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지연이 밖으로 나가자 성한빈은 신연의 표정을 살피더니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신 대표님, 앞으로 어떻게 할까요? 성북 쪽에서 이번 실수에 대해 불만이 많습니다.”신연의 눈빛에 서린 분노는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었다. 뚜렷한 이목구비는 지금 이 순간 더욱 냉혹하게 보였고 마치 손에 쥔 펜을 당장이라도 부러뜨릴 것 같았다.성한빈은 옆에서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태씨 그룹의 위기는 단지 고위층 간의 내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태씨 그룹은 초기에 가장 먼저 뛰어든 실업 회사였다. 그러나 시대는 계속해서 변화를 거쳤고 실업 회사들의 상황은 이전과 같지 않았다. 태씨 그룹은 여전히 가장 오래된 운영 방식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 결과, 신흥 산업에 의해 시장의 대부분을 잠식당하고 말았다.이번에 신연은 성북과 협력을 통해 태씨 그룹이 직접적인 전환을 이루길 노렸다. 하지만 중간에 태송백이 나타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그는 태씨 그룹에서 일했던 오래된 직원들과 태씨 가문에 충성하는 사람을 이용해 시장에서 큰 문제를 일으켰다. 지금 성북 쪽은 현재 상황에 대해 명백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성한빈은 이 소식을 접하자마자 즉시 신연에게 보고했다. 혹시라도 예전에 태송백과 일했던 것 때문에 그를 의심할까 두려웠다. 그러나 성한빈도 태송백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필경 태씨 그룹은 여전히 태씨 가문의 회사로, 태씨 가문의 발전을 방해하는 게 과연 그에게 무슨 이득이 될까?“성북 비행기 티켓부터 예약해. 내일 손혁진과 직접 얘기해야겠어.”신연의 차가운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그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음산한 어조로 말했다. “태송백이 나서기 시작했으니 끌어내도록 해.”그는 셔츠 단추를 풀어 헤치더니 얇은 입술을 움직이며 말했다. “그 물건을 가져갔다고 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어리석기 그지없네.”성한빈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신연과 태송백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
전혜린은 젓가락을 들고 있던 손을 잠시 멈칫했다.태은정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태은정과 전혜린에게 음식을 덜어주고 나서 천천히 말했다. “물론 엄마가 말씀하신 건 아빠의 건강이겠죠. 저도 아빠가 꼭 회복하실 거라고 믿어요.”전혜린은 말했다. “그럼 당연하지. 내 뜻은 너희 아빠가 건강을 회복하면 우리 가족이 예전처럼 놀러 다닐 수도 있다는 뜻이야.”태은정은 고개를 돌려 태지연을 향해 윙크하며 말했다. “지연아, 들었지? 주말에 아빠의 회복을 기원하러 절에 가자. 그럼 아빠가 빨리 나아서 함께 놀러 다닐 수 있을 거야.”태지연은 입술을 오므리더니 입꼬리를 휘어 올리며 말했다. “응, 좋아.”전혜린은 태은정을 보며 물었다. “그럼 이제 너랑 육지성의 이혼에 대해서 얘기하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태은정은 얼굴이 살짝 굳은 채 무심하게 대답했다.“말했잖아요. 같이 못 살겠다고.”“참, 넌 결혼할 때도 말 안 하더니, 이제 이혼도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니? 너무 오냐오냐하며 키웠어.”태은정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 “인생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슬픔과 기쁨, 이별과 만남은 지극히 평범한 일이죠. 그리고 지연이 결혼할 때도 몰랐잖아요.”순간 식탁의 분위기는 얼어붙었다.태성민과 전혜린은 눈썹을 찌푸렸고 태지연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유독 태은정만이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었다. “결국 엄마, 아빠도 인정한 일이잖아요?”태지연과 신연의 결혼은 보기엔 신연의 일방적인 행동처럼 보였지만 만약 태성민과 전혜린이 정말 결혼에 대해 불만이었다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태지연을 이혼시켰을 것이다.아무리 태씨 가문이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런 작은 일쯤은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게다가 태성민과 전혜린이 이 결혼에 대해 크게 반대하지 않는 걸 봐서는 태은정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아마 부모님의 예상에 있었을 결혼이었다.그리고 이 결혼에서 순진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작은 동생뿐이었다.태지연은 얼굴이 새하얘진 채 입술
태송백은 아파트 밖에 숨어 있었고 태지연은 그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그녀는 태송백에게 손목을 붙잡힌 채 옆으로 끌려가자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태송백이 그녀의 입과 코를 막으며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지연아, 나야.”태지연은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침 대문 밖의 사각지대로 매우 어두웠다.어두운색 후드를 입고 야구 모자를 눌러쓴 태송백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잘생긴 얼굴에 서린 심각한 표정만큼은 선명했다.“오빠?”태송백은 자신과 함께 자라온 동생인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신연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도 했다.태지연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긴장한 채로 옷자락을 꼬집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오빠, 여긴 어쩐 일이에요?”“...널 찾으러.”태지연은 잠시 멈칫하더니 억지로 웃어 보였다.“오늘 병원에서 엄마 아빠랑 저녁 먹었어요. 참, 오빠도 알죠? 큰언니가 돌아온걸.”태지연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태송백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꺼번에 모든 주제를 꺼냈다.그러나 태송백은 단번에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알아, 큰누나가 돌아온걸. 그리고 오늘 저녁을 함께한 것도 알고, 근데 난 너를 찾으러 온 거야.”그는 태지연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넌 태씨 그룹에서 일하고 있어. 게다가 신연의 사무실에서. 신연은 너한테 경계심이라고 없어.”“지연아, 오빠 좀 도와줄래?”태지연은 그의 눈빛에 가슴이 저려오며 황급히 태송백의 시선을 피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뭘 도와줄 수 있는데요?”“엄마가 말했을 거야. 신연의 손에 중요한 서류가 있어. 지연아, 그걸 오빠한테 줘.”태송백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말했다. 태지연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잠시 멈췄다가 말했다.“오빠,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왜인지 태지연은 지금 태송백과 마주한 순간 회사에서 성한빈과 신연이 회사에서 생긴 문제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자꾸 떠올랐다.태지연은 눈을 깜빡이더니 다시 태송백을 쳐다보며 그의
신연은 마치 골든 리트리버처럼 태지연에게 바짝 붙은 채 특유의 맑고 상쾌한 향기는 술 냄새가 섞인 채 그녀를 휘감았다.그녀는 고개를 숙이더니 손을 밀치며 말했다. “일하는 중이야.”그러나 신연은 태지연을 들어 올리더니 책상 위의 물건을 모두 밀어내버리고는 허리를 감싸안은 채 그녀를 책상 위에 앉혔다.두 발이 붕 뜨자 태지연은 본능적으로 신연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그는 허리를 감싼 손을 풀더니 턱을 치켜올리며 입을 맞췄다.신연은 유독 모든 주도권을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을 좋아했다.둘은 키 차이가 꽤 나는 편이라 태지연은 책상에 앉아 있어도 여전히 고개를 들어 바라봐야 했다.그녀는 마치 취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신연의 술기운이 자신에게도 전해지는 것 같았다.태지연은 떨리는 손으로 신연의 옷자락을 움켜잡으며 힘겹게 말을 뱉었다. “그만...”“왜?” 신연은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귓불을 깨물었다.태지연은 고개를 들어 벽 구석의 카메라를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살짝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카메라 있어...”그녀는 신연의 품에 안기며 말을 덧붙였다.신연은 그녀의 행동에 만족한 듯 낮게 웃으며 태지연을 풀어주었다.그는 핸드폰을 꺼내 몇 번 화면을 클릭하고는 태지연을 다시 안심시키듯 말했다. “다 껐어.”태지연은 신연의 핸드폰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옮겼다....모든 일이 물 흐르듯 흘러갔다.금방 씻고 나온 태지연은 다시 땀으로 젖어 있었다.그녀는 하얀 팔로 신연의 팔을 감싸안았고 신연은 그녀를 달래주었다. “얼른 가서 씻어.”그녀가 뭔가 말하려던 순간 신연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화면에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가 떠 있었다.순간 신연은 손으로 태지연의 시야를 가리며 핸드폰을 들어 올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만.”태지연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만히 신연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신연은 저장되지 않은 번호를 보더니 눈에는 짜증과 냉담함이 섞여 있었다.곧 태지연은 시선을 거두었다.그녀는 심장이 빠르게
장수영은 웃으며 물었다.“아저씨, 우리를 아직도 기억하시네요?”강 아저씨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어떻게 기억을 못 하겠니? 예전에 내 가게에 제일 자주 오던 애들인데. 주말만 되면 여기로 달려왔잖아.”그는 가게 안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봐, 안에 있는 캡슐의 절반이 너희 둘 거야. 맞지, 수영 학생, 지연 학생?”“설마 진짜로 보관하고 계셨다니.”장수영은 의아해하며 안을 들여다보았다. 심지어 예전에 태지연과 농담으로 가게의 시간 캡슐은 전부 거짓말이라고 했었다. 어쩌면 그들이 가게를 떠나자마자 아저씨가 캡슐을 다 버릴지도 모른다고 했다.아저씨는 그녀의 생각을 간파한 듯 눈에 잔뜩 힘을 주며 말했다.“참, 항상 말이 급하고 덜렁대더니. 네가 내 캡슐 몇 개나 망가뜨렸는지 기억하니? 그래도 말은 잘하는구나.”장수영은 웃으며 대꾸했다.“제가 다 보상해 드렸잖아요?”장수영과 강 아저씨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태지연은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녀와 태지연은 어릴 때부터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때 장씨 가문이 한창 바쁠 때라 그녀를 태씨 가문에 보내 돌봐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태성민과 전혜린도 항상 장수영을 데리고 나가 놀곤 했다.태지연은 속눈썹을 내리깔더니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추억에 빠진 듯했다.그녀는 강 아저씨에게 물었다.“지금도 시간 캡슐을 만들 수 있나요?”아저씨는 대답했다.“물론이지.”장수영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뭐야~ 오늘 나랑 같이 추억여행이라도 가려는 거야?”태지연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응, 옛날 느낌 좀 찾고 싶어.”그러고는 다시 강 아저씨에게 물었다.“이번에 넣을 건 오래 두지 않을 거예요. 며칠 뒤에 바로 꺼낼 수도 있는데 괜찮을까요?”강 아저씨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근데 네가 전에 넣어둔 것들을 먼저 꺼내보지 않겠니?”태지연은 대답했다.“아직은 괜찮아요. 나중에 다시 올게요.”“걱정 마세요. 놀이공원이 철거되기 전에 꼭
태지연은 주먹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오빠, 나한테 없어요. 엄마와 오빠도 못 가져간 걸 내가 어떻게 손에 넣겠어요... 그리고 신연이 지금 나를 더 의심하고 있어요.”태송백이 잠시 침묵하자 태지연은 그가 드디어 납득한 줄 알았다. 망설이다가 다시 말을 꺼내려는 순간 태송백의 차가운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지연아, 나 지금 병원이야. 엄마랑 아빠도 내 옆에 있으니까 물건 갖고 와.”“태씨 가문의 중요한 일이야. 엄마 아빠가 널 얼마나 이뻐했는데 너도 적당히 눈치껏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태송백은 말을 마치자마자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는 손에 힘이 풀리더니 물뿌리개를 떨어뜨렸다.갑자기 그녀는 허리를 숙이고 가슴을 움켜쥔 채 숨을 쉬려고 애썼지만 마치 누군가 가슴에 칼을 꽂은 듯한 고통이 몸 전체를 휘감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견딜 수 없는 통증이 온몸에 밀려왔다....태송백이 전화를 끊자마자 책 한 권이 그를 향해 날아왔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지만 모서리가 이마를 스치며 상처가 났고 피가 흘러내렸다.태송백은 잠시 멈칫했다. 곧 태성민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태송백! 네가 저지른 일 좀 봐라! 결국 네 동생이 뒤처리하게 만들어야 하니?”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태성민을 보더니 전혜린은 급히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태송백을 흘겨보더니 이내 태성민에게 다가가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말로 하면 되지, 왜 화를 내고 그래. 의사도 화내지 말라고 했잖아.”태성민은 손가락으로 태송백을 가리키며 소리 질렀다.“저놈을 보면 화가 난단 말이야!”태송백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리자 전혜린도 안타까운 눈빛으로 눈에 잔뜩 힘을 준 채 말했다.“얼른 가서 상처나 처리해!”그러나 태송백은 꼼짝하지 않고 태성민을 똑바로 쳐다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얼굴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가득했다.“아빠, 제가 그때 급해서 실수한 것도 맞지만 지연이도 책임이 있잖아요. 신연은 지연이가 데리고 온 사람 아니에요? 지연이는 좋은 점만
태송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화가 잔뜩 난 눈빛으로 태지연을 쳐다봤다.그녀는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며 숨결도 함께 거칠어졌다.태송백이 물었다. “지연아, 너 혹시 걔를 놓지 못하는 거야?”이 한마디에 태성민의 시선은 다시 태지연에게 향했다. 전혜린 역시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지연아?”태지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엄마, 제가 정말 그렇게 철없는 애처럼 보여요?”전혜린은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하지만 지연아, 이 일이 우리 가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해. 엄마는 그냥 네가...”그녀는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른 채 복잡한 눈빛으로 태지연을 바라봤다.태지연은 입술을 오므린 채 태성민과 전혜린의 시선을 피하며 혹시라도 눈을 마주칠까 봐 두려웠다.지금 그녀는 가족을 속인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렸다.가슴이 얕게 오르락내리락하는 태지연을 보며 전혜린은 입을 떼려는 순간 병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또각또각 하이힐 소리와 함께 태은정이 아무렇지도 않게 병실로 들어섰다.그녀는 병실 안을 쓱 둘러본 뒤 시선을 태송백에게 고정하더니 눈썹을 치켜올리며 눈웃음을 띄었다. “송백? 오랜만이네.”마치 병실 안의 긴장된 분위기를 전혀 모르는 듯 덤덤하게 물었다. “엄마, 아빠, 오늘은 지연이랑 송백이 다 있네요. 가족 모임인가요? 근데 왜 저한테는 연락이 없었죠? 저를 잊은 거예요?”전혜린은 태성민과 눈을 마주치고는 입을 열었다. “오늘 고객 만나러 간다고 하지 않았니?”“그분이 약속을 어겼어요. 전에 해외에 오래 있다 보니 자주 못 뵀던 것도 생각나서 왔죠. 그런데 제가 없을 때 가족 모임이라뇨?”“아니야, 네가 너무 바빠 보이길래 아빠가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어.”전혜린은 머리가 아파 났다. 그녀는 태은정이 분명 태지연을 옹호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딸이 안타깝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그녀는 어떻게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
태송백은 신연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태지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신연을 밀어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태송백은 태지연을 보더니 급하게 행동을 멈췄다.그러나 이미 큰 힘을 실은 탓에 갑자기 멈추려 해도 늦었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태지연의 어깨에 맞았다.뼈가 부딪히는 고통에 태지연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그녀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신연이 반응했을 때 태지연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는 태지연의 신음소리만 울려 퍼졌다.“아파...”신연의 눈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그는 태지연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성한빈, 당장 구급차 불러! 지금 당장!”그는 태지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신연은 이내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태송백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태송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다가왔다.“태지연... 지연아...”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까의 광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태지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태송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오빠... 내 말부터 들어줄래?”태송백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그래, 네 말 들을게. 오빠가 나빴어. 오빠가 미안해... 지연아,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아껴줬잖아.”태지연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 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낮게 말했다.“오빠, 난 신연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저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 가족이 다시
태송백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연을 노려봤다. 한참 후에야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뒤에서 숨고만 있다가 부하들만 짖게 놔두더니 이제야 직접 나선 거냐?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신연, 너 진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태송백은 태지연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너 내 동생을 완전히 속였잖아. 지금도 태지연이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고.”태송백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태지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빠, 제발 진정 좀 해요.”“태지연, 넌 입 다물어. 계속해서 그 새끼 편을 들면 넌 더 이상 내 여동생도 태씨 가문의 딸도 아니야!”태송백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우리 태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데다 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하지.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모든 게 다 저 새끼 때문이라고.”“엄마는 창녀에 아빠는 손님이고. 참, 너도 신유리 알지? 걘 얼마나 똑똑한지 저 새끼랑 상종도 안 해. 너 혼자 보물인 양 여기고 있는 거야.”태송백은 쌓여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그는 반드시 신연에게 자신이 당한 굴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태송백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설을 내뱉었다.“태지연, 넌 더럽지 않냐?”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제자리 굳어버린 채 태송백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빠, 그만해요... 제발 그만 말하세요.”그녀는 차마 신연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말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연 앞을 막아서며 무시해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치 나무 말뚝에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태송백의 독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악의 어린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지
성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도련님께서 문이 열릴 때마다...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신연은 바닥에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흘겨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부술 게 남아있어?”성한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태지연은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신연은 눈을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약속하듯 말했다.“아무것도 안 할게. 믿어줘, 응?”“아직 불안정할 텐데. 너희 둘만 남겨둘 수 없어.”“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래도 내 오빠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장 아껴주던 사람이야.”태지연은 신연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물건을 너한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어.”“우리도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예전처럼 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태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했다.“연아, 나 정말 너무 힘들어.”신연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번 얘기해 봐.”태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가진 않을 거야. 보다시피 최근 태송백 상태가 불안정해. 단둘이 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기다릴게.”현관에서는 안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그녀는 신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온갖 유리 파편들과 장식품들이 흩어져 있었다.태송백은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거실까지 다가갔다. 순간 태송백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나가라고
다음 날 아침, 신연은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초콜릿케이크가 보이지 않았고 신연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유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얼른 씻고 아침 먹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점심에 못 올 거야. 점심은 호텔에서 보내줄 거야.”태지연은 순간 마음이 움찔하며 신연에게 물었다.“회사? 아니면 어디?”신연은 동작을 멈추더니 속눈썹을 내리깐 채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응, 회사.”“연아.”태지연은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고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신연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나중에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조금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 들은 말로만 신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는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태송백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태지연은 손에 힘을 풀더니 힘겹게 신연 곁으로 다가갔다.“연아,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찾아줄게.”순간 신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목젖을 울렁이며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태지연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오빠가 말했어. 자기 손에 너한테 아주 중요한 게 있다고. 연아... 내가 찾아줄게. 내 오빠잖아, 내가 말해볼게.”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다소 잠겨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신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태지연은 말을 마치고 신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신연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일으켜 세웠다.“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얼른 먹어봐.”태지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신연을 쳐다보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되레 단단히 잡혔다.신연은 식탁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열고는 라즈베리 초콜릿케이크를 꺼냈다.태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케이크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신연한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고 조르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가장 즐겨 먹던 케이크를 보면서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녀는 태송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오빠가...”그러나 신연이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또 둘째를 낳았대. 너도 기억하더라.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했어.”“신연...”“맛 좀 봐.”신연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건네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태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연아,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줘. 네가 오빠를 데려갔어?”태지연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신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뿐이야?”태지연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대답해.”신연은 말했다. “일단 케이크부터 먹어봐.”태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순간 가족과 신연 사이에서 고민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연과 가족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바라던 작은 소망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신연과 태씨 가문은 이미 끊어진 실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이였다.모두가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이 되돌릴 수 있다는
태은정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연아, 신연이 송백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태지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언니, 왜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조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마치 사람들이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지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는데 말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태은정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태지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반응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그래.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지연아, 내가 너무 급했나 봐.”태은정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는데 이는 태은정이 곤란할 때 나오는 작은 습관이었다.태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방금 신연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태은정은 지금도 상황이 엉망진창이라고 느꼈다. 태송백은 이미 이틀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전혜린과 태성민은 신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태지연과도 연락이 닿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달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송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야 했다.게다가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었다.태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신연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는 알아?”태지연은 대답했다.“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에 있을 거야.”그녀는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근데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보통 자세한 건 나한테 말하지 않
태지연은 마땅한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신연은 그녀에 대해 잘 알다 못해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태지연은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으로 바라봤다.“왜겠어? 연아, 네가 생각해 봐.”“우리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고 엄마랑 오빠는 널 원수처럼 대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건데?”“누굴 탓해야 할까? 내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다들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서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태지연은 바닥에 다리를 웅크리고 앉은 채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녀의 가족을 해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를 아껴주던 부모와 오빠조차 이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다.모두 그녀를 속이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진심을 다하라고 요구했다.태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내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날 속이는데 왜 난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난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진실만을 원할 뿐이야. 그게 다야.”“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해줄 수 없는 거야?”“왜? 내가 바보 같아?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왜 너희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어깨가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진실이 그녀 앞에 명백히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태지연이 절망에 빠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속이려고만 했다.무언의 눈물에서 작게 흐느끼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태지연은 자신이 고집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입술이 터져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신연은 그녀의
신연은 언제나 태지연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하지만 태지연은 마치 약점을 찔린 듯 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신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시선이 되레 태지연의 마음을 한껏 졸여왔다.“왜?”신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연아, 너도 그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거지?”“착하지, 그만 돌려줘.”신연은 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있는 거 알아.”“...없어.”태지연은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계약서라니, 난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제야 의지와는 다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켰다.그녀는 오빠가 신연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신연이 오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태지연은 누구에게도 그 계약서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며 모든 생각을 숨기려 했다.신연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나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태지연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 아니야...”“정말이야?”신연이 다시 물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응.””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신연은 말을 마치고 서랍에서 약병과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전에 침대 옆 서랍에 숨겨둔 비타민 약병과 피임약이었다.최근에 산 피임약을 아직 비타민 약병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태송백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다.신연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말해 봐. 집에 왜 이런 약이 있는 거야?”그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신연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변명했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