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뒤, 권재민은 한껏 어두워진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었다.“가능성이 크다고? 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히 이 프로젝트 책임자가 처음부터 개입해 손을 썼겠지.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이렇게 한참을 헤매다 이제야 찾았다니.”윤기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였다. 솔직히 권재민이 화라도 낼까 봐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어쩐지. 회사 기밀이 어떻게 이렇게 쉽게 새어나가나 했더니 내부에 스파이가 있었던 거였네. 그것도 가장 핵심적인 위치에. 그깟 돈 몇 푼을 위해 이랬다고?”권재민의 표정에는 경멸이 가득 차 있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권재민이 가장 멸시하는 부류다.그러다 이내 그 책임자는 강윤아가 모셔 온 사람이라는 것이 생각났다.애초에 조태식이 책임자로 오는 걸 거절하는 바람에 강윤아가 몇 번이나 찾아가 부탁했었다. 물론 유비가 제갈량을 청하는 것만큼 공손했다고는 하지 못 해도 여러 차례 간곡히 부탁했었다.심지어 조태식이 회사에 오기로 했을 때 강윤아는 몇 날 며칠을 그 일로 기뻐했다. 게다가 조태식에 대한 믿음 때문에 회사 개발에 관한 건은 대부분 조태식에게 건의를 묻곤 했다.어찌 됐든 조태식의 지위는 사장 정도는 아니더라도 절대 낮다고는 말할 수 없다.그리고 이번에 강윤아는 표절 논란에 휩싸였을 때 조태식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칠까 봐 미안해했고 자기가 회사 기밀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 해 직원들이 한 달 동안 공들인 프로젝트가 물거품이 되었다고 죄책감에 시달렸었다.그런데 조태식은 오히려 고마운줄 도 모르고 반격을 하다니. 이거야말로 현실 속에 있는 동곽 선생의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권재민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그 모습에서 윤기태는 권재민이 대책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내가 시키는 대로 해.”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들려오는 권재민의 말에 윤기태는 고개를 들고 권잽민의 차가운 얼굴을 쳐다봤다.“그 자식 내 앞에 데려와. 윤아 씨도 여기 데려오고.”권재민은 말을 마친 뒤 의자에 기댔다.“네.”이윽고 윤
조태식은 강윤아도 있을 거라는 건 생각지도 못했는지 살짝 놀란 듯한 반응을 보이더니 강윤아가 모든 걸 들은 듯한 반응을 보이자 더 숨길 수 없다는 판단이 섰는지 오히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대꾸했다.“진짜면 어떻게 가짜면 어떤데요? 뭐가 됐든 회사는 이제 곧 망할 텐데.”물론 이미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었지만 이런 말을 듣자 강윤아는 여전히 마음이 괴로웠다.자기가 조태식에 대한 믿음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렸다.“어떻게 이럴 수 있어? 내가 얼마나 믿었는데. 회사의 중요한 임무를 모두 당신한테 맡겼는데 어떻게!”조태식은 그 말에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하, 믿음이 돈이 됩니까? SY그룹은 바로 10억을 제시하던데. 10억!”조태식은 손가락을 쫙 펴 5라는 숫자를 내보이면서 격동한 듯 말했다.“10억에 내 연구 성과를 사주겠다고 하던데 강 사장은 그렇게 줄 수 있나요?”그 연구는 조태식이 밤낮없이 고생하여 수많은 실험을 거쳐 해낸 것이다.만약 회사에 그 성과를 바치면 그저 월급만 받으며 살 테지만 SY 그룹은 한번에 10억을 제시했다.10억이라는 금액을 제안받았을 때 조태식은 큰돈이 생겼다는 기쁨과 동시에 자기의 연구 성과가 인정을 받았다는 기분이었다.강윤아는 조태식이 이토록 돈에 눈이 먼 사람이라는 걸 몰랐기에 이를 갈았다.“10억에 자기 성과를 팔아넘긴다고? 직업윤리는 조금도 없나 보죠? 내가 사람 잘못 봤네.”강윤아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것도 모두 조태식이라는 사람에 대해 잘 알아보지 않고 고용한 강윤아의 자기 잘못도 크다고 생각했다.“직업윤리가 밥 먹여 주나요? 부자 되게 해주나요? 그걸 지킨다고 돈 생겨나는 것도 아닌데 제가 왜 지켜야 하죠?”조태식은 오히려 우습다는 듯 되물었다.“하지만 이렇게 되면 조태식 씨 앞날을 망친다는 건 알아야죠. 회사에 있으면 조태식 씨한테 더 많은 기회를 줬을 거고, 더 좋은 실험실을 내어주어 연구에 매진할 수 있게 도왔을 겁니다. 모든 사람이 조태식 씨가 발명한
강윤아는 권재민과 얘기를 더 나누다가 곧바로 사무실을 나가 기자회견 준비를 시작했다.그날 오후, 기자회견 현장.강윤아가 표절을 했다는 논란이 인터넷에서 붉어지면서 쇼핑몰 매장에 반품 대란까지 일어났기 때문에 이번 기자회견에는 수많은 취재진이 몰려들었다.심지어 기자회견 시작 1시간 전인데도 현장에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그중에는 기자도 있었고 소비자도 있었으며 일부 사람은 구경거리가 있다는 소문에 몰려들었고 일부 사람은 진실이 뭔지 궁금해 몰려들었다.이렇듯 목적은 여러 가지로 나뉘었지만 표절 대란 때문에 몰려들었다는 건 같았다.진작 현장에 도착해 이 상황을 지켜본 강윤아도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하지만 사람이 많을수록 사람들이 강윤아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었고 이따가 해명할 때 더 좋은 효과가 있을 수 있어 나쁜 징조는 아니었다.시간이 되자 강윤아는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강윤아가 등장하는 순간 기자들은 카메라를 들고 미친 듯이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너무 번쩍거리는 불빛에 눈을 뜨지 못하자 강윤아는 손을 들어 눈을 가렸지만 기자들은 강윤아가 찔려서 피한다고 생각했는지 지나갈 틈도 주지 않고 바로 마이크를 앞으로 쑥 내밀었다.“강 사장님, 이번 기자회견을 연 목적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행위를 사과하려는 겁니까? 아니면 결백을 증명할 만한 증거를 찾은 겁니까?”순간 모든 시선이 강윤아에게로 몰려들었다. 사람들도 그 답을 알고 싶었다. 어찌 됐든 이 일이 벌어진 지 한참이 되기에 자기가 한 게 아니라면 증거를 찾아낼 때도 됐으니까.하지만 너무 붐비는 인파 속에서 강윤아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데 질문에 대답하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그때 옆에 있던 윤기태가 강윤아의 난처한 상황을 눈치채고 얼른 다가와 기자들을 뒤로 밀고 부딪히지 않도록 손으로 가려주었다.“죄송합니다. 우선 저희 사장님이 무대 위로 오를 수 있도록 길을 내줄 수 있나요? 오늘 확실히 결백을 증명하러 온 게 맞습니다.”윤기태의 말에 기자들은 뭔가 낌
인터넷과 각종 언론사에서 보도된 뉴스 때문에 SY 그룹의 주식은 크게 하락해 하루 아침에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그와 동시에 권지윤의 회사마저 연루되어 피해를 보게 되었다. 일부 소비자는 권지윤의 회사가 갑자기 부상한 게 마침 강윤아가 표절 논란이 터졌을 때라면서 분명 깨끗하지 못한 방법으로 이익을 취한 거라는 둥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하, 전에 정말 강윤아 사장을 오해했네. 나 그때 매일 전화해서 환불을 요구했는데…… 이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한 마트에서 웬 젊은 여성이 핸드폰에 뜬 기사를 보더니 옆에 있는 친구에게 말했다.그 말에 친구도 죄책감을 느꼈는지 이내 맞장구쳤다.“그러게, 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터넷으로 강윤아 사장과 그 회사를 욕하고 다녔는데…… 하, 조금 미안하고 부끄럽네.”두 사람은 대화에 열중하느라 강윤아가 마침 두 사람의 뒤에 놓인 선반 옆에 서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했다.그동안 억울한 누명 때문에 괴로웠지만 이제 오해를 풀게 되자 강윤아는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슈퍼에서 물건을 산 강윤아는 집에 가려고 했는데 마침 슈퍼마켓 입구에서 방금 대화를 나누던 두 여자와 우연히 마주쳤다.전에 강윤아가 티브이에 여러 번 나온 데다 네티즌들과 악플러들이 강윤아를 악덕 상인으로 매도하는 바람에 온라인상으로도 어느 정도 얼굴을 알린 셈이다.때문에 아까는 강윤아를 보지 못했지만 이렇게 앞에서 맞닥뜨리자 바로 누구인지 알아버렸다. 이에 놀랐는지 그중 한 여자가 친구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나지막하게 물었다.“야, 저기 봐. 저 사람 강윤아 아니야?”“응?”다른 한 여자는 눈치를 채지 못했다가 친구의 말에 고개를 들어 봤다. 그랬더니 눈앞에 있는 이 낯익은 사람이 바로 뉴스에 나왔던 사람과 똑같다는 걸 발견했다.“진짜네…….”이윽고 낮은 소리로 답했다.두 사람이 소곤거릴 때 강윤아는 웃으며 두 사람을 향해 걸어갔다.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두 사람은 잔뜩 긴장해서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안녕하세요, 강윤아라고 합니다.
다음 날.“이 영감탱이들이 은혜도 모르고 감히 나를 쌩까? 사고가 나니 아예 나를 버리시겠다?”소주헌은 신문을 탁자 위에 내던지면서 눈살을 찌푸렸다.발표회가 끝난 뒤로 SY 그룹의 주식은 완전히 폭락해 일주일 만에 3포인트나 내려갔다.심지어 각종 부정적인 뉴스도 속출해 회사 안팎이 시끄러워졌다.게다가 이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말을 맞추기라도 한 듯 소주헌을 꾸짖어 댔고 명확한 목표를 내세워 2주 내로 모든 걸 해결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이런 결정에 소주헌은 더 화가 치밀었다. ‘이런 불가능한 목표를 혼자서 어떻게 이뤄낸다고. 내가 신선도 아니고!’“이제 어떻게 하죠?”비서가 전전긍긍하며 물었다.“어떡하긴! 일을 최대한 뒤로 미루는 수밖에. 책임을 다른 사람한테 떠넘길 수 있으면 더 좋고. 안 그랬다간 조만간 끝장나!”소주헌은 악에 받쳐 퉁명스럽게 말했다.이 일은 SY 그룹에 큰 영향을 끼친 만큼 만약 공개적으로 사과한다면 자가기 잘못한 걸 인정하는 게 되고, 사과하지 않으면 대량의 고객을 잃을 수 있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거다.되도록 이미지를 깨끗이 갱신해 소비자들에게 다른 인식을 남겨주고 책임을 떠넘긴 사람에게는 퇴로도 남겨주지 않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게 좋다.머릿속으로 계획을 짜던 소주헌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전에 하라고 한 일은 어떻게 됐어?”“이미 알아냈습니다.”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그렇다면 원래 계획대로 진행해. 절대 실수해서는 안 돼.”소주헌은 담배를 길게 들이켜고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 하지마 분명 웃고 있었지만 오히려 섬뜩한 느낌을 줬다.다음 날 아침, 인터넷에 떠도는 영상 하나가 각종 사이트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그 위에는 SY 그룹의 현재 상황이 강윤아 회사의 책임자 조태식과 관련이 있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몇몇 유명한 너튜버들은 조태식이 두 회사 사이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 이 일을 혼자 꾸민 거라고 지적하면서 신빙성을 위해 영상과 사진까지
축하 파티가 끝난 뒤 일부 직원은 2차로 노래방에 가자며 제안했다.“사장님, 우리랑 같이 노래방 가지 않으래요?”심지어 일부 여직원은 강윤아를 초대했다.여직원들의 눈에 강윤아는 우상이나 다름없다. 회사를 이토록 잘 관리하는 것도 모자라 매번 새 제품을 출시할 때마다 호평을 받으니까.만약 이번에 스파이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만 않았다면 아마 회사에서 출시한 새 제품이 또 화장품 업계에서 정점을 찍었을 거다.물론 그러지 못한 게 아쉽지만 강윤아가 짧은 시간 동안 증거를 찾아 결백을 증명하여 SY 그룹에 벌을 준 것만으로도 아주 훌륭하다고 할 수 있었다.그때 강윤아가 가방을 어깨에 걸치며 고개를 저었다.“전 됐어요. 일찍 집에 돌아가야 해서.”“사장님…….”여직원은 아쉬운지 강윤아를 계속 설득했다.매번 시간 관리를 칼같이 하는 분이 이번에 처음으로 직원들과 늦게까지 시간을 보내게 됐는데 놓아주기 싫은 건 당연했다.하지만 그 여직원 옆에 있던 다른 직원이 고개를 홱 돌려 째려 보면저 경고하는 척 말했다.“이렇게 늦었는데 사장님도 애인 만나러 가야지.”그제야 처음에 강윤아를 만류하던 직원은 뭔가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강윤아를 바라봤다.“오! 알겠어요. 그렇다면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게요.”말을 마친 뒤 두 여직원은 강윤아를 향해 손을 젓고는 호텔을 떠났다.두 사람을 보내고 혼자 덩그러니 남은 강윤아는 순간 어이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분명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 왜 다들 그렇게 믿고 있는지, 원.’하지만 이미 떠나간 사람들 뒤에다 대고 설명하는 것도 안 될 말이었다.이에 강윤아는 그저 다른 직원들을 향해 손을 저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권재민은 파티가 끝나기 전에 이미 강윤아에게 전화해 윤기태더러 데리러 가게 하겠다고 말해두었다.때문에 강윤아는 모든 직원들 보낸 뒤에 윤기태에게 문자를 보내고 호텔 문 앞에서 기다렸다.윤기태는 문자를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곧바로 호텔 문앞에 도착했다.“사모님, 타세
잠에서 깬 강윤아는 침대 머리에 기댔지만 머리가 무거웠는지 관자놀이를 연신 문질렀다.그러던 그때 마침 방문이 활짝 열렸다.“깼네요? 어디 불편해요?”권재민은 강윤아가 머리를 문지르자 얼른 앞으로 다가가 관심했다.이에 강윤아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자요, 해장국이에요.”권재민은 강윤아를 일으켜 세우며 해장국을 강윤아 앞으로 가져다주었다.원래도 술을 잘 못 마시는 사람이 임신한 상태에서 술을 마셨으니 불편한 건 당연할 거다.때문에 권재민은 아침에 깨어나자마자 가사도우미한테 해장국을 만들라고 당부했다.강윤아는 해장국을 받아 들고 입으로 온도를 체크하더니 딱 맞은 온도를 확인하고는 꿀꺽꿀꺽 마셔대기 시작했다.뜨끈뜨끈한 국물이 뱃속으로 들어가자 불편하던 속도 어느 정도 개운해졌다.“오늘 출근 안 해요?”“하죠.”입을 닦으며 묻는 강윤아의 손에서 그릇을 받아 든 권재민은 침대 옆 테이블 위에 그릇을 내려놓고 티슈를 뽑아 강윤아의 입을 닦아주었다.“이렇게 늦었는데 출발 안 해도 돼요?”강윤아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이에 권재민은 손가락으로 강윤아의 코를 쓱 내리 쓸었다.“으이그, 바보. 오늘 윤아 씨 검사하는 날이잖아요.”강윤아는 그제야 생각났는지 머리르 탁 쳤다.“아, 잊을 뻔했네요. 그런데 이건 저 혼자 가도 돼요.”“어떻게 그래요? 저도 우리 애기 보러 같이 가고 싶어요.”권재민은 강윤아의 배를 문질렀다.그때 강윤아가 권재민의 손을 톡톡 치며 입을 열었다.“아직 몇 달 밖에 안 됐는데 뭐가 만져진다고 그래요?”권재민은 그간 카리스마 넘치던 모습이 온데간데없어진 채 강윤아의 배를 만지며 애교를 부려댔다.“전 꼭 볼 건데요? 안 그래 아가야? 아빠가 이렇게 보는 게 좋지?”‘어쩜 다 큰 어른이 아이보다 유치할까?’강윤아는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그래요, 알겠어요.”“그럼 휴식 해요. 제가 아침 준비하라고 할 테니까 샤워하고 내려가요.”권재민은 말하면서 그릇을 들고 방을 나갔다.강윤아는 왠
두 사람이 집에 도착했을 때 해는 이미 지고 저녁 무렵이 다가왔다.하지만 강윤아가 집에 도착했을 때 소파에는 웬 낯선 여자가 앉아있었다. 불은 이미 켜져 있어 주위를 환히 비추고 있었고 티브이에는 새로 시작한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다.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소파에 앉아 있던 여자가 고개를 돌려 강윤아를 바라봤다.그제야 강윤아도 여자를 제대로 훑어봤다.여자는 자태가 우아하고 짙은 화장을 한데다 정교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고 마치 신의 손길을 거친 조각품처럼 나무랄 데 없이 아름다웠다.게다가 짧은 치마를 입고 있어 긴 다리가 그대로 드러났고 몸에 딱 달라붙는 원피스 덕에 콜라병 몸매가 더욱 부각되어 요염한 자태를 그려냈고 남자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더욱이 날카로운 눈매는 중성적이면서도 시크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물론 손에 꼽히는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분위기만은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분위기는 일반 사람들이 절대 따라갈 수 없는 거니까.“누구……”강윤아는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던 권재민이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강윤아의 말을 끊었다.“누나.”그 부름 소리에 여자는 싱긋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했다.“응, 왔네?”권재아는 미소를 띤 얼굴로 권재민을 위아래로 살폈지만 그 미소에 담긴 의미는 아무리 봐도 알 수 없었다.두 사람의 대화에 강윤아는 멍하니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어쩐지 재민 씨랑 닮았다 했더니 재민 씨 누나였네.’강윤아는 권재민한테서 친누나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더욱이 이렇게 미인이라는 것도…….하지만 가족의 유전자를 보면 권재민이 이토록 잘생겼는데 누나인 권재아도 예쁜 건 당연했다. 그제야 강윤아는 이 모든 게 이해가 됐다. “이제 막 퇴근했어. 그런데 누나는 어떻게 왔어?”권재민의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약간의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시간 나서 와봤지.”권재아는 오히려 제 집에서 손님을 받는 것처럼 주인행세를 했다.그러더니 시선을 강윤아에게 돌렸다
강윤아라는 말에 권재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윤아가 우리 집에 온 이후로 힘든 일을 많이 겪었고 늘 다른 사람의 타깃이 되었어요. 재민이가 너무 다른 사람의 호감을 사 그녀를 연루시킨 거죠.”“재아 씨가 지금 걱정해도 소용없어요, 재아 씨부터 잘 챙겨요.”윌은 재아의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자, 재아 씨 기분 전환하러 갔다가 나중에 우리 집에 가요.”그 말을 들은 권재아는 얼굴이 빨개졌다.“얼굴이 왜 빨개지는 거예요? 내가 옆에 있었으면 재아 씨가 좀 더 편하게 잠들 거예요.”윌은 웃으며 농담했다.재아는 얼굴이 빨갛게 상기 된 채 그를 한 대 때렸지만 거절하지 않았다.날이 저물자 바다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고 이따금 파도가 아련하게 일기도 했다. 해변의 모래사장에는 간간이 등불이 있는데, 등불은 그다지 밝지 않고 군데군데 있어서 밤하늘의 별과 서로 잘 어울렸다.재아는 부드러운 모래를 밟으며 앞으로 한 걸음씩 폴짝폴짝 뛰어갔다. 귓가에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아득하고도 고요했다.윌은 재아의 뒤에서 몇 걸음 걷다가 재아가 전혀 알아채지 못하자 성큼성큼 몇 걸음 앞으로 나가 그녀의 손을 잡고 손바닥으로 감쌌다.재아는 어리둥절해 하더니 이내 두 눈이 반달 모양으로 변했다.“손잡고 싶은 거면 얘기하지 그랬어요.”재아의 표정이 너무 도도해서 윌은 눈살을 찌푸리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끝을 긁었다.“그러게 누가 재아 씨더러 아무것도 모르래요?”술도 밥도 배불리 먹었으나 그 뒤로 딴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재아는 윌 덕분에 배불리 먹었고 지금은 기분이 너무 좋았다. 윌의 손을 잡고 있자니 따뜻한 손바닥에서 전해오는 힘에 말할 수 없는 안정감을 느꼈다.백사장을 따라 한참을 걸은 후에야 마침내 윌이 말한 그 ‘재미있는 곳’에 이르렀다.재아는 어두컴컴한 불빛 속 나무 밑에 숨어 있는 해먹에 하마터면 눈살을 찌푸릴 뻔했다.“여기가 재밌는 곳이에요?”“재미있는 곳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올 거잖아요?”윌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올라탄
회의가 끝난 후, 권재아는 권현우가 그녀를 쉽게 보지 못하게 하려고 여전히 당당하게 걸어 나갔지만, 사무실로 돌아온 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초조하고 어쩔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재아는 매우 낭패한 모습이었다.재아는 권재민에게 이 일을 알리려 문자를 보냈지만, 그쪽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재아는 윤기태에게도 이 일을 말했다. 기태도 분노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재아가 풀이 죽은 모습을 보며 화가 났지만 재아를 먼저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대표님, 이런 결과는 대표님도 원하지 않겠지만, 정말 방법이 없잖아요. 자책하지 마세요, 권재민 대표님이 돌아오시면 분명히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재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기태의 위로가 전혀 소용이 없었고 재아는 여전히 괴로웠다.재아의 이런 모습을 본 기태는 더는 방해하지 않고 그녀에게 인사한 후 자리를 떴다.늦은 시간, 재아는 여전히 회사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무실 문이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권재아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만 했다.갑자기 넓은 손이 재아 앞에 다가오더니 그녀의 머리를 강제로 들어 올렸다.재아는 화를 내려다가 윌임을 발견했다. 순간 화가 난 얼굴이 미리 설정된 듯 활짝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아, 윌, 여긴 어쩐 일이에요? 귀국하지 않았어요? 돌아왔으면 나한테 말해주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내가 공항으로 데리러 갔을 텐데.”윌은 재아의 머리를 받치고 있던 손을 풀고 책상을 돌아 재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러는 내내 눈빛은 재아에게서 떠나지 않았다.“보고 싶어서 돌아왔어요. 알려줬으면 어떻게 서프라이즈를 해줬겠어요. 왜 이렇게 피곤한 얼굴이죠? 날 봤을 땐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어요.”윌이 그녀 앞에 서자 재아는 윌의 허리를 끌어안고 머리를 살짝 윌의 몸에 기대며 풀이 죽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윌은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은 듯해 보여 더는 강요하지 않고 빨리 나가자고 재촉했다.“주차장에서 오래 기다렸는데도 안 내려와서 야근하는 거 아닌가
권재민은 강윤아의 움직임을 추적한 뒤 곧바로 현진성과 합류해 구출 계획을 논의하고 애스릭이 숨어 있는 곳으로 쳐들어가려 했다.하지만 이번에도 그들은 변장하고 다가갔다. 애스릭은 분명 그들을 경계할 것이고, 외딴 섬에서의 일을 겪었으니 애스릭의 경계와 의심이 더 강해지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들은 반드시 만반의 계획을 세워야만 윤아를 구해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같은 시간, 국내에 있던 김소혜와 서만옥은 출국할 예정이었다.그날 기슭에 도착한 후 재민은 아이를 안배하고 나서 소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혜는 발신자가 실종된 지 오래된 자기 아들이라는 것을 보고 매우 흥분했다.“재민아, 드디어 엄마한테 전화했구나. 그동안 네가 나한테 전화 안 해서 우리도 방해할 엄두가 안 났는데 너는 지금 어때? 윤아는 행방불명이야? 윤아를 구해낸 거 아니었어?”소혜는 재민의 전화가 희소식을 전하러 걸려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재민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민의 전화를 받은 후 마음이 매우 흥분되고 기뻤기 때문이기도 했다.재민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소혜의 이렇게 흥분한 말투를 들으며 차마 그녀에게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급박해서 아이를 돌볼 가족이 있어야 했다. 비록 의사가 있지만 그는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다.그는 이를 악물고 실정을 소혜에게 말했다.“엄마, 내 말 좀 들어봐요. 마음을 다잡고 들어요, 일이 이렇게 됐어요…… 엄마가얘기한 거랑 상황이 좀 달라요. 윤아가 처음에 구출되긴 했는데 다시 잡혀갔어요. 그동안 연락이 없었던 건 내가 계속 그 사람의 경계에 잠복해있었기 때문이에요.”재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혜가 말을 끊었다.“뭐? 구출되긴 했는데 또 잡혀갔다는 건 뭐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엄마, 내 말끝까지 들어봐요.”재민이 이마를 어루만졌다.“이 일은 당분간 자세히 말하기 어려워요. 제가 윤아를 데려가고 나서 자세히 말해줄게요.”
고승혁 교수가 협조를 거부했기 때문에 애스릭은 더 심하게 때렸다. 거의 몇 시간마다 가서 괴롭혔는데 매번 때리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말로 욕했지만 고승혁 교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강윤아는 고승혁 교수가 돌아올 때마다 얼굴에 약간의 상처가 생기는 것을 보고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사실, 애스릭이 매번 고승혁 교수를 데려갈 때마다 그가 입을 열어 경험을 전수해주도록 했을 뿐 매번 그를 때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승혁 교수는 돌아올 때마다 애스릭의 부하들에게 얻어맞았다.고승혁 교수는 베티를 치료해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배신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그들은 매우 원망스러웠다.“고승혁 교수님, 저 때문에 교수님이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협조하고 절 그냥 내버려 둬요.”“괜찮아요, 때리고 싶으면 때리고 욕하고 싶으면 하라고 해요. 나는 견딜 수 있어요. 나는 오히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어디까지인 보고 싶어요. 언젠가 내가 정말 견딜 수 없게 되면 자연히 그들에게 항복할 거예요. 그때 가서 윤아 씨가 나를 원망하지 말아주세요.”고승혁 교수는 손을 내저으며 개의치 않는 듯 윤아를 향해 농담까지 했다.“교수님은 이미 내 목숨을 구해줬고 내 아이를 지켜줬어요. 이것만으로도 저는 이미 교수님에게 감사해요. 교수님이 앞으로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나는 받아들일 수 있어요.”윤아는 고승혁 교수의 이런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정말 내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이건 내 인생 경험의 일부일 뿐이에요.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에요. 굴복해 연명할 수 있지만 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고승혁 교수는 윤아가 미안한 표정을 짓자 그녀를 안심시켰다.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우리가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교수님의 연구원에 많이 투자할게요.”“그럼 먼저 윤아 씨에게 감사해야겠어요.”“고승혁 교수님, 우리는 함께 목숨 걸고 싸운 사이이니 그냥 저를 윤아라고 부르세요, 윤아 씨는 너무 서먹서먹해요.”윤아가 고승혁을
메리는 인큐베이터 옆에 있는 의사가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그를 한 번 쿡 찌르며 낮은 소리로 주의를 시키었다.“존, 사람들이 묻고 있잖아요.”“네?”존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권재민은 옆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다시 물었다.“내 아이의 상태가 어떤지 물었어요.”“아기는 지금 상태가 안정돼 있고 아까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놀라지 않았어요. 달이 차지 않아 태어났기 때문에 면역력이 좋지 않아 인큐베이터에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요.”존은 마침내 반응을 보였고 무서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재민은 가볍게 알았다고 대답하고 고개를 숙이고 인큐베이터 안의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갑자기 생명이 정말 완강하다고 느꼈다.강윤아에게 그렇게 많은 위험이 닥쳤는데도 이 아이는 이렇게 안전하고 무사하게 태어났고, 게다가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 앞으로도 꿋꿋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눈앞의 작은 아이가 이렇게 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건강할 수 있다면, 아이의 엄마 윤아는 분명 더 완강할 것이다.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지만 윤아는 아슬아슬하게 돌아왔으니 이번에도 반드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재민은 보면 볼수록 더 반가웠고 윤아가 출산할 때 옆에 없었지만 수술실 밖에 있었으니 좀 멀지만 어떻게 보면 윤아 옆에 있은 셈이다. 다음번에는, 다음번에는 윤아 옆에 꼭 있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재민의 부드러운 표정을 보고 현진성과 한기현도 옆으로 다가가서 아기를 바라보았다.“윤아 씨를 많이 닮아서 참 예뻐. 앞으로 윤아 씨처럼 예쁘게 자랄 거야.”기현은 한참을 쳐다보았다.옆에 있던 진성은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말했다.“태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어떻게 윤아 씨와 닮은 줄 알아요? 갓난아이는 이목구비도 다 비슷비슷하고 쭈글쭈글한 모습이 늙은이 같다는 생각만 들어요. 게다가 머리카락이나 눈썹도 다 나지 않았잖아요.”“진성 씨…… 왜 그래요? 분명 윤아 씨를 닮았잖아요?”핀잔을 들은 기현은 얼굴이 빨개졌다.“재민아. 진성 씨 봐, 너의 아이가
한기현은 다시 권재민에게 전화를 걸어 그들이 숨은 곳을 알려줬지만 강윤아가 끌려갔다는 사실은 알려주지 않았다.재민은 재빨리 이곳으로 달려와 둘러보았으나 윤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미간을 찌푸린 채 의심스러운 얼굴로 기현과 현진성을 힐끗 쳐다보았다.“기현아, 현진성 씨, 윤아 씨는요? 윤아 씨가 왜 여기에 없죠?”두 사람은 안절부절못했다. 평소 대단한 사람들이었지만 지금 재민 앞에서 감히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기현은 슬며시 진성을 쳐다보고 몰래 진성을 쿡 찔렀다. 진성은 방심하다 밀려났고 뒤를 돌아보며 기현을 노려보았지만 기현은 고개를 숙이고 더는 두 사람을 쳐다보지 않았다.“묻고 있잖아요! 윤아 씨는요? 내 아내 어디 갔어요? 당신들 윤아 씨를 어디로 데려갔어요?”재민은 두 사람의 행동을 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소리쳤다.진성은 미안한 표정으로 재민을 바라보며 재민에게 그가 떠난 후의 일을 대충 말했다.“권재민 대표님, 죄송합니다, 제가 윤아 씨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애스릭에게 빼앗겼어요. 제가 부주의했어요. 그 방에 숨으면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는데, 애스릭이 이렇게 교활하게 두 가지 계략을 쓸 줄은 몰랐어요.”“권재민 대표님, 지금 저를 때리고 욕해도 저 할 말이 없어요.”이 말을 들은 재민은 온몸에 살기가 피어올랐고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진성을 노려보며 허리에서 총을 꺼내려 했다. 기현이 황급히 그런 재민을 말렸다.“재민아, 일단 흥분하지 마, 방법이 있을 거야. 같은 편이니 우릴 도울 수 있어. 게다가 인터폴이야. 너 인터폴을 죽이는 건 큰 문제가 아니지만, 윤아 씨부터 찾아야지. 지금 우리는 진성 씨가 필요해.”기현은 재민의 허리춤의 총을 쥔 손을 힘껏 눌렀다.진성도 황급히 위로했다.“권재민 대표님,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밖에 비도 오고 바람도 심해서 빨리 갈 수 없으니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거예요.”“게다가, 우리 배에는 위치추적 장치가 있어요. 아주 은밀한 곳에 두었으니, 그들은 분명히 찾을 수 없
한기현은 사람과 함께 현진성의 사람들을 따라 수술실의 암도 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길을 따라가다가 애스릭의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기현은 그들 모두가 깨끗이 떠난 줄 알고 있었는데 애스릭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사람을 남겨 그들을 몰살시킬 준비를 했을 줄은 몰랐다.기현의 눈에 갑자기 핏빛이 솟구쳐오르더니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맨주먹으로 몇 사랑을 해치웠다.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독살스러운 모습까지 보여 상대방을 놀라게 했다.그 사람들은 애스릭을 보낸 후 매우 내키지 않았다. 한바탕 뒤지고 나서 도망갈 계획이었는데, 결국 절반 정도 뒤지다가 기현 일행을 만났다. 특히 기현은 어두운 얼굴을 한 채 그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듯 보였다.그들은 원래 기현 일당과 대충 싸우려고 일부러 그들을 놓아주려 했는데 기현이 달려들어 그들 몇 사람을 쓰러 눕히자 분노가 치밀어 올라 기현 일행과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기현이 상대방의 생각을 알면 지금쯤 후회해 죽을지도 모른다. 몇 분 동안 아무렇게나 싸우면 될 일을 이렇게 충동적으로 또 한 번 미뤘다.몇 분 동안 싸운 후, 쌍방은 모두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기현의 왼팔이 그 무리의 두목을 누르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총을 쥐고 그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고 있어 쌍방이 모두 시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기현은 그들의 타협을 기다렸고, 그 사람은 반격의 기회를 기다렸다.이 팀장은 원래 타협하려 했지만, 지금 이 지경에 이르니 승리욕이 자극되었고 지금은 고개를 숙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머리를 숙이면 부하들이 그를 무시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라도 그는 승부를 내려고 했다.이때 폭발음이 드디어 또렷하게 들렸고 그 사람은 이때 갑자기 손을 썼다.기현은 그가 성급히 달려들 것을 예상한 듯 손을 빼 권총을 내던지고 날쌔게 상대방의 손을 잡아 그의 등 뒤로 돌렸다. 두 발은 날렵하게 그의 허리와 배를 걷어찼고 곧 사납게 그의 몸을 비틀어 앞을 가
현진성은 애스릭의 부하들이 베티를 데려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애스릭이 아직도 단념하지 않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애스릭이 베티를 포기하거나 그들과 함께 죽으려고 이 보이지 않는 장치를 작동시켰다고 생각했다.애스릭이 여전히 단념하지 않고 베티를 데려가서 부활을 꿈꾸고 있을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애스릭은 고승혁 교수와 강윤아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진성은 갑자기 눈꺼풀이 미친 듯이 뛰며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윤아와 고승혁 교수가 숨어 있던 방에서 총소리가 났다.그는 급히 아까의 그 방으로 돌아갔다. 들어가 보니 그가 배치한 사람 중 몇 명은 상처를 입었고, 또 몇 명은 이미 의식을 잃었으며 그중 한 명은 이미 죽었는데 의사였다. 그 의사는 아기의 인큐베이터를 필사적으로 안고 있었다.진성은 그 의사의 시체를 땅에 부축하려고 했지만, 그 사람의 손이 인큐베이터 가장자리를 필사적으로 잡고 있어서 아주 많은 힘을 써서야 그 손을 쪼갰다. 진성은 겨우 옆 깨끗한 곳으로 메고 가서 그를 살며시 내려놓았다.의사를 내려놓은 진성은 돌아서서 인큐베이터 안의 아기를 살펴보았다. 아기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매우 달콤하게 자고 있었기에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모두가 엎드려 있어서 진성은 한동안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하나 뒤집어 보았다. 애스릭의 사람들이 그냥 들어와서 그들을 다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고승혁 교수를 데려갔을 줄은 몰랐다.진성은 갑자기 윤아가 떠올랐다. 총소리가 그렇게 컸으니 윤아가 정신을 차리지 않았을 리 없다. 진성은 급히 모퉁이의 병상 옆으로 달려갔다.이불 속이 울퉁불퉁했다. 그는 처음에는 고승혁 교수 등이 윤아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고 생각했지만 열어보니 안에 베개가 있었다. 진성은 멍해졌다.“이 방은 밀폐되어 있는데 그들은 어디에 잡혀간 거지? 게다가 방금 내가 문 앞에서 지키고 있었으니 문으로 나갔을 리가 없어.”진성은 조급했다.갑자기
고승혁 교수는 숨을 헐떡이며 말하고는 바다 위를 바라보았다. 바다 위에 배가 한 척 있었는데 애스릭이 그 배에 있었고 많은 사람이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고승혁 교수는 깜짝 놀라 몇 발짝 뒤로 물러서며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현진성은 그에게 대답할 방법이 없어서 그를 붙잡고 비밀 통로로 갔다.권재민도 급히 한기현에게 연락해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했다.그러나 신호를 받자마자 재민은 기현 쪽에서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기현아, 무슨 일이야?”재민은 노심초사하여 급히 물었다.“방금 그 사람들이 들이닥쳐 시스템을 파괴했어. 최선을 다해 구조했으니 지금은 30분 정도 지연될 수 있어.”“시스템 복구가 시급한데 지금 그들과 싸우는 중이라……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어.”기현은 시스템 감시실에서 애스릭의 부하들과 싸우며 관제탑에 다시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면서 권재민과 이쪽의 상태를 보고했다.보고하는 과정에서 재민은 기현의 끙끙거리는 소리까지 듣고는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기아현, 너는 어때? 버틸 수 있겠어? 시스템 쪽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지금은 복구할 방법이 없어. 이젠 네가 나설 차례야. 우리가 살아나갈 수 있는 시간은 안 남았어요, 재민아.”“상대편은 사람이 너무 많은데 우리 사람은 이 몇 명밖에 없어. 버티기 힘들 것 같아, 재민아, 빨리 와.”기현이 헐떡이며 소리쳤다.재민은 이 소식을 듣고 마음이 급했지만 윤아가 이쪽에 있었기에 결정하기 어려웠다. 윤아가 힘없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서 매우 걱정했다.진성은 재민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내 부하들이 애스릭의 부하들에게 습격당했고, 그자들이 통제실의 시스템을 파괴했대요. 지금 우리 부하들이 그들과 싸우고 있는데 기현이도 그들에게 얽매여 시스템을 고칠 기회가 전혀 없어요…… 나는 윤아 씨가 마음에 걸려요.”재민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가요, 여기 내가 있을게요. 기지 안에 내 사람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