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리는 연극 같은 이 장면을 보고 손끝마저 차가워졌다.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 낮게 물었다.“왜 …”그녀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이연지는 미미를 잡아당기던 손을 떼고 기대 섞인 눈길로 신유리를 바라보며 간청했다.“유리야.”신유리가 눈을 돌리자, 그녀는 숨을 들이마시며 다시 말하려고 할 때, 옆에서 강희성이 소리쳤다.“아줌마, 경찰에 신고한 사람은 저인데, 왜 저쪽한테 부탁해요?”이연지는 멍해져서 주저하며 강희성에게 시선을 옮겼다.그녀는 방금 주국병에게 밀치고 맞아 머리카락도 옷도 엉망진창이었다.그는 손으로 빌며 말했다.“부탁해요. 경찰한테 우리 남편 데려가지 말라고 말해주면 안 돼요?”강희성은 서준혁과 눈이 마주쳤고 서준혁은 냉담한 표정으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강희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리 연지를 향해 말했다.“남편이 고의로 사람을 쳤어요. 알죠?”"아니에요.”이연지는 다급하게 해명했다.“고의로 사람을 친 게 아니에요, 그저 기분이 안 좋아서...”강희성은 그녀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신유리를 바라보았다.신유리는 얼굴을 돌리고 그들 누구도 쳐다보지 않았다.입술만 힘껏 깨물고 있을뿐이었다.이연지는 그의 시선을 따라 신유리를 바라보다가 곧 신유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집안일에 경찰을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잖아”그녀는 손톱이 긴 탓에 신유리의 손등에 엷은 상처를 냈다.이연지의 손은 저항할 수 없는 큰 힘이었다.신유리는 두 번 밀었지만, 도무지 빼내지 못했다. 이연지는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네 사장님이잖아. 빨리 뭐라고 말좀 해봐.”신유리는 화를 참으며 입을 열었다.“뭘 설명해요? 나에게 그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에요. 방금 나를 때리려고 했는데, 못 봤어요?”이는 그녀가 이연지와 만난 후 처음으로 화난 어투였다.이연지는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린 후 느릿느릿 말했다.“안 맞았잖아.”그녀를 노려보던 신유리는 눈에 있던 분노를 가라앉히고 다른 한 손으로 이연지의 손을 강제로
신유리도 안색이 좋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일 좀 있어서.”목소리는 쉬어있어서 피곤함이 가득했다.하지만 송지음은 더 경계하는 눈빛으로 가까스로 웃더니 물었다.“그럼, 왜 우리랑 같이 안 왔어요?” 신유리는 지금 송지음의 이런 잔꾀에 대처할 힘이 없어,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야 답했다.“개인적인 일이야. 휴가 냈어.”“그래요?”송지음은 헛웃음을 지으며 서준혁에게 고개를 돌렸다.“오빠, 일 다 끝냈어?”서준혁은 담담하게 고개를 떨구고 태연한 표정으로 앞에 놓인 찻잔을 들며 말했다."아직.”송지음은 불만스럽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강희성은 그녀의 기분을 알아차리고 물었다.“왜 그래요? 합정 별로예요?”송지음은 급히 손을 흔들며 고민하더니 말했다.“합정의 날씨에 적응이 안 되는 것 같아요. 몸에 두드러기가 났어요.”강희성은 큰 반응으로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그건 유난히 조심해야죠.”신유리는 인형처럼 옆에서 말이 없었고 입맛도 없어서 많이 먹지 않았다.송지음은 강희성과 급히 친숙해지더니 시끌벅적하게 농담도 주고받았다.그러던 중 송지음이 갑자기 서준혁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오빠, 희성오빠 말이 사실이야?”서준혁은 말하지 않았다.그는 기분이 별로인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송지음이 그를 몇 번 불러서야, 그는 비로소 눈길을 들었다.송지음은 차가운 눈빛에 놀라 물었다.“무슨 일 있어?”강희성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서준혁을 바라보았다.송지음은 신유리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유리 언니.”그녀가 말을 마치자 마침 신유리의 전화가 울렸다.외할아버지가 한 전화였다.전화 소리가 급한 듯 날카로웠다. 신유리는 가슴이 뛰며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안 좋은 예감이 서서히 떠올랐다.그녀는 휴대전화를 들고 일어나며 미안하다는 속삭임과 함께 서둘러 룸을 빠져나왔다.밖에 나와서야 신유리는 전화를 받았다.“유리야.”외할아버지의 가쁜 숨소리에 기침을 두어 번 하고 말소리가 들려왔다.“너 지금 합정에
신유리는 말하고 싶었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서준혁은 신유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자신을 과대 평가 하지마.”“오빠?” 코너에서 나온 송지음은 신유리를 보면서 말했다. “유리 언니, 다들 기다리고 있는데 빨리 와요.”송지음의 눈빛이 너무 적나라해서 신유리는 입술을 앙다물고 자신의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빨리 갈게.”“언니가 오지 않는 줄 알았어요.” 송지음은 적나라하게 서준혁을 보면서 말했다.신유리는 송지음이 괜한 생각을 한다고 여겼지만 설명할 기운이 없어 룸에서 가방을 가지고 나오겠다고 했다.얼마후 강희성이 신유리의 가방을 가지고 나와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아, 미안해요. 당신이 까먹고 급하게 일어나길래 대신 가지고 나왔어요.”그러자 신유리는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가방을 건네받았다.강희성은 서준혁을 보면서 말했다. “준혁아, 지음 씨가 알레르기가 있는 것 같아서 병원 데려다주는 게 좋을 것 같아.”그러자 송지음은 소매를 걷어 팔에 난 여러 개의 빨간 두드러기를 보면서 투덜거렸다. “오빠, 아침까진 없었는데 아까부터 간지럽기 시작했어.”“혹시 알레르기 때문에 못 먹는 음식 있어요?”“땅콩 알레르기가 있어요.”신유리는 땅콩잼이 있는 음식이 생각났다. 그녀가 식욕이 없고 마침 그 요리가 앞에 놓여 있어 몇 젓가락 먹어서 알고 있었다.강희성도 머리를 탁 치며 생각이 났는지 서준혁에게 물었다. “지음 씨가 땅콩 알레르기가 있다고 왜 말하지 않았어?”“네가 땅콩이 있는 음식을 시키는 걸 보지 못했으니까.”그들은 더 이상 따지지 않고 송지음을 근처에 있는 병원으로 데려다주었다. 신유리는 같이 병원 갈 필요가 없다고 여겨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난 일이 있어서 먼저 호텔로 돌아갈게.”서준혁은 신유리를 한번 슥 보고 말했다. “맘대로.”지금 그녀는 다른 사람을 상대할 기력이 없어 서준혁의 말에 한시름 놓았다.그러나 송지음은 무슨 연유인지 미간을 찌푸리면서 그녀를 보고 물었다. “유리 언니,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 보여서
신유리가 서준혁의 취미를 알기 위해 그의 친구들을 추가했지만 실제로 얘기를 나눠본 사람은 몇 안 된다. 그녀는 핸드폰을 보면서 고민하다가 이주휘를 삭제했다.잠도 오지 않고 머리도 깨질 듯이 아픈 신유리는 아예 침대에 기대어 앉아 그의 친구들을 하나씩 삭제하고 휴식을 취했다. 이때 벨 소리가 울려서 확인해 보니 서준혁의 전화였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인데...”서준혁이 그녀의 말을 끊고 물었다. “어느 호텔이야?”머리가 멍한 신유리는 서준혁이 묻자 호텔 주소를 말했고 정신을 차릴 때 전화가 끊겼다. 그녀가 물을 끓이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려 문을 열자 무표정한 서준혁이 보었다.“무슨 일이야?”그녀는 잠옷을 입고 있었고 땀이 나서 앞머리가 젖어 핏기 없는 얼굴에 붙어있었다.이런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서준혁은 기분이 나빴다. 신유리는 문 손잡이를 잡고 서준혁이 들어갈 수 없도록 막고 서있었다.서준혁은 온갖 생각이 들어 신유리를 한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내가 오지 말았어야 했어?”신유리는 계속 손 잡이를 잡으면서 같은 말만 반복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그는 예쁜 눈매를 가지고 있었고 시선을 떨구면서 신유리를 바라봤다. “신유리, 네가 아직 화인의 비서라는 사실을 잊지 마.”신유리는 매우 피곤했고 몸에 힘도 없어 아예 손잡이를 놓고 방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이를 본 서준혁도 방으로 들어왔는데 열린 창문을 보자 걸음을 옮겨 창문을 닫았다.그녀는 열이 나서 짜증이 났는데 서준혁이 창문을 닫자 더 짜증났다. “창문 닫지 마, 갑갑해.”“밖에 비 와.”신유리는 그와 더 이상 논쟁을 벌이기 싫어 침묵을 유지하다가 목이 괜찮아지자 말했다.“늦은 시간에 와서 한다는 말이 고작 내가 화인의 직원이다?”서준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신유리를 바라봤다. “네가 화인의 비서로서 개인 사생활 문제도 신경 써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려고. 화인의 체면이 깎이지 않게.”매서운 추위를 맞은 신유리는 서준혁의 시선을 그
새벽 다섯시 반의 응급실은 사람이 적어 신유리는 접수를 마치고 진찰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미열이 40도 고열로 올라 호흡기관에 감염이 일어나 기침을 심하게 한 거라고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의사는 수액을 맞으면 된다 했고 서준혁에게 처방전을 줄 테니 퇴원할 때 약을 받아 가라고 했다.서준혁은 미리 결제를 하려고 나섰다.“기다려.”간호사는 수액을 가져올테니 신유리더러 편히 누워있으라고 했다.병원 냄새를 싫어하는 서준혁은 결제를 하고 약까지 처방받아 온 후 간호사에게 대신 전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병원을 나섰다. 간호사는 신유리에게 수액을 놓으면서 물었다. “남자친구예요?”그녀는 고개를 흔들면서 낮게 말했다. “대표님이에요.”“그러시구나. 수액의 양이 많아서 화장실 가고 싶으면 남자분이 데려다주면 되겠다고 말하고 싶었어요.”신유리는 침이 천천히 혈관에 들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아파서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마시고요. 화장실 가고 싶으면 뒤에 있는 벨을 눌러요. 그럼 간병사가 데려다줄 거예요.” 간호사는 당부의 말을 하고 자리를 떴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큰 수액 병을 바라봤다. 응급실에 사람이 적어 매우 조용했고 신유리는 수액을 맞으면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자세가 불편해 깊게 잠들지 않은 신유리는 어렴풋이 누군가 자기 앞에 잠시 머물렀다가 빠르게 떠나간 것을 느꼈다.그녀가 힘들게 눈을 뜨자 간호사가 옆에 있는 분에게 주사를 놓고 있었다. 신유리의 수액은 절반만 남아있었고 핸드폰으로 시간을 보자 벌써 일곱시였다.“깼어요?” 옆에 있던 간호사는 주사를 놓고 신유리에게 말했다. “수액 눌리지 않게 잠잘 때 조심해요.”신유리가 두 번째 수액을 다 맞을 때에야 서준혁이 돌아왔다. 그녀는 서준혁이 이미 떠났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아직도 병원에 있어 의외라고 생각했다.수액 덕분에 정신을 차린 그녀는 서준혁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지만 서준혁은 수액을 보면서 물었다. “아직도 남았어?”“급한 일 있으면 먼저 가도 돼.”그는 미간
전화를 받은 신유리가 말이 없자 이연지는 신유리가 거절한 줄 알고 조급하게 말했다. “엄마가 그냥 맛있는 거 해먹이려고 그래. 힘들게 출근하는 거 다 알고 있는데 어제는 말이 멋대로 나왔어. 유리야 화 풀어, 엄마가 미안해.”이연지는 마지막에는 울먹이면서 말했다.그러자 신유리는 눈을 질끔 감으면서 질렸다는 듯 말했다. “지금 병원이에요.”“응? 왜 병원에 있어? 내가 밥 챙겨서 병원으로 갈까?”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연지는 진심으로 걱정이 되는 듯 물었다. 그러자 신유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이어서 말했다. “괜찮아요.”“유리야, 잠깐만 기다려. 미미 데리고 병원으로 갈게.” 이연지는 이렇게 말하면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이때 뒤에 있던 송지음이 갑자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나랑 접수하러 갈래?”신유리는 신경 쓰지 않고 핸드폰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에 잠시 침묵했다. “주소 보내줘요. 내가 갈게요.”“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이연지는 기쁘게 말했지만 신유리는 이연지의 주소도 물어야 한다는 사실에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녀는 전화를 끊고 뒤를 돌아보니 송지음이 서준혁의 팔짱을 끼면서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지만 신유리는 못 본체 했다. “일 있어서 먼저 갈게.”“유리 언니, 오빠가 같이 점심 먹자고 했어요.”그러나 신유리는 고개를 숙여 이연지가 보낸 주소를 보면서 거절했다. “말은 고마운데 둘이 먹어.” 그리고 서준혁을 보면서 다시 한번 말했다. “고마워.”그녀는 왜 서준혁이 자신을 병원에 데려다줬는지 몰라도 그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그리고 오전에 수액을 맞을 때 어제저녁 서준혁이 그녀가 몸이 좋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신유리는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서준혁이 신유리를 보면서 말했다. “딴 생각 하지 마. 네가 무슨 일 생기면 화인은 너네 집에서 기생하는 거머리들을 책임져 줄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신유리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송지음은 화
이연지는 미미가 괜찮은 걸 확인하고 고개를 돌려 신유리를 봤다. 신유리의 소매에 국물이 튄 걸 보고 황급히 티슈 두 장을 뽑아 닦아주었다. “아이고, 내가 움직이는 게 시원찮아서 국물이 다 튀었네.”“괜찮아요, 가서 옷 갈아입으면 돼요.”이연지는 신유리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옷 많이 비싸지?”그러자 신유리는 움직임을 멈추고 말했다. “와서 밥 먹으라고 불렀잖아요?”이연지는 백숙과 갈비찜, 소고기 볶음과 청경채를 준비했다. 그녀는 미미에게 밥을 먹여주면서 신유리와 말했다. “많이 먹어. 평소에 집에서 소고기도 먹지 않는데 너 먹이려고 일부러 아침 시장에서 사 왔어.”방금까지 고열이 있던 신유리는 식욕이 없어 채소만 깨작거렸다. 하지만 이연지의 말을 들은 후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신유리가 음식을 먹지 않자 이연지는 소고기와 갈비를 집어 그녀의 앞접시에 놨다.“많이 먹어, 어릴 때 엄마가 해주는 음식 좋아했잖아.”이연지가 신유리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쓴다는 걸 알아서 젓가락을 놓으면서 말했다. “무슨 일인데요? 그냥 말하세요.”그러자 이연지는 음식을 집던 움직임을 멈추고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 일도 없어. 그냥 밥 한 끼 해먹이려고 부른 거야.”사실 신유리는 이연지의 불안과 허탈한 감정을 알아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밥을 먹은 후 이연지는 설거지를 했고 미미는 방으로 돌아가서 자고 있었으며 신유리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이연지가 무슨 일 때문에 부른 건지 잘 알고 있었지만 이연지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에서 나온 이연지는 신유리에게 물을 건네주며 옆에 앉아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리야, 네가 성남의 큰 회사에 출근하는데 그날 본 그 남자가 너희 대표님 맞지?”신유리가 짧게 대답하자 이연지는 이어서 물었다. “네가 대표님한테 잘 말해서 주 아저씨 경찰서에서 꺼내줄 수 있겠니? 이걸 다른 사람들이 알면 뒤에서 뒤에서 호박씨 까.”그녀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더 피곤했다. “
이신은 핸드폰을 거두며 말했다. “너와 협업하는 날을 기대할게.”“나도 기대 돼.”이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전환했다. “이곳에서 힘든 일 있어?”“왜 그렇게 물어?”“얼굴에 훤히 보여서. 네가 시한에 있을 땐 이 정도로 수척해 보이진 않았거든.”이에 신유리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만졌다. “괜찮으면 나한테 털어놔도 돼.”그러나 신유리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신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하고 물었다. “저녁 같이 먹을래? 곡연도 있어.”“저녁에 병원에서 수액 맞아야 해서 너네끼리 놀다 와.”이신은 신유리를 자세히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사람들은 출장 간 김에 여행이라도 하는데 넌 오히려 벌받는 것 같다?”그는 처음으로 장난기 가득하게 신유리와 말했다. 이신이 워낙 본판이 잘생겨서 이렇게 웃으니 올라간 여우 눈에 부드러움이 보이면서 사람을 집어삼킬 것 같았다.하지만 이신의 웃음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평소로 돌아온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연락 주기 전에 연우진이 나보고 너 케어 잘하라고 신신 당부하더라. 네가 이렇게 성남으로 돌아가면 연우진이 내가 너 괴롭힌 줄 알아.”“넌 연우진과 사이 좋아?”“우진이가 얘기 안했어?” 이신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올리며 말했다. “내 동생이야.”신유리는 연우진과 이신의 관계를 몰라 멍해있었다. 마침 테이블에 놓인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그녀가 수액을 맞으러 가야 한다고 설정한 알람이었다. “그럼 고민해 보고 연락할게. 지금 병원 가야 해서 이만 일어날게.”“아, 맞다.”몇 걸음도 채 걷지 않은 신유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며 말했다. “테이블에 놓인 케이크는 손 대지 않았으니까 괜찮으면 네가 먹어. 그리고 다른 디저트도 먹고 싶으면 시켜.”이신은 어이가 없었다. “날 여자애 취급하는 거야?”신유리가 병원에 도착할 사람이 별로 없었고 그녀는 수액을 맞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아침에 본 간호사가 수액을 놔줬다. “아침에 본 그분이군요.”“네,
태송백은 신연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태지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신연을 밀어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태송백은 태지연을 보더니 급하게 행동을 멈췄다.그러나 이미 큰 힘을 실은 탓에 갑자기 멈추려 해도 늦었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태지연의 어깨에 맞았다.뼈가 부딪히는 고통에 태지연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그녀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신연이 반응했을 때 태지연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는 태지연의 신음소리만 울려 퍼졌다.“아파...”신연의 눈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그는 태지연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성한빈, 당장 구급차 불러! 지금 당장!”그는 태지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신연은 이내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태송백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태송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다가왔다.“태지연... 지연아...”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까의 광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태지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태송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오빠... 내 말부터 들어줄래?”태송백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그래, 네 말 들을게. 오빠가 나빴어. 오빠가 미안해... 지연아,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아껴줬잖아.”태지연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 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낮게 말했다.“오빠, 난 신연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저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 가족이 다시
태송백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연을 노려봤다. 한참 후에야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뒤에서 숨고만 있다가 부하들만 짖게 놔두더니 이제야 직접 나선 거냐?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신연, 너 진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태송백은 태지연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너 내 동생을 완전히 속였잖아. 지금도 태지연이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고.”태송백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태지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빠, 제발 진정 좀 해요.”“태지연, 넌 입 다물어. 계속해서 그 새끼 편을 들면 넌 더 이상 내 여동생도 태씨 가문의 딸도 아니야!”태송백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우리 태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데다 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하지.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모든 게 다 저 새끼 때문이라고.”“엄마는 창녀에 아빠는 손님이고. 참, 너도 신유리 알지? 걘 얼마나 똑똑한지 저 새끼랑 상종도 안 해. 너 혼자 보물인 양 여기고 있는 거야.”태송백은 쌓여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그는 반드시 신연에게 자신이 당한 굴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태송백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설을 내뱉었다.“태지연, 넌 더럽지 않냐?”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제자리 굳어버린 채 태송백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빠, 그만해요... 제발 그만 말하세요.”그녀는 차마 신연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말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연 앞을 막아서며 무시해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치 나무 말뚝에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태송백의 독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악의 어린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지
성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도련님께서 문이 열릴 때마다...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신연은 바닥에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흘겨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부술 게 남아있어?”성한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태지연은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신연은 눈을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약속하듯 말했다.“아무것도 안 할게. 믿어줘, 응?”“아직 불안정할 텐데. 너희 둘만 남겨둘 수 없어.”“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래도 내 오빠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장 아껴주던 사람이야.”태지연은 신연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물건을 너한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어.”“우리도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예전처럼 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태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했다.“연아, 나 정말 너무 힘들어.”신연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번 얘기해 봐.”태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가진 않을 거야. 보다시피 최근 태송백 상태가 불안정해. 단둘이 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기다릴게.”현관에서는 안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그녀는 신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온갖 유리 파편들과 장식품들이 흩어져 있었다.태송백은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거실까지 다가갔다. 순간 태송백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나가라고
다음 날 아침, 신연은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초콜릿케이크가 보이지 않았고 신연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유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얼른 씻고 아침 먹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점심에 못 올 거야. 점심은 호텔에서 보내줄 거야.”태지연은 순간 마음이 움찔하며 신연에게 물었다.“회사? 아니면 어디?”신연은 동작을 멈추더니 속눈썹을 내리깐 채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응, 회사.”“연아.”태지연은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고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신연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나중에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조금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 들은 말로만 신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는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태송백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태지연은 손에 힘을 풀더니 힘겹게 신연 곁으로 다가갔다.“연아,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찾아줄게.”순간 신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목젖을 울렁이며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태지연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오빠가 말했어. 자기 손에 너한테 아주 중요한 게 있다고. 연아... 내가 찾아줄게. 내 오빠잖아, 내가 말해볼게.”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다소 잠겨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신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태지연은 말을 마치고 신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신연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일으켜 세웠다.“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얼른 먹어봐.”태지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신연을 쳐다보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되레 단단히 잡혔다.신연은 식탁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열고는 라즈베리 초콜릿케이크를 꺼냈다.태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케이크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신연한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고 조르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가장 즐겨 먹던 케이크를 보면서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녀는 태송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오빠가...”그러나 신연이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또 둘째를 낳았대. 너도 기억하더라.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했어.”“신연...”“맛 좀 봐.”신연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건네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태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연아,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줘. 네가 오빠를 데려갔어?”태지연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신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뿐이야?”태지연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대답해.”신연은 말했다. “일단 케이크부터 먹어봐.”태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순간 가족과 신연 사이에서 고민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연과 가족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바라던 작은 소망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신연과 태씨 가문은 이미 끊어진 실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이였다.모두가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이 되돌릴 수 있다는
태은정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연아, 신연이 송백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태지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언니, 왜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조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마치 사람들이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지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는데 말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태은정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태지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반응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그래.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지연아, 내가 너무 급했나 봐.”태은정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는데 이는 태은정이 곤란할 때 나오는 작은 습관이었다.태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방금 신연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태은정은 지금도 상황이 엉망진창이라고 느꼈다. 태송백은 이미 이틀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전혜린과 태성민은 신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태지연과도 연락이 닿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달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송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야 했다.게다가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었다.태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신연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는 알아?”태지연은 대답했다.“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에 있을 거야.”그녀는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근데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보통 자세한 건 나한테 말하지 않
태지연은 마땅한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신연은 그녀에 대해 잘 알다 못해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태지연은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으로 바라봤다.“왜겠어? 연아, 네가 생각해 봐.”“우리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고 엄마랑 오빠는 널 원수처럼 대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건데?”“누굴 탓해야 할까? 내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다들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서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태지연은 바닥에 다리를 웅크리고 앉은 채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녀의 가족을 해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를 아껴주던 부모와 오빠조차 이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다.모두 그녀를 속이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진심을 다하라고 요구했다.태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내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날 속이는데 왜 난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난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진실만을 원할 뿐이야. 그게 다야.”“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해줄 수 없는 거야?”“왜? 내가 바보 같아?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왜 너희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어깨가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진실이 그녀 앞에 명백히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태지연이 절망에 빠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속이려고만 했다.무언의 눈물에서 작게 흐느끼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태지연은 자신이 고집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입술이 터져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신연은 그녀의
신연은 언제나 태지연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하지만 태지연은 마치 약점을 찔린 듯 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신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시선이 되레 태지연의 마음을 한껏 졸여왔다.“왜?”신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연아, 너도 그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거지?”“착하지, 그만 돌려줘.”신연은 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있는 거 알아.”“...없어.”태지연은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계약서라니, 난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제야 의지와는 다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켰다.그녀는 오빠가 신연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신연이 오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태지연은 누구에게도 그 계약서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며 모든 생각을 숨기려 했다.신연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나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태지연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 아니야...”“정말이야?”신연이 다시 물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응.””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신연은 말을 마치고 서랍에서 약병과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전에 침대 옆 서랍에 숨겨둔 비타민 약병과 피임약이었다.최근에 산 피임약을 아직 비타민 약병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태송백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다.신연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말해 봐. 집에 왜 이런 약이 있는 거야?”그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신연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변명했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