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한 치료 끝에 서유의 생명 징후는 다시 안정되었지만, 여전히 깊은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번에 과연 다시 깨어날 수 있을까?“너무 성급했어. 이번에 버텨내지 못하면 서유는 영영 깨어나지 못할지도 몰라...”피터는 서유를 치료한 후, 병상 옆에 앉아 있는 상철수를 살짝 책망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환자를 자극해서 기억을 되찾게 하려면, 좀 더 완화된 방식으로 접근해야지. 이렇게 무모한 방식은 잘못하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어.”하지만 상철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오직 핏기 없는 서유의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녀가 깨어나기를 묵묵히 기다렸다.만약 서유가 이승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의 죽음을 들었을 때나 아이가 위험에 처했을 때, 반드시 의지의 힘으로 깨어날 것이라고 확신했다.상씨 집안의 사람은 그래야 했다. 견고한 심지를 가지고 있어야만 집안의 피를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고 그는 믿었다.상철수는 서유가 반드시 깨어날 것이며, 그의 극단적인 자극이 그녀의 기억을 곧 되찾게 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생사의 문턱을 넘은 그녀에게 일시적인 기억 상실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렇게 그는 하루 밤낮을 꼬박 병상 곁에서 지키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다시 눈발이 흩날리는 새벽이 되었을 때, 상철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서유, 내 외손녀. 이제 깨어나야지.”24시간이 위험한 고비였다. 그 고비를 넘기면 괜찮겠지만 넘기지 못한다면 그는 자신의 손으로 외손녀를 죽인 셈이 되고, 이승하의 생명에 또 다른 죄를 더하는 셈이 될 것이다.시간이 조금씩 흘렀지만 서유는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상철수는 손에 쥔 지팡이를 점점 더 꽉 쥐었다. 포기하려는 순간, 서유의 손가락이 살짝 움직였다.상철수는 재빨리 피터를 깨웠다.“손가락이 움직였어! 빨리 와서 서유가 깨어날 것인지 확인해 줘.”피터는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기계로 상태를 확인했다.“5분만 더 기다려봐. 눈을 뜨면 괜찮을 거야.”5분은 짧은 시간이지만, 상철수에게는
큰 고통을 견뎌냈을 이승하를 떠올리자, 서유는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파왔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조여오고, 눈물이 주르르 쏟아져 내렸다.그때 그가 왜 자신에게 이혼 서류에 서명하라고 강요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처음엔 그녀도 연지유에게 협박당한 줄로만 알았다. 그 후엔 상철수에게 협박받은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모든 진실이 밝혀지고 나자, 서유는 더욱 가슴이 아팠다. 이승하, 그 바보는 그녀가 걱정할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 한 마디도 내뱉지 않고, 모든 고통을 혼자 감당해냈던 것이다.그런데 자신은... 기억을 잃어버렸다. 심지어 열여덟 살 이전의 기억으로 돌아가 송사월을 사랑하던 때만을 기억하며 그를 완전히 잊어버린 채,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만을 했다.‘무서워.’그 세 글자를 내뱉고 난 후, 이승하의 절망에 찬 눈빛이 떠올랐다. 서유의 심장은 마치 칼에 찔린 듯 아파왔다.그가 어떻게 그런 말을 했을까?‘네가 깨어나기만 하면, 날 잊어도 상관없어.’그 말을 할 때,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서유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는 어떻게든 그를 만나야 했다. 비록 다리가 움직이지 않더라도, 두 손으로라도 기어서 그를 찾아가야 했다.관을 뽑은 자리에서 피가 흘러내려 옷을 적시고,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그럼에도 서유는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아갔다.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상철수의 눈은 점점 붉어졌다.“서유야, 외할아버지가 잘못했어. 내가 데려다줄게. 이승하를 만나게 해줄 테니까 나한테 기회를 줘.”상철수는 이승하를 여기로 부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서유가 직접 찾아가야만 두 사람 사이의 기억 상실로 인한 간극을 메울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서유는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무엇보다 승하 씨가 제일 중요해.’결국 상철수는 포기하고 문을 열어 정가혜를 안으로 들였다.정가혜의 부축을 받으며 서유는 비틀거리며 이승하의 병실로 향했다.문
이승하가 정말로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은 서유의 기억 상실이 아니었다.그는 서유가 기억을 잃은 후, 송사월만 기억하고, 오직 자신만을 잊어버린 것을 더 마음 아파했던 것이다.그는 분명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서유의 마음 깊은 곳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송사월이었을 거야.’사실, 서유가 기억해 낸 것도 송사월이었지, 이승하는 아니었다. 그녀 자신도 왜 그렇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서유의 침묵에 잠긴 표정이 이승하의 눈에 들어왔다.순간, 그의 마음이 시리게 아팠다. 하지만 그 아픔은 잠깐이었다.그는 이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서유의 손을 놓고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됐어. 네가 무사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설령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송사월이라 해도, 상관없어.”서유는 그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과다출혈에 합병증까지 겪으며 죽음의 문턱을 넘었고, 겨우 살아 돌아온 그녀가 지금 눈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승하에게는 기적이었다.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이제 무슨 소용이 있을까?이승하가 바란 것은 그저 서유의 평안과 아이의 건강뿐이었다.그 소망이 이루어진 지금, 자신의 사소한 감정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서유는 아직 답을 하지 않았는데도, 이승하가 먼저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심지어 그녀가 송사월을 더 사랑한다고 해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그의 야윈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서유는 천천히 손을 돌려 그의 손가락을 꽉 잡았다.“내가 송사월을 사랑했을 때, 사월이를 위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결혼하는 것뿐이었어요. 하지만 당신은...”서유는 다른 손을 들어 그의 짙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손가락 끝이 그의 이마에서부터 천천히 뒤로 미끄러져 내려갔다.“만약 언젠가, 당신 머릿속의 칩이 당신을 데려간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당신과 함께 이 세상을 떠날 거예요.”서유의 목소리는 이전에 없던 확고한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그 말은 마치 마법처럼 이승하를 둘러싼 고독을 단숨에 흩어버렸다.그는 깨달았다.
“정말이에요?”서유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승하 씨, 당신은 항상 다친 걸 대수롭지 않게 말하지만, 사실 당신이 겪은 일들은 하나같이 목숨을 위협하는 일이잖아요. 그런데도 늘 나한테 숨기고,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죠.”말을 마친 서유는 난간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그저 일어서는 것만으로도 반쯤 죽을 것 같은 고통이었다.뽑아낸 주삿바늘 자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 많지는 않았지만, 그 통증에 그녀는 식은땀을 흘렸다.서유가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 이승하는 그녀의 몸에 난 상처를 보지 못했다.하지만 그녀가 일어서자마자 그는 비로소 그것을 알아차렸다.순간적으로 몸이 굳어버린 이승하는 즉시 침대에서 일어나 휘청이는 그녀를 단단히 끌어안았다.“선생님!”그는 서유를 품에 안고 큰 소리로 의사를 불렀다.하지만 서유는 그의 손을 막으며 조용히 말했다.“당신이 그 칩 때문에 겪고 있는 고통에 비하면, 내 이 정도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나도 당신과 함께 이 고통을 나누고 싶어요.”이승하는 짙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하지만 서유의 의도를 알고 있었기에, 눈을 내리깔고 무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알았어. 그러니까 의사를 부르게 해줘. 응? 피부터 멈추자, 응?”그의 입에서 마침내 인정하는 말이 나오자, 서유는 갑자기 그의 목을 끌어안고 얼굴을 그의 어깨에 파묻었다.“어떡하죠... 내가 어떻게 해야 당신 머릿속의 칩을 빼낼 수 있을까요...”따뜻한 눈물이 그의 어깨를 적시고, 옷을 스며들어 이승하의 마음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그는 서유가 그토록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저려왔다.“바보야, 넌 의사가 아니잖아.”이승하는 길고 섬세한 손가락을 들어 서유의 허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가볍게 두드렸다.“걱정하지 마. 네 남편은 쉽게 죽지 않아. 그까짓 작은 칩 하나가 내 목숨을 앗아갈 수 없다고.”아이를 달래듯 하는 그의 말에 서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상철수 씨가
이승하는 서유보다 빠르게 회복되었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가 서유를 돌보고 있었다.서유가 눈을 떴을 때, 이승하가 뜨거운 수건을 들고 그녀의 다리를 부드럽게 닦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오늘은 눈이 오지 않았고, 햇빛이 쨍쨍 내리쬐었다.금빛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들어와, 그 남자의 모습을 비추었다. 마치 따뜻한 기운처럼 포근하게 서유의 가슴속을 채웠다.그의 손길은 매우 익숙하고 부드러웠다.그녀를 깨우지 않으려는 듯, 또 그녀가 불편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가갔다.서유가 그의 따뜻한 시선을 느꼈을 때, 이승하는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의사 선생님이 말했어. 혼수 상태가 길어지면 다리 혈액 순환이 안 되니까, 매일 따뜻한 수건으로 닦아주면 좋다고.”그는 간단히 설명하고, 옆으로 몸을 돌려 새로운 수건을 가져왔다. 그리고 종아리에 대고, 천천히 닦기 시작했다.사실 이승하는 사람을 돌보는 일이 익숙하지 않았지만, 이 반년 동안 그는 많은 간호 지식을 익혔다.ㅍ서유가 깨어나고 나서 몸이 많이 약해졌을 때 돌볼 수 있기 위해서였다.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이제 뼛속 깊이 스며들어, 행동으로도 나타났다. 이건 평생을 함께한 부부라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서유는 감동을 느끼며, 눈에 눈물이 고였다.“여보.”서유는 상체를 일으켜 남자를 안았다.“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지금 이 순간, 나는 당신을 너무 사랑해요. 그 누구보다도 더요.”남자는 천천히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내려놓고, 몸을 돌려 그녀를 품에 안았다.“그럼 나랑 아이 중에서 누굴 더 사랑해?”서유는 원래 감동을 받았었지만, 이 말을 듣고는 웃음이 나왔다. 자기 아들과 비교하다니, 이거 완전히 질투 왕이었다. 그녀는 이미 그를 사랑한다고 말했으므로 대답 대신 물었다.“그럼 당신은요? 나랑 아이 중에서, 누굴 더 사랑해요?”이승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당연히 너지. 그놈이 네 목숨을 위협했잖아. 그 애를 내가 사랑한다고? 그럴 리가 없지.”그의
계속 아쉬움이 남은 채로 이승하는 어쩔 수 없이 서유를 놓아주고는 불쾌한 눈빛으로 돌아서서, 이연석이 정가혜를 끌고 나가려는 모습을 차갑게 쳐다보며 말했다.“차라리 들어와. 마음껏 보고 가게.”이연석은 자신이 이미 뻔뻔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승하가 더 대단했다. 그는 두 번 혀를 찼다.“봐, 우리 둘째 형의 담대함 좀. 모르고 보면 생중계라도 하겠다는 줄 알겠네.”이승하는 여유로운 태도로 손가락을 들어 올려, 서유가 무너뜨린 셔츠를 바로잡고 1인용 소파에 기대앉으며 턱으로 이연석을 가리켰다.“내가 생중계한다면, 넌 볼 자신 있냐?”이미 방 안으로 들어온 이연석은 의자를 끌어다가 이승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유료야? 무료라면 내가 마지못해 형 방송의 첫 번째 시청자가 되어줄게.”이 말을 듣고 서유는 얼굴을 가렸다. 이 두 형제가 평소에 나누는 대화가 도대체 어떤 건지, 이런 이야기를 대놓고 할 수 있다니.서유가 얼굴이 빨개진 것과는 달리, 정가혜는 이미 익숙한 듯했다. 특히 이연석이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란 걸 잘 알기에, 평소에도 침대 위에서는 온갖 농담을 늘어놓다가 막상 내려오면 바지가 채 올라가기도 전에 황당한 농담을 또 해댔다. 하지만 그 농담이 이번엔 이승하에게까지 닿을 줄이야, 진정한 용자였다.‘용자’ 이연석은 한마디 더 하려다, 이승하의 차갑고 음산한 눈빛에 기가 죽어, 어쩔 수 없이 주제전환을 시도했다.“저기... 가혜야, 빵순이 좀 데려와서 형과 형수님께 보여드리자.”서유는 굳어진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며 정가혜가 아이를 안아서 그녀에게 건네줄 때, 약간 죄책감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아이를 받아들었다.“다 내가 잘못했지... 반년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서, 아이 이름도 못 지었으니...”이연석은 형수를 의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형수님, 애 이름은 급하게 짓지 않아도 돼요. 돌잡이 때, 아이가 스스로 고를 수 있도록 하죠. 지금은 그냥 빵순이라고 불러요. 잘 자랄 것 같잖아요.”서유가 말을 꺼내기도 전
뭔가 감동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갓 태어난 이 생명을 바라보는 순간, 이승하는 문득 깨달았다. 왜 이전에 서유가 자신의 목숨을 걸면서까지 10%의 가능성에 매달렸는지를.부모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희생을 기꺼이 선택하게 되는 일이었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선량한 본성이고, 또한 생명을 이어가는 본능이었다.이승하가 아기를 안고 햇살 속에서 미소 짓는 모습을 바라보며, 서유의 눈가가 서서히 붉어졌다. 이 장면을 위해서라면 몇 번을 다시 돌아가더라도 그녀는 변함없이 이 아이를 선택할 것이다.이연석은 휴대폰을 꺼내 들고 한 장의 사진을 찍어, 이승하가 없는 형제들 단체 채팅방에 올렸다.[내 말 좀 들어봐. 우리 이 둔감한 둘째 형이 애를 안을 줄 알다니, 내가 진짜 놀랐다니까!]그러고 나서 형제들이 놀릴 댓글을 기다리는 중, 정가혜가 그의 팔꿈치를 찌르며 말했다.“빨리 삭제해. 가족 단톡방에 보냈어...”이연석의 얼굴이 굳어졌다. 휴대폰을 붙잡고 황급히 삭제하려는데 맞은편의 이승하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가져와.”이연석은 휴대폰을 꼭 껴안고 끝까지 버텼다.“형, 내가 실수로 동영상을 가족 단톡방에 올린 거야. 그래서 가혜가 삭제하라 한 거지. 형은 보지 마. 나중에 형수님이 안 계실 때 단독으로 보내줄게.”이 어이없는 변명에 이승하는 반응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대신 정가혜에게 시선을 돌렸다.“클럽 운영권 30% 투자해 줄게요. 그리고 클럽 1위 자리도 넘겨주죠. 어때요?”이 제안에 정가혜가 1초라도 망설인다면, 그것은 돈에 대한 무례였다.“방금 ‘내 말 좀 들어봐. 우리 이 둔감한 둘째 형이 애를 안을 줄 알다니, 내가 진짜 놀랐다니까!’라고 올렸어요.”그리고 한술 더 떠, 정가혜는 대형 폭탄을 던졌다.“이 사람이 방금 아주버님 외 다른 가족들을 채팅방에 초대했어요. 단톡방 이름은 ‘짜증 나는 둘째 형’이에요.”옆에서 옷을 잡아 뜯으며 정가혜를 말리던 이연석은 결국 포기하고, 다급하게 병실 밖으로
정가혜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서유야, 지난 반년 동안, 이 대표가 널 깨우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어. 그분의 행동과 태도를 보면 송사월보다도 널 더 사랑한다는 게 느껴져. 그러니까 앞으로는 조금 더 잘해줘. 이 대표도 가족의 사랑을 느껴볼 수 있게 말이야.”부부 사이는 단순히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가족 같은 정이 생기기도 마련이다. 이승하가 어린 시절 받지 못한 그 사랑을, 아내인 서유가 대신해 줘야 했다.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사랑을 듬뿍 주는 것이다.서유는 힘껏 고개를 끄덕인 뒤, 부드러운 눈빛을 떨구며 졸려 하는 아기를 내려다봤다.“이제 내 세상엔 그 사람과 아기밖에 없어. 당연히 최선을 다해 잘해줄 거야. 다만...”그녀의 눈에 이내 안개 같은 물기가 가득 차올랐고, 심장이 저도 모르게 아려왔다.“가혜야, 승하 씨 머릿속엔 아직도 칩이 있어. 난 어느 날 그게...”정가혜는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위로했다.“서유야, 의사가 말했잖아. 건드리지 않으면 아무 문제 없다고. 게다가 연석 씨랑 다른 형제들도 다 의사를 찾고 있잖아. 이 정도 힘을 합치면 꼭 잘될 거야.”서유는 대답하면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의사를 빨리 찾아서 그 칩을 꺼낼 수만 있다면, 승하 씨가 더 이상 그렇게 아프지 않을 텐데...”다른 사람들은 이승하의 생명을 위협할까 봐 걱정했지만, 서유는 그의 고통이 두려웠다. 정가혜는 알았다.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내만이 이렇게 마음 아파할 수 있다는 것을.“네가 이 대표 곁에 있는 한, 아프지 않을 거야.”이승하에게 있어 가장 큰 슬픔은 아마 서유에게 버려지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육체적인 고통이란 건, 그런 슬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말을 떠올리며 정가혜는 문득 송사월을 생각했다.그 소년 역시 서유를 그렇게 사랑했었다.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그는 과연 이 일을 어떻게 견디고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