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열리더니 송혁준이 안에서 걸어나왔다.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고 회장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송혁준은 태연한 태도로 단상에 올라서더니 옅은 미소를 띠었다.한 기자가 입을 여는 걸 시작으로 날카로운 질문이 쏟아졌다.그의 뒤에 있는 커다란 스크린에는 네티즌들의 실시간 댓글이 올라왔다.입에 담기 힘들 정도로 험한 말들도 있었지만 송혁준은 여전히 웃으며 앞을 보고 허리를 곧게 편 채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말했다.“여러분이 이 문제에 관심이 많으신 것 압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의 의문들에 모두 답을 해드리려 합니다.”“맞습니다.”송혁준이 입술을 한번 깨물고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저는 동성애자입니다.”말이 끝나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사실 저도 이 일 때문에 오래동안 속을 썩여왔었습니다.”송혁준이 옅게 웃었다.“오늘 이 자리에서 밝힘으로서 여러분에게도, 저에게도 솔직해지려고 합니다.”“저는 남자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게 용서받지 못 할 정도로 악랄한 일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사람마자 마음이 다르니까요. 혹여 사람들의 보편적인 사상과 일치하지 않을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해도 저는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는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밝히는 이유는 여러분의 질책을 받아들이고 저 자신에게도 솔직해지기 위해서입니다.”“그리고 만약 제가 국왕이 된다면 저는 왕후를 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습니다. 엄한 여자를 희생시킬순 없으니까요.”기자들은 숨을 죽인 채 기사를 써내려갔고 카메라는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그의 모든 모습을 담고 있었다.“그리고 인터넷의 악플들은...”송혁준이 웃었다.“제가 과연 아무렇지도 않을까요?”그 말에 사람들이 수군거렸다.“서로 의견이 달라서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는 것은 문제 될게 없습니다.”곧이어 송혁준이 정색하며 말을 이었다.“하지만 인신공격은 도덕적으로 문제 될 뿐만 아니라 엄연히 위법행위이기도 합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의 발언권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그렇
정전에 들어선 송지아는 송이수의 매서운 눈초리를 마주하고는 몸을 움찔 떨었다.“숙부님...”송이수는 노기를 띤 채 그녀를 보았다. 그는 이미 송지아에서 완전히 실망했다.송지아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그 시위가 나 장군님의 심복이라는 걸 알아챘다. 송이수는 무엇때문에 나씨 가문의 시위를 황궁에 불러들인 걸까...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웃었다.“숙부님께서 어쩐 일로 저를 부르셨는지.”송이수가 숨을 들이마시더니 속에 있는 화를 잠깐 가라앉히고는 손을 들어 시위들을 물렸다.정전에 둘말 남자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방금은 송지아의 체면을 생각해서 아무말도 하지 않은 것이었다.“우리 둘 뿐이구나.”송이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차갑게 그녀를 보았다.“솔직히 말하거라!”송지아가 우물쭈물했다.“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시치미냐?”송이수가 크게 화를 냈다.“인터넷에 올라온 글, 네 짓이지? 그리고 그 악플도 네가 시킨 거지? 넌 혁준이를 해치고 벼랑 끝에 몰아세웠어. 대체 왜 그런거냐!”“숙부님, 왜 제가 한 짓이라고 생각하세요?”송지아가 발뺌했다.“설마 제가 송혁준을 질투해서 그런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걔는 제 친동생이에요, 제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요.”“그러니까, 나도 네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묻고 싶구나.”송이수가 힘겹게 심호흡하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너랑 혁준이가 황궁에 금방 들어왔을때 내가 너희 둘 손을 잡고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던 기억이 생생한데... 맹세컨대 나는 너희 둘을 내 자식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변합없고!”“하지만 왜 혁준이와 다르게 너는 가족의 정이 없는 거냐. 왜 모든 걸 걸어서라도 그 애를 망가뜨리려 해. 심지어 황실도 망가뜨리려 하고 있구나.”“저는...”송지아가 입술을 깨물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숙부님, 증거 없으시잖아요!”“증거?”송이수는 그녀가 끝까지 잡아 뗄줄을 예상하지 못했기에 냉소를 흘리며 종이를 한장 내던졌다.송지아는 종이에
송지아가 멍해 있을 때 몇 명의 건장한 시위들이 들어와서 좌우로 그녀의 팔을 잡아 끌고 나갔다.송이수가 그녀에게 금족령을 내려 그녀는 이제 한동안 궁전에서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송지아가 발악하며 크게 소리치자 그녀의 울부짖음이 복도에 울려퍼졌다. 송이수는 그런 그녀를 보며 한숨을 크게 쉬고는 복잡한 심경을 가라앉혔다.송혁준이 정전쪽의 어수선함을 의아하게 여겨 그쪽으로 갔을때 마침 시위들에게 끌려 나가는 송지아를 발견했다.두 사람이 서로를 지나칠때 송지아는 죽일듯한 눈빛으로 송혁준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에 송혁준은 등 뒤에 식은 땀이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송혁준이 정전으로 들어가 송이수의 앞에 앉았다.“왔니...”송이수가 마지못해 웃어보였다.송혁준에게 있어 송이수는 항상 나무처럼 든든한 존재여서 언제까지나 그들을 위해 바람과 비를 막아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와서야 그 나무가 사실을 흰머리가 많이 났고 점점 늙어가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숙부님...” 송혁준이 송이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누나를 너무 탓하지 마세요. 그냥 신경 쓰지 마세요, 누나는...”그가 머리를 짜매며 위로의 말을 생각해내려 했으나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송이수가 그 모습을 보더니 웃었다.“내 딸 같은 아이인데 내가 어찌 그 애를 탓하겠니. 근데 아무것도 안 하자니 너에게도 못할 짓인 것 같고...”“전 이미 그녀에게 있어 가장 소중했던 왕위를 가졌으니 이제 서로 공평해졌다고 봐야죠.”송이수가 송혁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래, 너랑 상의 할 일이 있다.”그가 몸을 일으키더니 송혁준을 데리고 정원으로 들어갔다. 신선한 공기와 아름다운 풍경을 보니 마음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서지현을 위해 연회를 준비하려고 한다.”“여기 와서부터 내가 해준것이 없더라고, 그러니 이 기회를 빌어 그녀와 황실의 일원들을 서로 소개해주는 것도 좋을 것 같구나. 나중에라도 보면 인사할 수 있게.”송혁준이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너무 좋죠
송혁준은 어이가 없어서 그를 쳐다봤다.나석진은 혼이 나가서 반지를 만지작거리다가 그제야 송혁준이 자신에게 뭐라고 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어, 뭐라고 했어?”“아니야.”송혁준이 웃으며 말했다.“그냥 작위 세습을 페지할까 생각하고 있었어.”나석진이 이해가 되지 않는 다는 듯 물었다.“왜?”“예상대로라면 나 장군님이 너한테 작위를 물려주시겠지?”“그렇지.”나석진이 고개를 끄덕였다.“그게 왜?”“그냥...”송혁준이 개구지게 웃었다.“작위 세습이라는 게 좀 위험한 게 아닌가 싶어서. 나라의 중요한 직위를 바보에게 맡길 순 없잖아.”나석진이 송혁준을 째려보며 가볍게 한대 때렸다.“야!”송혁준이 나석진의 주먹을 가볍게 피하며 웃었다.“내가 어떤 고생을 해가며 이 코너를 준비했는데, 날 이렇게 대해?”“무슨 코너?”송혁준이 손뼉을 치자 한 고용인이 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가져왔다.“다이아몬드 반지 같은 건 사실 내가 선물하긴 좀 그런데, 그래도 도저히 뭘 선물해야 좋을 지 모르겠더라고.”송혁준이 웃었다.“이 반지 한쌍은 숙부님이 나한테 물려주신 거야. 원래는 나랑 왕후가 낄거였지만... 난 왕후를 두지 않을 생각이니까.”“혁준아, 이건...”“괜찮아.”송혁준이 나석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숙부님이 그러시는데 원래 왕위는 송임월 고모님것이었대. 만약 그때 고모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마 나중에는 서지현의 자리가 되었겠지.”“그러니 이 반지를 너와 서지현에게 주는 건 어떻게 보면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거지 뭐.”나석진이 감동받은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끼인 약간 거매진 은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 지 몰라했다.“프러포즈 하는 김에 크게 해야지.”송혁준이 개구지게 웃었다.“황실 사람들에게 다 알려야 돼. 너희 장군부가 우리 꼬마 저하를 귀하게 대해줄거라는 걸 말이야.”...강서연과 최연준이 최군형을 데리고 연회에 참석했다.한살이 좀 넘은 아이는 화원의 아름다
손이 작아도 꽤나 매웠다. 그리고 최군형은 할 일을 끝냈다는 듯 꺄르르 웃었다.“최군형!”최연준이 아이의 통통한 손을 잡고는 때리는 시늉을 했다.“이 자식, 다시 한번 아빠 때리면 가만 안 놔둘거야!”“어마...”억울함을 당한 꼬마가 몸을 돌려 엄마를 찾으며 강서연의 목을 끌어안았다.하지만 강서연은 평소와 다르게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최군형이 맘껏 울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는 최연준과 함께 곁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강서연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아까 아빠 때린 손 어느 손이야! 내밀어!”최군형이 눈을 크게 뜨더니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하지만 강서연은 물어나지 않았다.“애기가 이렇게 어른을 때리면 돼요, 안 돼요? 군형이 아빠를 때리면 어떡해.”“우우...”“어느 손이야! 어서 내밀어.”최군형은 자신의 편이 없다는 걸 알아채고는 이번에는 진짜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우물쭈물하며 희고 작은 두 손을 내밀었다.강서연이 망설임없이 두 손을 내리치자 최군형이 울음을 터뜨리려고 했다. 그때 그녀가 부드럽게 아들을 말렸다.“군형아, 너 이제 한 살 반이야. 너도 이제는 알아야지. 사람 얼굴을 때리는건 아주 예의없는 짓이야. 앞으로는 그러면 안돼. 알겠지?”강서연이 아들의 머리를 만지며 말했다.“너도 씩씩한 남자지? 엄마는 네가 다시는 이런 예의 없는 짓을 하지 않을 거라고 믿어. 맞지?”최군형이 벌개진 눈으로 그녀를 보다가 ‘남자’라는 말을 알아듣고는 눈물을 삼켰다. 최군형이 최연준을 한번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바... 제송함니다.”최연준은 순식간에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아들이 귀엽게 사과했기 때문도 있지만 강서연이 자신의 편을 들어줬기에 기분이 아주 좋았다.그가 최군형을 안고는 볼에 뽀뽀하며 사과를 받아주었다. 그리고는 강서연을 빤히 바라보았다.“왜 봐요?”“그냥...”그는 너무 감격해서 어디부터 말해야 할지 몰랐다.“그냥 드디어 당신에게서 내 존재감이 느껴졌어.”강
”그게...”강서연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아까 누가 지나가는 걸 본 것 같아요!”최연준이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주위를 봤지만 수상한 흔적은 없었다.대황궁은 생태환경을 최대한 유지하려 했고 동물의 출입을 굳이 막지 않았다. 그렇기에 가끔씩 고양이들이 궁안으로 들어와 먹을 걸 찾거나 다람뒤들이 나무 위에서 뛰놀기도 했다.“내가 잘 못 본걸 까요?”최연준이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잘 못 봤든 아니든 일단 송혁준 씨에게 알리자. 호위를 강화할 수 있도록.”“네, 그게 좋겠어요.”강서연이 동의했다.“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두 사람은 빠르게 발을 놀려 사진을 찍는 정원 가운데에 도착했다.단체 사진 촬영의 대형이 얼추 갖춰져있었는데 송시우가 정중앙에 있었고 서지현과 송혁준이 그의 양 옆에 있었다. 두 사람 다 왕관을 쓰고 정식적인 예복을 차려입고 있었는데 거기에 아름다운 외모까지 더해지니 마치 동화속의 공주님과 왕자님을 보는 것 같았다.나석진은 최대한 서지현의 옆에 서고 싶었지만 그럴 명분을 없었기에 결국 그녀의 뒤에 서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그렇게 겨우 그녀의 뒤에 자리를 잡았을때 나도훈에게 뒷목을 잡혔다.“황실 일원들 끼리 사진 찍는 건데 네가 거긴 왜 끼니.”나석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이제 프러포즈에 성공하고 나면 그때도 그렇게 말 할 수 있나 두고 보죠!’사람들은 행복한 분위기에 취해 석상 뒤에서 한 사람이 독기 품은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송지아는 입술이 새하얘질 때까지 깨물었다. 그녀의 손에는 탄환이 가득 찬 권총이 들어있었다.그녀는 송혁준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을 보니 어릴적 생각이 조금 났다. 어린 송혁준은 나이에 답지 않게 음울했기에 사람들은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면에서 뛰어난 송지아는 가연의 예쁨을 받았다.게다가 남양은 이제껏 여왕이 등기하는 일이 많았기에 왕위는 그녀의 곧 그녀의 것이 되리라고 생각했다.송혁준도 그녀와 왕
나석진이 수술실에서 나와 VIP병실로 옮겨졌다.병실에는 커다란 유리창이 있었는데 서지현이 유리창 밖에 조용히 앉아 병상에 누워있는 나석진을 보았다.그녀의 얼굴에 참담함이 드리웠다.그녀는 사람이 너무 아프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걸 지금 알게 되었다. 울지도 웃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않은 채 그러 나무처럼 그자리에서 그를 바라보기만 할뿐이었다.일분일초라도 더 보기 위해서.머리속에서 나석진이 쓰러지는 장면이 계속 재생되었다.그때 그는 피범벅이 된 채로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는데 품에서 힘들게 꺼낸 다이다몬드 반지를 그녀에게 줬다.“청혼... 하는 거야.”그가 피가 낭자한 입을 열어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지현아, 무서워하지마. 나는 꼭 살아서... 너랑 결혼 할 거니까.”그의 말이 그녀의 마음 깊이 박혔다.그녀는 고개를 숙여 피가 말라붙어 굳어진 자신의 손을 들여다 보았다.이렇게 많은 피를 흘렸었나!서지현이 입술을 깨물며 울지도 어쩌지도 못하고는 다시 한번 병실에 있는 나석진을 보았다.그러다가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아저씨, 배우니까, 연기 잘 하잖아요.”“그러니까 지금 연기하는 거죠? 맞죠?”옆에 있던 강서연이 눈물을 흘렸다. 다른 사람들도 서지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랐다.수술은 윤찬의 집도하에 진행되었고 순조롭게 총알을 빼냈지만 나석진은 이미 피를 많이 흘렸기에 아무리 지금 수혈을 한다고 해도 깨어나기까지 시간이 좀 필요했다.하지만 깨어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점점 더 위험해졌다.윤찬이 그들에게 다가와 낮은 한숨과 함께 말을 했다.“다들 가서 쉬세요. 저희 쪽에서 석진형님을 극진히 모시겠습니다.”최연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그럼 언제 깨어나는 거야?”윤찬이 고개를 숙였다.“저도 몰라요...”“네가 어떻게 몰라!”윤정재가 버럭 화를 냈다.“이렇게 간단한 수술도 제대로 못하고, 우리 윤씨 가문의 망신을 네가 다 하는 구나.”“아버지!”윤찬이 억울한 듯 말했다.“아버지는 한의학
반지는 그녀의 손에 있는 것과 한쌍이었는데 그저 크기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만약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서지현이 반지를 꼭 쥐고는 나석진이 총에 맞은 채 힘겹게 반지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던 모습을 떠올렸다.“그 사람은...”그녀가 입을 열어 무언가 물어보려 했지만 목이 막혀와 한마디도 내뱉을수 없었다.윤찬이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여겨 두루뭉술하게 말해줬다.“총알이 급소가 아니라 어깨에 박혔어요. 그리고 지금은 수혈도 한 상태라 금방 깨어날거에요.”“진짜요?”“네, 진짜.”“그럼 얼마나 걸리는데요?”“그게...”윤찬이 난처해졌다.나석진은 그에게 정확히 얼마나 걸릴지 알려준 적이 없었다.‘아, 진짜! 어려서부터 품행이 바르고 거짓말을 해본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하는 거짓말이 황실 사람을 속이는거라니...’윤찬이 코를 긁적이고 머리를 긁적이며 귀가 빨개져서 억지스럽게 말했다.“그냥 잠시 기절한 것 뿐이예요. 곧 일어날 거예요, 아마도...”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놓인 반지를 더 꼭 쥐었다. 다이아몬드의 딱딱한 겉면이 그녀의 손바닥에 아프게 파고 들었다.이렇게 딱딱하니 사람들에게 영원한 사랑의 상징으로 불리는 거겠지.서지현이 정신을 차리며 옅게 웃었다.“저기, 혹시 제가 들어가서 간병해도 될까요?”윤찬이 잠시 멈칫했다.‘이 대사는 시뮬레이션이 없던 건데...’하지만 나석진이라면 이 상황을 반겼겠지.“사실 간병하지 않으셔도 돼요.”윤찬이 그래도 일단 예의상 거절했다.“저희 병원에 전문적인 의사와 간호사가 많아서 석진형님을 알뜰히 보살필 겁니다. 그래도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잘 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말을 마친 윤찬이 발빠르게 달려가서 무균복을 하나 가져왔다.서지현이 간호사를 따라 옷을 갈아입으러 갔을때, 사무실에 도착한 윤찬은 나석진에게 문자를 보냈다.[석진 형님, 임무 완수했습니다. 전하께서 지금 직접 간병하러 가신답니다.][저기, 전 이제 이만 가봐도 되겠죠? 좀 이따가 수술도 있고, 회진도 해야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