔고 송승우가 먼저 손을 뻗더니 그녀를 끌어당기려 했다.그러나 그가 손을 뻗자 하지수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승우 씨?”그녀는 그제야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다.조금 전까지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던 상황이 이제와사 분명해졌다.그녀는 자신이 언제 잠에 들었는지도 몰랐다. 그저 너무 피곤해서 머리가 흐릿할 뿐이었다.“너무 늦었어요. 제가 데려다줄게요.”송승우가 그녀를 끌고 나가려고 하자 하지수는 급히 그의 손을 쳐내며 말했다.그러자 송승우는 눈살을 찌푸렸다.“아까는 잠에서 덜 깨서 그랬어요. 전 문수 씨랑 같이 갈 거예요.”“뭐라고요?”송승우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언제까지 연기할 거예요?”“네?”하지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송승우가 왜 갑자기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저를 놀리는 게 재밌으세요?”송승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저... 저는 그런 게 아니라...”하지수는 당황해하며 말을 더듬었다.그러자 송승우가 입을 열었다.“알겠어요. 제가 잘못한 걸로 하죠.”그가 갑작스레 사과를 하자 하지수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녀는 송승우가 왜 갑자기 사과를 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왜 사과를 하는 거야?’“미안했어요. 어쩔 수 없이 떠난 거라고는 하지만 우리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잖아요. 결혼식장에 지수 씨 혼자 남겨두고 간 건 제 잘못이에요. 미안해요.”하지수는 그제야 무슨 말인지 이해했
하지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심장은 여전히 빨리 뛰고 있었다.그녀는 전혀 말을 듣지 않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만약 누군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이 어색한 상황이 얼마나 계속될지 알 수 없었다.‘문수 씨도 부끄러워하는 건가?’하지수는 입술을 꽉 깨물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애썼다.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올까 봐 걱정이었다.하지수는 소파에 앉아 몰래 송문수를 쳐다보았다.그는 그저 고위직 직원의 얘기를 듣고만 있을 뿐, 전혀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깊게 숨을 쉬었다.‘단지 어색해서 그런 건가?’송문수는 언제나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해명하려 하지 않는 것도 결국 체면을 세우려고 그러는 건가?’하지수는 너무 많은 기대를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잡았다....크레지를 맞이하기 위해 모든 관련 부서가 계속해서 야근을 하고 있었다.송문수와 하지수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들은 끊임없이 회의를 열고 논의하며 최대한의 성의를 보이기 위해 애썼다.새벽 2시가 되었지만 송문수는 아직 퇴근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방금까지도 각 부서와 회의를 하면서 협력 계획과 판매 계획을 다시 수정하고 보완했다.회의가 끝난 후에도 송문수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계속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송문수는 그제야 그의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슨 서류든 제대로 보지 않고 사인을 해버렸었다. 하지만 이젠 점점 더 신중해졌고 모든 서류를 꼼꼼히 확인하고 나서야 사인을 했다.그 덕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고 오늘 하루 동안의 모든 서류를 처리하고 나서야 송문수는 퇴근을 하려고 하지수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는 이미 소파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것이었다.하지수는 잠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송문수의 기억 속에 하지수는 늘 자신보다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었고 절대 늦잠을 자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소파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많이 피곤한 걸까?’자세히 생각해 보니 그들은 지난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야
송문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그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밝아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하지수는 송문수를 더 방해하지 않으려 했다. 송문수가 점점 더 발전하는 걸 보면서 하지수도 그를 더 지지해 주고 싶었고 송문수로 하여금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하지수는 옆에 있는 소파로 가서 노트북을 들고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그리고는 습관처럼 회사의 공식 채팅방에 들어갔다.그녀는 비록 알림을 꺼 놓았지만 회사의 공식 채팅방에 메시지가 있으면 항상 첫 번째로 확인하곤 했다.그런데 그때, 그룹 채팅에 있는 메시지를 본 하지수는 깜짝 놀랐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아마 이 상황을 믿기 어려워할 것이었다.송문수가 회사의 공식 채팅방에 ‘하지수’라는 이름을 여러 번 보낸 것이었다.하지수는 고개를 들어 송문수를 바라보았다.그는 진지하게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채팅방에는 여전히 ‘하지수’라는 이름이 올라오고 있었다.“문수 씨, 컴퓨터 바이러스에 걸린 거 아니야?”하지수가 물었다.“어?”송문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했다.하지수는 송문수 앞에 서서 그의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화면에는 타자를 해놓고 아직 보내지 않은 ‘하지수’도 있었다.송문수도 그제야 자신이 채팅방에 ‘하지수’라는 이름을 여러 번 입력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 자신도 놀란 듯했다. 그는 자신이 타자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하지만 방금 그의 머릿속이 온통 하지수로 가득 찬 건 사실이었다.그때, 채팅방에서 누군가 메시지를 보냈다.[회장님 지금 하 매니저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그걸 실수로 단체 채팅방에 보낸 거고?]메시지는 보내지자마자 삭제되었고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나도 잘못 보냈네!”그룹 채팅에 두 개의 삭제 기록이 나타났다.송문수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그제야 메시지를 삭제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그는 ‘하지수’라는 메시지들을 삭제하려 했지만 이미 메시지를 취소할 수 있는 시간이
송승우는 이를 꽉 악물었다. 그는 하지수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하지수에게 송문수를 고른 게 얼마나 잘못된 선택이었는지 반드시 알게 해주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로 하여금 후회하도록 만들겠다고 다짐했다....하지수는 송승우의 사무실을 떠나 바로 송문수의 사무실로 갔다.송문수는 업무에 몰두해 있었다.회사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는 자유시간이 없었고 퇴근 후에도 여전히 업무와 관련된 일들을 처리하고 있었다.하지수는 송문수가 많이 변했다고 느꼈다. 그녀는 하느님도 부지런한 사람을 도울 거라 믿으며 송문수가 앞으로 큰 성과를 낼 것이라고 확신했다.“형이 뭐라고 했어?”송문수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며 차갑게 물었다.“자기 개인 비서로 되어달라고 하더라고.”하지수는 송문수에게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그에게 숨기고 싶지 않았다.송문수랑 같이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고 싶었기에 최대한 마음을 다할 생각이었다.송문수는 멈칫하더니 코웃음을 치더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가 어떻게 대답했는지 알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하지수가 그 제안을 무조건 받아들였을 거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지수가 형 요구를 거절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이번에도 알겠다고 했겠지...’이렇게 생각한 송문수는 일에 더 집중하려 애썼다. 회사 일을 제대로 해내기로 결심한 이상 중간에 포기할 생각은 없었으니 말이다.“거절했어.”하지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송문수는 가슴이 약간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분명 그녀의 말에 설렌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겉으로 티 내지 않으려 했다.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척 계속해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반면, 하지수는 송문수에게 그 어떤 반응도 기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송문수는 자기한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자신의 결정을 그에게 알리고 싶었을 뿐이었다.“왜 거절했는데?”송문수가 차분하게 물었다.“문수 씨한테 내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하지수는 웃으며
하지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송승우를 바라보았다.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말이다.어린 시절 그녀는 항상 송승우를 믿었고 그가 자기를 보호해 줄 거라 생각했었다. 송승우는 같은 또래 친구들보다 성숙하고 머리가 좋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순간, 그녀는 자신이 송승우에 대해 뭔가 오해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게다가 그가 지금 하는 행동이 너무 유치해서 하지수는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어떻게 이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지?’송승우는 하지수와 송문수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하지수가 몇 번이나 말했으니 모를 리 없었다. 지금은 송문수와 잘 지내고 있고 송승우와의 관계는 이미 끝난 거라고 말이다.그리고 송문수가 지금 송씨 그룹의 대리 회장직을 맡고 있다는 것도 분명 알고 있었다. 송문수의 결정이 회사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말이다. 송문수한테 도움이 더 필요했고 송문수가 받는 스트레스가 더 많았다.‘생각이 없는 건가? 어쩌면 이렇게 이기적인 말을 할 수 있는 거지?’“왜요? 제가 무슨 어려운 부탁이라도 했나요?”송승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하지수를 바라보며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승우 씨, 정말 제대로 일하려고 온 거 맞아요? 아니면 그냥 문수 씨를 못 믿어서 온 건가요? 문수 씨가 회사를 잘 관리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감시하러 온 거냐고요!”“당연히 일하러 온 거죠. 아니면 왜 연구소 일까지 내려놓고 회사로 왔겠어요! 그리고 또...”“아까 지수 씨가 그러셨잖아요. 송문수를 못 믿냐고요. 맞아요. 전 송문수 그 자식 못 믿어요. 송문수가 회사를 제대로 이끌 수 있을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성과를 하나 냈다고 교만해져서 마음대로 하려 할 겁니다.”“갑자기 드는 생각인데요. 승우 씨는 왜 그렇게 문수 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거예요?”하지수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게 아니라면 왜 문수 씨를 그렇게 모욕하고 내 곁에서 떼어놓으려 하겠어...’하지수의 능력이 얼마나
짧은 시간이었기에 송문수가 회사의 대체적인 상황을 잘 파악한 것만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는 단지 송문수에게 회사를 관리하는 재능이 있어서 해낸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송문수가 매일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하지수는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항상 그는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회사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연구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지어는 날마다 새벽까지 야근을 하다가 집에 돌아갔다. 게다가 차에서 보는 서류들도 모두 송씨 그룹과 관련된 문서였다.송문수는 원래 시간만 나면 게임을 하거나 먹고 자고 놀기만 했던 사람이었다. 얼마 안 되는 사이에 송문수는 정말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된 것 같았다....송문수의 말대로 하지수는 다음 주에 회사로 찾아올 크레지를 위해 연관 업무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송문수와 하지수가 일 처리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사님들도 점점 두 사람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맡긴 업무에 대해 불평이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바로 행동에 옮기기만 했다.그러면서 송문수와 하지수의 업무 부담도 줄어들었고 회사도 더 원활하게 운영되고 있었다.회의가 끝난 후, 하지수는 송문수를 따라 그의 사무실로 갔다.요즘 들어서 그녀는 송문수의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것에 익숙해졌던 것이다. 송문수는 자주 회사의 전문 용어나 이해할 수 없는 마케팅 계획에 대해 물었고 그녀는 언제 어디서든 그가 묻는 말에 답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서로의 사무실을 오가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지수 씨, 잠깐 제 사무실로 올 수 있으세요?”그때, 송승우가 갑자기 하지수를 불렀다.하지수는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송문수를 한 번 바라보았다.“네 마음대로 해.”송문수는 이렇게 말하고 큰 걸음으로 사무실을 떠났다. 질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지수는 속으로 약간 허탈감을 느꼈다.송문수가 많이 변한 건 사실이었지만 하지수에 대한 감정은 별로 진전이 없는 것 같았다. 물론 그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