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육연우는 믿기 힘들다는 듯 되물었다.“사실이에요.”동혜림은 태연하게 대답했다.“백인서가 쓰던 컴퓨터는 원래 산다라가 쓰던 거였어요. 흥, 산다라가 누군지 기억하죠?”육연우는 잠시 멍해졌다.산다라는 한때 뛰어난 영업사원이었고 성과가 좋았을 때는 영업부 절반을 책임질 정도로 실력자였다. 뛰어난 능력과 미모 때문에 질투를 받았고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 바로 동혜림이었다.동혜림은 산다라의 뛰어남이 회사 고위층, 특히 권욱의 눈에 띄는 게 두려워 산다라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그래서 동혜림은 산다라를 감시하려고 그녀의 컴퓨터에 몰래 손을 댔다.산다라가 작성하는 문서, 보고서, 대화 내용까지 모두 동혜림의 컴퓨터로 전송되도록 만든 것이다.이후 산다라가 건강 문제로 회사를 떠나자, 그 컴퓨터는 한동안 사용되지 않았고 그 자리에 백인서가 앉게 되었다.“그럼, 백인서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글을 썼는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는 거네?”“물론이죠.”동혜림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하지만 백인서는 참 이상한 사람이에요. 야근하던 그날 밤 딱 한 번 말고는 컴퓨터로 거의 글을 쓰지 않았어요.”그날 백인서가 일기장을 챙기지 못해 초조해하는 모습이 동혜림의 눈에 띄었다.백인서는 항상 냉정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었고 아무리 큰일이 일어나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백인서의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고 동혜림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모니터링 장비를 연결해 백인서의 컴퓨터를 감시하기 시작했다.“그때 저는 백인서가 쓴 걸 봤어요. 백인서가 ‘언니가 나를 잘 챙겨줘. 언니 회사에서 일하게 되어 엄마도 안심할 수 있을 거야’라고 쓰더라고요...”“처음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동혜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지만 나중에 알았어요. 그 ‘언니'가 바로 작은 대표님이라는 걸. 백인서는 주우남이 데려왔잖아요. 주우남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또 누구겠어요?”육연우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연우 아가씨, 제
“네!”강소아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이 알아서 해요.”최군형은 손을 아내의 배 위에 조심스럽게 올렸다. 임신 후기로 접어들면서 가끔 느껴지는 태동이 이번에도 아빠를 반기는 듯 살며시 움직였다.“아, 맞다. 군형 씨. 비밀 하나 말해줄게요.”강소아가 밝은 미소를 띠며 최군형의 귀에 살짝 속삭였다.“우리 아기... 딸이래요!”“뭐?”최군형은 순간 심장이 멈춘 듯 놀라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놀람과 기쁨이 뒤섞인 나머지 최군형은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진짜야? 어떻게 알았어?”강소아는 쑥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제가 의사한테 계속 물어봤거든요! 처음엔 규정 때문에 못 알려준다고 하더니, 검사가 끝난 후에 ‘공주 침대 준비하세요'라고 했어요!”최군형은 너무 기쁜 나머지 강소아를 번쩍 들어 올릴 뻔했다.문득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최씨 가문은 남자가 많고 여자가 적어서 예전부터 딸이 거의 없었다. 최연준 세대만 해도 최연희를 제외하면 전부 남자였다.그 아래 세대도 마찬가지였다. 연이어 낳은 최군형과 최군성도 모두 남자아이다 보니 ‘저주’도 생겨났다. 딸을 얻으려면 아들을 일곱 명은 낳아야 한다는 이야기였다.그래서 어머니는 두 형제를 낳은 후, 더는 아이를 낳지 않았다.아버지는 딸이 없었던 것을 평생 아쉬워했다.이제 최군형이 딸을 가지게 된 것이다.그는 당장이라도 가족들에게 전화해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은 마음에 들떴다.“진정 좀 해요!”강소아는 웃으며 말했다.“초음파가 가끔 틀릴 수도 있잖아요. 혹시 모르니까...”“아니야, 틀릴 리 없을 거야!”최군형은 확신에 차 말했다.“딸인 게 확실해.”“그래도 아직 말하면 안 돼요.”강소아는 최군형을 꾸짖듯 바라보며 말했다.“출산까지 몇 달 남았으니까, 그때까지 기다려봐요!”최군형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강소아를 끌어안았다.아내가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 혼자서만 몰래 기뻐하기로 했다. 하지만 지금부터 아기용품을 준비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최지용이 아파트에 들어서자마자 주방에서 퍼져 나오는 구수한 향이 그를 반겼다.백인서의 가녀린 모습이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백인서는 몇 시간 동안 삼계탕을 정성스럽게 끓이며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삼계탕은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백인서는 지루함 없이 그 과정을 즐기는 듯했다.백인서는 솥뚜껑을 열고 향을 깊게 들이마신 후, 작은 국자로 한 숟가락 떠 맛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최지용은 주방 문가에 조용히 기대어 서서 백인서의 모습을 지켜보며 마음속에서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최지용은 살며시 다가가 백인서를 뒤에서 안았다.“아!”백인서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허리에 감긴 커다란 손은 백인서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으며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백인서는 익숙한 품에 안기자마자 긴장했던 몸이 서서히 이완되었다.“뭐 하는 거예요?”백인서는 조용히 속삭였다.최지용은 말없이 백인서의 향기를 맡으며 자연스럽게 백인서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백인서는 어깨를 움츠리며 얼굴이 서서히 붉어졌다.최지용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곳이 백인서의 약점이었다.“비록 내 걸 만드는 건 아니지만, 이런 기분은 참 좋다.”최지용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뭐가요?”“집에 들어왔을 때, 네가 주방에서 바쁘게 요리하고 난 따뜻한 집에서 너와 함께 있는 것. 그게 내가 꿈꾸는 삶이야.”백인서는 조용히 최지용에게 삼계탕 한 그릇을 내밀었다. 최지용은 과하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장난스레 말했다.“이거, 임산부 전용 아니었어?”“안 마실 거예요?”백인서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얼굴엔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최지용은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그릇을 들고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식탁에 앉았다.백인서는 가스 불을 끄고 최지용의 맞은편에 앉아 미소를 머금고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아까 최지용이 말한 그런 삶, 그건 백인서 역시 가장 바라는 삶이었다.“인서야.”최지용은 고개를 들어 백인서를 보며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그날 네가 했던 그
임우정이 문 앞에 서자, 육연우는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임우정의 표정은 무덤덤했다.진홍색 숄은 임우정의 우아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고 자연스레 사람을 압도하는 기운을 내뿜었다.임우정은 육연우를 조용히 바라보며 배은망덕한 사람에게 다시는 자비를 베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이모.”육연우가 가볍게 말을 꺼냈다.“요즘 잘 지내시나요?”“아직도 날 이모라고 부르는구나.”임우정은 뒤쪽을 힐끗 바라보았다.기자들은 카메라를 내린 채 조용히 서 있었다. 육씨 가문의 안주인 앞에서 모두가 자연스럽게 자세를 낮췄다.“흥,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리고 날 보러 온 거냐?”“이분들은 이 분야에서 베테랑 기자들입니다.”육연우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제가 이분들을 초대했어요. 저와 함께 증인이 되어줄 분들이죠.”임우정의 눈빛이 깊어졌다. 이들 중 몇몇은 얼굴이 익었다. 연예인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등장하는 사람들이었다.“증인?”임우정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네가 저지른 악행의 증인들이 말이냐? 육자 그룹의 고객 자료를 빼돌리고, 내 남편에게 허위 소문을 퍼뜨린 그 일들 말이다.”육연우의 얼굴이 굳어지며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연우야.”임우정은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으로 육연우를 설득하려 했다.“사람의 마음은 원래 선한 거야. 너도 알지 않니? 네 삼촌과 내가 널 얼마나 아꼈는지. 언제나 널 딸처럼 대하며 부족함 없이 보살펴 주려고 했어...”임우정의 목소리에는 서린 슬픔이 배어 나왔다.“그런데 왜, 왜 이렇게 변해버린 거니? 우리가 너에게 잘해주던 모든 걸 다 잊은 거야?”육연우는 굳은 표정으로 서서 주먹을 꽉 쥐었다.“이모는 아직도 네가 바른길로 돌아오길 기대해. 우리 모두가 널 사랑해. 백인서도...”“백인서 이름을 내 앞에서 꺼내지 마세요!”백인서의 이름이 들리자마자 육연우는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뒤에 있던 기자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카메라와 녹음 장비를 슬쩍 준비했다.“백인서가 우리 엄마를
육연우의 독설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다시 이어졌다.“백인서는 이미 오래전에 모든 걸 알았어요. 일기장에 다 적혀 있더라고요! 흥, 이모, 언니, 진짜 사람들을 속여 온 사람은 백인서라고요! 백인서가 육씨 가문에 접근한 이유는 뻔하지 않나요?”백인서는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그만해!”육연우는 더욱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왜, 도둑이 제 발 저리니? 하하하... 예전에 네가 그랬잖아, 도둑이 도둑 잡는다고. 그 말, 오늘 그대로 돌려줄게!”“육연우!”“너는 도둑이야, 네 엄마도 도둑이었어! 네 엄마는 내 삼촌까지도 건드렸잖아!”“닥쳐!”백인서는 이성을 잃고 육연우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강소아가 필사적으로 백인서를 붙잡고 말렸다.“언니, 백인서 엄마가 누군지 알아?”육연우는 불난 집에 계속 기름을 부어댔다.“백인서 엄마가 누구냐면, 바로 백홍이야. 우리를 팔아넘기려던 그 인신매매범!”“그만해!”백인서는 비명을 지르며 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그 순간, 백인서의 마음속에 쌓여 있던 분노, 두려움, 수치심이 뒤섞여, 곧 터질 화산처럼 치솟았다.강소아와 임우정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멍하니 서 있었고 강소아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급히 임우정에게 다가갔다.“엄마...”임우정은 온몸을 떨며 숨을 헐떡였다. 한 손으로는 가슴을 꼭 움켜쥐었다.임우정은 마치 심장이 고기 분쇄기에 갈리는 듯한 통증에 숨조차 쉴 수 없었다.하지만 임우정은 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 차츰 이성을 되찾았다. 백인서는 강소아보다 어린데, 만약 백인서가 육경섭의 딸이라면, 이는 육경섭이 결혼 후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었다는 뜻이다.하지만 육경섭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다.더구나, 백홍은 조직원이었다. 육경섭은 임우정과 결혼하기 한참 전에 조직에서 발을 뺐다.육경섭이 다른 여자와 어울려 사생아를 낳았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그럴 리 없어...”임우정의 목소리가 떨렸다.“아니야...”“엄마, 이러지 마세요.”강소아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최연준도 함께 가겠다고 나서며 강서연을 불렀다.모두가 서둘러 차에 오르려 할 때, 집사가 머쓱한 표정으로 설명했다.“어르신, 사모님. 육 사모님께서 기절하신 건 아니랍니다. 사모님께서 직접 해결하실 수 있다고 하셨는데... 소문이 잘못 전해진 모양입니다...”모두가 한숨을 돌렸다.하지만 강서연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말했다.“우정 언니가 강하긴 해도 육연우가 집 앞에서 소란을 피우는 건 정말 불편한 일이에요. 게다가 소유도 임신 중이라 감당하기 힘들 테고요!”“맞아요, 맞아요!”최군형은 이미 운전기사에게 시동을 걸도록 지시했다. 당장이라도 집으로 돌아가 아내를 보호하고 싶었다.“모두 가서 상황을 확인합시다.”강서연이 결심하듯 말했다.“군형아, 너 육연우를 감시하던 사람이 있잖아?”“네, 맞아요.”최군형은 침착하게 대답했다.“제가 보낸 사람들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육연우가 최근 기자들과 자주 접촉했다고 해요. 하지만 이렇게 빨리 기자들을 불러들일 줄은 몰랐네요.”“무슨 일 때문이지?”최군형은 말없이 최지용을 잠시 바라보았다.그 역시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더는 숨길 수 없다고 생각한 최군형은 결국 진실을 털어놓았다.“육연우가 어디선가 백인서의 일기를 본 것 같아요. 그 일기에는 백인서가 아버님의 사생아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어요.”차 안은 순식간에 정적이 흘렀다.최연준과 강서연은 눈을 크게 뜨고 육경섭을 쳐다봤고 육경섭은 당황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하늘이 알고 땅이 알아!”육경섭이 크게 외쳤다.“이번 생에 우정이 외에 다른 여자가 있었다면, 천벌을 받아도 마땅해!”최연준과 강서연은 여전히 육경섭을 바라보며 말없이 있었다.육경섭은 더욱 초조해진 나머지, 최연준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최연준 씨도 알잖아... 내가 맨정신일 때 그런 일 할 리가 없어. 술에 취했을 땐... 나, 그게 불가능하다고!”“푸하하!”최군형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며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최연준은 못마땅한 듯 육
“백홍은 언니를 구한 거예요!”육연우는 이미 증오에 휩싸여 있었다.“그때 그 사람들이 납치하려고 했던 사람도 언니였어요! 나는 언니 때문에 얽혀 희생당한 거라고요!”“너...”“백홍이 언니를 구한 건 언니 아버지를 생각해서겠죠. 옛 연인의 아이를 구해놓고 고상한 척한 거예요!”강소아는 허리를 구부리며 배를 움켜쥐었다. 배가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하지만 잊지 마, 그때 누가 나를 납치하려고 했는지!”강소아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했다.강소아는 그런 차가운 말들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말은 칼처럼 날카로워 듣는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남길 수밖에 없었다.강소아는 육연우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한 가닥 희망을 붙잡고 싶었다.하지만 이제야 깨달았다. 육연우는 그런 가치를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최군성이 육연우와 헤어진 것이 옳았다. 독사에게 더는 연민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그때 나를 납치하려 했던 사람은 바로 육명진이었어! 부모님과 나를 20년이나 갈라놓은 것도 그 사람이었어!”“연우야, 나는 너를 항상 내 동생처럼 여겼어. 네가 어머니를 잃은 걸 항상 안타깝게 생각했어... 우린 함께 자매로 평생을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제야 알았어. 이 모든 게 내 착각이었단 걸.”“언니...”육연우는 입술을 떨며 말했다.“왜 이 천박한 여자는 미워하지 않으면서 나만 미워하는 거예요?”“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아.”강소아는 쓴웃음을 지었다.“누군가를 미워하는 건 너무 지치는 일이야. 그리고 너는 내가 미워할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나는 내 인생을 살아야 해. 다만, 내 인생에서 이제 더는 네가 없었으면 해.”육연우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다가 기자의 카메라에 부딪혔다.육연우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서 기자들이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육연우는 기자들을 데리고 와 백인서가 사생아라는 사실을 폭로하려 했지만, 이제 보니 모든 사람
“지용 씨, 지금...”백인서는 중얼거리며 최지용을 바라보았다.“지용 씨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최지용의 마음은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하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었다.최지용은 진실을 말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다만 백인서의 실망 가득한 눈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그 표정은 마치 굳게 믿었던 믿음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늘 의지하던 빛이 꺼져버린 듯했다.이제껏 자신이 세상에서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것이 하나의 농담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말이다.“인서야...”최지용은 건조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미안해, 나...”백인서의 시선 앞에서 최지용은 한마디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백인서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아까 육연우가 백인서를 육경섭의 사생아라고 폭로했을 때는 그저 분노와 두려움을 느꼈었다.분노는 육연우가 백인서의 비밀을 폭로했다는 것이었고 두려움은 자신으로 인해 강소아와 육경섭을 잃게 될까 봐서였다.그러나 지금, 최지용이 백인서가 육씨 가문의 딸이 아니라고 말하자 백인서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마치 한 발짝 내딛자마자 끝없는 심연으로 떨어진 느낌이었다. 이제 백인서의 세상에는 더 이상 그녀를 지탱해 줄 것이 없었다.백인서는 다리에 힘이 풀려 옆으로 쓰러졌다.“인서야!”최지용은 깜짝 놀라 달려가서 백인서를 붙잡았다.백인서는 최지용의 품에 가만히 몸을 웅크렸다. 마치 온 힘이 빠져나간 듯, 백인서의 작은 몸은 축 처져 있었다.백인서의 눈은 초점을 잃었고 눈꺼풀이 살짝 떨리더니 곧 무겁게 감겼다....백인서는 끝없는 길을 홀로 걷고 있는 것 같았다.길에는 독충과 맹수들이 가득했고 발밑에는 날카로운 돌들이 흩어져 있었다. 찌는 듯한 더위와 얼어붙는 한기만이 백인서를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든 고통을 백인서는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백인서는 자신의 마음이 이제는 단단해졌다고 믿었다. 어떤 독도 견뎌낼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눈앞에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강소아, 최지용,
“뭐라고요? 10억 원이요?”백시연은 깜짝 놀라서 외쳤다.강소아는 슬쩍 백시연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왜 그래? 고작 10억 가지고. 게다가 가원이에게 큰 선물을 주겠다고 네가 먼저 약속한 거잖아. 혹시 후회라도 하는 거야?”“그럴 리가!”배윤아가 옆으로 걸어오며 백시연의 어깨를 힘차게 두드렸다.“우리 인서는 분명히 선물을 줄 거야, 그렇지? 너희 둘 사이에 보석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백시연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졌고 입술이 굳게 닫혔다.10억? 조순영에게서 받은 카드에는 고작 10억 원뿐이었다.백인서가 이때까지 이렇게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이 정도 돈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걸까?그래서 강소아가 그렇게 말한 것일까?“어머, 저 사람은 육 아가씨와 친하다던 백인서 아니야?”그때, 근처에 있던 여배우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방금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었어?”“예전에... 둘이 약속했나 봐, 백인서가 육 아가씨의 딸에게 선물을 주기로.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바뀐 것 같아!”“정말? 풉! 상류층 자매라는 것도 결국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봐! 백인서는 육 아가씨와 둘도 없는 사이처럼 보였는데. 육 아가씨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녔잖아... 이제는 최씨 가문의 아들과 친해지니까, 가식적인 행동도 하기 싫어졌나 봐.”“그 선물이 10억 원짜리라고 하던데... 역시 두 사람 우정은 10억 원도 안 되는 거였어!”백시연의 얼굴은 점점 더 붉게 물들어갔다. 뒤돌아 그들에게 따지려던 찰나, 강소아가 재빠르게 백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됐어, 인서야.”강소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저 사람들은 평소에도 입만 살았어. 나중에 제대로 혼내 줄 거야.”“그래야죠, 저 사람들은 정섭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이잖아요. 제대로 가르쳐야 해요!”백시연은 화를 내며 말했다.“소아 언니, 저 사람들이 이런 자리에 나온 건 정섭 엔터테인먼트를 대표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 언니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저렇게 뒤에서
권욱과 조순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벅찬 기쁨에 눈물이 터져 나왔고 이내 서로를 끌어안은 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권 대표님, 사모님, 정말 큰 경사입니다!”의사는 골수 검사 결과를 들고 환히 웃으며 말했다.“드디어 아가씨를 살릴 수 있게 됐습니다!”“맞아요, 정말 기쁜 일이네요.”최지용이 권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한심하긴, 그만 울어요!”권욱은 흐느끼면서도 반박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네 딸이 아픈 게 아니니, 넌 당연히... 당연히 이 고통을 알 리가 없지!”최지용은 기가 차 웃으며 권욱의 등을 두 번 세게 두드렸다.백인서는 마음 한편의 큰 짐을 덜어낸 듯 병실 안에 있는 권온유를 바라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그나저나.”조순영이 문득 입을 열었다.“백시연의 골수 결과는 어떻게 됐나요?”“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나왔습니다.”의사가 고개를 저었다.“대부분의 지표는 일치했지만 몇 가지 중요한 항목이 맞지 않아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정말 신기한 인연이네요.”최지용이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쌍둥이라고 해도 신체의 세포가 다를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네요.”한 명은 강인하고 선량했고 다른 한 명은 어리석고 악랄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자매라도 서로 다른 개성과 운명을 가질 수밖에 없다. 누구도 타인의 성격과 운명을 그대로 복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그러게 말이야.”권욱은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다른 쌍둥이였다는 걸 알게 됐으니 이제 모든 진실을 밝힐 때가 된 것 같네.”...축하 연회 날, 손님들로 붐비는 연회장은 떠들썩하고 활기가 넘쳤다. 오성에서 유명한 대가문은 물론, 연예계의 반 이상이 모인 듯했다.정섭 엔터테인먼트는 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했기에 대상 수상 경력이 있는 배우들조차 강소아의 초대를 거절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연회장에 들어선 백시연은 평소 TV에서만 보던 유명 여배우들이 서로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광경에 기가 죽고 말았다.백시연은
차 안에서 백인서는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께 앉아 있던 두 남자는 서로를 힐끔거리기만 할 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조금 전 나눈 대화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백인서는 갑작스레 쏟아진 진실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권씨 가문의 사생아라니.“네 어머니와 우리 아버지가 꽤 가까운 사이였던 모양이야.”“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물건이 있었어. 바로 회중시계인데, 그걸 백시연이 가지고 온 거지.”“인서야, 너와 백시연이 쌍둥이 자매란 거 알고 있었어?”백인서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가 깨질 듯 욱신거렸다.어머니가 이렇게 많은 진실을 감추고 있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인서야?”최지용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백인서의 손을 잡았다.그러자 앞좌석에 있던 권욱이 뒤를 돌아보며 싸늘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쏘아보았다.“놔라!”“뭐요?”권욱은 입을 삐죽이며 최지용이 꼭 잡은 백인서의 손을 가리켰다.참 이상했다. 평소에는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매형이 된 순간부터 그가 갑자기 거슬리기 시작했다.“인서는 좀 쉬어야 해!”권욱은 찡그리며 말했다.“손은 왜 자꾸 붙잡고 있는 거야?”최지용은 순간 멍해서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권욱을 쳐다보았다.“무슨 상관이에요?”“난 인서 오빠야! 당연히 내가 상관해야 할 일이지.”“웃기지 좀 마세요!”“너...”“그만 좀 싸울래요?”백인서가 뒤돌아 두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머릿속이 이미 복잡할 대로 복잡한데 이 두 사람은 백인서를 편히 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최지용과 권욱은 서로를 노려보며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눈싸움을 벌였다.“온유는 아직 병원에 있어요?”백인서가 갑자기 물었다.“응...”“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요!”“뭐라고?”권욱은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백인서는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진짜 동생이라면 온유 고모가 되는 거잖아요. 아직 적합한 골수를 찾지 못했다면서요? 제가 한번 해볼게요!”권욱은 잠시
종수는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백인서에게 내밀었다.“통화해.”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최 도련님의 번호는 분명 잘 기억하고 있겠지만, 굳이 조언을 하나 하자면... 먼저 육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연락하는 게 좋을 거야.”백인서는 종수를 노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왜냐하면 백인서도 강소아에게 먼저 연락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강소아는 위치 추적 장비를 가지고 있었기에 전화를 걸면 곧바로 이곳이 추적될 터였다.그렇게 되면 종수와 백시연은 피해 갈 수 없을 터였다.“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아?”종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어젯밤, 소아 아가씨가 시연이와 통화했는데 평소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던 아가씨가 시연이와 한참 동안 통화를 하더군. 내가 생각하기론 위치를 추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컸어.”백인서의 표정이 점점 풀렸다.백인서는 천천히 손을 옮기고 종수가 움직이기 전에 재빨리 몸을 돌려 문 쪽으로 달려갔다. 종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했다.종수는 그저 가만히 백인서를 바라볼 뿐, 뒤쫓으려는 기색은 없었다.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백시연을 용서할 거란 기대는 하지 마세요.”백인서는 차갑게 말했다.“아저씨를 용서할 생각도 없어요! 저는 누구를 먼저 해치지 않아요. 그런데 당신들이 먼저 나타나 저를 해치려 들고선 이제 와서 자매애를 말하다니, 우습지도 않나요?”백인서는 말을 마치고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종수는 백인서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종수의 마음은 더욱 복잡했다.백인서는 저택을 벗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걸은 끝에 조용한 길 한가운데에 다다랐다. 지친 몸을 이끌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화려한 시내는 여전히 멀어 보였다.오성은 너무 넓었고 모든 곳을 다 가본 게 아니었기에 대략적인 방향만 추정할 수 있을 뿐, 휴대전화도 없어서 난감하기만 했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내던 순간, 고요한 길
종수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씁쓸함이 서려 있었다.종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백인서는 문밖 풍경을 바라보았다.때마침 오전의 화창한 햇살이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살랑거리고 작은 새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모습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백인서는 무의식적으로 깊은숨을 들이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종수를 바라보았다.“어서 가.”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인서야, 내가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뭔데요?”“네 남자 친구에게 시연에 대한 얘기는 하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백인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종수는 한 걸음 다가서며 간절한 눈빛으로 백인서를 바라보았다.“시연이는 내가 키운 아이야. 내겐 딸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약속할게, 시연이를 데리고 이곳 오성을 떠나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결국, 저보고 용서하라는 말이군요?”“인서야, 그 아이는 네 쌍둥이 동생이야. 네가...”종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인서는 빠르게 식탁 위의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부분을 종수의 목에 단숨에 들이댔다.종수는 깜짝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급히 손을 뻗어 백인서의 손목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목 깊숙이 차가운 위협이 스며든 후였다.백인서가 누르고 있는 곳은 동맥이 위치한 곳이었다.“백인서, 너...”“아저씨.”백인서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제가 조금만 힘을 주면, 아저씨는 여기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어요. 방금 확인했는데, 이 저택은 넓지만, 따로 감시카메라는 없더군요. 제가 아저씨를 죽이고 떠나도 아무도 알지 못할 거란 얘기예요.”종수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경찰이 너를 추적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흥!”백인서는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 역추적 능력에는 꽤 자신 있거든요.”“백인서!”“아저씨, 전 사람을 해치고 싶진 않았어. 그런데 당신들은 왜 저를 놓아주지 않는 걸까요?”“전부 시연이 잘못이야!”
백인서는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시선을 문 쪽으로 옮겼다.종수가 방에 들어올 때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다.신의 실력을 지나치게 믿었거나, 아니면 백인서를 단순히 어린 애로 여겨 경계를 늦췄던 게 분명했다.“어서 먹어라.”종수는 백인서를 쳐다보며 말했다.“다 먹고 나서 끝내줄게.”“네, 알겠어요.”“무섭지 않아?”“왜 제가 무서워해야 하죠?”백인서는 미소를 띠며 조용히 말했다.“겁을 내야 할 사람은... 아저씨 아닌가요.”종수는 백인서의 맑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 눈빛의 날카로움은 마치 칼날처럼 심장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종수는 다시금 백홍을 떠올렸다. 한평생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했는데 지금 은인의 딸을 죽이려 하고 있으니...백인서의 말이 맞았다. 겁을 내야 할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종수는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젯밤 백시연의 말에 화가 나 잠 한숨도 자지 못하다 보니 머릿속이 멍한 상태였다. 갑작스레 숨이 가빠오며 가슴이 터질 듯한 답답함이 몰려왔다. 무심코 주머니를 더듬었고 그 순간 전에 앓던 천식이 다시 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하지만 약을 가져오지 않았다.종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물 밖으로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필사적으로 공기를 삼켰다.“어서... 어서...”종수는 떨리는 손으로 백인서를 가리키며 도움을 청했다.백인서는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종수를 주시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처음엔 거짓 연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인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식판을 발로 차 뒤집었다. 종수는 바닥에 쓰러져 온몸을 고통스럽게 비틀었다.백인서는 종수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어서 닫히지 않은 문을 바라보았다.지금이 탈출할 최고의 기회였다!“약...”종수는 애써 말을 이었다.“내 약이...”“배... 백인서... 부탁이야...”백인서는 이를 악물었다.“제발... 백인서, 날 좀 살려줘!”백인서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침착하게 문 쪽으로 달려가 주위를 살
종수는 무거운 표정으로 백시연을 바라보다가 TV를 켰다. 화면에는 비밀방에 갇힌 백인서의 모습이 감시 카메라에 담겨 나타났다.백인서는 어두운 방의 구석에 무릎을 감싸안고 웅크려 앉아 있었다.백인서는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여기에 갇힌 지 3일째라는 결론을 내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어둡고 답답한 공간 속에서 하루하루가 1년처럼 길게 느껴졌다.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탈출할 수 있는 틈은 없었다. 혼자 힘으로는 밖을 지키고 있는 사람과 정면으로 맞설 수 없었다.백인서는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며칠 동안 종수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맛은 없었지만 백인서는 남김없이 깔끔하게 먹어 치웠다. 백인서는 알고 있었다. 극한의 상황일수록 절망하지 말고 조용히 몸을 숨기며 힘을 비축해야 한다는 것을. 모든 것은 탈출을 위한 준비였다.종수는 화면을 멈추더니 백시연을 향해 돌아섰다.“너... 정말 백인서를 없앨 생각이야?”“왜 이렇게 말이 많으세요!”백시연은 짜증을 내며 종수를 흘겨보았다.“너의 친자매이기 전에.”종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백인서는 절대 간단한 상대가 아니다. 쉽게 없앨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뭐라고요?”“방금 너도 봤잖아. 저런 상황에서도 잘 먹고 잘 쉬는 모습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말 모르겠니? 지금 에너지를 비축하면서 우리를 상대할 방법을 찾고 있다고!”“그러니까 더더욱 없애야죠!”백시연은 소리를 질렀다.“아저씨, 설마 백인서한테 마음 약해진 거 아니죠?”종수는 머리속이 하얘진 채 멍하니 백인서를 바라보았다.“어쨌든, 전 백인서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요!”백시연은 종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저의 엄마한테 약속했잖아요. 저를 잘 돌봐주기로. 어릴 때 저와도 약속했잖아요, 제 말이면 뭐든 다 들어두겠다고.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거예요?”“시연아...”“그만해요!”백시연은 목청을 높이며 말했다.“아저씨는 우리 엄마가 데려온 떠돌이 개일 뿐이에요. 저를 훈계할 자격
최지용은 충격에 휩싸여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그러니까...”최지용이 권욱을 바라보며 말했다.“이틀 동안 나와 함께 있던 사람이 정말 인서가 아니었단 거네요!”“그게 무슨 말이에요?”권욱도 어리둥절했다.“그 사람은 인서가 아니에요!”최지용은 흥분하며 외쳤다.“인서는 분명 지금 그 여자한테 잡혀 있을 거예요. 그 여자가 인서를 해치려 들 거예요.”“도련님, 진정 좀 하시죠. 지금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갑니다!”최지용은 더는 말을 잇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총을 꺼내 든 채 밖으로 나가려 했다.표아정이 침착하게 최지용의 앞을 가로막았다.“지금 필요한 건 대책을 세우는 거야!”표아정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처럼 감정에 휘둘려선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어!”권욱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표아정은 권욱을 향해 물었다.“권 대표, 백시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백시연은 제 아버지의 사생아입니다.”지금은 이 부끄러운 가정사를 숨길 때가 아닌 것 같아 모든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하지만 수년간 찾지 않았어요. 사실 찾을 의지도 없었죠. 제 딸이 병에 걸려 골수 이식수술이 필요하기 전까지는요. 집안의 모든 친척이 골수 검사를 했지만, 적합한 사람이 없었어요... 그제야 동생을 찾게 된 겁니다.”표아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 동생은 어디서 찾았지?”“찾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남긴 단서를 따라 사람을 보내 남양에서 데려왔어요.”권욱은 낮은 목소리로 이어갔다.“하지만 돌아온 백시연은 처음부터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어요. 얼굴이 망가졌다면서 가면을 쓴 채 진짜 얼굴을 드러내길 거부했어요. 다만 몸에 지니고 있던 물건은 확실히 저의 아버지의 것이었죠.”“그다음은?”“백시연의 행동이 너무 이상해서 저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어머니는 누구야?”권욱은 단호하게 말했다.“백홍입니다.”최지용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표아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금세 실마리를 잡은 듯 말했다.
“결과가 바로 나오진 않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권욱은 마른 입술을 핥으며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넥타이를 풀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권욱은 마음 깊은 곳에서 답답함이 밀려오며 짜증이 치솟았다.권욱은 문득 검사실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술대 위에는 마취가 아직 풀리지 않아 의식이 없는 채로 누워 있는 백시연이 있었다.권욱은 갑작스레 백시연에 대한 궁금증이 피어올랐다.진짜 여동생이라면 적어도 동생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는 봐야 하지 않을까? 혹여 얼굴에 상처가 있다면 어디가 어떻게 손상되었는지 알아야 적합한 의사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결심한 듯 권욱은 발걸음을 재촉해 수술대 앞으로 다가갔다. 권욱은 손을 들어 올리고 잠깐 주저하다가 곧 거칠게 백시연의 얼굴을 덮은 가면을 벗겨냈다.가면이 벗겨지자, 권욱의 눈동자에는 마치 폭발하는 화산처럼 충격과 경악이 번져갔다.“백... 백인서잖아?”...최지용은 초조한 기색으로 거실을 서성거리며 누군가를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표아정이 아끼는 두 명의 부하, 우일과 우민 남매가 돌아왔다. 두 사람은 전문 훈련을 받은 인물로, 뛰어난 손재주와 상황 판단력 덕분에 표아정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상황은 어땠어?”표아정이 급히 물었다.우일과 우민은 보고하기 시작했다.“계속 백 아가씨의 뒤를 밟았는데 아가씨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통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병원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에서 가면을 꺼내 쓰는 걸 보았습니다.”“가면?”최지용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네, 가면이 확실했습니다.”우민이 설명했다.“그 가면은 꽤 독특해 보였는데 금으로 만들어진 데다 보석이 박혀 있어서 꽤 값비싸 보였습니다.”최지용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인서는 가면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런 걸 쓴 적도 없고...”“또 뭘 봤는데?”“누군가 천으로 아가씨의 입을 막은 채 강제로 끌고 갔습니다. 병원 주위를 살펴본 결과, 그들은 권욱의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