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건방진 권지윤을 보고 있자니 강윤아는 정말 어처구니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비서가 옆에서 너무 걱정하는 바람에 권지윤한테 화풀이할 힘도 없었다.그러던 그때, 두 사람의 인기척에 다가온 지배인은 강윤아의 상처를 보다 얼른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물론 조금 아프긴 했지만 그래도 큰 상처가 아니라 대충 지혈하고 싸매는 거로 끝날 수 있었다.하지만 윤 실장은 여전히 걱정됐는지 잔뜩 엄숙한 표정으로 강윤아를 설득했다.“대표님, 그래도 병원에 갑시다.”“아니…… 필요 없어요…….”“안 됩니다. 사장님이 병원에 가셔야 제 마음이 편해서 그럽니다. 사장님도 제발 좀 자기 몸 생각하세요.”강윤아는 자기의 상처를 아무리 봐도 비서가 너무 호들갑 떤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지만 비서가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끝내 동의했다.이윽고 두 사람은 곧바로 레스토랑을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윤 시장님…… 그렇게 긴장할 거 없어요. 그냥 살짝 긁힌 정도인데요, 뭘.”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눈살을 찌푸리고 걱정하는 비서를 보자 강윤아는 왠지 자꾸만 웃음이 났다.“안 됩니다. 권 대표님이 사장님 제대로 돌보라고 했단 말이에요. 만약 사장님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저 진짜 죽어요.”윤 실장은 무엇보다 권재민이 마음에 둔 사람을 소홀히 대할 수 없었다.‘하긴, 나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윤 실장님이 고생하긴 하지.’강윤아도 권재민이 어떤 사람인 줄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에 도착하기 바쁘게 윤 실장은 간호사 한 명을 불러와 강윤아의 상처를 소독하게 했다.두 사람이 온 병원에는 권재민의 지분이 있기에 병원 관계자들은 두 사람에게 모두 깍듯하게 대했다.심지어 강윤아의 상처를 보자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처치하기 시작했다.다행히 상처가 크지 않아 꿰맬 필요가 없이 약만 바르고 붕대를 감는 거로 끝이 났다.“봐요. 제가 괜찮다고 했죠?”강윤아는 손에 감긴 붕대를 본 순간 오직 일에 영향 주지 않을 정도라서 다행이라는
뭐라 말하려던 찰나 전화가 끊어지자 권지윤은 화를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옆으로 내팽개쳤다.하지만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뭔가 대책을 마련하려고 고민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또다시 울리기 시작했다.순간 공장주인이 마음이 바뀌어 다시 협력을 제안해 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권지윤은 고민도 없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생각이 바뀐 거죠?”상대가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고 권지윤은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다.하지만 전화 건너편에서 오히려 어안이 벙벙해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권지윤 씨, 그게 무슨 소리죠?”그제야 목소리가 다르다는 걸 눈치챈 권지윤은 전화번호를 보고 상대가 기계 수입을 책임진 매니저라는 걸 알아차렸다.“무슨 일이죠?”“저기, 죄송하지만 저희가 기계를 수입해 들이는 과정에 세관에서 막혀버려 지금 물건을 들여오지 못하고 있습니다.”“뭐라고요?”상대의 설명을 듣는 순간 권지윤의 미간에 주름 한 줄이 더 생겨났다.하지만 전화 건너편에서 다시 한번 말을 반복하는 바람에 현실을 부인하려던 권지윤은 할 수 없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심지어 화가 치밀어 상대의 말을 더 들어보지도 않고 전화를 꺼버린 뒤 핸드폰을 내팽개쳐 버렸다.분노를 억제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다가 결국은 현실에 충격을 받고 주저앉아 버린 권지윤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거금을 들여 구매한 제품이 모두 세관에서 걸려버리면 돈을 모두 날려버린 거랑 뭐가 다르단 말인가?하지만 자세히 생각하면 할수록 이렇게 큰일이 한꺼번에 벌어진 게 너무 이상했다.‘뭐 안 좋은 일은 원래 한꺼번에 일어난다고들 하지만 이렇게 공교롭다고?’‘뒤에서 누군가 손을 쓴 게 틀림없어.’권지윤은 심각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가능성 외에는 달리 생각이 나지 않았다.‘하지만 대체 누가 나랑 이렇게 큰 원한이 있는 거지? 설마…….’한창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집사의 목소리가 잇따라 들려왔다.“아가씨, 송해나 씨와
“알아요.”권지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그런데 아무리 봐도 재민이가 요즘 너무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전에는 분명 이러지 않았는데. 제가 볼 때 분명 누군가 뒤에서 재민이를 부추기는 게 틀림없어요. 이대로 뒀다간 아주 언니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오르면 어떡해요?”심지어 너무 정중하고 진지한 태도에 듣고 있던 김소혜의 얼굴은 점점 파랗게 질렸다.그 말을 듣고 나니 김소혜도 권지윤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게, 아들이 그 여자랑 같이 지내기 시작한 뒤로 매번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했으니.분명 아들을 위해 진심으로 한 조언인데도 이러는 걸 보면 그 여자한테 단단히 홀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그 사실을 인지하고 나니 김소혜는 심혈을 기울여 키운 아들이 그런 뭣도 아닌 여자 때문에 망가지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반드시 방법을 생각해서 그 여자를 아들한테서 떼어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 잡았다.잠깐 고민을 한 김소혜는 눈살을 찌푸리며 권지윤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걱정할 거 없어. 이제 나도 알았으니 절대 네가 억울한 일 당할 일은 없을 테니.”“정말요? 언니, 저 이제 의지할 곳이 언니밖에 없어요.”권지윤은 이내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솔직히 아침부터 권지윤이 찡찡거리는 바람에 김소혜는 짜증이 치밀었지만 강윤아만 떠올리면 그 여자를 아들 옆에서 떼어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일은 오히려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그래. 내가 언제 약속한 일을 안 지키는 거 봤어? 소식 있으면 알려줄 테니 얼른 돌아가.”김소혜는 무표정한 얼굴로 축객령을 내렸다.권지윤이 아무리 둔감하다 할지라도 그 말에서 김소혜가 자기를 반기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걸 인지하는 순간 서럽고 억울했지만 이제 기댈 곳은 김소혜밖에 없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끝내 작별 인사를 했다.…….아침 8시, 권재민은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회사로 출근했다.하지만 사무실에 들어서기 바쁘게 누군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대표님
집으로 돌아온 강윤아는 얼른 임신 테스트기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설마설마하면서도 결과를 기다리는 내내 강윤아는 콩닥거리는 심장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그로부터 얼마 뒤, 테스트기에 빨간 줄무늬 두 줄이 나타난 걸 보자 강윤아는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두 줄이라는 건…… 임신이라는 거잖아!’테스트기를 몇 번이고 확인하고 나서야 강윤아는 자기가 임신했다는 게 믿어졌다. 더욱이 이 아이는…… 당연히 권재민의 아이다.강윤아는 이 소식을 알렸을 때 권재민의 반응을 상상할 수 있었다. 심지어 언제나 무뚝뚝하고 차갑기만 하던 얼굴에 웃음꽃이 피는 모습이 머리에 그려졌다.그보다도 이 아이가 자기와 권재민의 사랑의 결실이라는 것에 만족감이 피어올랐다.물론 지난 몇 년간 자기한테만 매번 시련을 안겨주는 하느님을 수도 없이 원망했지만 또다시 자기한테 천사 같은 아이를 선물로 내려주신 걸 생각하니 지난 일이 모두 잊혔다.하지만 천사 같은 아이를 생각하니 자연스레 머릿속에 은찬의 얼굴이 떠올라 표정이 굳어졌다.권재민은 은찬의 친부가 아니기에 자기 배 속에 아이가 있다는 걸 은찬이가 알면 싫어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이 아이 때문에 우리가 자기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수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날아갈 것 같던 기분도 순식간에 진정이 되었다.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가지는 게 기쁜 일이라고들 하지만 이 순간, 강윤아에게는 오히려 양날의 검처럼 작용했다.이에 한참 동안 고민한 강윤아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나중에 기회가 될 때 은찬에게 사실을 말하려고 결심했다.그날 저녁, 식사 내내 수심에 차 있는 강윤아를 보자 권재민은 참다못해 물었다.“윤아 씨, 왜 그래요? 무슨 걱정이 있는 것 같은데?”“네?”자기가 임신한 걸 생각하고 있던 강윤아는 권재민의 부름 소리에 순간 정신을 차렸다.“뭘 그렇게 놀라요?”권재민은 젓가락 끝으로 강윤아의 머리를 콕콕 찔러댔다.“윤아 씨 좀 봐봐요. 정신이 딴 데
다행히 권재민이 빨리 반응해 권지윤의 손이 강윤아의 뺨에 닿기 전에 확 낚아챘다.하지만 그 힘이 어찌나 셌는지 권지윤은 평형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더니 “아-”하고 비명을 질러댔다.그 모습에 권재민은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너! 어떻게 여자 하나 때문에 고모한테 이럴 수 있어?”권지윤은 눈앞의 남자가 바로 자기가 어릴 때부터 크는 걸 봐온 조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걸 자각하는 순간 눈에는 실망감과 분노가 서렸다.“아무리 그래도 나 네 고모야!”그런 권지윤의 모습에 인내심이 바닥날 대로 바닥난 권재민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핸드폰을 꺼내 들고 곧바로 윤기태한테 전화했다.“응, 우리 고모 대신 동유럽행 티켓 끊어. 오늘 오후 3시에 출발할 수 있게.”권재민은 권지윤이 입에 달고 다니는 가족이라는 말에 이제는 이골이 날 대로 났다. 만약 진짜 가족으로 생각하면 권재민도 권재민이 사랑하는 사람도 존중해 줬을 텐데.권지윤은 존중은커녕 납치극이나 벌이지 않으면 비난만 해대니 당장 권지윤을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권지윤은 권재민이 자기를 보낸다는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 민감하게 반응했다.“나 안 가! 안 간다고!”이윽고 말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꽁무니 빠지게 도망치는 권지윤의 뒷모습을 보자 권재민은 허탈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괜찮아요?”권재민은 강윤아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방금 전 권지윤의 행동에 강윤아가 놀라지는 않았나 걱정했다.하지만 강윤아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재민 씨가 저 보호해 주는 데 일이랄 게 있나요?”“그럼 다행이네요. 우리 얼른 병원이나 가요.”권재민은 강윤아를 품에 안으며 차를 향해 걸어갔다.그때 강윤아가 권재민의 팔을 끌어안으며 고개를 들었다.“재민 씨, 저 정말 괜찮아요. 불편하지도 않고요. 오늘 오전 회의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먼저 출근해요.”권재민은 혀를 차며 엄숙한 말투로 말했다.“윤아 씨 혼자 가면 제가 어떻게 안심해요?”“괜
“아니에요.”강윤아는 놀란 듯 고개를 들면서 극구 부인했다.“아무리 봐도 너 오늘 이상해. 누구한테 괴롭힘이라도 당한 것처럼.”어머니의 말에 강윤아는 자기의 모든 게 역시 어머니의 눈은 피할 수 없다고 다시 한번 감탄했다.“그냥 회사 일 때문에 그래요. 괜찮아요.”“그렇다면 다행이고. 무슨 일 있으면 꼭 엄마한테 말해, 알았지?”어머니가 자기 손을 잡으며 손등을 톡톡 두드리자 강윤아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며칠 뒤면 엄마 생일인데 혹시 뭐 갖고 싶은 거 있어요?”“내가 이 나이에 필요한 게 뭐 있다고 그래? 그냥 너와 은찬이가 행복하게 지내기만 하면 그걸로 족해. 너의 아버지한테 절대 이용당하지 말고, 은찬이도 아직 어리니까 절대 괴롭힘당하게 하지 마.”서만옥은 남편 생각만 하면 이가 갈렸다. 그런데 누굴 탓하랴? 모두 젊었을 때 눈이 삐었던 자신을 탓할 수밖에.밖에서 바람을 피우는 것도 모자라 친딸한테 그렇게 몹쓸 짓까지 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은찬이는 제가 잘 돌보고 있으니까.”강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다가 갑자기 강씨 저택에 두고 온 목걸이가 생각났다. 일전에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준 거라면서 어머니가 엄청 아꼈던 목걸이인데 입원하면서 챙겨오지 못했다.순간 강윤아는 그 목걸이를 다시 찾아오면 어머니가 기뻐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생일 선물을 뭐로 준비할지 생각이 선 강윤아는 서만옥과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다가 볼 일이 있다는 핑계로 병원을 떠났다.그리고 곧바로 강씨 저택으로 향했다.저택에 도착하니 박미란과 강수아가 모두 집에 있었다.“이게 누구야?”박미란은 강윤아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비아냥거리듯 높은 소리로 말했다. 마치 사람들의 주의를 끌려는 것처럼.아니나 다를까 소파에서 핸드폰을 만지작대고 있던 강수아가 먼저 귀찮은 듯 눈을 들어 강윤아를 힐끗 바라봤다.이윽고 강범석도 내키지 않는 듯 입을 열었다.“네가 여기는 왜 왔어?”“물건 챙기러 온
강윤아는 이 집에 한시도 있고 싶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차 냄새를 맡는 순간 헛구역질이 올라와 다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갔다.강윤아의 그런 모습에 박미란과 강수아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같은 생각을 했다.한편, 화장실에서 한바탕 헛구역질을 한 강윤아는 아무것도 토해내지 못해 결국 몸을 일으켰다.솔직히 임신 때문에 헛구역질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정말 뭐라도 토해낼 거라고는 애초에 생각지도 않았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화장실에 달려왔을 뿐.현재도 속이 불편한 건 여전했지만 강윤아는 이곳에서 빨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얼른 밖으로 나갔다. 어쨌든, 계속 머물러 있는다 할지라도 속이 편해지는 건 아니니까.화장실에서 걸어 나오자마자 강범석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왔다.“윤아야, 괜찮니?”물론 전에 강윤아에게 미안한 일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친딸인지라 강범석은 겉치레적인 말로 관심을 내비쳤다.하지만 강윤아는 그저 차갑게 웃을 뿐 강범석의 말에 별다른 반응을 해주지 않았다.자기 아버지가 어떤 인간인지 진작에 경험해봤기에 이제는 뭘 하든 믿음이 가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도 그저 연기를 할 뿐 자기를 진심으로 걱정한다고 생각지도 않았다.강윤아는 싸늘하게 고개를 돌려 강범석이 내민 손을 에돌아 옆으로 빠졌다.“괜찮아요.”그러고는 그대로 저택을 빠져나갔다.강윤아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강범석은 허탈한 듯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강윤아가 자기한테 이렇게 쌀쌀맞게 구는 것도 남을 탓할 수는 없었다…… 어찌 됐든 자기가 해온 게 있으니. 그런 일을 당하고도 참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하…….”강범석의 깊은 탄식은 박미란의 싸늘한 차가운 시선을 불러왔다.“왜요? 이제 와서 마음이 아파요? 딸을 팔아먹을 때는 그렇게 매정하던 사람이?”박미란은 원래부터 남의 싸움 구경이라면 쌍수 들고 환영하는 사람인지라 아예 관람자 모드로 평가를 해댔다. 게다가 이러는 남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으로 강
송해나는 김소혜에게 사실을 알려 도움을 받을까도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김소혜가 그 아이 때문에 강윤아를 정식으로 받아주기라도 하면 자기한테 더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안 돼. 권씨 집안 식구들의 태도를 완벽히 파악하기 전까지…… 이 일은 무조건 함구해야 해.’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송해나의 안색은 더 어두워졌고 짧은 시간 내에 그렇다 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무조건 강윤아가 그 애를 낳는 걸 막아야 해!’“해나 씨…… 괜찮아요?”송해나가 한참 동안 생각하고 있을 때 강수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도 그럴 게, 먼 길을 달려와 이 소식을 전해준 건 송해나가 그저 바보처럼 멍하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바란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솔직히 강수아도 송해나와 같은 목적이었다. 바로 강윤아가 애를 낳지 못하게 하는 것.딴 데 정신이 팔렸던 송해나는 강수아의 말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여전히 굳어있었다.송해나의 심각한 표정에 강수아가 잠깐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송해나 씨, 이 일은…… 제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강수아가 자기를 도와주겠다는 말에 송해나는 눈을 반짝이며 다급히 물었다.“그런데 뭐요?”강수아는 그제야 눈을 굴리며 자기 목적을 슬쩍 내비쳤다.“그런데…… 제가 요즘 회사 일도 처리해야 해서 조금 바쁘거든요. 해나 씨도 알다시피 회삿돈을 그렇게나 많이 손해를 봐서 이러다간 회사가 문을 닫게 생겼거든요.”강수아도 사실 강윤아를 처리하고 싶은 심정이기에 송해나한테 요구를 제시하는 건 양심이 없는 행동이었지만 이렇게 좋은 기회가 눈앞에 놓여 있으니 제대로 이용하지 않는 게 오히려 바보라는 생각이 들었다.역시나 송해나는 강수아의 요구를 듣자마자 표정이 굳어버렸다. 지금이 어떤 때인데 강수아가 자기와 흥정하고 있다는 게 어이없었으니까.“강수아 씨, 지금…….”송해나는 순간 욱해서 뭔가 말하려다가 반쯤 나온 말을 억지로 삼켜버렸다.그도 그럴 게, 강수아의 도움이 절실
강윤아라는 말에 권재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윤아가 우리 집에 온 이후로 힘든 일을 많이 겪었고 늘 다른 사람의 타깃이 되었어요. 재민이가 너무 다른 사람의 호감을 사 그녀를 연루시킨 거죠.”“재아 씨가 지금 걱정해도 소용없어요, 재아 씨부터 잘 챙겨요.”윌은 재아의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자, 재아 씨 기분 전환하러 갔다가 나중에 우리 집에 가요.”그 말을 들은 권재아는 얼굴이 빨개졌다.“얼굴이 왜 빨개지는 거예요? 내가 옆에 있었으면 재아 씨가 좀 더 편하게 잠들 거예요.”윌은 웃으며 농담했다.재아는 얼굴이 빨갛게 상기 된 채 그를 한 대 때렸지만 거절하지 않았다.날이 저물자 바다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고 이따금 파도가 아련하게 일기도 했다. 해변의 모래사장에는 간간이 등불이 있는데, 등불은 그다지 밝지 않고 군데군데 있어서 밤하늘의 별과 서로 잘 어울렸다.재아는 부드러운 모래를 밟으며 앞으로 한 걸음씩 폴짝폴짝 뛰어갔다. 귓가에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아득하고도 고요했다.윌은 재아의 뒤에서 몇 걸음 걷다가 재아가 전혀 알아채지 못하자 성큼성큼 몇 걸음 앞으로 나가 그녀의 손을 잡고 손바닥으로 감쌌다.재아는 어리둥절해 하더니 이내 두 눈이 반달 모양으로 변했다.“손잡고 싶은 거면 얘기하지 그랬어요.”재아의 표정이 너무 도도해서 윌은 눈살을 찌푸리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끝을 긁었다.“그러게 누가 재아 씨더러 아무것도 모르래요?”술도 밥도 배불리 먹었으나 그 뒤로 딴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재아는 윌 덕분에 배불리 먹었고 지금은 기분이 너무 좋았다. 윌의 손을 잡고 있자니 따뜻한 손바닥에서 전해오는 힘에 말할 수 없는 안정감을 느꼈다.백사장을 따라 한참을 걸은 후에야 마침내 윌이 말한 그 ‘재미있는 곳’에 이르렀다.재아는 어두컴컴한 불빛 속 나무 밑에 숨어 있는 해먹에 하마터면 눈살을 찌푸릴 뻔했다.“여기가 재밌는 곳이에요?”“재미있는 곳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올 거잖아요?”윌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올라탄
회의가 끝난 후, 권재아는 권현우가 그녀를 쉽게 보지 못하게 하려고 여전히 당당하게 걸어 나갔지만, 사무실로 돌아온 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초조하고 어쩔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재아는 매우 낭패한 모습이었다.재아는 권재민에게 이 일을 알리려 문자를 보냈지만, 그쪽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재아는 윤기태에게도 이 일을 말했다. 기태도 분노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재아가 풀이 죽은 모습을 보며 화가 났지만 재아를 먼저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대표님, 이런 결과는 대표님도 원하지 않겠지만, 정말 방법이 없잖아요. 자책하지 마세요, 권재민 대표님이 돌아오시면 분명히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재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기태의 위로가 전혀 소용이 없었고 재아는 여전히 괴로웠다.재아의 이런 모습을 본 기태는 더는 방해하지 않고 그녀에게 인사한 후 자리를 떴다.늦은 시간, 재아는 여전히 회사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무실 문이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권재아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만 했다.갑자기 넓은 손이 재아 앞에 다가오더니 그녀의 머리를 강제로 들어 올렸다.재아는 화를 내려다가 윌임을 발견했다. 순간 화가 난 얼굴이 미리 설정된 듯 활짝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아, 윌, 여긴 어쩐 일이에요? 귀국하지 않았어요? 돌아왔으면 나한테 말해주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내가 공항으로 데리러 갔을 텐데.”윌은 재아의 머리를 받치고 있던 손을 풀고 책상을 돌아 재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러는 내내 눈빛은 재아에게서 떠나지 않았다.“보고 싶어서 돌아왔어요. 알려줬으면 어떻게 서프라이즈를 해줬겠어요. 왜 이렇게 피곤한 얼굴이죠? 날 봤을 땐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어요.”윌이 그녀 앞에 서자 재아는 윌의 허리를 끌어안고 머리를 살짝 윌의 몸에 기대며 풀이 죽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윌은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은 듯해 보여 더는 강요하지 않고 빨리 나가자고 재촉했다.“주차장에서 오래 기다렸는데도 안 내려와서 야근하는 거 아닌가
권재민은 강윤아의 움직임을 추적한 뒤 곧바로 현진성과 합류해 구출 계획을 논의하고 애스릭이 숨어 있는 곳으로 쳐들어가려 했다.하지만 이번에도 그들은 변장하고 다가갔다. 애스릭은 분명 그들을 경계할 것이고, 외딴 섬에서의 일을 겪었으니 애스릭의 경계와 의심이 더 강해지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들은 반드시 만반의 계획을 세워야만 윤아를 구해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같은 시간, 국내에 있던 김소혜와 서만옥은 출국할 예정이었다.그날 기슭에 도착한 후 재민은 아이를 안배하고 나서 소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혜는 발신자가 실종된 지 오래된 자기 아들이라는 것을 보고 매우 흥분했다.“재민아, 드디어 엄마한테 전화했구나. 그동안 네가 나한테 전화 안 해서 우리도 방해할 엄두가 안 났는데 너는 지금 어때? 윤아는 행방불명이야? 윤아를 구해낸 거 아니었어?”소혜는 재민의 전화가 희소식을 전하러 걸려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재민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민의 전화를 받은 후 마음이 매우 흥분되고 기뻤기 때문이기도 했다.재민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소혜의 이렇게 흥분한 말투를 들으며 차마 그녀에게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급박해서 아이를 돌볼 가족이 있어야 했다. 비록 의사가 있지만 그는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다.그는 이를 악물고 실정을 소혜에게 말했다.“엄마, 내 말 좀 들어봐요. 마음을 다잡고 들어요, 일이 이렇게 됐어요…… 엄마가얘기한 거랑 상황이 좀 달라요. 윤아가 처음에 구출되긴 했는데 다시 잡혀갔어요. 그동안 연락이 없었던 건 내가 계속 그 사람의 경계에 잠복해있었기 때문이에요.”재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혜가 말을 끊었다.“뭐? 구출되긴 했는데 또 잡혀갔다는 건 뭐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엄마, 내 말끝까지 들어봐요.”재민이 이마를 어루만졌다.“이 일은 당분간 자세히 말하기 어려워요. 제가 윤아를 데려가고 나서 자세히 말해줄게요.”
고승혁 교수가 협조를 거부했기 때문에 애스릭은 더 심하게 때렸다. 거의 몇 시간마다 가서 괴롭혔는데 매번 때리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말로 욕했지만 고승혁 교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강윤아는 고승혁 교수가 돌아올 때마다 얼굴에 약간의 상처가 생기는 것을 보고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사실, 애스릭이 매번 고승혁 교수를 데려갈 때마다 그가 입을 열어 경험을 전수해주도록 했을 뿐 매번 그를 때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승혁 교수는 돌아올 때마다 애스릭의 부하들에게 얻어맞았다.고승혁 교수는 베티를 치료해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배신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그들은 매우 원망스러웠다.“고승혁 교수님, 저 때문에 교수님이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협조하고 절 그냥 내버려 둬요.”“괜찮아요, 때리고 싶으면 때리고 욕하고 싶으면 하라고 해요. 나는 견딜 수 있어요. 나는 오히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어디까지인 보고 싶어요. 언젠가 내가 정말 견딜 수 없게 되면 자연히 그들에게 항복할 거예요. 그때 가서 윤아 씨가 나를 원망하지 말아주세요.”고승혁 교수는 손을 내저으며 개의치 않는 듯 윤아를 향해 농담까지 했다.“교수님은 이미 내 목숨을 구해줬고 내 아이를 지켜줬어요. 이것만으로도 저는 이미 교수님에게 감사해요. 교수님이 앞으로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나는 받아들일 수 있어요.”윤아는 고승혁 교수의 이런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정말 내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이건 내 인생 경험의 일부일 뿐이에요.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에요. 굴복해 연명할 수 있지만 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고승혁 교수는 윤아가 미안한 표정을 짓자 그녀를 안심시켰다.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우리가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교수님의 연구원에 많이 투자할게요.”“그럼 먼저 윤아 씨에게 감사해야겠어요.”“고승혁 교수님, 우리는 함께 목숨 걸고 싸운 사이이니 그냥 저를 윤아라고 부르세요, 윤아 씨는 너무 서먹서먹해요.”윤아가 고승혁을
메리는 인큐베이터 옆에 있는 의사가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그를 한 번 쿡 찌르며 낮은 소리로 주의를 시키었다.“존, 사람들이 묻고 있잖아요.”“네?”존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권재민은 옆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다시 물었다.“내 아이의 상태가 어떤지 물었어요.”“아기는 지금 상태가 안정돼 있고 아까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놀라지 않았어요. 달이 차지 않아 태어났기 때문에 면역력이 좋지 않아 인큐베이터에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요.”존은 마침내 반응을 보였고 무서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재민은 가볍게 알았다고 대답하고 고개를 숙이고 인큐베이터 안의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갑자기 생명이 정말 완강하다고 느꼈다.강윤아에게 그렇게 많은 위험이 닥쳤는데도 이 아이는 이렇게 안전하고 무사하게 태어났고, 게다가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 앞으로도 꿋꿋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눈앞의 작은 아이가 이렇게 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건강할 수 있다면, 아이의 엄마 윤아는 분명 더 완강할 것이다.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지만 윤아는 아슬아슬하게 돌아왔으니 이번에도 반드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재민은 보면 볼수록 더 반가웠고 윤아가 출산할 때 옆에 없었지만 수술실 밖에 있었으니 좀 멀지만 어떻게 보면 윤아 옆에 있은 셈이다. 다음번에는, 다음번에는 윤아 옆에 꼭 있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재민의 부드러운 표정을 보고 현진성과 한기현도 옆으로 다가가서 아기를 바라보았다.“윤아 씨를 많이 닮아서 참 예뻐. 앞으로 윤아 씨처럼 예쁘게 자랄 거야.”기현은 한참을 쳐다보았다.옆에 있던 진성은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말했다.“태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어떻게 윤아 씨와 닮은 줄 알아요? 갓난아이는 이목구비도 다 비슷비슷하고 쭈글쭈글한 모습이 늙은이 같다는 생각만 들어요. 게다가 머리카락이나 눈썹도 다 나지 않았잖아요.”“진성 씨…… 왜 그래요? 분명 윤아 씨를 닮았잖아요?”핀잔을 들은 기현은 얼굴이 빨개졌다.“재민아. 진성 씨 봐, 너의 아이가
한기현은 다시 권재민에게 전화를 걸어 그들이 숨은 곳을 알려줬지만 강윤아가 끌려갔다는 사실은 알려주지 않았다.재민은 재빨리 이곳으로 달려와 둘러보았으나 윤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미간을 찌푸린 채 의심스러운 얼굴로 기현과 현진성을 힐끗 쳐다보았다.“기현아, 현진성 씨, 윤아 씨는요? 윤아 씨가 왜 여기에 없죠?”두 사람은 안절부절못했다. 평소 대단한 사람들이었지만 지금 재민 앞에서 감히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기현은 슬며시 진성을 쳐다보고 몰래 진성을 쿡 찔렀다. 진성은 방심하다 밀려났고 뒤를 돌아보며 기현을 노려보았지만 기현은 고개를 숙이고 더는 두 사람을 쳐다보지 않았다.“묻고 있잖아요! 윤아 씨는요? 내 아내 어디 갔어요? 당신들 윤아 씨를 어디로 데려갔어요?”재민은 두 사람의 행동을 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소리쳤다.진성은 미안한 표정으로 재민을 바라보며 재민에게 그가 떠난 후의 일을 대충 말했다.“권재민 대표님, 죄송합니다, 제가 윤아 씨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애스릭에게 빼앗겼어요. 제가 부주의했어요. 그 방에 숨으면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는데, 애스릭이 이렇게 교활하게 두 가지 계략을 쓸 줄은 몰랐어요.”“권재민 대표님, 지금 저를 때리고 욕해도 저 할 말이 없어요.”이 말을 들은 재민은 온몸에 살기가 피어올랐고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진성을 노려보며 허리에서 총을 꺼내려 했다. 기현이 황급히 그런 재민을 말렸다.“재민아, 일단 흥분하지 마, 방법이 있을 거야. 같은 편이니 우릴 도울 수 있어. 게다가 인터폴이야. 너 인터폴을 죽이는 건 큰 문제가 아니지만, 윤아 씨부터 찾아야지. 지금 우리는 진성 씨가 필요해.”기현은 재민의 허리춤의 총을 쥔 손을 힘껏 눌렀다.진성도 황급히 위로했다.“권재민 대표님,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밖에 비도 오고 바람도 심해서 빨리 갈 수 없으니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거예요.”“게다가, 우리 배에는 위치추적 장치가 있어요. 아주 은밀한 곳에 두었으니, 그들은 분명히 찾을 수 없
한기현은 사람과 함께 현진성의 사람들을 따라 수술실의 암도 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길을 따라가다가 애스릭의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기현은 그들 모두가 깨끗이 떠난 줄 알고 있었는데 애스릭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사람을 남겨 그들을 몰살시킬 준비를 했을 줄은 몰랐다.기현의 눈에 갑자기 핏빛이 솟구쳐오르더니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맨주먹으로 몇 사랑을 해치웠다.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독살스러운 모습까지 보여 상대방을 놀라게 했다.그 사람들은 애스릭을 보낸 후 매우 내키지 않았다. 한바탕 뒤지고 나서 도망갈 계획이었는데, 결국 절반 정도 뒤지다가 기현 일행을 만났다. 특히 기현은 어두운 얼굴을 한 채 그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듯 보였다.그들은 원래 기현 일당과 대충 싸우려고 일부러 그들을 놓아주려 했는데 기현이 달려들어 그들 몇 사람을 쓰러 눕히자 분노가 치밀어 올라 기현 일행과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기현이 상대방의 생각을 알면 지금쯤 후회해 죽을지도 모른다. 몇 분 동안 아무렇게나 싸우면 될 일을 이렇게 충동적으로 또 한 번 미뤘다.몇 분 동안 싸운 후, 쌍방은 모두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기현의 왼팔이 그 무리의 두목을 누르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총을 쥐고 그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고 있어 쌍방이 모두 시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기현은 그들의 타협을 기다렸고, 그 사람은 반격의 기회를 기다렸다.이 팀장은 원래 타협하려 했지만, 지금 이 지경에 이르니 승리욕이 자극되었고 지금은 고개를 숙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머리를 숙이면 부하들이 그를 무시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라도 그는 승부를 내려고 했다.이때 폭발음이 드디어 또렷하게 들렸고 그 사람은 이때 갑자기 손을 썼다.기현은 그가 성급히 달려들 것을 예상한 듯 손을 빼 권총을 내던지고 날쌔게 상대방의 손을 잡아 그의 등 뒤로 돌렸다. 두 발은 날렵하게 그의 허리와 배를 걷어찼고 곧 사납게 그의 몸을 비틀어 앞을 가
현진성은 애스릭의 부하들이 베티를 데려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애스릭이 아직도 단념하지 않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애스릭이 베티를 포기하거나 그들과 함께 죽으려고 이 보이지 않는 장치를 작동시켰다고 생각했다.애스릭이 여전히 단념하지 않고 베티를 데려가서 부활을 꿈꾸고 있을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애스릭은 고승혁 교수와 강윤아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진성은 갑자기 눈꺼풀이 미친 듯이 뛰며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윤아와 고승혁 교수가 숨어 있던 방에서 총소리가 났다.그는 급히 아까의 그 방으로 돌아갔다. 들어가 보니 그가 배치한 사람 중 몇 명은 상처를 입었고, 또 몇 명은 이미 의식을 잃었으며 그중 한 명은 이미 죽었는데 의사였다. 그 의사는 아기의 인큐베이터를 필사적으로 안고 있었다.진성은 그 의사의 시체를 땅에 부축하려고 했지만, 그 사람의 손이 인큐베이터 가장자리를 필사적으로 잡고 있어서 아주 많은 힘을 써서야 그 손을 쪼갰다. 진성은 겨우 옆 깨끗한 곳으로 메고 가서 그를 살며시 내려놓았다.의사를 내려놓은 진성은 돌아서서 인큐베이터 안의 아기를 살펴보았다. 아기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매우 달콤하게 자고 있었기에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모두가 엎드려 있어서 진성은 한동안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하나 뒤집어 보았다. 애스릭의 사람들이 그냥 들어와서 그들을 다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고승혁 교수를 데려갔을 줄은 몰랐다.진성은 갑자기 윤아가 떠올랐다. 총소리가 그렇게 컸으니 윤아가 정신을 차리지 않았을 리 없다. 진성은 급히 모퉁이의 병상 옆으로 달려갔다.이불 속이 울퉁불퉁했다. 그는 처음에는 고승혁 교수 등이 윤아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고 생각했지만 열어보니 안에 베개가 있었다. 진성은 멍해졌다.“이 방은 밀폐되어 있는데 그들은 어디에 잡혀간 거지? 게다가 방금 내가 문 앞에서 지키고 있었으니 문으로 나갔을 리가 없어.”진성은 조급했다.갑자기
고승혁 교수는 숨을 헐떡이며 말하고는 바다 위를 바라보았다. 바다 위에 배가 한 척 있었는데 애스릭이 그 배에 있었고 많은 사람이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고승혁 교수는 깜짝 놀라 몇 발짝 뒤로 물러서며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현진성은 그에게 대답할 방법이 없어서 그를 붙잡고 비밀 통로로 갔다.권재민도 급히 한기현에게 연락해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했다.그러나 신호를 받자마자 재민은 기현 쪽에서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기현아, 무슨 일이야?”재민은 노심초사하여 급히 물었다.“방금 그 사람들이 들이닥쳐 시스템을 파괴했어. 최선을 다해 구조했으니 지금은 30분 정도 지연될 수 있어.”“시스템 복구가 시급한데 지금 그들과 싸우는 중이라……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어.”기현은 시스템 감시실에서 애스릭의 부하들과 싸우며 관제탑에 다시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면서 권재민과 이쪽의 상태를 보고했다.보고하는 과정에서 재민은 기현의 끙끙거리는 소리까지 듣고는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기아현, 너는 어때? 버틸 수 있겠어? 시스템 쪽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지금은 복구할 방법이 없어. 이젠 네가 나설 차례야. 우리가 살아나갈 수 있는 시간은 안 남았어요, 재민아.”“상대편은 사람이 너무 많은데 우리 사람은 이 몇 명밖에 없어. 버티기 힘들 것 같아, 재민아, 빨리 와.”기현이 헐떡이며 소리쳤다.재민은 이 소식을 듣고 마음이 급했지만 윤아가 이쪽에 있었기에 결정하기 어려웠다. 윤아가 힘없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서 매우 걱정했다.진성은 재민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내 부하들이 애스릭의 부하들에게 습격당했고, 그자들이 통제실의 시스템을 파괴했대요. 지금 우리 부하들이 그들과 싸우고 있는데 기현이도 그들에게 얽매여 시스템을 고칠 기회가 전혀 없어요…… 나는 윤아 씨가 마음에 걸려요.”재민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가요, 여기 내가 있을게요. 기지 안에 내 사람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