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시연은 순간 멍해졌다. 백시연의 눈에 비친 당황과 의문은 최지용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최지용은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항상 하던 대로'의 규칙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그것은 둘 사이의 작고 은밀한 애정 표현이었다.백인서의 앞머리가 길어지면 최지용이 잘라줬고 최지용의 수염이 길어지면 백인서가 면도해 줬다.“인서야.”최지용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늘 하던 거, 정말 기억 안 나?”백시연은 속이 타들어 갔고 눈은 사방을 헤맸다.“인서야! 오늘 너 왜 이래?”“아, 맞다, 지용 씨!”백시연은 급히 화제를 돌렸다.“저기 편집숍 보세요! 안에 있는 옷들이 정말 괜찮아 보이지 않아요?”“인서야...”“가요, 가서 구경해요!”백시연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최지용을 편집숍 쪽으로 부드럽게 이끌었다.“저 드레스 사줘요. 전 드레스 입는 걸 가장 좋아하잖아요!”최지용은 백시연의 손에 이끌려 DL 타워를 한 바퀴 돌았다. 드레스를 구매한 후, 백시연의 쇼핑 욕구는 더욱 불타오르는 듯했다. 최지용은 양손에 쇼핑백을 가득 든 채 백시연을 따라다녔고 백시연이 마음에 들어 한 것을 모두 계산했다.단 2시간 만에 백시연은 억 단위의 숫자를 훌쩍 넘어서는 돈을 썼다.백인서와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이런 거액을 써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쓴 돈은 아깝지 않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번지는 의문을 지울 수는 없었다.“저기... 지용 씨.”마지막으로 백시연이 약간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좀 피곤해졌어요. 이제 쇼핑 그만할까요?”최지용은 백시연을 깊이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백시연은 계속 거짓말을 이어갔다.“저 학교에 좀 들르려고요. 정승우가 공부 열심히 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거든요.”“오늘 주말인데도 일하러 가야 해?”“그게...”백시연은 눈동자를 굴리며 말을 꾸며냈다.“야근하는 거, 가끔 있는 일이잖아요! 지용 씨는 집에서 기다려요. 금방 다녀올게요.”백시연은 그렇게 말하고 방금 산 물건들을 들고 바람처
“뭐라고?”종수는 경계하며 물었다.“최지용이 너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고?”“맞아요!”종수의 눈이 가늘게 좁아지며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시연아, 가지 마!”“왜요?”백시연은 쇼핑백에서 한정판 드레스를 꺼내 몸에 대어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아저씨, 이 드레스가 얼마인지 아세요? 남양에서 봤던 적이 있는데, 이 디자이너는 오직 남양 왕실을 위해서만 옷을 제작한다고요! 그런데 여기선 최지용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저한테 사줬다니까요!”종수는 백시연을 바라보며 깊은 고민과 걱정 속에 빠져들었다.백시연은 마음이 깊지 않았다. 백시연의 날카로운 가시와 끝없는 탐욕은 감출 수 없이 드러나고 있었다.몇 벌의 드레스와 몇 개의 가방만으로도 백시연을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었다. 남양에서도, 사람들이 조금의 이익만 챙겨줘도 백홍이 고생하며 쌓아 올린 재산을 무너뜨리는 데 서슴지 않았다.종수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이 아이는 자신이 어릴 적부터 아끼며 키운 아이였다. 종수는 백시연을 친딸처럼 아꼈고 단 한 번도 백시연이 고통을 겪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게 두지 않았다. 종수는 백시연을 위해 화려한 유리성을 세워 세상의 험난함으로 완전히 차단하려 했다.하지만 그는 잊고 있었다.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아이는 무모한 자신감과 거리낌 없는 소비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사실을.“최씨 가문은 최고 명문가야. 그렇게 만만하게 볼 집안이 아니라고.”종수는 백시연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최지용과 너무 가까워지다가 네가 손해를 볼까 봐 걱정된다.”“손해요?”백시연은 웃음을 터뜨리며 오늘 쇼핑한 ‘전리품’을 모두 보여줬다.“최지용이 오늘 저에게 얼마를 썼는지 알기나 해요?”“시연아, 너...”“됐어요, 그만하세요!”백시연은 짜증 난 듯 손을 휘저었다.“또 설교하려는 거 알아요. 조그만 이익에 넘어가 대국을 잃지 말라는 얘기하려는 거죠? 그런데 아저씨, 최지용은 달라요! 그리고 제가 백인서를 대신하려면 결국엔 최지
종수는 백시연을 답답한 눈빛으로 한참 바라보다가 억눌린 감정을 터뜨리며 말했다.“난 이미 최지용을 네 손에 넘겨줬어! 백인서를 납치한 것만으로도 네 엄마에게 너무나 미안한데, 이제 남녀 사이의 일까지 내가 하나하나 가르쳐야 하겠니?”종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휙 젓고 떠나버렸다.남겨진 백시연은 멍한 표정으로 한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화가 치민 백시연은 드레스를 바닥에 던지려다 망설이더니 결국 소파 위로 힘껏 내던졌다....하지만 백시연은 종수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자신의 길을 고집하며 밀고 나가기로 했다.백시연은 최지용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밤은 권온유와 시간을 더 보내겠다며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핑계를 댔다. 최지용은 잠시 멈칫하다가 잠깐의 침묵 후 말했다.“알았어. 온유에게 내 안부도 전해줘. 너도 몸 잘 챙기고 쉬도록 해.”“네, 알겠어요.”“아, 맞다. 인서야.”전화를 끊기 전, 최지용이 물었다.“내일 저녁에 우리 집에서 밥 먹자. 우리 엄마가 너를 오랜만에 보고 싶어 하셔.”백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승낙했다.다음 날 저녁, 최지용은 백시연과 함께 부모님 집으로 향했다.표아정은 백시연을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다. 만나자마자 백시연의 손을 잡아 자기 팔에 끼워 넣었다.백시연은 이런 신체 접촉에 익숙하지 않아 본능적으로 뿌리치고 싶었지만 백인서라면 평소 이렇게 행동했을 거라고 생각하며 억지로 미소를 띤 채 팔을 더 세게 잡았다.저녁 식사를 하기 전, 표아정은 백시연과 가볍게 이야기를 나눴다.“인서야, 오랜만에 봤는데 살이 조금 빠진 것 같네? 무슨 일 있었던 거니? 지용이가 널 잘 챙겨주지 않니?”“아니에요.”백시연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지용 씨는 저한테 정말 잘해줘요.”백시연은 최지용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남자의 눈에 깃든 따스함이 백시연의 마음을 뒤흔들었고 동시에 질투로 가슴을 뜨겁게 태웠다.그 따스함은 자신이 아닌 백인서를 향한 것이었다. 이런 생각이 스
최지용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자 표아정은 백시연을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인서야, 잠시만 앉아 있어. 난 주방으로 가봐야 해!”“어머님, 하지만...”백시연은 조금 놀란 듯 물었다.물에 손끝 하나 담글 것 같지 않은 귀부인이 백인서를 위해 직접 요리를 한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너 내가 만든 송어찜을 제일 좋아하잖아. 오늘 한 마리 준비했으니까 내 솜씨를 제대로 보여줄게!”백시연은 기뻐하며 활짝 웃었고 표아정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표아정은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보며 말했다.“지용아, 넌 주방에 와서 날 좀 도와줘.”최지용은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나 표아정과 함께 거실을 나섰다.거실에 홀로 남겨졌지만, 백시연은 조금의 불편함도 느끼지 않았다. 백시연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최씨 가문의 화려함에 눈길을 떼지 못했다.명황산은 최씨 가문의 소유지로 가문의 대부분이 이곳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연서의 ‘서원’은 명황산 저택 중 가장 운치 있는 곳으로 손꼽혔다.최지용에게는 별도의 독립된 집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부모님과 함께 보내곤 했다.백시연은 넓은 거실을 천천히 걸으며 감상했다.최연서가 서화와 골동품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전에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거실에 진열된 몇 점의 옥기와 도자기는 하나같이 우아한 디자인과 고급스러운 색감으로 눈길을 끌었다. 아무거나 집어 들어도 값어치가 엄청날 것임이 분명했다.만약 자신이 최연서의 외아들인 최지용과 결혼하게 된다면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되지 않겠는가?백시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이미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장면을 상상했다.한편, 표아정은 우아한 걸음으로 거실을 벗어나더니 서둘러 방음 처리된 비밀 방으로 들어갔다.표아정은 문을 닫고 돌아서서 최지용을 바라보았다. 최지용은 이미 초조함으로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엄마...”최지용이 말을 꺼내려는 순간, 표아정은 손을 들어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다 알아.”표아정
시간이 흐를수록 백시연의 마음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표아정과 최지용이 주방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보내는 이유가 정말 송어찜을 만들기 위해서일까?혹시 최씨 가문의 사모님이 백인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일부러 이렇게 방치하는 건 아닐까?백시연이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종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모두 백인서가 어두운 방에 갇혀 있는 사진이었다.[알겠어요.]백시연은 답장을 보냈다.[백인서를 잘 감시하세요. 하지만 앞으로는 저한테 메시지 보내지 마세요. 지용 씨가 볼 수도 있어요.]문자를 보내자마자 백시연의 다른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권씨 가문과 연락할 때만 사용하는 전용 휴대전화였다.화면에 뜬 이름을 본 순간, 백시연의 눈에 짜증 섞인 기색이 스쳤고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죠?”“무슨 일이냐고?”전화기 너머의 권욱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도대체 골수 검사는 언제 와서 받을 건데?”백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에 있는 도우미를 피해 구석으로 걸어갔다. 백시연은 목소리를 낮추며 차갑게 대답했다.“흥, 그걸 왜 저한테 묻죠? 오라버니, 부인의 ‘성의’가 너무 부족한 거 아닌가요?”“너...”권욱은 잠시 말을 멈추고 목소리를 차분히 가다듬으며 말했다.“온유 상태가 더 나빠졌어. 와서 온유라도 보고 가면 안 되겠니?”“지금 해야 할 일이 있어요.”“돈이 필요한 거 아니야?”백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돈 줄게.”권욱은 냉정하게 말했다.“네가 원하는 만큼 줄게. 그저 내 딸을 구하겠다는 약속만 지켜줘.”“이건 돈 문제가 아니에요...”“네 모든 조건을 들어줄 수 있어!”권욱은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했다.“백시연, 내 딸을 구해주겠다던 약속은 지켜!”백시연은 핸드폰 마이크를 손으로 꼭 감싸며 주위를 경계하듯 둘러보았다.최씨 집안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에 결국 마지못해 권욱의 요구에 대답했다.“지금은 곤란해요... 조금만 기다려요. 곧 갈 테니까.”바로 그때, 표아정이 환한 미소를 띤
최지용이 말을 이으려 하자 표아정은 가볍게 손을 흔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머니가 직접 데려온 사람들이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 남매는 나이는 어리지만 움직임이 번개처럼 빠르고 머리 회전도 뛰어났다. 혹독한 훈련을 버텨내고 선발된 이들이니 그 실력만큼은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그야말로 표아정의 오른팔이나 다름없었다.“왜? 어머니가 보낸 사람들이 믿음직스럽지 않다는 거야?”“그런 건 아니에요, 다만...”“알아, 네가 직접 확인하고 싶어 하는 마음.”표아정이 최지용을 힐끔 바라보았다.“네 마음 이해해. 그런데 말이야, 아들. 어떤 일이든 급해한다고 해결되지 않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정함을 유지해야 상대의 약점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어.”...백인서는 이미 밀실 속에서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어둠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관자놀이에서는 욱신거림이 느껴졌다. 머릿속이 비어 있는 듯 혼란이 가득했다. 겨우 몸을 일으킨 백인서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참 동안 곰곰이 기억을 되짚었다.병원, 복도, 그리고 그 아저씨...백인서는 갑작스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러다 무릎이 옆에 있던 서랍장에 부딪혀 적막한 공간에 큰 소리가 울렸다. 백인서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어 문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조용히 울리는 발소리, 그리고 낮고 거친 목소리가 어둠 속을 가르며 들려왔다.“깨어났군.”백인서는 얼어붙은 듯 몸을 멈췄다.“누구세요?”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들어왔고 백인서는 눈앞의 사람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아저씨?”백인서는 놀라서 소리쳤다.종수는 아무 말 없이 백인서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백인서 앞에 몸을 낮춰 앉았다. 두 다리는 멀쩡했고 심지어 젊은이들보다 더 날렵했으며 움직임에는 힘이 넘쳤다. 그동안의 세월은 그에게 태연히 위기를 마주하는 침착함과 냉혹한 결단력을 심어준 듯했다.“정말... 아저씨예요?”백인서의 목소리가 떨렸다.“아저씨가 왜....”“그래, 나야.”종수는 낮은
종수의 눈빛에 묘한 어둠이 깃들었다. 그는 잠시 동작을 멈추고 사진 몇 장을 꺼내 백인서 앞에 내던졌다.백인서는 멍하니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사진 속 얼굴은 자신과 똑같았다. 마치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친 듯 백인서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단번에 멈춰버렸다.“이 아이는 백시연이다.”종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의 쌍둥이 동생이지.”“쌍...쌍둥이요?”백인서는 귀를 의심하며 중얼거렸다.종수는 백인서를 잠시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웃음을 지었다.“홍이 누님은 한 번도 이 사실을 말한 적 없었겠지.”백인서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백인서는 줄곧 자신이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고 생각해 왔다. 어머니 백홍이 세상을 떠난 뒤, 이 세상에 더 이상 자신의 혈육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다.하지만 자신과 피를 나눈, 게다가 얼굴마저 똑같은 자매가 있다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알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당시 홍이 누님은 두 명의 아이를 낳았어. 하지만 너희는 사생아였고 이름도 가문도 없었지.”종수는 조용히 말했다.“홍이 누님은 입지도 부족했고 평판 또한 좋지 않았어. 늘 경찰의 추적을 피해 살아야 했지. 그래서 두 아이를 모두 데리고 있을 수 없었기에 결국 동전을 던져 남을 아이와 떠날 아이를 정했어.”백인서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이었다.“그리고 시연이가 남게 되었어.”종수는 백인서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그리고 너, 인서... 너는 떠나는 쪽이었어.”백인서라는 이름도 그렇게 정해진 것이었다. 떠날 인연이라는 뜻을 담아...“홍이 누님은 널 정대명에게 맡겼고 매달 돈을 보내며 널 돌보게 했지. 그 작은 마을에 널 숨긴 이유는 그곳이 세상과 단절된 곳이라 누군가 널 찾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홍이 누님이 어떤 일을 해왔는지 너도 알고 있겠지. 만약 경찰에게 잡히기라도 한다면 너와 시연의 인생은 평생 망가졌을 거야.”백인서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흥, 그 작은 마을이 정말 그렇
백시연이 병원에 발을 들이자마자 좌우에서 갑자기 두 명의 경호원이 다가와 백시연을 붙잡았다.머릿속이 새하얘진 백시연은 본능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상대는 거구의 남자들이었기에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한 남자가 거칠게 천 조각을 백시연의 입에 밀어 넣었다.백시연은 신음 소리를 내며 발버둥 쳤다.그들은 병원의 구조를 꿰뚫고 있는 듯, 감시 카메라가 없는 경로를 정확히 따라 움직였다. 백시연은 어느 한 실험실로 끌려갔다.그곳에서 창가를 등진 채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권욱이었다. 햇빛이 권욱의 실루엣을 감싸며 그의 냉혹하고 날카로운 기운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백시연은 눈을 크게 뜬 채 두려움에 몸부림쳤고 더 다급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백시연, 미안하군.”권욱의 목소리는 낮고 차갑게 울려 퍼졌다.“널 만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권욱은 옆에 서 있던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에게 눈짓을 보냈다.의사들은 그 신호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경호원들을 향해 지시했다. 백시연은 그대로 수술대에 강제로 눕혀졌다.“윽!”“백시연, 저항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권욱은 백시연을 냉랭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말했다.“네가 더 몸부림칠수록 이 과정은 더욱 고통스러워질 거야. 하지만 협조하면 고통은 최소화될 거야. 알아서 잘 판단해 봐.”권욱은 경호원에게 손짓하며 백시연의 입을 막고 있던 천을 빼내게 했다.갑자기 숨통이 트인 백시연은 숨을 크게 몰아쉬며 간신히 말했다.“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나는 네가 약속을 지키길 바랄 뿐이야.”“권욱...”“백시연.”권욱은 차갑게 말을 이어 나갔다.“넌 아이를 키워본 적이 없으니,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겠지. 부모에게 아이는 목숨과도 같은 존재야. 그리고 내 딸은 지금 목숨이 위태로워. 네가 계속 핑계를 대며 골수 검사를 하지 않고 있으니... 흥!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이렇게라도 조치를 취하는 수밖에.”“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설마 강제로 골수 검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