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혜림은 머릿속이 멍해졌고 눈은 동그랗게 커진 채 얼굴은 불타는 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입을 몇 번이나 열었다 닫았지만,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너... 너...”동혜림은 백인서를 손가락질했다.백인서는 재빨리 동혜림의 손을 쳐냈다.동혜림은 히스테리컬하게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어 백인서와 맞붙으려 했다. 하지만 백인서는 재빠르게 몸을 돌려 동혜림의 두 손을 능숙하게 뒤로 꺾어 제압했다.옆에서 지켜보던 조순영은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백인서가 동혜림을 제압한 틈을 타 동혜림의 뺨을 번갈아 두 대나 때렸다.“이제 그만하시죠. 서로 한발 물러서는 게 좋을 것 같네요.”백인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재클린, 당신은 판매부의 얼굴이에요. 제발 판매부의 이미지를 망치지 말아 주세요.”그렇게 말하면서도 백인서는 동혜림의 손을 여전히 붙잡고 있었다.조순영은 웃으며 다시 두 대를 더 때렸다.“그만하라는 말 안 들립니까?”백인서가 찡그리며 말했다.“아직도 싸우실 겁니까? 작은 대표님이 바로 위층에 계세요. 그분까지 내려오시게 하실 겁니까?”조순영은 손바닥이 붉어질 때까지 웃음을 참으며 동혜림을 때렸다.“그만, 이제 그만...”“그만둬요!”조순영은 이제 속이 풀린 듯했고 백인서는 동혜림을 놓아주었다.동혜림은 목이 터지라 울면서 두 여자를 매섭게 노려보다가 사람들을 밀치며 달아났다.그제야 보안 요원들이 몰려와 사람들을 흩어지게 하고 질서를 유지했다.장소는 서서히 평온을 되찾았다.백인서는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자신이 방금 한 행동이 옳았는지 그른지 알 수 없었다.그저 동혜림이 본처인 권 사모님을 도발하며 거만하게 구는 모습이 못마땅했을 뿐이다. 결국 첩에 불과한데, 어디서 그런 큰 용기가 나왔는지 의문이었다.그러나 곧 생각은 백인서의 어머니로 이어졌고 자신의 존재가 사실은 첩의 자식이라는 사실이 떠오르자, 백인서의 마음은 한없이 가라앉았다.“이봐요!”그때 맑은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백인서가 고개를 돌리니 조순영이 인사하
백인서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주우남의 말이 떠올랐다. 혹시 권욱과 동혜림은 아무 관계도 없는데, 조순영이 오해한 걸까?“내 아내가 방금 대승을 거둔 건 당신 덕분인가 보군요!”백인서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권욱의 어두운 눈빛과 마주쳤다.백인서가 무언가 변명하려 했지만, 조순영은 손을 휘두르며 자리를 떠났다. 권욱은 조순영을 따라가면서도, 떠나기 전 백인서를 한 번 더 돌아보며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백인서는 그 자리에 한참 서 있다가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정신을 차렸다.오늘 권욱을 기분 상하게 한 건가?하지만 권욱은 회사의 고위층이고 백인서는 평범한 사원일 뿐이니 앞으로 특별히 얽힐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백인서는 크게 숨을 내쉬고 발걸음을 재촉해 사무실로 돌아갔다.*배윤아는 최군성의 만화를 수정해 주고 나서 직접 최씨 집안을 찾아갔다.며칠 동안 기운 없이 지내던 최군성은 배윤아가 가져온 원고를 보자 눈빛이 되살아났다.배윤아는 미소를 지으며 원고를 최군성에게 건넸다. 배윤아의 세심한 손길 덕분에 이야기와 캐릭터가 한층 더 생동감 있게 살아났다.“와, 배윤아!”최군성이 감탄하며 말했다.“넌 진짜 그림의 천재야. 아니, 넌 그림의 신이야! 어떻게 이렇게 잘 고치는 거야? 이 캐릭터들이 다 그림 밖으로 걸어 나올 것 같아.”배윤아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저었다.“네 그림이 워낙 좋았으니까. 나는 그저 색감과 작은 디테일만 조금 조정했을 뿐이야.”“성공과 실패는 디테일에 달린 법이지!”최군성은 신이 나서 말했다.“네가 볼 때 내가 그린 그림 괜찮은 것 같아?”“지금 웹사이트에서 연재하고 있지?”배윤아가 물었다.“조회수는 어때?”“예상보다 좋아.”최군성은 머리를 긁적였다.“조회수가 벌써 10만 회를 넘었고, 몇몇 출판사에서 만화를 출판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 그런데 그 사람들이 혹시 사기꾼일까 봐 아직 연락은 안 했어.”“윤아야, 사실 난 너의 확신이 가장 필요해. 너는 전문가잖아. 그 사람들보다 네 말이 더
최군성은 멍하니 배윤아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육연우는 이런 말을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이 가까웠을 때조차, 항상 최군성이 좋은 말만 하려 애썼을 뿐이었다.두 사람의 사이가 소원해진 후, 육연우는 가족 재산을 두고 최군형과 싸우라거나, 최군성이 그리는 그림은 별 의미 없다는 말만 늘어놓곤 했다.배윤아의 말이 최군성의 마음을 아리게 했다. 눈가가 뜨거워지며 눈물이 금방이라도 흐를 것 같았다.“최군성!”배윤아는 놀라서 최군성을 달래려 했다.“왜 이러는 거야? 너... 제발 이러지 마!”“나 괜찮아.”최군성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그냥... 기뻐서 그래. 네가 나를 인정해 줘서 정말 기뻤어.”“사실, 나는 집에서 많이 외로웠어.”최군성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부모님은 내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고 형은 그림을 그저 취미로만 여겼어. 생계를 위한 일로는 생각하지 않았지. 외할머니는 화가이시지만 멀리 남양에 계셔서 자주 대화할 수가 없어.”“이제서야 만화를 그릴 기회를 얻었다는 게... 난 정말로...”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군성은 다시 감정에 휩싸였다가 한참 후에야 차분해졌다.배윤아는 웃으며 최군성에게 원고를 내밀었다.“그림을 좋아한다면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해! 하지만 미리 말해둘게. 이 길은 쉽지 않아. 나도 이름을 알리기까지 7년 동안 무명으로 지내며 여러 스튜디오에서 아르바이트했어. 때로는 내 이름조차 적히지 않는 그림도 그렸고...”배윤아는 최군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배윤아의 눈빛은 맑고 투명했다.“최군성, 너도 이 고난을 견딜 수 있겠어?”“당연히 할 수 있지!”최군성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내가 좋아하는 일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많은 고난이라도 감수할 수 있어!”“나도 그렇게 생각해!”배윤아가 웃자, 볼에 작은 보조개가 사랑스럽게 패였다.진정한 열정만이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는 법이다.정말로 좋아하는 일이라면, 비록 결과가 기대만큼 좋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한 과정이 있었기에 후회는 남지 않는다.
“네?”“며칠 동안 웃지 않았잖아. 그 정도면 충분히 고통받은 거 아닌가?”그때 거실에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최군성과 배윤아는 방금 완성한 그림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서로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주현정이 음식을 가져와 두 사람을 식탁으로 불렀다.최군성은 식탁에 앉아 갈비를 집어 들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했던 탓이다.강서연은 아들이 맛있게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순간이었다.“여보.”최연준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우리도 가서 함께 먹자고.”“그만둬요!”강서연은 살짝 째려보며 말했다.“우리는 별실에서 먹어요!”최연준은 입을 삐죽 내밀었지만, 더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따라갔다.별실로 향하던 중, 강서연의 휴대전화가 갑자기 울렸다. 전화를 받자, 그 너머로 임우정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서연아... 다들 너희 집에 있어?”“무슨 일 있어요?”“나... 지금 병원이야...”임우정은 흥분한 나머지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연우가... 연우가... 아이고, 내가 왜 그 애를 잘 보살피지 못했을까? 다 내 잘못이야...”강서연은 임우정의 떨리는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강서연은 급히 최군성을 불러 병원으로 달려갔다....응급실 밖, 임우정은 긴 의자에 앉아 창백한 얼굴로 몸을 떨고 있었다. 육경섭은 심각한 표정으로 초조하게 병원 복도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최연준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섰다.“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우정 씨가 전화해서 설명을 제대로 못 하는 바람에 서연이가 급하게 우리를 다 데리고 왔어요.”“군성이도 왔어요?”임우정이 갑자기 고개를 들며 물었다.최군성은 이미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응급실을 멍하니 바라보며 온몸이 굳어 있었다.“군성아!”임우정이 다가와 먼저 강서연의 손을 잡고는 이내 최군성을 바라보며 한 마디씩 또박또박 내뱉었다.“연우가...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어.”“뭐라고요?”강
“다 내 잘못이에요, 전부 내 잘못이에요!”최군성은 눈물과 콧물에 범벅이 된 채 울부짖었다.“내가 연우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였어요... 우리가 문제를 겪을 때, 내가 먼저 사과하고 풀어야 했는데, 오히려 연우를 이런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고 갔어요...”“엄마, 내가 연우를 죽인 거예요! 난 정말 쓰레기예요!”최군성은 자신을 때리려 손을 치켜들었지만, 최연준이 그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정신 차려!”최연준이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호통쳤다.“남자가 이렇게 울고불고해서야 되겠냐!”“아빠...”“군성아.”육경섭이 다가와 최군성을 다독였다.“네가 워낙 착하고 여리니까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려 하는 거지. 이건 네 탓이 아니야. 너무 자책하지 마라.”최군성은 눈물로 붉어진 눈으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강서연은 괴로워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더 깊이 아려왔다.강서연은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다. 이번 일로 육연우가 순진한 아들을 완전히 붙잡았다는 사실을.그때 응급실 문이 열리고 최연희가 나왔다. 최연희는 모두에게 차분히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응급처치가 제때 이루어졌어요. 이제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최군성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긴장된 몸이 풀리며, 온몸의 힘이 빠진 채 벽에 기대어 힘없이 서 있었다.“군성아, 이제 걱정 안 해도 돼.”최연희는 복잡한 눈빛으로 조카를 바라보며 말했다.“믿어 줘. 이모가 있는 한, 연우에게는 절대 아무 일도 없을 거야.”“연희 씨.”강서연이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연우가 수면제를 얼마나 많이 먹었나요?”“양이 꽤 많았어요.”최연희는 솔직하게 대답했다.“한 번 위세척을 했지만 잔여 약물이 남아 있어서 두 번 세척했어요. 그렇다고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어요. 후유증이나 합병증이 남을 가능성이 있어 한동안은 상태를 면밀히 지켜봐야 해요.”“그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나요?”“네.”강서연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최군성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육연우가 들것에 실려 나
강소아는 근심이 가득했고 최군형은 소아가 태아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받을까 봐 병원에 가서 육연우를 만나보는 것을 금지했다.그러면서 백인서가 더 자주 강소아 곁에 머물러 주며 주의를 돌리도록 했다.백인서도 자연스럽게 강소아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다. 육연우의 자살 시도 소식은 강소아에게 마치 잔잔한 호수에 이는 물결처럼 순간적인 충격을 주었지만, 곧 지나가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강소아는 육연우가 진정으로 죽고 싶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이 모든 것이 아마 최군성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일 것이라고 생각했다.육연우의 목적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렇게 죽어버린다면 너무 아쉽지 않겠는가?*그날도 백인서는 정성스럽게 끓인 삼계탕을 회사로 가져왔다. 점심시간이 다가올 때쯤 강소아에게 전달하려 했는데, 다른 부서의 동료가 백인서를 불러 세웠다.“판매부의 백인서 씨 맞죠?”백인서는 잠시 당황했다.동료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는 권 대표님의 비서입니다. 우리 권 대표님께서 백인서 씨를 위층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죠.”백인서는 손바닥에 땀이 맺히는 것을 느끼며 긴장했다.권욱의 사무실은 강소아의 사무실 바로 아래층에 자리 잡고 있었고, 넓은 공간은 오직 소수의 고위층만을 위한 공간이었다.권욱의 사무실은 최고의 전망을 자랑했다. 창밖으로는 강소아의 사무실과 마찬가지로 번화한 상업가와 멀리 바다까지 한눈에 들어왔다.비서는 백인서를 데려다주고 나가버렸다.백인서는 불안한 마음으로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권욱은 아직 휴식을 취하지 않고 있었고 컴퓨터 화면에 집중하며 문서의 글자 하나하나를 꼼꼼히 검토하고 있었다.“왔어요?”권욱은 고개도 들어주지 않은 채 나른하지만 위압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네.”백인서는 조용히 답했다.권욱이 문서를 꼼꼼히 읽는 동안, 백인서는 그저 서 있었다. 권욱은 앉으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백인서?”마침내 권욱이 백인서에게 시선을 주었다.“네.”백인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소녀는 맑고 투명한 모습에 복숭아처럼 분홍빛이 감도는 뺨과, 눈웃음을 지을 때 더욱 돋보이는 큰 눈을 가지고 있었다.소녀는 작은 천사처럼 문을 열고 들어왔고 백인서는 그 순간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하지만 백인서의 어린 시절은 이 소녀처럼 행복하지 않았다.어린 백인서는 이렇게 깨끗하고 예쁘지 않았고 늘 더럽고 헝클어진 머리에 몇 치수나 큰 옷을 입고 다녔다. 다른 아이들은 어린 백인서를 괴롭히며 “부모 없이 자란 아이”라고 놀렸다.어린 시절의 백인서는 꿈속에서도 이 소녀가 들고 있는 인형을 갖고 싶어 하곤 했다.백인서의 마음은 갑자기 먹먹해지며, 아무 표정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조순영이 백인서에게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여기 계셨군요? 점심도 안 먹고 계속 일하고 계셨어요?”백인서가 대답하기도 전에 차가운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누구나 당신처럼 한가한 줄 알아?”조순영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화를 참았다.그러나 권욱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비아냥거리며 말했다.“오늘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딸까지 데리고 와서 감시라도 하러 온 건가?”“조순영, 우리 딸은 권씨 성이야, 잘못된 길로 이끌지 마!”“당신...”조순영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어졌다가 창백해졌고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백인서는 더 이상 이곳에 있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느껴 떠나려 했지만, 그 순간 따뜻한 작은 손이 백인서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이모!”백인서는 깜짝 놀랐다.“너...”고개를 내려다보니 작은 소녀가 백인서의 손을 잡고 달콤하게 웃고 있었다.소녀의 웃음은 마치 햇살에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처럼 백인서의 마음을 서서히 부드럽게 만들었다.“온유!”조순영이 급히 다가와 말했다.“이분은 이모가 아니야. 왜 그렇게 부르니?”“엄마, 그건 엄마가 가르쳐 준 거잖아요?”권온유는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며 천진난만하게 말했다.“예쁜 여자를 만나면 이모라고 부르라고 했잖아요!”조순영이 눈을 깜빡이며 웃음을 지었다.“아니지!
육연우의 몸은 하루하루 회복되어 가고 있었고 이 사건은 겉으로 보기에는 이미 지나간 것처럼 보였다.하지만 최군성은 차분해진 마음으로 육연우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도 예전의 감정을 다시는 되찾을 수 없었다.사람들은 생사의 기로를 넘기면 다시 태어난다고들 말한다.육연우는 분명 다시 태어난 듯했지만, 더는 예전의 육연우가 아니었다.최군성은 혼란스러웠다.그토록 순수하고 착하며, 심지어 겁 많던 육연우는 이제 정말 사라져 버린 걸까?정말로 육연우는 성소월이 절벽에서 뛰어내릴 때, 함께 추락해 산산조각 나버린 걸까?이제 최군성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펜을 집으면, 육연우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곤 했다. 최군성이 펜을 내려놓고 게임을 끌 때까지 육연우의 시선은 변함없이 차가웠다.그러고 나서 육연우는 최군성에게 책 몇 권을 건네주었다.기업 경영, 금융 경제, 심지어 권모술수에 관한 책들까지 있었다.육연우는 최군성의 귀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군성 씨는 형보다 이미 큰 차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두 배로 노력해야 따라잡을 수 있어요!”최군성은 그 책들만 봐도 머리가 지끈거렸다.결국 두려움이 생겨 꿈속에서조차 육연우가 반복하는 말들이 따라다녔다.“군성 씨, 그림이랑 게임으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걸로는 절대 성공 못 해요!”“만약 그것들이 그렇게 좋은 거라면 왜 군성 씨 형이 하지 않겠어요? 왜 소아 언니는 하지 않겠어요?”“군성 씨, 왜 이렇게 아무것도 못 해요? 내 말에 모두 따르겠다고 약속했잖아요!”“저는 군성 씨를 돕고 있는 거예요... 군성 씨가 너무 나태하니까 이렇게라도 자극을 줄 수밖에 없잖아요! 군성 씨, 군성 씨 부모님은 형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군성 씨에게는 너무 너그럽게 굴었어요. 결국 최상 그룹을 군형 씨에게만 물려주는 게 공평하다고 생각해요?”때때로 최군성은 악몽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고, 등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백인서가 새로 만든 수프를 또다시 실패한 날, 최지용은 집에서 슬
“그게... 무슨 뜻이에요?”백시연은 침착함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지만, 권욱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했다.“이 카드가 제 거 아니면 누구 건데요?”“난 그런 말 한 적은 없는데?”권욱의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번졌다.“그냥 문득 우리 아내도 이런 비슷한 카드를 몇 장 가지고 있던 게 떠올랐을 뿐이야. 카드 색깔도 이런 파란색이었고 뒷면에는 대나무 무늬의 홀로그램이 새겨져 있었어. 조씨 가문은 학문을 중시하는 전통을 지닌 집안이라 대나무처럼 강인하고 꿋꿋한 식물을 특별히 아낀다고 하더군. 한번 뒤집어 확인해 볼래?”백시연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가 이내 창백해졌고 손은 카드 위에서 더욱 굳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백시연은 강소아를 찾아갔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약속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묘안석이 그렇게 비싼 줄 몰라서 서둘러 나오느라 준비가 부족해 지금은 이 카드밖에 없다고 둘러댔다.그러고는 억지로 친근한 미소를 띠며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소아 언니, 우리 자매처럼 친한 사이잖아요. 언니 딸은 곧 제 딸이나 다름없죠! 가원이에게 쓰는 돈이라면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강소아는 미소를 머금고 백시연의 손에서 카드를 슬쩍 가져가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정말? 고마워! 나중에 가원이가 크면 널 두 번째 어머니로 생각할 거야.”백시연의 얼굴 근육이 떨렸지만 억지로 미소를 유지하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인서야.”강소아는 다정한 눈빛으로 백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요즘 권욱의 공익 프로젝트를 도맡아 관리하고 있다면서? 잘한다는 칭찬이 자자하더라. 몇 번이나 넌 정말 유능한 관리형 인재라고 말했어.”“아... 그래요?”백시연은 속으로 긴장하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그럼!”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그래서 앞으로도 너한테 정말 잘해줄 생각이야.”그 말을 듣자 백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10억 원을 써서 강소아의 호의를 얻은 거라면 나쁘지 않은 거래라는 생각이 들었다.“소아 아가씨
연회장 한편에서 백시연은 마침내 잠시 자리를 빠져나갈 기회를 잡았다. 화장실에 간다고 둘러대고는 한적한 구석에 숨어 종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무언가 해답을 찾고 싶었다.긴 신호음 끝에야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백시연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왜 이렇게 늦게 받아요?”백시연은 알지 못했다. 종수가 이미 경찰차에 타고 있었고 간신히 경찰의 허락을 받아 전화를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아저씨! 정말 급해서 전화했어요. 지금 뭐 하고 계셨어요?”종수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 나지막이 속삭였다.“시연아...”뭔가 말을 더하려던 종수는 경찰이 허리춤에 총구를 겨누는 바람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됐어요, 됐다고요!”백시연은 짜증을 내며 말을 끊었다.“딱 한 가지만 물을게요... 아까 소아 아가씨가 저한테 10억 원짜리 선물을 요구했는데, 그거 줘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10억?”“네!”상황을 모르는 백시연은 초조한 듯 말을 더 이어갔다.“그 재수 없는 여자가 과거에 강소아와 무슨 약속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강소아가 저를 보자마자 자기 딸이 말하기 시작했다면서 선물을 요구하더라고요. 뭐였더라... 묘안석이라고 했던가? 어쨌든 그게 10억 원짜리래요!”종수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상황을 단번에 파악했다. 그건 강소아가 원하는 게 아니라 조순영을 대신해 요구한 것이라는 사실을.세상은 언제나 공평했다. 무엇을 얻었다면 그 대가는 반드시 같은 무게로 돌아오게 마련이었다.종수는 지친 듯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아저씨? 종수 아저씨!”백시연은 초조한 목소리로 외쳤다.“뭐라도 말 좀 해주세요! 줘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시연아, 이제 너도 어른이야. 이런 일은 네가 직접 판단해야 해.”“제가 알아서 할 수 있었으면, 아저씨께 묻겠어요?”백시연은 이마를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오늘의 종수는 어딘가 낯설고 이상했다.“솔직히... 전 주고 싶지 않아요. 그런 비싼 걸 고작 어린애한테 준다
“뭐라고요? 10억 원이요?”백시연은 깜짝 놀라서 외쳤다.강소아는 슬쩍 백시연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왜 그래? 고작 10억 가지고. 게다가 가원이에게 큰 선물을 주겠다고 네가 먼저 약속한 거잖아. 혹시 후회라도 하는 거야?”“그럴 리가!”배윤아가 옆으로 걸어오며 백시연의 어깨를 힘차게 두드렸다.“우리 인서는 분명히 선물을 줄 거야, 그렇지? 너희 둘 사이에 보석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백시연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졌고 입술이 굳게 닫혔다.10억? 조순영에게서 받은 카드에는 고작 10억 원뿐이었다.백인서가 이때까지 이렇게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이 정도 돈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걸까?그래서 강소아가 그렇게 말한 것일까?“어머, 저 사람은 육 아가씨와 친하다던 백인서 아니야?”그때, 근처에 있던 여배우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방금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었어?”“예전에... 둘이 약속했나 봐, 백인서가 육 아가씨의 딸에게 선물을 주기로.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바뀐 것 같아!”“정말? 풉! 상류층 자매라는 것도 결국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봐! 백인서는 육 아가씨와 둘도 없는 사이처럼 보였는데. 육 아가씨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녔잖아... 이제는 최씨 가문의 아들과 친해지니까, 가식적인 행동도 하기 싫어졌나 봐.”“그 선물이 10억 원짜리라고 하던데... 역시 두 사람 우정은 10억 원도 안 되는 거였어!”백시연의 얼굴은 점점 더 붉게 물들어갔다. 뒤돌아 그들에게 따지려던 찰나, 강소아가 재빠르게 백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됐어, 인서야.”강소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저 사람들은 평소에도 입만 살았어. 나중에 제대로 혼내 줄 거야.”“그래야죠, 저 사람들은 정섭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이잖아요. 제대로 가르쳐야 해요!”백시연은 화를 내며 말했다.“소아 언니, 저 사람들이 이런 자리에 나온 건 정섭 엔터테인먼트를 대표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 언니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저렇게 뒤에서
권욱과 조순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벅찬 기쁨에 눈물이 터져 나왔고 이내 서로를 끌어안은 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권 대표님, 사모님, 정말 큰 경사입니다!”의사는 골수 검사 결과를 들고 환히 웃으며 말했다.“드디어 아가씨를 살릴 수 있게 됐습니다!”“맞아요, 정말 기쁜 일이네요.”최지용이 권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한심하긴, 그만 울어요!”권욱은 흐느끼면서도 반박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네 딸이 아픈 게 아니니, 넌 당연히... 당연히 이 고통을 알 리가 없지!”최지용은 기가 차 웃으며 권욱의 등을 두 번 세게 두드렸다.백인서는 마음 한편의 큰 짐을 덜어낸 듯 병실 안에 있는 권온유를 바라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그나저나.”조순영이 문득 입을 열었다.“백시연의 골수 결과는 어떻게 됐나요?”“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나왔습니다.”의사가 고개를 저었다.“대부분의 지표는 일치했지만 몇 가지 중요한 항목이 맞지 않아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정말 신기한 인연이네요.”최지용이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쌍둥이라고 해도 신체의 세포가 다를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네요.”한 명은 강인하고 선량했고 다른 한 명은 어리석고 악랄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자매라도 서로 다른 개성과 운명을 가질 수밖에 없다. 누구도 타인의 성격과 운명을 그대로 복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그러게 말이야.”권욱은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다른 쌍둥이였다는 걸 알게 됐으니 이제 모든 진실을 밝힐 때가 된 것 같네.”...축하 연회 날, 손님들로 붐비는 연회장은 떠들썩하고 활기가 넘쳤다. 오성에서 유명한 대가문은 물론, 연예계의 반 이상이 모인 듯했다.정섭 엔터테인먼트는 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했기에 대상 수상 경력이 있는 배우들조차 강소아의 초대를 거절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연회장에 들어선 백시연은 평소 TV에서만 보던 유명 여배우들이 서로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광경에 기가 죽고 말았다.백시연은
차 안에서 백인서는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께 앉아 있던 두 남자는 서로를 힐끔거리기만 할 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조금 전 나눈 대화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백인서는 갑작스레 쏟아진 진실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권씨 가문의 사생아라니.“네 어머니와 우리 아버지가 꽤 가까운 사이였던 모양이야.”“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물건이 있었어. 바로 회중시계인데, 그걸 백시연이 가지고 온 거지.”“인서야, 너와 백시연이 쌍둥이 자매란 거 알고 있었어?”백인서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가 깨질 듯 욱신거렸다.어머니가 이렇게 많은 진실을 감추고 있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인서야?”최지용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백인서의 손을 잡았다.그러자 앞좌석에 있던 권욱이 뒤를 돌아보며 싸늘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쏘아보았다.“놔라!”“뭐요?”권욱은 입을 삐죽이며 최지용이 꼭 잡은 백인서의 손을 가리켰다.참 이상했다. 평소에는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매형이 된 순간부터 그가 갑자기 거슬리기 시작했다.“인서는 좀 쉬어야 해!”권욱은 찡그리며 말했다.“손은 왜 자꾸 붙잡고 있는 거야?”최지용은 순간 멍해서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권욱을 쳐다보았다.“무슨 상관이에요?”“난 인서 오빠야! 당연히 내가 상관해야 할 일이지.”“웃기지 좀 마세요!”“너...”“그만 좀 싸울래요?”백인서가 뒤돌아 두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머릿속이 이미 복잡할 대로 복잡한데 이 두 사람은 백인서를 편히 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최지용과 권욱은 서로를 노려보며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눈싸움을 벌였다.“온유는 아직 병원에 있어요?”백인서가 갑자기 물었다.“응...”“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요!”“뭐라고?”권욱은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백인서는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진짜 동생이라면 온유 고모가 되는 거잖아요. 아직 적합한 골수를 찾지 못했다면서요? 제가 한번 해볼게요!”권욱은 잠시
종수는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백인서에게 내밀었다.“통화해.”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최 도련님의 번호는 분명 잘 기억하고 있겠지만, 굳이 조언을 하나 하자면... 먼저 육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연락하는 게 좋을 거야.”백인서는 종수를 노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왜냐하면 백인서도 강소아에게 먼저 연락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강소아는 위치 추적 장비를 가지고 있었기에 전화를 걸면 곧바로 이곳이 추적될 터였다.그렇게 되면 종수와 백시연은 피해 갈 수 없을 터였다.“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아?”종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어젯밤, 소아 아가씨가 시연이와 통화했는데 평소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던 아가씨가 시연이와 한참 동안 통화를 하더군. 내가 생각하기론 위치를 추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컸어.”백인서의 표정이 점점 풀렸다.백인서는 천천히 손을 옮기고 종수가 움직이기 전에 재빨리 몸을 돌려 문 쪽으로 달려갔다. 종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했다.종수는 그저 가만히 백인서를 바라볼 뿐, 뒤쫓으려는 기색은 없었다.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백시연을 용서할 거란 기대는 하지 마세요.”백인서는 차갑게 말했다.“아저씨를 용서할 생각도 없어요! 저는 누구를 먼저 해치지 않아요. 그런데 당신들이 먼저 나타나 저를 해치려 들고선 이제 와서 자매애를 말하다니, 우습지도 않나요?”백인서는 말을 마치고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종수는 백인서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종수의 마음은 더욱 복잡했다.백인서는 저택을 벗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걸은 끝에 조용한 길 한가운데에 다다랐다. 지친 몸을 이끌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화려한 시내는 여전히 멀어 보였다.오성은 너무 넓었고 모든 곳을 다 가본 게 아니었기에 대략적인 방향만 추정할 수 있을 뿐, 휴대전화도 없어서 난감하기만 했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내던 순간, 고요한 길
종수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씁쓸함이 서려 있었다.종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백인서는 문밖 풍경을 바라보았다.때마침 오전의 화창한 햇살이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살랑거리고 작은 새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모습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백인서는 무의식적으로 깊은숨을 들이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종수를 바라보았다.“어서 가.”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인서야, 내가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뭔데요?”“네 남자 친구에게 시연에 대한 얘기는 하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백인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종수는 한 걸음 다가서며 간절한 눈빛으로 백인서를 바라보았다.“시연이는 내가 키운 아이야. 내겐 딸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약속할게, 시연이를 데리고 이곳 오성을 떠나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결국, 저보고 용서하라는 말이군요?”“인서야, 그 아이는 네 쌍둥이 동생이야. 네가...”종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인서는 빠르게 식탁 위의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부분을 종수의 목에 단숨에 들이댔다.종수는 깜짝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급히 손을 뻗어 백인서의 손목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목 깊숙이 차가운 위협이 스며든 후였다.백인서가 누르고 있는 곳은 동맥이 위치한 곳이었다.“백인서, 너...”“아저씨.”백인서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제가 조금만 힘을 주면, 아저씨는 여기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어요. 방금 확인했는데, 이 저택은 넓지만, 따로 감시카메라는 없더군요. 제가 아저씨를 죽이고 떠나도 아무도 알지 못할 거란 얘기예요.”종수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경찰이 너를 추적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흥!”백인서는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 역추적 능력에는 꽤 자신 있거든요.”“백인서!”“아저씨, 전 사람을 해치고 싶진 않았어. 그런데 당신들은 왜 저를 놓아주지 않는 걸까요?”“전부 시연이 잘못이야!”
백인서는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시선을 문 쪽으로 옮겼다.종수가 방에 들어올 때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다.신의 실력을 지나치게 믿었거나, 아니면 백인서를 단순히 어린 애로 여겨 경계를 늦췄던 게 분명했다.“어서 먹어라.”종수는 백인서를 쳐다보며 말했다.“다 먹고 나서 끝내줄게.”“네, 알겠어요.”“무섭지 않아?”“왜 제가 무서워해야 하죠?”백인서는 미소를 띠며 조용히 말했다.“겁을 내야 할 사람은... 아저씨 아닌가요.”종수는 백인서의 맑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 눈빛의 날카로움은 마치 칼날처럼 심장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종수는 다시금 백홍을 떠올렸다. 한평생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했는데 지금 은인의 딸을 죽이려 하고 있으니...백인서의 말이 맞았다. 겁을 내야 할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종수는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젯밤 백시연의 말에 화가 나 잠 한숨도 자지 못하다 보니 머릿속이 멍한 상태였다. 갑작스레 숨이 가빠오며 가슴이 터질 듯한 답답함이 몰려왔다. 무심코 주머니를 더듬었고 그 순간 전에 앓던 천식이 다시 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하지만 약을 가져오지 않았다.종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물 밖으로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필사적으로 공기를 삼켰다.“어서... 어서...”종수는 떨리는 손으로 백인서를 가리키며 도움을 청했다.백인서는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종수를 주시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처음엔 거짓 연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인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식판을 발로 차 뒤집었다. 종수는 바닥에 쓰러져 온몸을 고통스럽게 비틀었다.백인서는 종수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어서 닫히지 않은 문을 바라보았다.지금이 탈출할 최고의 기회였다!“약...”종수는 애써 말을 이었다.“내 약이...”“배... 백인서... 부탁이야...”백인서는 이를 악물었다.“제발... 백인서, 날 좀 살려줘!”백인서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침착하게 문 쪽으로 달려가 주위를 살
종수는 무거운 표정으로 백시연을 바라보다가 TV를 켰다. 화면에는 비밀방에 갇힌 백인서의 모습이 감시 카메라에 담겨 나타났다.백인서는 어두운 방의 구석에 무릎을 감싸안고 웅크려 앉아 있었다.백인서는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여기에 갇힌 지 3일째라는 결론을 내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어둡고 답답한 공간 속에서 하루하루가 1년처럼 길게 느껴졌다.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탈출할 수 있는 틈은 없었다. 혼자 힘으로는 밖을 지키고 있는 사람과 정면으로 맞설 수 없었다.백인서는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며칠 동안 종수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맛은 없었지만 백인서는 남김없이 깔끔하게 먹어 치웠다. 백인서는 알고 있었다. 극한의 상황일수록 절망하지 말고 조용히 몸을 숨기며 힘을 비축해야 한다는 것을. 모든 것은 탈출을 위한 준비였다.종수는 화면을 멈추더니 백시연을 향해 돌아섰다.“너... 정말 백인서를 없앨 생각이야?”“왜 이렇게 말이 많으세요!”백시연은 짜증을 내며 종수를 흘겨보았다.“너의 친자매이기 전에.”종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백인서는 절대 간단한 상대가 아니다. 쉽게 없앨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뭐라고요?”“방금 너도 봤잖아. 저런 상황에서도 잘 먹고 잘 쉬는 모습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말 모르겠니? 지금 에너지를 비축하면서 우리를 상대할 방법을 찾고 있다고!”“그러니까 더더욱 없애야죠!”백시연은 소리를 질렀다.“아저씨, 설마 백인서한테 마음 약해진 거 아니죠?”종수는 머리속이 하얘진 채 멍하니 백인서를 바라보았다.“어쨌든, 전 백인서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요!”백시연은 종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저의 엄마한테 약속했잖아요. 저를 잘 돌봐주기로. 어릴 때 저와도 약속했잖아요, 제 말이면 뭐든 다 들어두겠다고.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거예요?”“시연아...”“그만해요!”백시연은 목청을 높이며 말했다.“아저씨는 우리 엄마가 데려온 떠돌이 개일 뿐이에요. 저를 훈계할 자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