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전생과 현생에서 현익과 이렇게 자꾸 엮이는 것이 운청서는 달갑지 않았다.그리고 운청천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아닙니다. 민녀는 왕야의 아래에서 돈을 벌 팔자가 아닙니다. 더 설득할 필요도 없습니다. 집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운청서가 자리를 뜨려는 순간, 현익이 또 그녀를 잡아 세웠다.순간, 운청서는 조금 화가 났다.'사람 말 못 알아듣고 고집스러운 건 예전이랑 아주 똑같구나!'운청서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현익이 우산을 그녀에게 건네줬다."골목 밖은 비가 더 크게 내리고 있다. 등에 상처도 아직 낫지 않았으니 덧나면 네 오라버니가 걱정할 것이다."운청서는 온기가 느껴지는 우산대를 잡은 채 입술을 물었다. 그녀는 결국 거절하지 않았다.머지않아 우산을 펼친 여인의 인영이 골목 끝에서 사라졌다.어두운 곳에 숨어있던 조 집사는 허리를 굽힌 채 힘겹게 다른 우산을 들고 다가와 현익을 위해 우산을 폈다."왕야, 그게...""쓸모없는 놈."현익이 조 집사를 흘겨보며 말했다."남성이 크고 청서 낭자의 걸음이 빨라서 노비가 놓쳤습니다. 몇 시진을 돌아다니고 나서야 낭자를 찾은 겁니다. 노비는 마부 노릇을 할 팔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조 집사는 이 나이에 뒤늦게 고생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왕야, 홍수라는 시녀가 아직 마차에 묶여 있습니다. 어떻게 처리할 생각입니까?"그 말을 들은 현익의 안색이 차가워졌다.반주향 뒤, 검은 마차 안.현익의 차가운 손가락이 홍수의 입을 막고 있던 천을 뽑아냈다. 그리곤 숨이 막혀서 빨개진 얼굴을 내려다봤다. 현익은 홍수의 눈에 서린 두려움도 놓치지 않았다."왕... 왕야!"홍수는 사나운 현익의 눈빛에 놀라 몸을 벌벌 떨었다."노비는 저희 소저의 곁을 육 년이나 지켰습니다. 저희 소저와 장사 얘기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날 차관에서 노비가 왕야께 차를 따라드렸습니다... 저희 소저를 봐서라도 노비를 놓아주십시오!"홍수의 말을 들은 현익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오늘 운청천은 일찍이 돌아왔다.운청서는 처마 아래에서 비를 보면서 긴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곧 문이 열리더니 운청천이 계화꽃술과 식합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운청천의 옷은 빗물에 젖었지만 손에 들고 있던 음식은 하나도 젖지 않았다.그는 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그 우산을 발견했다."이 우산..."운청천이 조금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는 이런 색깔의 우산이 없었다. 우산대의 색깔을 봐도 새 우산 같지는 않았다."오늘 나갔던 게야?"운청서도 그 우산을 보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웃으며 설명했다."네, 나가서 한 바퀴 돌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내려서 쌀집에서 우산을 빌렸습니다. 내일 날이 개면 돌려줄 겁니다."운청서의 말을 들은 운청천도 자신이 너무 예민했다고 생각하곤 말을 돌렸다."오늘 돌아오는 길에 동창과 얘기를 나누는데 임씨 점포에서 신기한 탄필을 내놓았다고 하더구나. 먹을 묻히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다고 하니 내일 돌아올 때, 내 두 개 사오마. 앞으로 적을 게 있거든 그걸로 적거라."운청천의 말이 끝났지만 운청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의아함에 고개를 든 운청천은 창백해진 운청서의 안색을 보게 되었다.그는 깜짝 놀라서 비를 뚫고 운청서에게 다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청서야, 왜 그러냐?"......운청서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걱정 어린 운청천의 눈빛을 마주했다. 그녀는 부끄러움과 씁쓸함을 억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조금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습니다. 조심하지 않아서 등의 상처를 건드렸습니다."운청서는 얼굴을 돌리고 더 이상 운청천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혹여나 그가 자신의 거짓말을 알아차릴까 봐 등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오라버니, 마른 수건을 드릴 테니 물기 좀 닦으십시오."방으로 들어선 운청서는 탁자 위에 있던 주자 강집을 보게 됐다. 그녀는 얼른 마른 수건과 강집을 함께 들고 나갔다."오라버니, 이걸 보십시오."운청서가 웃으며 말했다.운청천는 대수롭지 않게 마른 수건을 받
식합을 열어본 운청서는 그 안에 가득 든 음식을 보곤 웃으며 운청천에게 말했다."요즘 오라버니께서 일찍 나가고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함께 밥도 못 먹었잖습니까. 오늘 마침 비도 오니 술이나 데워서 마음껏 마셔봅시다!"그 말을 들은 운청천은 강집의 출처를 까맣게 잊은 채 웃으며 대답했다. 그의 눈에 운청서를 향한 애정이 가득했다."그래."......비가 멈추자 안개가 피어올랐다. 하늘에 걸린 달이 구름 뒤에 숨었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했다.남매 둘은 처마 밑에서 달을 보며 술을 마셨다.운청서는 이미 조금 취해서 어질어질했다.덕분에 그동안 쌓였던 감정도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그녀는 힘 빠진 사람처럼 탁자 위에 엎드려 고개를 갸웃하곤 눈앞의 잘생긴 운청천의 얼굴을 감상하다 말했다."오라버니는 언제 올케언니를 데리고 올 겁니까?"그 말을 들은 운청천의 손이 멈칫하더니 곧 그녀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이게 어디 버릇없이. 네 걱정이나 하거라. 추시를 앞둔 오라버니에게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냐?"운청서는 이마를 문지르며 헤프게 웃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물들었다."오라버니는 시험 준비를 잘하십시오. 저는 돈을 많이 모으겠습니다. 나중에 큰 집을 사서 올케언니를 들여야죠."돈 얘기가 나오자 운청서는 다시 풀이 죽었다."오라버니, 어떻게 해야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요?"운청천은 그런 운청서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돈은 권력이 아니면 세력, 그것도 아니면 신박한 무언가를 통해 얻어야 한다. 아니면 평생 발버둥 쳐봤자 다 헛수고하는 거지. 너는 걱정 말거라, 오라버니가 추시에 합격해서 관직을 맡으면 장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에는 서생 신분이라 감히 엄두를 못 냈다. 혹여나 투기를 품은 자가 나를 고발한다면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끊길 수도 있으니까. 오라버니가 돈만 벌면 너를 존귀한 소저로 기를 것이다."그 말을 들은 운청서는 차가운 돌 탁자 위에 엎드려 중얼거렸다."늘 제게 그런 말을 하면서 속이지 않았습니
돈 벌 방법을 듣게 된 운청서는 얼른 서방으로 가서 강집 하나를 소중하게 품에 안고 운청천에게 말했다."일단 다른 걸 보십시오. 이건 제가 며칠 빌리겠습니다.""그리 급하게 굴 필요 없다. 내일 내가 탄필을 사서...""저는 그런 거 안 쓸 겁니다!"운청천의 말을 들은 운청서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임씨 점포의 물건은 하나도 쓰지 않을 겁니다."그 말을 끝으로 운청서는 강집을 들고 서쪽에 위치한 자신의 방으로 갔다.머지않아 촛불이 밝혀졌고 창문에 여인의 아름다운 옆모습이 비쳤다.운청천은 그런 운청서를 보며 웃음을 터뜨리더니 고개를 젓고는 마지막 한 잔의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탁자를 깨끗이 치운 뒤, 세수를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며칠 동안 바빴던 운청천은 술김을 빌어 쉬자는 생각에 눕자마자 잠들었다.......서쪽 방 안.운청서는 글을 본따기 위해 촛불을 빌려 글의 구조를 하나씩 연구했다. 그리고 운청천의 방에서 제일 비싼 선지를 가져와 그 글씨 위에 덮곤 천천히 한 획씩 쓰기 시작했다.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주인을 바꾼 옆집의 마당에 불이 밝혀졌다.운청서는 한 장을 쓰고나서 일어서서 기지개를 켰다.술기운이 사라지자 잠기운이 몰려왔다.하지만 그녀는 오늘 밤, 세 장을 쓸 생각이었다.운청서는 마당으로 가서 수건을 차가운 우물에 적셔 얼굴에 갖다 댔다.뼈를 파고드는 차가움에 운청서는 정신이 들었다.그녀가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던 순간, 갑자기 어렴풋한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순간 걸음을 멈춘 운청서는 의아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그 피리 소리의 출처가 옆집 강남 상인의 마당이라는 것을 발견했다.피리 소리는 꼭 누가 듣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했다.봄바람 같기도 하고, 버드나무 같기도 하고, 앳된 소년 같기도 한 소리였다.운청서는 그 피리 소리에 빠져서 자신이 하려던 일도 잊고 마당에 있던 돌걸상에 앉아 턱까지 괴고 피리 소리를 들었다.......벽 너머의 현익은 편한 옷차림
그녀는 늘 현익이 불러주는 피리가 제일 듣기 좋은 선악(仙樂)이라고 칭찬해 줬다.그 짧고도 아늑한 나날은 그가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아름다운 것이었다.나중에 현익은 자신이 늘 지니고 다니던 옥패를 그녀에게 선물했다.하지만 그 이튿날부터 그녀는 다시는 현익을 찾아오지 않았다.현익은 차가운 동굴에서 매일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곧 죽어갈 때까지 기다렸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다.대신 부왕의 군사들이 그를 찾아냈다.현익은 살았다. 경성으로 돌아온 그의 시력과 청력도 회복됐다.그때부터 현익은 그 소녀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자신과 호랑이굴 같은 경성, 그리고 보잘것없는 배경이 생각난 그는 참았다.현익은 자신이 일어선 뒤에 다시 소녀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그 뒤로 몇 년간, 현익은 경성에서 자신의 세력을 세우고 왕비를 끌어내렸다. 부왕이 돌아갔을 때, 왕야의 자리를 차지했고 새로운 황제를 도와 집정까지 하면서 모든 이들이 우러러보는 섭정왕이 되었다.혁익은 드디어 그때의 소녀를 찾을 수 있는 정력이 생겼다. 그는 소녀에게 안정적이고 풍족한 미래를 줄 생각이었다.하지만 신이 자신에게 이런 장난질을 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연모하던 이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현익은 애타게 그녀를 찾아 헤매며 그녀와 자신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결국 그녀가 자신의 후원에서 처참하게 죽어가게 만들었다.그리고 그들의 아이까지.현익은 가슴 아픈 현실에 피리를 불던 걸 멈췄다.......처마 밑에 앉아 있던 운청서는 갑자기 깨어났다. 그녀는 마당에 낀 안개를 보며 자신의 볼을 쳤다.'뭐 하는 거야! 피리 소리에 잠들다니!'운청서는 피리 소리가 무척 익숙하다고 생각했지만 고개를 저으며 잡념을 털어냈다. 그리고 또다시 수건에 찬 물을 적셔 정신을 차린 뒤, 방으로 돌아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돈을 벌 생각이었다.......이튿날, 운청서가 집을 나서기도 전에 좋은 일이 찾아왔다.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는데 세 번 두
운청서는 얼른 거절했다."부인, 그날 일은 정말 별거 아닙니다. 이렇게 귀중한 선물을 할 필요 없습니다. 가져가십시오."운청서는 원래 장춘호부와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런 귀중한 선물은 더더욱 받을 수 없었다.부인은 운청서의 말을 듣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금 어두워진 안색으로 말했다."청서 낭자, 혹 장춘호부를 얕잡아보는 겁니까? 낭자는 이것이 귀중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호부에게 이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르신이 제일 아끼는 손주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낭자, 솔직하게 말하면 낭자가 이 선물을 받지 않는다면 장춘호부도 낭자에게 인정을 진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할 겁니다. 그러니 미루지 말고 받으십시오."그 말을 들은 운청서는 멈칫했다.마당을 가득 채운 선물을 한 눈 훑어본 그녀는 부인이 한 말을 생각하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운청서는 그저 도와주고 싶어서 도와준 거였다. 보답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다.하지만 호부 같은 무서운 곳에서 지내는 사람들의 마음을 쉬이 알 길이 없었다. 그 누구도 다른 이에게 인정 지고 싶어 하지 않았다.깔끔하게 끊어내는 것이 제일 간단했다.운청서는 더 이상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않았다."부인의 말도 맞습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많으니 절반만 남겨주십시오."하지만 부인은 물건을 가지고 이곳까지 왔으니 절반만 남겨주고 갈리 만무했다.운청서에게 억지로 지계를 쥐여준 부인은 감나무 옆에서 놀고 있던 지아를 향해 손을 저었다."지아야, 이리 와서 은인께 절을 올리거라."그 말을 들은 운청서는 얼른 손을 저었다."아닙니다, 안 됩니다. 제 신분으로 어떻게 감히 작은 공자의 절을 받겠습니까?"하지만 지아는 말을 잘 들었다. 세배하듯 바닥에 무릎을 꿇은 아이는 운청서에게 두 번이나 절을 올리더니 손을 내밀고 세뱃돈을 달라고 했다.운청서는 그런 아이를 보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얼른 아이를 바닥에서 일으킨 그녀는 귀부인에게 안겨주곤 그녀와 인사치레 말을 했다.
둘째 부인은 노부인이 그날 했던 말만 생각하면 화가 났다.노부인은 지아의 명에 재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인연이 있고 복이 많은 이를 찾아 지아를 도와줘야 이 재겁을 순조롭게 넘기고 앞으로 평탄하게 지낼 수 있다는 거였다.그리고 대사를 찾아가서 점쳐봤는데 운청서가 바로 지아의 귀인이라고 하면서 지아를 데리고 가서 그녀에게 절을 올리고 수양어머니로 들인 뒤, 앞으로 명절 때마다 인사를 나누라고 했다.지아는 호부의 적손이었다.하지만 운청서는 어떤 신분인가? 부모를 잃고 오라버니도 거인일 뿐이었다. 매일 책을 베껴서 돈을 모아야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이런 신분의 사람을 귀인으로 모신다고 하면 경성에서 다들 비웃을 게 분명했다.하지만 노부인의 명이 있었기에 손씨는 어쩔 수 없이 지아를 데리고 와서 감사 인사를 건넸다. 돈을 주는 건 상관없었지만 운청서를 수양어머니로 인정하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지아야, 이따 돌아가서 할머니께서 묻거든 운씨가 아직 시집도 가지 않아서 다른 아이의 수양어머니가 될 수 없어 거절했다고 말하거라. 알겠지?"그 말을 들은 지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어머니를 보며 물었다."어머니, 왜 할머니를 속여야 하는 겁니까? 어머니께서는 그 얘기를 꺼내지도 않으셨잖습니까."아이의 말을 들은 손씨는 지아를 흘겨보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지아야, 네가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고 정말 운씨를 수양어머니로 모셨다간 앞으로 다시는 나와서 놀 수 없을 것 같다."어린아이는 쉽게 믿음을 줬다. 앞으로 다시는 나와 놀 수 없을 거라는 말을 들은 지아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어머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절대 청서 누나를 제 수양어머니로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손씨는 그제야 만족한 듯 지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한편, 운청서는 마당을 가득 채운 선물을 보며 고민에 잠겼다.그것을 잠깐 살펴보니 은자 오천 냥에 점포 두 개, 집 하나, 그리고 땅 십 무외에도 비단 세 상자, 보석 장신구 한
주작가(朱雀街)에는 백 년 동안 이어 온 세가들이 즐비하고 있었다.넓은 길 위에 마차도 많았다.연이어 이어진 집은 저마다 그 위세를 자랑했다. 문 앞에 세워진 돌사자는 문을 지키고 있는 호위보다 더 늠름했다.장춘호부도 그중에 있었다.일곱 개의 마당을 둔 호부의 제일 깊은 곳, 중앙에 위치한 명화당이 바로 호부의 어르신 옥씨(玉氏)의 처소였다.매달 초하루와 보름 아침에 옥씨의 손주와 며느리들이 인사를 하러 들렀다.오늘도 예외는 없었다.옥씨는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두고 있었다. 딸은 집안이 비슷한 후작의 집에 시집 보냈고 큰아들은 후작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작은 아들은 호부에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오품 관리 자리를 맡았다.작은 아들의 며느리가 바로 운청서에게 선물을 전한 손씨였다.평소 손씨는 옥씨 앞에서 투명 인간이나 다름없었다. 집안도 능력도 평범했기에 주동적으로 손씨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하지만 오늘 아침, 가장자리에 앉은 옥 노부인이 염주를 잡은 채 손씨에게 먼저 물었다."손씨, 여지항에 간 것이냐? 지아는 수양어머니께 인사를 드린 게야? 언제 그 운씨를 데리고 와서 보여줄 거야? 회업 대사(懷業大師)께서 운씨가 복을 타고난 자라고 하셨다. 오늘은 운씨가 호부의 힘을 빌리겠지만 앞으로 어쩌면 운씨가 호부를 도와줄지도 모른다고 했어."그 말을 들은 손씨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멈칫한 그녀는 품에 안겨 있던 지아를 향해 눈짓하곤 아이를 앞으로 내세웠다.지아는 익숙치 않은 걸음걸이로 옥 노부인의 품으로 달려가 노부인의 무릎을 안고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할머니! 청서 누나가 아직 시집을 가지 않아서 지아의 수양어머니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그 말을 들은 옥 노부인은 자신이 제일 아끼는 손주를 품에 안고 이마에 입을 맞추곤 다시 손씨를 바라봤다."내 생각이 짧았구나. 그 운씨의 가정 형편은 어떻더냐?"가난한 서생의 동생일 뿐입니다. 손씨는 이 한마디를 속으로만 되뇌었을 뿐 감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
명화당에서 나온 임완여를 불러세운 건 그녀의 적저(嫡姐)였다."야, 너 요즘 임씨 점포라는 걸 차렸다며. 아버지께서 몇 번이나 밤에 너를 서방으로 불러들여서 얘기를 나눴다고?"그 말을 들은 임완여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눈 밑으로 짜증스러움이 스쳐 지나갔지만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임완여는 웃고 있었다."둘째 언니,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부 중의 호칭은 삼 방을 모두 합해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다. 눈앞의 오만한 여인은 대방의 적녀, 부에서 둘째를 차지하고 있었다.그녀는 후야의 적녀이기도 했고 생모는 낙양 왕씨의 소저였기에 장춘호부에서의 신분이 자연스럽게 존귀했다. 그래서 늘 동생들을 마음대로 대했다.임완여는 대방의 서녀였지만 생모가 왕씨의 시녀였기에 호부에서의 신분이 극히 낮았다. 왕씨는 자신이 총애를 받기 위해 자신의 시녀를 달래서 후야의 침상 위로 보냈다. 하지만 시녀가 아이를 가지자마자 어미를 죽이고 아이만 남겨뒀다. 임완여의 생모는 목이 졸려 죽었고 임완여는 경성 밖의 집에 버려졌다. 왕씨는 임완여가 눈앞에서 알짱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후야는 갑자기 임완여라는 딸이 있다는 것을 기억했고 그녀가 시집갈 나이가 되자 호부로 데리고 왔다.이 때문에 왕씨와 사이가 틀어져 임완여가 호부로 돌아오는 길이 조금 힘들어졌고 들어와서도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다행히 임완여는 현대에서 온 망혼이었다. 전생의 그녀는 전문적인 장사꾼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상업적 시각을 이용해 장사를 하기 시작했고 후야도 그녀를 마음에 들어 했다.하지만 적저의 투기를 사게 될 줄은 몰랐다."내 물어볼 것이 있다."임문숙(林文淑)의 눈에 탐욕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네 그 점포, 한 달에 얼마 벌 수 있느냐?"그 말을 들은 임완여는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그게 언니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겁니까?"그러자 임문숙이 차갑게 웃었다."너는 내 어머니의 시녀가 낳은 딸이 아니냐. 네 어머니의 매신계(賣身契)가 아직 우리 어머니 손에
주작가(朱雀街)에는 백 년 동안 이어 온 세가들이 즐비하고 있었다.넓은 길 위에 마차도 많았다.연이어 이어진 집은 저마다 그 위세를 자랑했다. 문 앞에 세워진 돌사자는 문을 지키고 있는 호위보다 더 늠름했다.장춘호부도 그중에 있었다.일곱 개의 마당을 둔 호부의 제일 깊은 곳, 중앙에 위치한 명화당이 바로 호부의 어르신 옥씨(玉氏)의 처소였다.매달 초하루와 보름 아침에 옥씨의 손주와 며느리들이 인사를 하러 들렀다.오늘도 예외는 없었다.옥씨는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두고 있었다. 딸은 집안이 비슷한 후작의 집에 시집 보냈고 큰아들은 후작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작은 아들은 호부에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오품 관리 자리를 맡았다.작은 아들의 며느리가 바로 운청서에게 선물을 전한 손씨였다.평소 손씨는 옥씨 앞에서 투명 인간이나 다름없었다. 집안도 능력도 평범했기에 주동적으로 손씨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하지만 오늘 아침, 가장자리에 앉은 옥 노부인이 염주를 잡은 채 손씨에게 먼저 물었다."손씨, 여지항에 간 것이냐? 지아는 수양어머니께 인사를 드린 게야? 언제 그 운씨를 데리고 와서 보여줄 거야? 회업 대사(懷業大師)께서 운씨가 복을 타고난 자라고 하셨다. 오늘은 운씨가 호부의 힘을 빌리겠지만 앞으로 어쩌면 운씨가 호부를 도와줄지도 모른다고 했어."그 말을 들은 손씨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멈칫한 그녀는 품에 안겨 있던 지아를 향해 눈짓하곤 아이를 앞으로 내세웠다.지아는 익숙치 않은 걸음걸이로 옥 노부인의 품으로 달려가 노부인의 무릎을 안고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할머니! 청서 누나가 아직 시집을 가지 않아서 지아의 수양어머니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그 말을 들은 옥 노부인은 자신이 제일 아끼는 손주를 품에 안고 이마에 입을 맞추곤 다시 손씨를 바라봤다."내 생각이 짧았구나. 그 운씨의 가정 형편은 어떻더냐?"가난한 서생의 동생일 뿐입니다. 손씨는 이 한마디를 속으로만 되뇌었을 뿐 감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
둘째 부인은 노부인이 그날 했던 말만 생각하면 화가 났다.노부인은 지아의 명에 재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인연이 있고 복이 많은 이를 찾아 지아를 도와줘야 이 재겁을 순조롭게 넘기고 앞으로 평탄하게 지낼 수 있다는 거였다.그리고 대사를 찾아가서 점쳐봤는데 운청서가 바로 지아의 귀인이라고 하면서 지아를 데리고 가서 그녀에게 절을 올리고 수양어머니로 들인 뒤, 앞으로 명절 때마다 인사를 나누라고 했다.지아는 호부의 적손이었다.하지만 운청서는 어떤 신분인가? 부모를 잃고 오라버니도 거인일 뿐이었다. 매일 책을 베껴서 돈을 모아야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이런 신분의 사람을 귀인으로 모신다고 하면 경성에서 다들 비웃을 게 분명했다.하지만 노부인의 명이 있었기에 손씨는 어쩔 수 없이 지아를 데리고 와서 감사 인사를 건넸다. 돈을 주는 건 상관없었지만 운청서를 수양어머니로 인정하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지아야, 이따 돌아가서 할머니께서 묻거든 운씨가 아직 시집도 가지 않아서 다른 아이의 수양어머니가 될 수 없어 거절했다고 말하거라. 알겠지?"그 말을 들은 지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어머니를 보며 물었다."어머니, 왜 할머니를 속여야 하는 겁니까? 어머니께서는 그 얘기를 꺼내지도 않으셨잖습니까."아이의 말을 들은 손씨는 지아를 흘겨보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지아야, 네가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고 정말 운씨를 수양어머니로 모셨다간 앞으로 다시는 나와서 놀 수 없을 것 같다."어린아이는 쉽게 믿음을 줬다. 앞으로 다시는 나와 놀 수 없을 거라는 말을 들은 지아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어머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절대 청서 누나를 제 수양어머니로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손씨는 그제야 만족한 듯 지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한편, 운청서는 마당을 가득 채운 선물을 보며 고민에 잠겼다.그것을 잠깐 살펴보니 은자 오천 냥에 점포 두 개, 집 하나, 그리고 땅 십 무외에도 비단 세 상자, 보석 장신구 한
운청서는 얼른 거절했다."부인, 그날 일은 정말 별거 아닙니다. 이렇게 귀중한 선물을 할 필요 없습니다. 가져가십시오."운청서는 원래 장춘호부와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런 귀중한 선물은 더더욱 받을 수 없었다.부인은 운청서의 말을 듣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금 어두워진 안색으로 말했다."청서 낭자, 혹 장춘호부를 얕잡아보는 겁니까? 낭자는 이것이 귀중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호부에게 이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르신이 제일 아끼는 손주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낭자, 솔직하게 말하면 낭자가 이 선물을 받지 않는다면 장춘호부도 낭자에게 인정을 진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할 겁니다. 그러니 미루지 말고 받으십시오."그 말을 들은 운청서는 멈칫했다.마당을 가득 채운 선물을 한 눈 훑어본 그녀는 부인이 한 말을 생각하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운청서는 그저 도와주고 싶어서 도와준 거였다. 보답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다.하지만 호부 같은 무서운 곳에서 지내는 사람들의 마음을 쉬이 알 길이 없었다. 그 누구도 다른 이에게 인정 지고 싶어 하지 않았다.깔끔하게 끊어내는 것이 제일 간단했다.운청서는 더 이상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않았다."부인의 말도 맞습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많으니 절반만 남겨주십시오."하지만 부인은 물건을 가지고 이곳까지 왔으니 절반만 남겨주고 갈리 만무했다.운청서에게 억지로 지계를 쥐여준 부인은 감나무 옆에서 놀고 있던 지아를 향해 손을 저었다."지아야, 이리 와서 은인께 절을 올리거라."그 말을 들은 운청서는 얼른 손을 저었다."아닙니다, 안 됩니다. 제 신분으로 어떻게 감히 작은 공자의 절을 받겠습니까?"하지만 지아는 말을 잘 들었다. 세배하듯 바닥에 무릎을 꿇은 아이는 운청서에게 두 번이나 절을 올리더니 손을 내밀고 세뱃돈을 달라고 했다.운청서는 그런 아이를 보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얼른 아이를 바닥에서 일으킨 그녀는 귀부인에게 안겨주곤 그녀와 인사치레 말을 했다.
그녀는 늘 현익이 불러주는 피리가 제일 듣기 좋은 선악(仙樂)이라고 칭찬해 줬다.그 짧고도 아늑한 나날은 그가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아름다운 것이었다.나중에 현익은 자신이 늘 지니고 다니던 옥패를 그녀에게 선물했다.하지만 그 이튿날부터 그녀는 다시는 현익을 찾아오지 않았다.현익은 차가운 동굴에서 매일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곧 죽어갈 때까지 기다렸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다.대신 부왕의 군사들이 그를 찾아냈다.현익은 살았다. 경성으로 돌아온 그의 시력과 청력도 회복됐다.그때부터 현익은 그 소녀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자신과 호랑이굴 같은 경성, 그리고 보잘것없는 배경이 생각난 그는 참았다.현익은 자신이 일어선 뒤에 다시 소녀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그 뒤로 몇 년간, 현익은 경성에서 자신의 세력을 세우고 왕비를 끌어내렸다. 부왕이 돌아갔을 때, 왕야의 자리를 차지했고 새로운 황제를 도와 집정까지 하면서 모든 이들이 우러러보는 섭정왕이 되었다.혁익은 드디어 그때의 소녀를 찾을 수 있는 정력이 생겼다. 그는 소녀에게 안정적이고 풍족한 미래를 줄 생각이었다.하지만 신이 자신에게 이런 장난질을 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연모하던 이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현익은 애타게 그녀를 찾아 헤매며 그녀와 자신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결국 그녀가 자신의 후원에서 처참하게 죽어가게 만들었다.그리고 그들의 아이까지.현익은 가슴 아픈 현실에 피리를 불던 걸 멈췄다.......처마 밑에 앉아 있던 운청서는 갑자기 깨어났다. 그녀는 마당에 낀 안개를 보며 자신의 볼을 쳤다.'뭐 하는 거야! 피리 소리에 잠들다니!'운청서는 피리 소리가 무척 익숙하다고 생각했지만 고개를 저으며 잡념을 털어냈다. 그리고 또다시 수건에 찬 물을 적셔 정신을 차린 뒤, 방으로 돌아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돈을 벌 생각이었다.......이튿날, 운청서가 집을 나서기도 전에 좋은 일이 찾아왔다.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는데 세 번 두
돈 벌 방법을 듣게 된 운청서는 얼른 서방으로 가서 강집 하나를 소중하게 품에 안고 운청천에게 말했다."일단 다른 걸 보십시오. 이건 제가 며칠 빌리겠습니다.""그리 급하게 굴 필요 없다. 내일 내가 탄필을 사서...""저는 그런 거 안 쓸 겁니다!"운청천의 말을 들은 운청서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임씨 점포의 물건은 하나도 쓰지 않을 겁니다."그 말을 끝으로 운청서는 강집을 들고 서쪽에 위치한 자신의 방으로 갔다.머지않아 촛불이 밝혀졌고 창문에 여인의 아름다운 옆모습이 비쳤다.운청천은 그런 운청서를 보며 웃음을 터뜨리더니 고개를 젓고는 마지막 한 잔의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탁자를 깨끗이 치운 뒤, 세수를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며칠 동안 바빴던 운청천은 술김을 빌어 쉬자는 생각에 눕자마자 잠들었다.......서쪽 방 안.운청서는 글을 본따기 위해 촛불을 빌려 글의 구조를 하나씩 연구했다. 그리고 운청천의 방에서 제일 비싼 선지를 가져와 그 글씨 위에 덮곤 천천히 한 획씩 쓰기 시작했다.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주인을 바꾼 옆집의 마당에 불이 밝혀졌다.운청서는 한 장을 쓰고나서 일어서서 기지개를 켰다.술기운이 사라지자 잠기운이 몰려왔다.하지만 그녀는 오늘 밤, 세 장을 쓸 생각이었다.운청서는 마당으로 가서 수건을 차가운 우물에 적셔 얼굴에 갖다 댔다.뼈를 파고드는 차가움에 운청서는 정신이 들었다.그녀가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던 순간, 갑자기 어렴풋한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순간 걸음을 멈춘 운청서는 의아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그 피리 소리의 출처가 옆집 강남 상인의 마당이라는 것을 발견했다.피리 소리는 꼭 누가 듣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했다.봄바람 같기도 하고, 버드나무 같기도 하고, 앳된 소년 같기도 한 소리였다.운청서는 그 피리 소리에 빠져서 자신이 하려던 일도 잊고 마당에 있던 돌걸상에 앉아 턱까지 괴고 피리 소리를 들었다.......벽 너머의 현익은 편한 옷차림
식합을 열어본 운청서는 그 안에 가득 든 음식을 보곤 웃으며 운청천에게 말했다."요즘 오라버니께서 일찍 나가고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함께 밥도 못 먹었잖습니까. 오늘 마침 비도 오니 술이나 데워서 마음껏 마셔봅시다!"그 말을 들은 운청천은 강집의 출처를 까맣게 잊은 채 웃으며 대답했다. 그의 눈에 운청서를 향한 애정이 가득했다."그래."......비가 멈추자 안개가 피어올랐다. 하늘에 걸린 달이 구름 뒤에 숨었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했다.남매 둘은 처마 밑에서 달을 보며 술을 마셨다.운청서는 이미 조금 취해서 어질어질했다.덕분에 그동안 쌓였던 감정도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그녀는 힘 빠진 사람처럼 탁자 위에 엎드려 고개를 갸웃하곤 눈앞의 잘생긴 운청천의 얼굴을 감상하다 말했다."오라버니는 언제 올케언니를 데리고 올 겁니까?"그 말을 들은 운청천의 손이 멈칫하더니 곧 그녀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이게 어디 버릇없이. 네 걱정이나 하거라. 추시를 앞둔 오라버니에게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냐?"운청서는 이마를 문지르며 헤프게 웃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물들었다."오라버니는 시험 준비를 잘하십시오. 저는 돈을 많이 모으겠습니다. 나중에 큰 집을 사서 올케언니를 들여야죠."돈 얘기가 나오자 운청서는 다시 풀이 죽었다."오라버니, 어떻게 해야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요?"운청천은 그런 운청서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돈은 권력이 아니면 세력, 그것도 아니면 신박한 무언가를 통해 얻어야 한다. 아니면 평생 발버둥 쳐봤자 다 헛수고하는 거지. 너는 걱정 말거라, 오라버니가 추시에 합격해서 관직을 맡으면 장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에는 서생 신분이라 감히 엄두를 못 냈다. 혹여나 투기를 품은 자가 나를 고발한다면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끊길 수도 있으니까. 오라버니가 돈만 벌면 너를 존귀한 소저로 기를 것이다."그 말을 들은 운청서는 차가운 돌 탁자 위에 엎드려 중얼거렸다."늘 제게 그런 말을 하면서 속이지 않았습니
오늘 운청천은 일찍이 돌아왔다.운청서는 처마 아래에서 비를 보면서 긴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곧 문이 열리더니 운청천이 계화꽃술과 식합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운청천의 옷은 빗물에 젖었지만 손에 들고 있던 음식은 하나도 젖지 않았다.그는 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그 우산을 발견했다."이 우산..."운청천이 조금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는 이런 색깔의 우산이 없었다. 우산대의 색깔을 봐도 새 우산 같지는 않았다."오늘 나갔던 게야?"운청서도 그 우산을 보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웃으며 설명했다."네, 나가서 한 바퀴 돌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내려서 쌀집에서 우산을 빌렸습니다. 내일 날이 개면 돌려줄 겁니다."운청서의 말을 들은 운청천도 자신이 너무 예민했다고 생각하곤 말을 돌렸다."오늘 돌아오는 길에 동창과 얘기를 나누는데 임씨 점포에서 신기한 탄필을 내놓았다고 하더구나. 먹을 묻히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다고 하니 내일 돌아올 때, 내 두 개 사오마. 앞으로 적을 게 있거든 그걸로 적거라."운청천의 말이 끝났지만 운청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의아함에 고개를 든 운청천은 창백해진 운청서의 안색을 보게 되었다.그는 깜짝 놀라서 비를 뚫고 운청서에게 다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청서야, 왜 그러냐?"......운청서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걱정 어린 운청천의 눈빛을 마주했다. 그녀는 부끄러움과 씁쓸함을 억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조금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습니다. 조심하지 않아서 등의 상처를 건드렸습니다."운청서는 얼굴을 돌리고 더 이상 운청천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혹여나 그가 자신의 거짓말을 알아차릴까 봐 등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오라버니, 마른 수건을 드릴 테니 물기 좀 닦으십시오."방으로 들어선 운청서는 탁자 위에 있던 주자 강집을 보게 됐다. 그녀는 얼른 마른 수건과 강집을 함께 들고 나갔다."오라버니, 이걸 보십시오."운청서가 웃으며 말했다.운청천는 대수롭지 않게 마른 수건을 받
하지만 전생과 현생에서 현익과 이렇게 자꾸 엮이는 것이 운청서는 달갑지 않았다.그리고 운청천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아닙니다. 민녀는 왕야의 아래에서 돈을 벌 팔자가 아닙니다. 더 설득할 필요도 없습니다. 집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운청서가 자리를 뜨려는 순간, 현익이 또 그녀를 잡아 세웠다.순간, 운청서는 조금 화가 났다.'사람 말 못 알아듣고 고집스러운 건 예전이랑 아주 똑같구나!'운청서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현익이 우산을 그녀에게 건네줬다."골목 밖은 비가 더 크게 내리고 있다. 등에 상처도 아직 낫지 않았으니 덧나면 네 오라버니가 걱정할 것이다."운청서는 온기가 느껴지는 우산대를 잡은 채 입술을 물었다. 그녀는 결국 거절하지 않았다.머지않아 우산을 펼친 여인의 인영이 골목 끝에서 사라졌다.어두운 곳에 숨어있던 조 집사는 허리를 굽힌 채 힘겹게 다른 우산을 들고 다가와 현익을 위해 우산을 폈다."왕야, 그게...""쓸모없는 놈."현익이 조 집사를 흘겨보며 말했다."남성이 크고 청서 낭자의 걸음이 빨라서 노비가 놓쳤습니다. 몇 시진을 돌아다니고 나서야 낭자를 찾은 겁니다. 노비는 마부 노릇을 할 팔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조 집사는 이 나이에 뒤늦게 고생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왕야, 홍수라는 시녀가 아직 마차에 묶여 있습니다. 어떻게 처리할 생각입니까?"그 말을 들은 현익의 안색이 차가워졌다.반주향 뒤, 검은 마차 안.현익의 차가운 손가락이 홍수의 입을 막고 있던 천을 뽑아냈다. 그리곤 숨이 막혀서 빨개진 얼굴을 내려다봤다. 현익은 홍수의 눈에 서린 두려움도 놓치지 않았다."왕... 왕야!"홍수는 사나운 현익의 눈빛에 놀라 몸을 벌벌 떨었다."노비는 저희 소저의 곁을 육 년이나 지켰습니다. 저희 소저와 장사 얘기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날 차관에서 노비가 왕야께 차를 따라드렸습니다... 저희 소저를 봐서라도 노비를 놓아주십시오!"홍수의 말을 들은 현익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